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목 / 한명희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이근배)
새들은 저희들끼리
하늘에 길을 만들고
물고기는 너른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데
사람들은 길을 두고도
길 아닌 길을 가기도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
산도 길이요 물도 길인데
산과 산 물과 물이 서로 돌아누워
내 나라의 금강산을 가자는데
반세기 넘게 기다리던 사람들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앞 다투어 길을 나서는 구나
참 이름도 개골산, 봉래산, 풍악산
철따라 다른 우리 금강산
보라, 저 비로봉이 거느린
일만 이천 묏부리
우주만물의 형상이 여기서 빚고
여기서 태어났구나
깎아지른 바위는 살아서 뛰며 놀고
흐르는 물은 은구슬 옥구슬이구나
소나무, 잣나무는 왜 이리 늦었느냐 반기고
구룡폭포 천둥소리 닫힌 세월을 깨운다
그렇구나
금강산이 일러주는 길은 하나
한 핏줄 칭칭 동여매는 이 길 두고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구나
분단도 가고 철조망도 가고
형과 아우 겨누던 총부리도 가고
이제 손에 손에 삽과 괭이 들고
평화의 씨앗, 자유의 씨앗 뿌리고 가꾸며
오순도순 잘 사는 길을 찾아왔구나
한 식구 한 솥밥 끓이며 살자는데
우리가 사는 길 여기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이제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녹슨 철마 / 황주석
나는 수십, 수백의 총탄을 가슴으로 막았다
끓고 있는 심장, 지키려고 수많은 파편에 찢겨 갈기갈기 흩어진 살점들
나는 부모 형제 그리워 울고 또 울었다
칠십 년 정지된 세월 동안 거듭거듭
상처에 앉은 녹슨 딱지들이 분해되어 자양이 되더니 이제 새살이 돋는다
갈기갈기 이데올로기 총탄에 구멍 뚫린
나의 육체여 사랑이여
아이가 태어나 순탄하게 살았어도
칠십이란 나이가 되면
귀 먹고 눈이 가물가물 할 텐데
이 나이에 나는 누구를 더 기다리는가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하는가
목마름을 빗물 받아서 달랬던 기억
혹독한 추위가 점령한 눈밭 한가운데서
배고픔 달래려고 눈을 퍼먹던 기억
먹은 게 없어서
체증조차 부럽던 그 시절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
이산가족 아픔의 추모장을 기웃거리며
배를 채웠다
보이는가? 후손들이여 동포들이여
육체에 방부제를 처바르고 하늘을 가리면
반쪽으로 갈라지지않고 살아 숨쉬는
한반도 영혼들이 나타날까?
녹슨 내 육체가 다시 달릴 수 있을까
후손들이여!
이해타산 사상논리 따지지 말고
백두대간 혈맥을 이어라
내가 열정으로 쉼없이 달릴 때처럼
터질듯한 열망으로 남북으로
합치의 길을 부디 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