손이 오그라든 사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1코린 5,1-8; 루카 6,6-11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2024.9.9.
오늘 복음의 상황은 복음 진리와 사회 윤리가 갖는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려고 가르치셨는데, 공교롭게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데려다 놓은 것 같은 장애자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선포를 중단하시고 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이 행위가 안식일에 지켜야 할 윤리 규범을 어긴 것이라고 간주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를 빌미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 진리까지도 단죄하기로 작정했을 뿐 아니라 끝내는 그분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이 본래 지향하는 진리에 따라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지만, 당시 유다교의 엘리트들은 완고하게 이를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안식일 계명에 따른 유다교의 행위 규범은 안식일에 그 어떤 생업에도 종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장애자를 고쳐 주신 행위도 의술행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안식일 계명 준수를 위해 정해 놓은 행위 규범에 의하면, 병이 든 사람을 고쳐주는 일은 생업에 해당하는 의료행위로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행위 규범을 고수하느라고 안식일 계명에 담긴 진리까지도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의 마음이 오그라들었음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들면 일상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어려운 장애자 처지에 놓일 뿐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들면 윤리적인 장애가 생겨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일어난 일을 빌미로 앙심을 품은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이치를 선교 역사에서 살펴보자면 윤리적인 장애나 인간관계의 불편함을 넘어 박해까지도 초래하곤 합니다. 다른 문화권에 복음이 전해질 때에는 복음이 담고 있는 진리 이전에 복음이 명하는 윤리와 기존 사회의 윤리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 윤리를 둘러싼 문화적 충돌이 복음 진리를 받아들여 윤리를 복음화시키기도 하고 또는 기존의 윤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복음 진리를 박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복음을 전했던 고대 그리스의 코린토에서도 복음과 윤리 풍습이 충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매우 격정적인 어조로 이를 비판했고 불륜과 비윤리를 바로잡도록 가르쳤습니다. 이 문화적 충돌은 그리스 사람들의 윤리와 풍습이 복음화되는 방향으로 매듭이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직후, 복음 진리를 갈망하던 선비들이 부딪쳤던 문제는 조상제사 문제였습니다. 애초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보유론적 입장에서 문화순응적인 선교 노선을 채택했으므로, 삼위일체 교리에 따른 하느님 신앙을 전했을 뿐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조상을 공경하여 지내던 제사를 문제시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사들은 도시에서 지식층들을 상대하던 예수회와는 달리 시골 농촌에서 선교하게 되었는데, 시골 사람들은 조상을 신으로 간주하여 제사를 드리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러한 민간 신앙의 풍속에는 미신적 요소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의 문제 제기로 교황청에서 의례 논쟁이 일어나는데, 현지 사정을 알 수 없었던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에, 다시 파리외방전교회의 문제 제기를 받은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1715년에 각각 제사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북경 구베아 주교를 통해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조선 천주교회의 신자들은 둘로 갈렸습니다. 조상 제사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양반 출신 신자들은 교회를 떠났고, 조상 제사보다 천주교 신앙을 중시했던 양반 출신 신자들과 중인 이하 신분 출신의 신자들은 교회에 남았습니다. 초기에 복음 진리를 받아들인 선비들도 조상 제사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배교한 양반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조상 제사의 윤리를 택한 것뿐입니다. 나중에 다산 정약용 사도 요한은 이에 항변하는 뜻으로 조상 제사에 관한 중용 해석을 방대하게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조상 제사 때문에 배교를 강요당한 선비 신자들을 간단히 배교자로 낙인 찍는 것은 무리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천진암 강학회 선비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이벽 세례자 요한과 함께 수많은 선비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놀라운 선교 실적을 올렸던 데다가, 끝내 목숨을 바쳐 치명하기까지 했던 이승훈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결국 조상 제사가 조상신을 숭배하는 종교 예식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성의 윤리적 발로임을 인정한 교황 비오 11세와 12세가 1935년과 1939년에 동아시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조상 제사를 허용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유림들로부터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패륜무리라고 공격과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로 인한 박해를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백 년이요 치명자가 관변기록으로만 2천여 명이며 신자들의 구전상으로는 2만여 명입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었던 사람들 때문에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룬 것입니다.
조상 제사가 허용된 무렵에는 이미 공식적 박해가 종식된 후였지만,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천주교 신자들도 조상을 공경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참회의 시편 기도와 찬미가 그리고 죽은 영혼을 기억하는 성인호칭기도를 전통적인 음률로 만들어 ‘연도(煉禱)’ 즉,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는 한국천주교회에만 고유한 기도입니다. 조상제사가 허용되고 연도로 승화되었으므로, 신앙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조상제사를 지내고자 배교자로 낙인 찍혔던 선비 신자들을 자동으로 사면 복권시켜야 하는 시대의 징표가 이 연도입니다. 끔찍한 박해까지 초래했던 조상제사 금지령 논쟁은 조상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고 조상을 공경하기 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하기 때문이고, 교황청에서 이미 이 초점에 맞추어 조상제사를 허용한 이상 결자해지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까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조상을 공경하고 천주교다운 방식으로 연도를 창안해 내어 바쳐온 신앙 선조들의 아름다운 전통을 따라서 이번 추석 명절에도 가족이 모여 연도를 잘 바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 주교단에서 권장하는 조상 공경의 예식은 우선 가족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나서 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첫댓글 40년전 종갓집 종손이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들 가운데 제일 예뻐 "예쁜 고모" 라고 부르던,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수녀님이 되어 동네 출입도 금지당했던 고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병풍뒤 시신옆에서 5일장을 보내셨지요.
어렸고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통해있던 옆방으로 가서 빼꼼히 고모를 보면 늘 깨어서 기도하고 계셨어요.
"고모 안무서워요?" 하고 물으면 웃기만 하셨어요.
상동식구가 되고 연도를 두어번 따라 가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일가친척이나 되는줄 알았습니다.
"연도"의 정확한 의미도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늘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