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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만발한 봉화 도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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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2리 502번지
연꽃 만발한 봉화 도암정
-김태환 / 소백춘추 편집국장
올해도 어김 없이 도암정엔 연꽃이 피고
늙어 청산의 주인이 되어서 돌한 언덕에 두루하네 소나무 흔들며 바람이 고요히 지나고 고요한 연못의 달은 자리를 뜰줄 모르고 난정계(蘭亭계) 모임을 기약하며 계수(桂樹) 가을을 향해 읊었다. 다리가 길어 끊어지지 않아 오는 사람마다 이 모임을 이어 갈 것이다.
이시는 황파 김종걸의 도암정 시다. 한여름의 도암정(陶巖亭)은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愿)을 연상케 한다. 도암정 마루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는 촌로들의 모습이 그렇고, 따가운 햇살아래 아양을 부리는 연당(漣堂)의 연꽃 또한 이 곳 도암정을 찾는 이들에게 선경(仙境)에 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가끔씩 무더위를 달래 듯 간간히 불어 오는 바람에 연꽃들은 하나 둘 흡사 음악에 몸을 맡긴 무희처럼 온갖 교태를 부린다. 도암정의 연꽃은 이미 인근 영주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매년 여름만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도암정은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915번 지방도를 따라 봉화농공단지를 지나자 마자 왼쪽 편에 들어 선 황전(黃田) 마을의 동구(東口)에 들어 서 있다. 황전마을은 태백산이 힘차게 달리다가 문수산을 이루어 놓고 다시 멈칫하더니 용트림을 하면서 정기(精氣)를 한데 모아 소태산(小太山, 일명 송관산)을 일구더니 용맥이 좌우로 휘감아 놓은 곳이 황전마을이며, 이 마을의 어귀에는 도암정이 들어 서 있다. 도암정은 이 마을의 상징이며 정자 오른편에 우람한 느티나무 고목 아래 질그릇처럼 생긴 거대한 암석은 정자의 이름을 만들어 놓았다. 도암정은 황파(黃坡) 김종걸(金宗傑, 1628~1708) 선생이 1650년(인조 28)에 건립했다.
옛 현인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곳 이름난터에 좋은 모임을 열어 못을 파니 층 언덕에 비추노라 단지가뾰족하여 어진 사람 가득하고 대가 평평하니 좋은 손님이 머무른다네 누런 구름은 네 곳의 들을 둘렀으며 흰 이슬은 중추에 가깝구나 알거니 학 털이 늙기 어려우니 서로 해마다 놀기를 기약해보자
이 시는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효종 5>~1725<영조 1>)의 도암정 시이다. 도암정은 황파 김종걸이 1704(숙종 30)에 건립하였다가 퇴락한 것을 그의 후손들이 1831년(순조 31) 에 새롭게 중건했다. 도암정은 정면 3칸, 측면 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전면에는 방지(旁支)를 조성하였으며 연못을 향한 전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후 좌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하게 하였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도암정에는 ‘도암정’ 현판과 황파 김종걸과 창설재 권두경의 시판, 김구한의 ‘도암정기’ 등의 현판이 게첨되어 있다. 1831년 도암정을 중건하면서 김구한(金九翰)이 쓴 ‘도암정 상량문’을 보면 도암정에 대한 황전마을 사람들의 깊은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 “석대(石臺)가층(層)으로 된 것이 아름답기가 귀신의 작품인 것 같고, 바위와 연못의 뛰어난 경치는 하늘이 아끼고 땅이 비장(備藏)한 것이다. 삼복더위 찌는 듯 해도 모르는 것은 큰 나무가 해를 가리워서이며, 오월 매미소리 차게 느껴지는 것은 무성한 나무 그늘이 짙기 때문이다. 다소의 숲과 샘은 7·8대 선조가 단장한 것이고, 이에 시를 노래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옛 현인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꽃피는 아침이나 달 밝은 밤에는 가서 편히 즐길 수 있으니 아무 걱정없으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 쓸쓸한 날은 이 곳에서 지낼 수 없어 매번 탄식해 왔다. 선조들이 겨를이 없어 미처 이루지 못했는데 이를 버려두면 후손들의 허탈감이 더 한다. 이에 문회(門會)를 열어 첨론(첨論)으로 두어 칸 정자를 신축하게 되었다. 재목은 멀고 가까운 산에서 가져오고 주춧돌은 좌우의 밭언덕에서 깎아 운반했다.”
