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가슴에 핀 불꽃, 그 겨울의 수행(修行)
글 / 은율 장기주
겨울은 언제나 들판의 서쪽 끝, 그녀가 사는 작은 오두막의 낮게 가라앉은 지붕 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볏짚 몇 단으로 기운 몸뚱이에, 누군가 버리고 간 낡은 가죽 외투를 걸친 채 휑한 눈으로 허공을 쪼는 서글픈 허수아비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매서운 북풍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그의 서늘한 가슴 깊은 곳, 오직 단 한 사람을 향해 붉게 타들어 가는 불씨 하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요. 그가 온 생을 바쳐 섬기는 이는 들판 너머, 외딴 등대처럼 노란 창을 켠 오두막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가끔 들르는 장터의 웅성거림 속에 섞여 있을 때조차, 그녀의 눈동자는 늘 빈 들판에 버려진 허수아비의 눈빛처럼 아득한 고독을 품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날마다 창가에 기대어 마른 들판을 내다보았고, 허수아비는 살을 에이는 눈보라 속에서도 미동조차 없이 그녀의 창문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아득한 거리에서 행해지는 지독한 연모였습니다. 어느 해 질 녘, 대지를 통째로 얼려버릴 듯한 칼바람이 불어오던 날이었습니다. 여인이 해진 숄을 어깨에 두르고 마침내 들판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서리 맞은 흙을 밟는 그녀의 사각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허수아비의 짚가슴속에서는 마른벼락이 치듯 격렬한 통증이 일었습니다. 여인은 허수아비의 몇 걸음 앞에 멈춰 섰습니다. 추위와 그리움으로 붉게 멍든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섣부른 다정함이나 안부의 말은 도리어 그의 견고한 침묵을 무너뜨릴 독이 됨을 알았기에, 여인은 뻗으려던 손을 겨우 거두었습니다."외로우냐고, 묻지 않을게요."여인의 목소리가 갈라진 얼음판처럼 서늘하게 들판의 정적을 갈랐습니다."이 추운 날에 누구를 그토록 기다리느냐고도 보채지 않을게요. 한 사람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지독한 뼈를 깎는 수행인지, 저 역시 매일 밤 빈 하늘을 보며 저리게 배우고 있으니까요."여인은 허수아비의 텅 빈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습니다. 그 거친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실루엣을 응시했습니다."사람들은 당신이 그저 홀로 버려져 외로울 거라고 수군대요. 하지만 나는 알아요. 당신이 외로운 건 혼자여서가 아니라,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요. 그리고… 저 수많은 사람 틈바구니에서 내가 매일같이 숨이 막힐 듯 서글픈 이유 또한, 오직 당신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만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을요."그녀는 하얀 입김 속에 벼려둔 고백을 얹어 보냈습니다."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그 부피만큼 외롭다면, 나 역시 당신을 그리워하는 딱 그 크기만큼 매일 밤 홀로 무너지고 있어요. 우리의 거리는 비록 이 황량한 들판만큼 떨어져 있지만, 내 고독의 정체 역시 결국 당신이라는 사랑입니다."여인은 차마 껴안지 못하는 슬픔 대신, 그가 걸친 낡은 외투의 깃을 정성스럽게 여며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오두막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뒤돌아 걷는 그녀의 등 뒤로 길고 짙은 그림자가 눈 위에 휑하니 흘러내렸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던 허수아비의 서글픈 외투 자락이 바람에 세차게 펄럭이며, 마침내 그의 가슴 깊은 곳에 갇혀 있던 비명이 들판의 정적을 깨뜨리고 터져 나온 것은. 그것은 여인의 귓가에 가 닿은 바람의 울음이었고,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허수아비의 최초이자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가지 마라, 나의 살을 깎아 만든 사람이여. 그대가 멀어질수록 내 가슴의 낙원은 무너지고, 그대가 머무는 만큼만 나는 겨우 살아 숨 쉰다. 내 어찌 혼자라서 외롭겠는가. 그대를 내 마음에 들여놓은 그날부터, 나는 단 한순간도 외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여인의 걸음이 찰나의 순간 굳어버렸습니다. 차마 뒤돌아보지 못한 채, 그녀는 하얗게 얼어붙은 들판을 향해 낮게 읊조렸습니다. 그것은 서글픈 수행을 완성하는 마지막 주문과도 같았습니다."닿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지독한 고독의 다른 이름일지라도, 나는 평생 이 벌판의 바람이 되어 당신의 곁을 맴돌 테니. 사랑합니다, 나의 시린 허수아비여."여인의 실루엣이 완전히 멀어졌을 때, 허수아비는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마른 짚단 가슴이 서럽게,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바스락거렸습니다. 비록 평생 서로의 살결을 만질 수도, 마주 안아 체온을 나눌 수도 없는 운명이었지만 허수아비는 이제 서럽지 않았습니다. 들판의 칼바람은 여전히 잔인했으나, 자신의 외로움이 그녀의 외로움과 단단한 핏줄처럼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해 겨울, 빈 들판 위에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지만 가장 맹렬한 두 사람의 사랑이 하얗게, 하얗게 각인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