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013.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 고작이 아니라 더. 등 )
----------------------------------------------------
231013.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고작이 아니라 더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어제 주님께서는 청하면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하느님은 아비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실 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것이신 성령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반대의 영 곧 악령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어느 집을 차지하고 있던 악령이 나갔는데
그 집이 계속 비어 있으면 더 많은 악령이 들어와 차지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청해야 들어오시는데
악령은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침입한다.
그러니까 성령은 손님이고 악령은 불청객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성령만 아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악령의 차지가 된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간절히 청하고 공손히 모셔야만 오시는 고귀한 손님이십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기에
우리가 당신 사랑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만 오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악령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우리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우리 안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악령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빛이 있으면 어둠은 절로 없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실 우리의 어둠이란 어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빛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아니 계시기 때문이듯
악령과 성령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령이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안 계시기에 있는 것이며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게 되면 악령은 절로 사라집니다.
사랑과 미움도 같습니다.
열망과 욕망도 같습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을 때 우리 안에 단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차지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순간 미움은 절로 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미움의 가시를 빼내려는 소극적인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대 발심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의 태세 전환을 하면 미움은 절로 사라집니다.
욕망이 우리 안에서 뒤끓는 것도 사랑의 열망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이니,
욕망을 끊으려고 소극적인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망과 갈망을 적극적으로 품어야 할 것입니다.
고작 미워하지 않으려고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고작 욕심과 욕망과 씨름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사랑하고 더 사랑하려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31013.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은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서 놀라워하는 이들이요, <둘째>는 예수님의 권위와 권능을 의심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 곧 예수님에게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뒤집어씌우는 이들이요, <셋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징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그야말로, 요한복음사가의 말대로 그들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던 것입니다.”(요한 3,1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두 가지 논거로 반박하십니다. 첫째는 만일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한다면, 결국 베엘제불이 자신의 세력을 제거해버리는 것이기에 모순이요, 둘째로는 자신들의 아들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것 역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이기에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비방은 완전히 부정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들의 비방과 모함에 대해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또한, 예수님께서 사탄을 쫒아낸 자리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사탄이 쫓겨난 ‘빈자리’에 예수님으로 채워져 있는지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더 세고 맹렬한 힘을 갖추고 떼로 몰려올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영혼은 임자가 있어야 하는 집과 같습니다. 만약, 집이 비어 있고 임자가 없으면, 마땅치 않는 자들이 침범해 들어와 살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집을 비우는 일이 아니라, 집을 빚으로 채우는 일인 것입니다. 만약 죄나 어둠을 비우고 깨끗해지고도, 그냥 그대로 있게 되면 그 자리는 즉시 또 다시 어둠이 찾아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어둠과 악이 동료들을 데리고 떼거리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영혼의 집이 거룩함으로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주인을 모시는 일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 영혼의 집이 ‘거룩한 분의 성전’이 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의 감실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
231013.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귀를 물리치는 길
마귀라는 말은 ‘중상자’, ‘고자질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에 대적하는 이 세상의 왕 또는 악한 세력입니다(루카4,6. 2고린4,4). 그래서 하느님을 사칭하고(2테살2,4) 하느님 일에 반대하며(마태16,23), 악인을 조종(에페2,2)합니다. 인간을 모함(욥기1,9-11)할 뿐 아니라 유혹(2코린11,3)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유혹(루카4,5-7)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 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중의 반응은 이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고도 뺨 맞는 격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마귀는 선한 것 안에서도 악한 것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한 것 안에서도 선을 끌어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시기와 질투, 중상, 모략, 미움, 분노, 적개심의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상태는 이미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천국의 문은 이미 지상에서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루카4,1-14)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28절에는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에페6,11).하고 권고합니다. 묵시록에서는 “우리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자(사탄)를 이겨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묵시12,11).