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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기 4 —"BHU와 사나스, 그리고 "아그라"로 이동—
*BHU(바라네스 힌두 대학교)
<BHU는 바라나시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약 4키로 떨어져 있다.>
내가 BHU를 찾아간 것은 2011년 10월 21일 금요일 오후였다. 아내는 계속 설사와 복통으로 고생하면서 보리차를 끓여 마시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바라나시 골목도 다닐 만큼 다녀서 더 이상 골목을 다니고 싶지 않았다. 안내책을 뒤적거리던 중에 BHU의 대학의 박물관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가보기로 결심했다.
자전거 릭셔를 끄는 노인에게 얼마에 가냐고 물으니 50루피라고 했다. 흥정해서 40루피(약 1,000원)로 가기로 하고 릭셔 뒤에 앉아서 거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길은 좁고 사람들은 붐볐으며 허름한 자동차와 마차, 자전거 등이 끊임없이 거리를 왕래하고 있었다.
<BHU 가는 길: 등이 보이는 사람이 내가 탄 자전거의 주인이다.>
어떤 곳에서는 여러 마리의 소가 모여서 쓰레기 더미 속에서 무엇인가를 골라 먹고 있고, 그 옆에는 어떤 사람이 소변을 보고 있으며, 또 그 옆에는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상인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소리를 지르며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는 왠지 좀 두렵기도 하고 호기심이 가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했다.
대학교 정문에 도착하여 50루피를 건네주니 자전거 기사는 거스름돈 10루피를 주지 않았다. 내가 달라고 재촉하니 잔돈이 없다고 하였다. 인도에서는 물건을 사고도 잔돈을 잘 주지 않으니, 잔돈을 많이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내가 당하고 보니 허탈하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 와서 생각해보니 겨우 200원 거스름돈 받지 못한 것에 기분이 나빴던 경험을 생각하니 내가 째째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 그 당시는 큰 사기를 당한 것만 같아서 인도인 전체에게 큰 원한을 품었고, 내 다시는 인도에 오지 않겠다고 결심까지도 했었다.
얼마 전에 서울의 사당동 근처의 오리고기 집에서 저녁과 술을 먹으면서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거기에 있는 종업원에게 1만원의 팁을 주었다. 나는 '왜 저렇게 많은 돈을 팁으로 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바라나시에 가서 1만원의 팁을 주면 아마 까무라쳐서 며칠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헛소리하며 버벅댈 것이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가난한 나라에 가면 자기가 왕이나 된 듯이 쩡쩡 거리면서 돈 쓰는 것은 째째해지고, 부자 나라에 가면 기가 죽어서 조용히 다니면서도 팁은 또 많이 주는 그런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인지도 모른다.
<BHU 박물관>
아치형 대문을 지나면 바로 BHU가 나온다. BHU는 초록색 나무로 둘러싸인 정원처럼 보였으며 사방에 길이 나 있고 자동차가 다녀서 거기가 대학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캠퍼스의 넓이는 약 5 평방키로미터 정도 되었다. 정문에서 박물관까지는 꽤 멀었는데, 조금 먼 것이야 뭐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에 들어가는데, 가방을 맡겨야 했고 샅샅이 몸을 수색당해야 했다. 널직한 박물관 내에는 많은 그림과 조각품 그리고 바라나시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품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주로 12세기 작품이 많아 보였다. 모든 박물관이 그렇듯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그저 눈으로 구경만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BHU 대학 캠퍼스>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바로 옆에 정원이 있었는데, 공사를 하는 중인지 나무 막대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지저분해 보였다.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매미 소리만 캠퍼스를 메우고 있었다. '어디를 더 가볼까'하다가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날은 더워서 그냥 바라나시 숙소로 가기로 하고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 근처에 사람들이 복닥거리고 있어서 무엇을 하나 궁금해 했는데, 마침 그때, 죽은 사람을 허름한 흰 천으로 덮어서 수레에 싣고 사람이 끌고 오고 있었다. 얼굴과 몸은 덮여있었고, 두 발은 밖으로 나와 수레가 흔들릴 때마다 두 발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판국에 죽은 자가 대접을 잘 받기는 힘들 것이다. 그야말로 생과 사가 공존하는 곳이 바라나시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BHU 대학 캠퍼스>
<바라나시에서 사르나트까지는 자동차 릭셔를 타고 왕복 약 2 시간 걸린다.>
사나스는 바라나시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로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을 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자동차를 빌려 좁은 길을 통해서 갔는데, 가는 도중 현지인들의 생활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소를 몰고 가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전거는 얼마나 낡았는지, 녹이 슬어 언제 와장창 부서질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태어난 곳의 방식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대부분이니, 사람의 팔자가 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사나스 가는 길>
우선 절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거대한 탑(수투파라고 한다)이 눈에 띈다. 34미터나 되는 이 탑이 바로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곳이다. 탑의 아래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그곳에 사람들이 꽃을 올려 놓기도 하고, 맨발로 탑 주위를 돌기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고 5명의 수행승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은 석가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석가는 말한다. "그대는 내 말을 들어라.그대는 나의 얼굴을 보라. 나는 부처가 되었다. 나는 깨달음을 열어 부처가 될 수 있었다. 그대들의 수행은 극단에 치우치고 있다. 번뇌를 없애기 위해 육체적 고행을 하고 있으나 그러한 육체적 고행은 오히려 육체에의 집착을 더할 뿐이며, 결과적으로 자신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다메크 스투파>
그 당시에는 자신에게 무한한 고통을 주어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깨우치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것을 본 부처님의 설법은 계속된다. "가혹한 육체적 고행은 오히려 육체적 고행에 연계되는 번뇌를 만들어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육체는 사람이 타는 배에 비유할 수 있다. 그 배의 사공은 사람의 마음이며, 이 마음이야말로 참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탄 배에 지나지 않는 육체의 오관에 사로 잡혀 참된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있다. 이리하여 오관에 농락된 사람의 마음은 성냄, 원망, 질투, 저주와 같은 욕망의 불속에 휩쓸리게 되어 참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미망의 세계를 헤매고 있다."