황전마을을 개척한 송산공(松山公) 김흠(金欽)
황파 김종걸의 조부인 송산공 김흠이 이 곳 황전에 정착한 후로 해마다 큰 재앙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속세 성은 성씨(成氏)라고 하는 한 대사(大師)가 송산공을 찾아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일렀다. 「안산(案山)인 학가산(鶴駕山)은 화산(火山)입니다. 누른 밭이니 토, (土) 김씨이니 금(金)·화·토·금(火土金)은 갖췄으나 수·목(水木)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어른께서는 마을 안팎에 연못을 파고 동구(洞口)밖에 수림(樹林)을 조성한다면 능히 재앙을 막고 자손대대로 크게 번성하는 길지(吉地)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청룡(靑龍) 끝의 삼대도암(三大陶巖 :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가 있는 바위)은 능히 삼대암(三大巖 : 돈 대는 높은 것을 말함)으로서 장차 정승급 대인(大人)을 세 사람은 배출하게 될 겁니다」라고 말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 송산공은 이 말을 따라 마을 어귀에 아래위의 못(윗못은 현재 매립해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음)을 파 수련(水蓮)을 심었다. 그리고 청룡과 백호 등에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는 한편 동구 밖 100m 지점에 소나무, 느티나무, 오리나무 등 장기수를 심어 쑤(沼)를 조성하고 거기에 성황단(城隍壇)을 설단해 매년 음력 5월 15일 동신제(洞神祭)를 지내고 여름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풋굿」잔치를 열어왔는데 이로 인해 재앙은 사라지고 지금까지 자손이 번성하며 평화롭게 번창해 왔다. 이로부터황전 본촌의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곳은 외손은 물론 타성씨는 한 집도 거주하지 못했다. 송산공의 후예는 약 300여 호. 황전중심에 80여 호를 비롯해 외곽을 합쳐 100여 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는 서울·대구·부산·대전 등 도시로 이거해 지금은 이농(離農) 현상을 실감케 하고 있다.
도암정을 건립한 황파(黃坡) 김종걸(金宗傑)
송산공의 손자 황파공(黃坡公) 김종걸(金宗傑)은 학자(學者)이며 효자(孝子)로 자는 국경(國卿)이며 황파는 호이다. 그는 1628년(인조 6)에 통덕랑(通德郞) 휘 해윤(海潤) 과 봉화 금씨(奉化 琴氏)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탁월한 재주로 12세에 사서(四書)를 읽어 익히 터득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황파는 특히 하늘이 내린 효자였다. 부친 통덕랑공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소태산에 제단을 만들고 7일 밤낮을 금식(禁食)하며 정성을 모아 제천기도(祭天祈禱) 를 드렸더니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신령이 나타나 가르쳐 준 약을 구해 친환(親患)을 환쾌케 했다. 이로인해 사림(士林)의 추앙은 물론 나라에서는 효자로 정려(旌閭)를 내렸다. 뿐만아니라 그는 선모(先慕) 사업에도 앞장섰다. 입향조인 송산공의 입향유덕(入鄕遺德)을 기리기 위해 1650년(인조 28) 황전 동구의 삼대암 옆 전후연못 중간에 도암정(陶巖亭)을 창건하고 사림의 석학지사(碩學知士)를 모아 학술을 논하고 나랏일을 공론했다. 또한 그는 산학부흥(産學復興)의 실학(實學)을 배양하는데 공헌했다. 또 후손들에게 면학의 터전을 마련해 학식과 덕망을 쌓게 하기 위해 봉산서당(鳳山書堂)을 건립하고 문예진흥(文藝振興)을 추구(追究)하게 했다. 이로써 그는 일천(逸薦)으로 부호군(副護軍)의 관직이 제수(除授)됐으며, 죽은 후에는 안동사림(安東士林)의 천거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됐다. 한편 1793년(정조 17년) 사림에서 그의 유덕을 기려 봉산리사(鳳山里社)에 봉향(奉享)하고 춘추로 유림에서 향사(享祀)를 봉행했다. 그러나 고종(高宗) 5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일시 중단됐다가 1925년에 다시 복설(復設)해 제향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가 건립한 도암정을 비롯해 봉산리사 봉산서당과 의성 김씨의 종택(宗宅)이 사적(史蹟) 및 지방 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군자의 꽃 도암정의 연꽃
