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국민펀드로 불리는 ‘미래에셋 인사이트’가 처음 판매된 지난해 10월31일. 미래에셋증권 콜센터는 폭주하는 투자 문의 전화로 거의 마비 상태였다. 펀드를 판매하는 일선 지점 창구는 정문 밖까지 길게 늘어선 인파로 진풍경을 연출했다.
창구 상담을 받으려면 번호표를 끊고도 1~2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했다. 갓난아이를 업고 있는 주부, 휴가 나온 군인, 점심시간에 틈을 낸 직장인, 환갑 진갑을 넘긴 노인들까지 인사이트펀드에 가입하겠다고 늘어선 이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이 같은 인사이트 열풍은 펀드 출시 한 달 만에 4조원의 투자금을 끌어모으며 극에 달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흐른 2008년 11월. 국내 펀드시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어 있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로 비롯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 세계 증시를 급락시켰고, 한국도 그 여파를 비켜가지 못했다. 코스피지수가 지난해 고점 대비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을 반영하듯 투자원금을 절반이나 까먹은 ‘반토막 펀드’가 속출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수익은커녕 원금이라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금융위기에 이어 실물경제 침체까지 겪고 있는 글로벌 증시는 쉽사리 회복될 조짐이 없어 냉가슴만 앓고 있다. 일부 투자자들은 은행과 증권사, 운용사 등을 상대로 투자 손실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근 몇 년간 국내 증시의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해 온 펀드시장의 몰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2003년 이후 본격적으로 강세장을 연출하면서 급성장한 국내 펀드시장이 5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온 약세장을 경험하면서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적립식펀드는 변신할 뿐
그렇다면 그동안 성장가도를 달려온 펀드시장은 이대로 주저앉고 마는 것일까. 시장 전문가들은 국내 펀드시장이 단기간에 걸친 급성장에 따른 후유증은 겪겠지만 이번 위기를 계기로 새롭게 재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계웅 굿모닝신한증권 펀드리서치팀장은 “글로벌 증시 폭락으로 대부분 손실을 입은 적립식펀드 투자자들은 반토막 난 펀드의 원금을 되찾기 위해 추가불입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며 “강세장을 지나 약세장이 장기화되는 금융환경의 변화 속에서 적립식투자는 또 다른 시즌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증시 급락에 따라 발생한 시장충격은 짧은 시일 내에 보상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저금리 상황에서 대안상품이 없는 데다 노후 대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로 인해 타격을 입은 이머징시장의 성장성이 훼손됨에 따라 적립식펀드의 투자대상이 해외펀드에서 국내 주식형펀드로 바뀌겠지만 지금까지 펀드시장의 성장을 견인해 온 적립식투자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해외 주식형펀드는 지난해 6월 비과세 조치가 확대되면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적립식펀드는 올해 9월 말 기준으로 주식형펀드의 46%를 차지하며 국내 증시의 ‘기댈 언덕’을 제공하고 있다. 판매잔액은 75조5000억원 규모이며 계좌수는 1507만개에 달한다. 2005년 403만개 수준이었던 적립식펀드 계좌 수는 불과 3년 만에 4배 가까이 급증했다.
오온수 현대증권 펀드애널리스트는 “주가의 바닥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꾸준한 적립식투자를 통해 평균 매입단가를 낮추는 것이 하락장에서 잃어버린 수익률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조언했다.
새로운 투자문화 정착 계기로
올 들어 지속되고 있는 평가손실에도 불구하고 펀드시장 규모가 해마다 성장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요인이다.
자산운용협회에 따르면 2005년 말 199조원이었던 펀드 판매잔액은 2006년 231조원, 2007년 292조원으로 늘었고, 올해 9월 말 기준으로 334조원에 달하고 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10% 정도 증가한 386조원 규모의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내년 2월 본격 시행을 앞둔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은 펀드시장에 긍정적인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자통법이 시행되면 그동안 은행, 증권, 보험사 등 일부 금융기관에 한정됐던 펀드판매 채널이 다양해진다. 10억~50억원의 자본금만으로 펀드판매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펀드슈퍼마켓, 독립재무설계사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펀드판매가 이뤄질 예정이다.
펀드판매 채널이 다양해진다는 것은 경쟁체제가 심화됨으로써 계열사펀드 밀어주기나 과도한 판매수수료 등의 문제가 완화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또한 자산운용방법에 대한 규제도 완화되면서 투자대상 자산의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따라서 증권, 부동산은 물론이고 다양한 실물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투자하는 혼합 자산펀드의 출시도 가능해진다.
김대열 하나대투증권 펀드리서치팀장은 “자통법 시행으로 투자자 성향에 맞는 펀드를 권해주는 ‘적합성 원칙’이 도입된다”며 “이로 인해 보수적인 투자자금이 이탈할 가능성은 있지만 국내 투자문화가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내다봤다.
금융당국도 최근 투자자와 판매사 사이에 소송전으로 비화되고 있는 불완전판매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우선 ‘펀드 판매절차 표준매뉴얼’을 마련해 판매회사에 보급할 예정이다. 판매인력이 사전에 고객의 투자 성향을 파악한 후 적합한 펀드를 권유하는 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파생펀드 등 위험성이 높은 펀드는 전문성을 지닌 사람만 판매할 수 있도록 판매인력의 등급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현장에서 제대로 펀드판매가 이뤄지는지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고객 신분으로 판매 전 과정을 모니터링하는 ‘미스터리 쇼핑제’도 도입할 계획이다.
이계웅 팀장은 “내년은 과거 투자실패에 대한 교훈으로 무너진 투자원칙을 복원하고, 투자의 신뢰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 새로운 투자문화 정립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