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68-171
Ⅲ. 역사와 객관성
인간이 만약 현자들에 의해 발전된 의의 예와 기준에 의해 변화된다면, 현자들은 그것들을 처음에는 어떻게 만들까? 순자는 종종 현자와 장인들 간의 예화를 꺼낸다. 그 예화들을 좀 더 자세히 따라가 보자. 인간은 사냥이나 도축, 전쟁에 대해서는 예리한 도구가 필요하다. 고대에, 한 장인이 청동으로 만든 날이 당시 쓰이던 부싯돌로 만든 것보다는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청동 날은 더 넓은 절삭 면이 있어 덜 무뎌지기 때문이다. 그 장인은 청동을 녹여, 망치와 모루를 써서 만들었다. 그 결과 청동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인간에게 더 뛰어난 해결책이 되었다.
유사하게, 고대의 현자들은 인간이 직면한 문제를 인지했다: “인간은 비정상이며, 위험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치지 않으며, 제멋대로이고 혼란스러우며 무질서하다”(302). 이 결과, “힘있는 자들이 약한자들을 해치고 착취한다. 다수가 소수에 폭정하고 고함쳐 침묵시킨다.” 심지어 한때 지배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언제나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공포속에 산다. 상상력과 지성을 발휘하여, 현자들은 사람들을 이러한 문제에서 구할 해결책을 고안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의의 명확한 절차와 기준을 만들었다”(302). 청동날을 만들어내고 사용한 것이 절삭에 대한 인간이 필요에 더 나은 해답이었던 것처럼, 이것의 고안과 사용이 자연적인 혼란의 상태보다는 더 나은 삶의 방법이었다.
장인도 현자도 기존의 방식에 따라 만들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뇌는 청동을 녹이고 연마하는 지식에 고정되어있지 않다.) 그들의 생산은 “신중한 노력”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도공이 흙을 섞어 도기를 만들 때, 그 도기는 장인의 신중한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인이 나무를 깍아 식기를 만들 때, 그 식기는 장인의 신중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의의 절차와 기준, 적합한 모형과 방식은 현자의 세심한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순자23; 독서, p.300)
순자는 예와 의의 기준의 발명이, 먼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로서, 혹은 여러 세대에 걸쳐 차차 축적된 어떤 것으로서 우리가 알기를 바랬을까? 장인의 예화는 후자를 제시한다. 기술은 조금씩 시간에 거쳐 발전하기 때문이다. 공자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순자의 세상은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바뀌었다. 순자가 도와 비슷한 관점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문구가 좀 있다: “현자들은 의의 절차와 기준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모형과 방법을 수립하기 위해 반성과 숙고를 축적하고, 스스로 실행하며, 실천을 설득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의의 절차와 기준을 차차 축적되었다고 상상하게 했다. 아마도 초기의 현자들은 우리가 전쟁에서 예와 의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모두가 더 행복해지고 문명은 더 생존할거라고만 인지했을 것이다. “적의 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여러 세대에 걸쳐, 현자들은 이를 기반으로 점점 더 많은 예와 의의 기준을 덧붙였다. 이상적인 형태에 이르렀다고 생각되어질 때까지.
장인의 예화는 또한 장자의 상대주의적이고 비관적인 논쟁에 대한 반응을 구성하기 위해 그에게서 가져온 아이디어를 취한다. 장자는 제안하기를(적어도 때때로), “이것”과 “저것”이 각자의 관점에 달려있듯이 도 역시 “옳다고 간주되는” 혹은 “옳지 않다고 간주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장자는 또한 ”삶을 가꾸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제안한다. 황소를 죽이는 도살자처럼, 장인의 거의 기적적인 노력을 관찰함으로써. 도살자의 기술은 그가 각을 뜰 때, 황소의 몸의 자연적인 구성인 ”타고난 패턴에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도살자와 그의 칼, 그리고 황소의 사체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느냐에, 그가 각을 뜨는 올바른 방식(그리고 많은 잘못된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관점의 문제만은 아니다.
순자는 현자가 도를 개발한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양태”이라는 똑같은 언어에 호소한다: “인, 의, 예, 지는 알려지고 실천될 양태를 가지고 있다.”(304) 그는 특히 예에 관해 말하길, “사물의 분별에 있어, 양태화가 궁극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리한 인식이 궁극이다. 하늘아래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훌륭한 질서가 있다.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혼란이 있다”(276). 순자가 장자와 양주가 공자의 도는 인위적인 결과라는데 동의하는 한편, 그는 도살자가 각을 뜨는데 최상의 방법이 있는 것처럼, 인간을 규제하고 변화시켜 환경과 서로 조화롭게 살게 하는 실천과 제도에는 최상의 조합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의식을 그러한 권력과 영역의 패턴으로 보았기 때문에, 순자는 그에 대한 노래를 한다:
예로써, 하늘과 땅은 조화롭게 화합하며;
예로써, 태양과 달은 밝게 빛나며;
예로써, 사계절은 순회하며;
예로써, 별들은 하늘에서 움직이며;
예로써, 사랑과 증오에 대한 적절한 방식이 만들어지고;
예로써, 기쁨과 분노에 대한 적합한 한계가 있다.
예로써, 유순한 복종이 생겨나고,
예로써, 각성한 군주가 만들어진다.(순자 19; 독서 p.276)
어떻게 순자는 절차가 사계절의 변화와 별의 움직임에 관여한다는 자신의 제안과 장인의 작업절차에 대한 비교를 조합했을까? 결국, 전자의 이미지는 예는 인간이 발견한 우주의 원리를 내포하며, 후자는 그것들이 고안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두 관점사이에 갈등은 필요하지 않다. 청동검은 하나의 발명이며, 장인의 신중한 노력의 결과물이지만, 그 발명이 임의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의 목적에 기반하며, 청동의 특성과 쓰임대로 의도되었다. 우리 영장류의 뇌가 청동을 녹이도록 고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청동기 시대가 많은 독립된 문명을 시작하게한 이유이다. 유사하게, 인간의 의식이 발명되었지만, 그것들은 천지인에 기반하므로, 순자는 현자들이 이 셋을 조화롭게 한다고 명시한다.
풀과 나무들이 꽃피고 성장할 때, 도끼들은 산과 숲에 들어가면 안되며, 그 생명을 잘라서도 안되고, 그들의 성장을 막아서도 안된다. 거북이와 악어들, 물고기와 장어들이 알을 배고 낳을 때, 그물과 독약은 슾지에 들어가면 아니되며, 그 생명을 죽이고 성장을 막아서는 안된다. 봄에 밭을 갈고, 여름에 풀을 뽑으며,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저장한다.... 베거나 육성함에 그 적절한 때를 놓쳐서는 아니되며, 그래야 산과 숲이 황폐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풍족해질 것이다.(순자 9; 독서 p.268)
그리하여, 우리는 비유적으로 더 큰 우주현상을 예의 확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별의 움직임을 다스리는 법칙에 비교하는 것은 둘다 영원하며 불변임을 나타낸다. 순자는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 같다: “예는 정말로 완벽하지 아니한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숭고한 기준을 확립하여, 하늘아래 누구도 덧붙이거나 뺄 수 없다”(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