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자료[853]신익성선생시詠隨身物(영수신물)
詠隨身物영수신물
-몸에 늘 가까이하는 기물을 읊다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신익성申翊聖
其一
初衣獲返廣陵居。
收拾行裝不滿驢。
習氣平生猶未了。
手携韓柳二家書。
韓柳集
其二
詩書之厄甚於秦。
君賜家傳盡化塵。
賴有堯夫全集在。
老來觀物且觀身。
康節集
其三
雪樓遺集紙如雲。
燕市購來十襲芸。
亂後璧完唯此物。
定知神鬼護奇文。
白雪樓集
其四
窮村蝸室不施帷。
紙作屛風拙筆宜。
從古文章何限好。
會心唯有去來辭。
素屛風
其五
半生隨我與興居。
伸屈之形鶴膝如。
世上煩囂都不管。
暖風晴日夢華胥。
木枕
其六
光山蓑笠大如盤。
換得金簪一品冠。
堪笑此翁緣底事。
白頭江上老漁竿。
蓑笠
其七
一枝烏竹自湖中。
扶得東淮白髮翁。
村北村南隨意去。
江山勝處領春風。
竹杖
其八 여덟 번째
寒食風前穀雨餘。한식풍전곡우여
磨顋魚隊上灘初。마시어대상탄초
顋=뺨 시, [본음] 뺨 새.
乘時盡物非吾意。승시진물비오의
故使兒童結網疏。고사아동결망소
魚網어망
한식 바람 불기 전, 곡우 내린 후에
모여든 물고기 떼 여울로 올라오기 시작하네
때를 타 모두 잡는 것은 나의 뜻 아니기에
아이에게 그물을 성글게 짜라 하네
고기잡이 그물
몸에 늘 가까이하는 기물을 읊다〔詠隨身物〕
처음 출사한 후 광릉 집으로 돌아가게 되니 / 初衣獲返廣陵居
행장을 수습하여도 나귀 짐이 차지 않네 / 收拾行裝不滿驢
평생 익힌 습관을 아직 그만두지 못하고 / 習氣平生猶未了
손에는 한, 유 두 작가의 책을 들고 있네 / 手携韓柳二家書
한유와 유종원의 문집
두 번째〔其二〕
서적이 당한 곤액이 진나라 때보다 심하여 / 詩書之厄甚於秦
내리신 것이며 전하는 것 모두 티끌이 되었네 / 君賜家傳盡化塵
그나마 요부의 전집이 남아 있기에 / 賴有堯夫全集在
늙도록 만물을 살피고 몸을 살피노라 / 老來觀物且觀身
《소강절집》
세 번째〔其三〕
설루의 유집은 종이가 구름 같으니 / 雪樓遺集紙如雲
연경 시장에서 사서 열 번 싸고 좀약 넣어 왔네 / 燕市購來十襲芸
난리 후에도 온전한 것은 이것뿐이니 / 亂後璧完唯此物
귀신이 훌륭한 문장을 지켰음을 분명 알겠네 / 定知神鬼護奇文
《백설루집》
네 번째〔其四〕
궁벽한 시골의 좁은 집이라 휘장을 치지 않고 / 窮村蝸室不施帷
종이로 병풍을 만드니 내 글씨에 잘 어울리네 / 紙作屛風拙筆宜
예부터 좋은 문장이 어찌 끝이 있으리오마는 / 從古文章何限好
내 마음에 맞는 건 오직 귀거래사뿐이라네 / 會心唯有去來辭
흰 병풍
다섯 번째〔其五〕
반평생 나를 따라서 함께 생활했으니 / 半生隨我與興居
접었다 펴는 모습이 학 다리 같구나 / 伸屈之形鶴膝如
세상의 번잡스런 일엔 도무지 상관 않고 / 世上煩囂都不管
따뜻한 바람 부는 맑은 날에 화서의 꿈 꾸리라 / 暖風晴日夢華胥
목침
여섯 번째〔其六〕
광주의 사립은 크기가 소반만 해서 / 光山蓑笠大如盤
금잠의 일품 관과 바꿀 수 있네 / 換得金簪一品冠
못내 우습나니, 이 늙은이 무슨 일로 / 堪笑此翁緣底事
센 머리로 어부 되어 강 위에서 낚시질 하는가 / 白頭江上老漁竿
도롱이와 삿갓
일곱 번째〔其七〕
오죽 지팡이 하나가 강호에서 나와 / 一枝烏竹自湖中
동회의 백발노인을 부축하네 / 扶得東淮白髮翁
마을 북쪽 남쪽 마음대로 다니니 / 村北村南隨意去
강산의 경치 좋은 곳에서 봄바람을 부리네 / 江山勝處領春風
대나무 지팡이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권진옥 (공역) | 2016
樂全堂集卷之四 / 詩○七言絶句
신익성申翊聖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우참찬 신영(申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다. 어머니는 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쫓겨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대신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했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로 잡혀간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한 뒤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술활동
문장·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글씨로는 회양의 「청허당휴정대사비(淸虛堂休靜大師碑)」,
광주(廣州)의 「영창대군의비(永昌大君碑)」, 파주의 「율곡이이비(栗谷李珥碑)」 등이 있다.
저서로는 『낙전당집樂全堂集)』·『낙전당귀전록(樂全堂歸田錄)』·『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