고 말합니다. 결국 마귀를 물리치는 길은 말씀과 성령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살고 있다면 그를 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흉보며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둠의 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여러분이 선을 선으로 볼 수 있고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길 희망하며 마귀, 사탄을 물리치는 사람 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1013.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놀이 중에 ‘팽이’가 생각납니다. 팽이는 힘차게 돌아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지 않고 쓰러집니다. 그래서 팽이는 채찍으로 계속 돌려주어야 합니다. 채찍으로 돌리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하면 팽이는 이내 쓰러지고 맙니다. 집에서 키우는 화초도 그렇습니다. 가끔씩 잎을 닦아주고, 볕이 좋은 날 햇빛에 놓아두고, 적당히 물을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주 화초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화초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예민한 화초는 금세 시들어 버립니다. 디지털 시대를 살면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안전과 보안의 이유로 ‘비밀번호’를 정하는 것입니다. 비밀번호를 정할 때도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생일은 안 되고, 연속된 숫자도 안 되고, 8자리 이상은 정해야 되고, 특수문자도 있어야 되고, 어떤 것은 대문자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비밀번호를 정하는 것도 힘든데, 그렇게 정한 비밀번호를 기억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밀번호를 기록해 놓기도 하고, 자주 사용해야 합니다. 어쩌다 사용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팬데믹 기간에 매일 피아노 연습을 했습니다. 엠이 피정 때 깜짝 발표를 하기로 했기에 더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하니 굳이 악보를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손이 움직였습니다. 팬데믹도 끝나고 2년 가까이 피아노 곁을 떠나 있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손을 움직이려하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연습하지 않으면 손이 무디어 진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가수 김수철 씨는 매일 1시간씩 기타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지 벌써 5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문가 수준의 기타 실력이지만 그렇게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실력이 녹슬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종기도는 삼종기도와 부활 삼종기도가 있습니다. 보통 삼종기도는 매일 하니까 입에서 쉽게 나오는데 부활 삼종기도는 부활시기에만 하기에 처음에는 어색합니다. 하지만 매일 하면 그것도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밀림이 숲으로 우거지는 것은 비가 자주 오기 때문입니다. 사막이 삭막한 것은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기도의 비, 나눔의 비, 희생의 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들 마음도 삭막해 질 것입니다. 꾸준히 기도하고, 기쁘게 나누고, 기꺼이 희생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사랑의 꽃이, 믿음의 꽃이 희망의 꽃이 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당신 가운데 쉼을 얻을 때까지 편하지 않습니다. 주여! 저에게 앎과 헤아림을 주소서!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인지요! 당신을 부르는 것인지, 당신을 찬양하는 것인지요? 비슷하게 당신을 앎이 먼저인지, 당신을 부른 것이 먼저인지요? 허나 당신을 모른다면, 누가 당신을 부르겠습니까?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는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부를 것입니다.(고백록 1장 1절)” 위대한 영성가이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 앞에 쉴 때까지 이 마음은 늘 불안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께서도 늘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잘 지은 집도 3년만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고, 엉망이 되곤 합니다. 집 앞의 텃밭도 한해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와 함께 있어야 안전하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력은 힘들고 어려운 일 속에서도 우리를 넘어트리지만, 즐겁고 기쁜 일을 통해서도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일지라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가는 우리들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
231013.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왜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을까요? 왜 베엘제불을 거들먹거리고 표징을 요구하며 주님을 시험했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들의 아들들도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들의 아들들이 마귀를 쫓아낼 때와 주님께서 마귀를 쫓아낼 때의 그들의 말이 다르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십니다.
내 자식이 잘하면 실력이고 남의 자식이 잘하면 재수다.
이 말고 오늘 사람들이 주님을 시험한 모습들은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왜 예수라는 사람이 그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정작 주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중심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은 하늘나라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말씀하시고 복음 안의 사람들은 사람의 능력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 것을 중심에 둔 채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한다면 그 음성은 그저 감동 없는 건조함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셔도 못 알아들었던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있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세상 음식을 둘로 나누면
예전에,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예전에 아무 생각 없이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준현’이란 개그맨이 나왔습니다.
그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나에게 세상의 음식을 둘로 나누라고 하면
하나는 맛있는 음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
.
.
.
.
.
더 맛있는 음식^^
모두 다 맛있는 음식이라는 뜻이지요.
그때 갑자기 번쩍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돌아보니 은총이라는 말의 의미가 말입니다.
----------------------------------------------------
231013.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묵상 글을 매일 쓰고 있습니다. 또 이곳저곳에 보낼 글들도 시간 날 때마다 씁니다. 사실 매일 쓰고는 있지만, 어떤 날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글이 잘 써질 때는 최대한 많이 쓰려고 합니다.
한 번은 집중해서 글을 쓰려고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글이 잘 써지는 것입니다. 쓰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호텔 밖으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글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기억 때문에 글이 안 써지는 날,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몇 줄 쓰지 못하고 잠만 실컷 자고 나왔습니다.