<다메크 스투파 주위를 돌고 있다.>
부처님의 설범에 다섯명의 수행자들이 점점 회개하기 시작한다. 부처님은 계속 설법을 이어간다. "인생에 있어서 부와 지위와 명예는 이 현세의 일시적인 것이다. 중생은 빈손으로 이승에 왔기에 빈손으로 이승을 떠나야 한다. 사람들은 이 진실을 망각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면 마음까지 가난하게 되며, 이와 반대로 부유한 집에 태어나면 감사한 마음을 잊고 자만에 빠져 타락하기 쉽다. 이처럼 사람들은 각각의 환경에 따라 욕망의 포로가 되어 족함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간다. 인간이란 불쌍하다기 보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대들은 먼저 이 사실을 각성하여 인생의 미망과 삶의 고뇌에서 해탈하여야 한다."
<바로 옆에 사슴이 돌아다닌다.>
부처의 설법은 마치 샘솟는 물처럼 흘러 다섯 수행자의 가슴을 적시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서 광명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수행의 과오를 뉘우치고 정법의 거룩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옆에 사슴이 있는 정원이 있다.>
<경내에서 바닥을 수리하고 있다>
<아쇼카 기둥>
이 사찰에서 또 한가지 유명한 것은 아쇼카 기둥(Ashoka Pillar)이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이 기둥은 본래 15미터였는데, 상층부는 이미 다 부러져 떨어져 나갔고, 현재는 근처의 박물관에 있다. 우리가 이 기둥에 갔을 때, 인도 아이들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뾰죽하게 세워진 철장을 위태롭게 뛰어넘어 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그 속에 던져진 동전을 주워 철창을 뛰어넘어 바람처럼 사라졌다.
<철조망을 뛰어 넘어 들어가서 사람들이 던져 넣은 동전을 줍는 아이>
<절터>
ㅕ
*아그라로 출발
<"바라나시"에서 "아그라"까지는 기차로 약 13시간 정도 걸린다.>
<우리가 묵은 숙소의 종업원 JP> 우리가 머물던 망라 게스트 하우스에 종업원이 한 명 있었다. 뚱뚱한 사장은 항상 2층에 머물고, 그 종업원은 항상 아래 층에 있는 소파에서 잠을 자고 청소를 하고 심부름을 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JP라고 불려지는 그는, 일본에 애인이 있다고 말하면서 언젠가는 돈을 벌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몸이 좀 불편해 보이는 그는, 내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면 잠을 자다가 슬그머니 일어나고 미소를 나에게 보냈었다. 그러다가 또 누워서 잠을 자고, 잠을 깨면 TV를 시청했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고, 어제나 오늘이나 똑 같은 생활을 하는 그에게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를 도울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숙소를 떠나기 직전에 촬영된 사진>
<바라나시 역>
<바라나시 역에서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골라내고 있다.>
<아그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날 저녁 바라나시 역을 출발하여 아그라로 기차가 출발했다. 우리 앞에는 인도인 한 가족이 앉아 있었다. 눈길을 끄는 한 명은 젊고 예쁜 여인이었는데, 얼마나 수줍어하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의 발가락과 발톱은 특이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그녀의 이마에 그려진 붉은 색과 희한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새벽에 기차에서 나올 때, 계속 타고 가는 아이가 아그라에서 내리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인도에서 기차를 탈 때는 도난 방지를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기에 모든 가방을 가슴에 품고 자거나 발 아래 놓고 자서 그런지 몰라도, 그날밤 기차에서는 아무 일도 없이 그렇게 밤이 새고 말았다.
날이 밝을 무렵 기차는 아그라에 도착하고 있었다. 저 멀리 들판에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손에는 플라스틱 물병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소위 말하는 자연 비데였던 것이다. 볼 일을 보고 그 물로 깨끗이 씻어내는 자연 비데, 오랜 전통일 것이다. 나무를 잘라 휴지를 만들필요도 없는 자연친화적인 세척방법이었던 것이다.
*부처님 설법에 관한 부분은 홍순철 저 불교성서 pp 122-125 중 일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도이야기 끝부분을 마무리 하지 못했는데, 빨리 끝내려고 합니다. 다음 여행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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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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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억 저편으로 밀쳐저 있던 여행의 추억을 되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여행이 기대됩니다.
즐겁게 보고 있읍니다.
감동받는 글 항상 잘보고 갑니다.
즐겁게 감상하고 있습니다.
사르나트에 있는 커다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가부좌를 하고 명상에 잠겨보지는 않으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