한여름 도암정 마루에 걸터 앉아 연당의 연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맑은 바람이라도 된 듯하다. 연꽃은 항상 진흙 속 더러운 물속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정갈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핀다. 마치 세속에 몸 담고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지조를 간직한 선비를 연상케 한다. 또한 안으로 티없이 맑고 깨끗하면서도 겉을 꾸밀 줄 모르는 품위 높은 군자와 같다. 연꽃은 속대는 텅 비어 위 아래가 통해 있고 겉대는 꼿꼿하게 쭉 뻗어있으며, 넝쿨져 함부로 얽히는 일도 없고 오직 한 줄기 뿐, 분수 밖으로 불쑥 가지를 내미는 일도 없다. 연꽃의 속대가 뚫려 있는 것은 욕심 한 점 없이 맑게 트인 군자의 마음이 사물의 이치에 환히 통달해 있는 것과 같고, 연꽃 겉대의 꼿꼿한 것은 대쪽같이 곧고 바른 군자의 언행을 닮았고, 넝쿨지지 않는 군자의 사사로운 이익을 따라 부귀한 사람에 붙좇아 어울려 다니지 않는 군자의 점잖은 몸가짐을 닮았다. 오직 한 줄기로 가지 벌지 않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손을 벌리지 않는 군자의 분명한 정신을 닮았다. 또 연꽃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은 것은 군자의 아름다운 덕의 이름이 갈수록 멀리 들리는 것과 같고, 연꽃이 우뚝 높이 솟아 맑고 깨끗하게 서 있는 것은 평생을 결백하게 우뚝 홀로 서서 중정(中正) 한 길을 걸어가는 군자의 고상한 정신을 닮았고, 물 가운데 핀 연꽃이라 멀찍이 서서 바라 볼 수 있을 뿐 가까이서 매만지며 즐길 수 없는 것은 우러러 바라볼 수는 있어도 어딘지 함부로 할 수 없는 군자의 위엄을 닮았다. 일찌기 렴계 주돈이는 그의 ‘애련설’에서 “나는 말하겠다. 국화는 꽃의 은일자요, 모란은 꽃의 부귀자요, 연꽃은 꽃의 군자라고. 아! 국화를 사랑함은 도연명 이 후엔 들은 적이 없고, 연꽃을 사랑함은 나와 같은 이가 몇 사람인고! 모란을 사랑함은 많을 것이 당연하리라.”라고 하며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 칭했다. 국화는 남들이 다 피고 간 뒤 홀로 남아서 찬 서리 맞으며 핀다. 마치 속세를 떠나 숨어서 사는 은사(隱士)와도 같이…… 그래서 주돈이는 국화를 꽃 중에서 ‘은둔(隱遁)의 꽃’이라 말했다. 모란은 사치스러운 꽃! 마치 부귀한 사람들이 화사한 옷차림을 하고 날 보란 듯 뽐내어 웃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주돈이는 모란을 꽃 중에서 ‘부귀의 꽃’이라 말했다. 연꽃! 연꽃은 도덕 수양이 높은 군자를 닮았으니, 이것은 분명 꽃 중에서도 ‘군자의 꽃’!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마다 부귀공명을 찾아 급급한 세상이라 그 은둔의 취미를 지닌 국화를 사랑한다는 말, 그 말은 도연명 뒤로는 들어보지를 못했고, 연꽃을 사랑한다는 사람, 군자의 덕을 닮았기에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 몇이나 되는가. 이 마음, 이와 똑같은 의미로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몇이나 되는고? 황전마을 사람들이 도암정 앞 연못에 연꽃을 심고 여름이 오면 정자에 앉아 그 꽃을 감상하는 마음 또한 주돈이가 연꽃을 사랑했던 마음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