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7일(화)
* 시작 기도
주님...
내 안에 부요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요하여 주님의 은혜를 모르고 그 부요함에 취하여 마음의 배만 부르나이다.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심령이 가난하게 하옵소서.
샘은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지 않는데 어찌하여 이 죄인은 한 마음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는지요?
주여, 이 종을 주의 공의로 심판하시어 주만 의지하고 찬양하며 신뢰하는 자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날 씻어 정결케 하소서.
내 눈을 세상과 정욕에 돌리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만 바라게 하소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사 주님만이 나의 전부임을 영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이 종이 오직 주의 것 되게 하옵소서.
나의 의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구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성심으로 섬길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4:13-22
제목 : 이상하고 희한한 믿음, 그러나...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40여 세나 되었더라.
* 나의 묵상
예루살렘 공회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 교육을 받지 못한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제야 비로소 예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병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도 그 현장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딱히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공회에서 나가라고 한 다음에 자기들끼리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
분명한 것은 그 두 사람으로 인하여 확실한 표적 곧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이 나타난 것을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공회의 지도자들 역시 그것에 대하여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하기를 이 소문이 더 이상 일반 사람들 사이에 퍼지지 못하도록 경고를 하고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전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경고를 듣고 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너희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은지 한 번 생각하여 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그들에게 당당하게 말하였다.
공회의 지도자들이 두 사람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그냥 위협하고 놓아 주었는데 이는 주위의 많은 백성들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다.
일어선 앉은뱅이는 약 40세 정도 되어 보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다.
능력은 그 이름 안에 있다.
능력이란 이처럼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현실적인 능력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귀하고 본질적인 능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생명 없는 자 곧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생명을 얻게 된다면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명은 아무리 다시 산다고 해도 또 다시 죽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진짜 생명인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준 진짜 선물은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신체적 자유의 선물보다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다.
성령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것은 앉은뱅이가 벌떡 하고 일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진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이것, 곧 하나님의 나라인 영생이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자가 40세나 되어서 일어서서 걷고 뛸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나는 목사였지만 이런 주님의 궁극적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를 잘 믿어서 눈에 보이는 이런 기적을 원하는 자였다.
그것이 성령의 은사라는 이름으로 내게 나타나기를 얼마나 소망했는지 모른다.
방언을 받기 위해서 갖은 애를 다 쓰기도 했다.
때로는 신유의 은사를 받으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가?
내가 아니더라도 성도들 중에서라도 이런 은사를 통하여 고침을 받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나는 이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오늘 40세 된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이런 기적을 통하여 예루살렘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한다.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거나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탄의 전략이다.
거기에 굴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사탄에게 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곧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며, 그 안에 있는 육신의 생명 곧 아담의 생명을 아들의 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물론 주님께 병고침이나 눈에 보이는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회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 응답을 받기도 하고 받지 못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으로 결국 쇠하거나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관심은 영원한 것에 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생명 말이다.
나는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믿음이 좀 희한한 믿음이었음을 고백한다.
무엇을 위하여 기도할 때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하고, 만물 안에 있는 것을 구하지만 그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기도는 하면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기도를 하곤 하였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전혀 억울해 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교역자 시절에 전도를 하러 아파트를 방문할라 치면 이 집 현관문이 열리지 않기를 속으로 바랐다.
그래서 진짜 현관문이 열리지 않는다거나 아예 1층 출입문부터 잠겨 있으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었다.
그리고 ‘출입문부터 잠겨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해?’ 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내가 만약 베드로나 요한이었다고 하면 예루살렘 공회 지도자들이 예수 이름을 전하지도 못하게 막으면 나는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안 했을 것 같다.
저 권세 있는 사람들이 못하게 막는데 내가 어쩌라고 하면서 그것을 변명 삼아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 복음을 전하는 목사요 선교사이다.
복음은 온실의 화초들과 같이 그렇게 순풍에 돛 단 듯 전해지지 않는다.
사탄은 그것을 막기 위하여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한다.
인간관계나 어떤 상황 또는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일들을 통해서 막으려고 할 것이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무엇으로도 타협할 수 없다.
나는 주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대적하는 이들의 대적 앞에 순응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이 곧 나의 고백이 되기를 순간순간 다져본다.
(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주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사탄의 세력은 꼬리를 내린다.
그리 아니할지라도, 그래서 팔이 잘리고 눈이 뽑히고 다리가 잘려서 상이용사가 될지라도,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다 할지라도 결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히 10:32-39)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 이유는 나의 삶은 땅에서 육신이 전부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인 영생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빼앗길지라도 기쁘게 당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주를 위함이다.
더 낫고 영원한 소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 낫고 영원한 소유는 다름 아니라 아들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지금까지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나 중심적으로 믿어왔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있어야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중심적인 자였나이다.
이런 나는 내게 어떤 유익이 있으면 거기에 고무되어 그것이 전부인 양 그것을 좇았고 내게 유익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이어 나간 자였나이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셨으며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어 이제는 땅의 것, 만물 안에 있는 것에 치심하지 않고 날마다 말씀 안에서 위의 것을 바라보며 살기 원합니다.
내게 집어 삼킬 듯한 고난의 파도가 올지라도 거기에 굴복하거나 매몰되지 않도록 나의 영으로 깨우소서.
내게 닥친 고난을 주님이 주신 무덤으로 알고 그것을 해결하려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더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갖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주의 생명으로 사는 자리임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오늘도 사람의 반응을 보지 않도록 나의 눈을 가려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