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3, 9, 21, 목요일, 10, 4, 수요일, 양일간, 왕실묘역길 원당골 천주교 방학묘원 들머리, 도봉역 날머리,
구리역에서 05, 10 분 첫차를 타고 우이역 하차후,, 왕실묘역길에 들어섭니다 ~
"연산군묘 재실" 은 묘역 관리자가 제사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는 공간이라 하구요 ~
서울시 기념물 33 호인 느티나무는 2012 년 현재 수령이 550 년으로 확인이 됐답니다 ~
"양효공 안맹담" 과 "정의공주" 묘역은 초서와 활쏘기에 능했던 안맹담과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의 부부묘 구요 ~
전형필 가옥에서 오르는 등산로 왼편 작은계곡에는 "귀록계산"<歸鹿溪山> "와운폭"<臥雲瀑>이란 암각문이 있는데 ~
시루봉 아래 해등촌<海等村 방학동>에 기거하던 "귀록 조현명"<歸鹿 趙顯命>은 54 세인 1744 년 이곳에 "명오정"<名吾亭 귀록정>을 짓고 ~
벗들과 "소유"<逍遊>했는데 "명오정" 은 "내이름의 정자" 이고 "귀록" 은 조현명의 호라 귀록정도 맞는말인 셈이죠..?
"귀록계산"<歸鹿溪山> "사슴이 돌아오는 계곡" 이란 뜻인데 사슴은 신선이 타던 동물로 조현명의 자연주의적 성품이 돋보인다는 겁니다 !!
"와운폭"<臥雲瀑>은 완만한 계류폭포고.. 해등촌은 지금의 노원구 도봉구를 일컫는 지명으로 당시엔 양주군 해등촌면 이었다네요 ~
정교하게 조각된 마애불<磨崖佛>은 장수산악회 회원들이 1973 년에 세웠는데 훼손되자 93 년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9, 21 일 ~ 끝 ~
10, 4 일 우이역에서 방학동 방향 고개를 넘어와 "에덴카페" 아래 "우이정 풍천장어" 주차장 끝 가건물 옆 도랑 가에 ~
"명월동문"<明月洞門>이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도교사상은 금기였기에 "동천"<洞天 신선이 들어가는 문>을 슬쩍 바꿔..?
천<天>을 문<門>으로 표기 했을테고 "해서체" 인 "명월동문" 은 명필의 솜씨로 글쓴이는 알수없고 경치가 빼어난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랍니다..?
명월동문을 보고 내려와 다음목적지를 찾아 원당골로 접어들자..?
길이 끊긴듯 하지만 냇가를 끼고 돌담위로 걸어가면 세개의 암각이 있고.. 왼쪽은 천주교 방학동 묘원으로 철문을 열고 들어가 ~
큰길로 30 여 미터 거리.. 길 아래 우측으로 내려가면 조요셉이란 분의 묘에 바둑판이 있는데 ~
이곳은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1571 ~ 1637>의 별서지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의 양란을 겪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었으며 ~
"동악시단"<東岳詩壇>의 중심 인물로 4,379 수의 방대한 "시" 를 남긴 "이안눌 별서" 는 흔적이없고 봉묘가 그자리에 있다는거지요..?
자연속에 바둑판을 조성하는 것은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영향이라고 하며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을 추앙하고 ~
신선의 강림을 바라는 마음에서 풍광이 수려한곳에 바둑판을 조성했는데 여기 바둑판은 자연 암반위에 근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
높은 산정등 우리산 곳곳에 20 여개의 바둑판이 발견되었답니다 ~
석축 위로 걸어 들어가 멧돼지 방지 철문을 통과해 조금가다 우측으로 내려서면 작은폭포가 있구요..?
물이 흐르는 바위라는 뜻의 "계수석"<溪水石>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는데
계<溪>자는 귀퉁이 일부가 떨어져 나갔네요..?
2 주전 시루봉 주변을 한참이나 헤매며 찾으려던 암각이 그날 우리 둘이 간식을 먹던 그 바위 아래였다니.. 헐..?
등잔 밑은 그래서 어둡다는 명언이 나왔을터? 오늘도 몇번을 오르 내리며 찾다.. 다시한번 물줄기 위를 바라보니..?
상단 귀퉁이에 술래잡기 하자고 숨어있는 "와폭"<臥瀑>을 발견한 순간 얼메나 반가운지 부둥켜 안을뻔 했지 뭐 ~ 유..?
"연월암삼폭" 은 한수 더떠 나무가지를 덮고 위장을 하고있어,, 길 옆이지만 지나칠수 밖에 없는 지형지물을 이용할줄이야..?
"연월암 삼폭"<延月巖 三瀑>의 뜻은 "달과 함게 노니는 바위와 세개의 폭포" 라는 뜻으로 "예서체" 라고 합니다 ~
방학능선으로 오르다 본 비석인데 희미한 글씨에 가방끈이 짧은 관계로 해독불가..?
구름과 맞짱뜨는 우이암과 원통사가 시야에 들어오네요..?
관음보살이 부처님을 향해 기도하는 형상을한 봉우리를 지금은 "우이암"<牛耳巖>이라 부르지만 원래는 "관음봉" "사모봉" 으로 불리었고 ~
호랑이 두꺼비등 동물형상의 바위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이곳은 "관음성지" 라고 합니다 !!
"원통"<圓通>이란.. 절대의 진리는 모든것에 두루 통한다는 "관음보살" 의 덕을 칭송하는 뜻이구요..?
"나한전"<羅限殿>은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던 시기에 이곳 석굴에서 100 일 기도를 올리던 마지막 날..?
천국의 정승<상공>이 되어 "옥황상제" 를 배알하는 꿈을 꾸자.. 새겼다는 "상공암" 바위글씨가 약사전 앞에 있구요..?
석굴전 내부는 깜깜이라? 후레쉬를 터트려 촬영했는데 비교적 넓은 공간입니다 ~
약사전<藥師殿> 앞 거북바위에 "해서체" 로 새겨진 "상공암"<相公岩>은 이성계의 꿈에서 새기게 됐다지만..?
역사 학자들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자 민중을 설득하려 만들어낸 스토리텔링 즉 "상징조작" 이라고 합니다..?
"상공" 은 지위가 높은 사대부를 일컬으며 "관암 홍경부" 의 "상공암부" 에는 바위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하는데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
"귀록 조현명" 선생은 "해등촌" <지금의 방학동 일대>에 거주하며 이곳에 자주올랐고 인근에 귀록이 세운 명오정<귀록정>이 있으므로 ~
귀록을 기려 후학들이 새겼을거란 해석이 팩트로 인식되고 있으며.. 따라서 중창기에 언급된 이야기는 위인과 신비성을 과장해..?
사찰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라는 것이죠.. 우리나라 사찰 창건에 소환되는 인물은? "의상" "원효대사" "도선국사" 등과..?
권력자로는 "왕건" 이성계 등이 있으니 홍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위상을 높이려는 본능적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