이때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글쓰기 공간이 중요하지 않고 글쓰기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탓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너무나 너그러운 우리이기에 자기 마음을 탓하기보다 환경을 비롯한 외부 조건을 탓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 탓을 계속 따지다 보면 자기를 제대로 못 보게 됩니다. 자기가 나아갈 길을 잃고 맙니다. 어렵고 힘들 때, 많은 이가 오히려 주님 곁을 떠나는 모습을 봅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라면서 주님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으니 그 사랑을 일상 삶 안에서 느낄 수 없으며, 하느님 안에 있어야 할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을 온전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이 해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런 활동은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고발합니다. 마귀 두목 베엘제벨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하느님의 일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나 그 두목보다 훨씬 더 강하신 분이십니다. 즉,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며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함께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진정한 ‘나’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사랑은 문제를 풀 때마다 결코 같은 답이 나오지 않는 수수께끼,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같은 문제를 푼다. 그래야만 하기에, 그 답이 필요하기에(토드 로빈슨)
---------------------
----------------------------------------------------
231013.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하느님 중심의 영적 승리의 삶-
어제 미사중 화답송 후렴에 대한 언급이 생각납니다. 새삼스럽게 발견한 시편성구의 말씀이 평범한 듯 하나 참 깊고 은혜로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40,5ㄱㄴ)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재물이 많은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한,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주님을 신뢰할 때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 가득한 삶이기에 비로소 참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화답송 시편도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삶을 묘사합니다.
“그는 시냇물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시편1,3)
얼마나 좋습니까? 이래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 삶을 강화해 줍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평생 영적전쟁중인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교황님도 “싸우지 않는 자는 신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의 전사로서의 영적전쟁을 뜻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바로 매일 미사 은총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도대체 매일미사은총으로 무장하는 것보다 영적승리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제 피정지도는 가톨릭 기도서의 “성호경-주님의 기도-성모송-영광송” 기도와 더불어 다음 첫 일성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참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이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수도원에, 아름다운 주님을 만나러 오신 참 좋은 피정을 선택하신 여러분은 참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어 정신 건강, 마음 건강, 영혼 건강에 대해 많이 강조했습니다. 요즘 주변에 보면 마음이 정신이 병들어 아픈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약화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 가득한 영적건강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치열한 영적전쟁중 영적승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온통 악이 세력에 포위된 듯 고립무원의 양상이지만 마귀들을 쫓아냄으로 영적승리로 끝냅니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온갖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악마들을 퇴치하는 구마활동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인데, 무지의 편견, 선입견에 눈먼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완전히 곡해하며 새삼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어는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사탄들이 얼마나 영리한데 그러니 결코 분열로 자중지난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악마의 유혹에 얼마나 허약한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깨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부패도 분열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들을 축출함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있는 것이다.”
사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리고 내중심의 삶을 살 때 모두의 가능성이 사탄입니다. 사탄들이 횡행하는 영적전쟁상황중에도 영적승리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일치되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백전백승의 영적승리의 삶일 것입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공동전선을 펴고 영적전투에 임할 것을 바라시는 주님의 심중이 다음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모아들이는 일치의 일이라면 사탄이 하는 일은 갈라쳐 흩어버리는 분열의 책동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분열이 아닌 일치의 삶을 추구합니다. 오늘 제1독서 요엘서는 온통 회개를 촉구하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정녕 그날의 심판날이 가까웠으니 “슬피 울어라, 울부짖어라, 밤을 새워라,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등 격렬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내 중심”의 사탄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서의 부단한 전환,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되돌아 오는 악령의 비유도 의미심장합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지만 악마는 진공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악마축출의 삶의 중심, 빈자리에 하느님이 자리잡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는 악마의 놀이터가 됩니다. 하느님 중심 자리에 우상들이나 악마가 자리잡습니다. 바로 복음 후반부가 이런 불행한 현실에 대한 묘사입니다.
“더러운 영이 돌아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면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래서 냉담한 이들의 회두가 어려운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고 지혜롭습니다. 내 삶의 중심 자리를 비워두지 않고 악령이 아닌 성령의 궁전으로 만들어 성령 충만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주님의 전사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언제나 영적건강에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내 중심의 사탄의 삶에서 부단한 회개를 통해 날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화하여 명실공히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해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전사로서 성령 충만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231013.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에게는 보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선하게 보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도
악하게 보입니다
곧은 사람에게는
곧은 것이
곧게 보입니다
굽은 사람에게는
곧은 것도
굽게 보입니다
맑은 사람에게는
맑은 것이
맑게 보입니다
탁한 사람에게는
맑은 것도
탁하게 보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것이
부드럽게 보입니다
딱딱한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것도
딱딱하게 보입니다
따뜻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것이
따뜻하게 보입니다
차가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것도
차갑게 보입니다
깨끗한 사람에게는
깨끗한 것이
깨끗하게 보입니다
더러운 사람에게는
깨끗한 것도
더럽게 보입니다
살리는 사람에게는
살리는 것이
살림으로 보입니다
죽이는 사람에게는
살리는 것도
죽임으로 보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