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성서형제회가 덜 활성화된데에 대해서 다른 문제를 내놓고있다
코로나로 인하였다고 하고 때로는 본당 사목방향과 대치되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우게되는데요 이는 전반적으로 평신도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조선시대에 큰박해인 신유박해를 맞이하여서 조선 최초의 사제인 주문모신부와
조선의 평신도회장들이 순교하여서 30여년동안 조선쌍에는 사제없이 지냈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없나는 의미는 미사뿐만 아니라 각종 성사를 드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산간지역으로 흩어져 교우촌을 만들고 그곳에서 평신도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교회는 박해를 먹고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 본당에서 여러가지 시노드이며 교구별로 하는 일이 많기에 새로운 개념의 단체인
성서형제회가 확장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안에서 단 몇분이라도 헌신적인 마음이 있다면 절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앞으로 나아갈것입니다
저는 대구에 내려와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허리가 예전과 같이 앉아서
성당길 100미터 오르막길을 올라가는것도 힘이 들지만
어찌된셈인지 다른해보다 더 자주 평일미사를 드리고 제단체활동을 합니다 노인대학인 아름대학에도 가고,
성당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잠시 앉아서 묵주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추석전에 본당에서 아름대학이 개강되었습니다
영성체하러 나갈때에도 비틀거리며 불안하게 다니시는 할머니도
평일미사며 레지오회합에도 참여하십니다
그리고 노인대학인 아름대학에 나오셔서 음악에 맞추어서 율동을 합니다
서울에서는 가까운 본당끼리 즉 당산동이나 이문동 그리고 목3동
그리고 수원교구 시흥시와 안산시에 있는 본당공동체의 일년에 단 몇차례만이라도
팀간의 교류방문을 권하고 싶습니다
곧 가을이면 다들 단풍구경을 겸한 성지순례를 하게 됩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해서 1988년 12월 30일 요한바오로2세 교황이 반포한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읽어보시고 도움이 된다고 여기신다면 이곳 까페에 그 다음부분도 올려볼까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
1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신비의 교회에서 평신도의 존엄성
포도나무의 신비
8. 성경은 포도나무의 표상을 여러 가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특별히 하느님 백성의 신비를 표현하는 데 기여합니다.
교회의 내적 본질을 강조하는 이러한 전망에서 평신도들은 단순히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포도밭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복음 15,5)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선택받은 백성을 가리키고자 포도나무의 표상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포도나무이고, 주님 자신의 작품이며,
당신 마음의 기쁨입니다. “나는 좋은 포도나무로, 옹골한 씨앗으로 너를
심었다.(에페 2,21). 너희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밭의 포도나무 같았지
물이 많아서 열매가 풍성하고 가지가 무성하였네“(에페 19,10)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이사 5,1~2)
예수님께서 친히 다시 한 번 포도나무의 상징을 들어 하느님 나라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설명하는 데에 이를 사용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들러치고 포도확을 파고 탑을 새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마르 12,1; 마태오 21,28 이하 참조)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를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재촉하여 포도나무의 신비를
깨닫도록 이끌어 줍니다. 포도나무는 하느님 백성만의 상징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며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브븐꼐서는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가지는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지닙니다.(요한 15,1 이하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성서적
표상들을 참고하여 언급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표상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포도나무이시며 그 가지들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그회안에 머무르며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1`5 참조)“
그렇다면 바로 교회 자체가 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입니다. 아버이와 아들과 성령의
생명과 사랑 자체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요한 3,5참조) 모든 사람이 거저 받는
은총이므로 교회는 신비이며, 교회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그 사명 안에서 바로
하느님의 친교를 재현하고 천명하고 전달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바로 친교의 신비인 교회의 신비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이 드러나며,
평신도들의 근본 존엄성이 밝혀집니다. 오직 이러한 존엄성의 맥락 안에서만,
교회와 세계에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