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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왕위 | 묘호 | 이름 | 생몰연 | 재위기간 | 릉소재지 | 업적,기타 |
1 | 太祖 | 李成桂 | 1335 ∼1408 | 6년2월 | 건원릉-구리동구릉 | 조선건국,함흥차사 |
2 | 正宗 | 방과 | 1357 ∼1419 | 2년11월 | 후릉-개성시판문군 | 이방원, 형제의 난 |
3 | 太宗 | 芳遠 | 1367 ∼1422 | 17년10월 | 헌릉-서초구 내곡동 | 정몽주, 하여가 |
4 | 世宗 | 祹 | 1397 ∼1450 | 31년6월 | 영릉-경기 여주 | 훈민정음,측우기, 18남4녀,54세 죽음 |
5 | 文宗 | 향 | 1414 ∼1452 | 2년3월 | 현릉-구리시 동구릉 | 37세 왕이 됨 |
6 | 端宗 | 弘暐 | 1441 ∼1457 | 3년2월 | 장릉-영월읍 영흥리 | 12세왕,노산군으로강등 |
7 | 世祖 | 유 | 1417 ∼1468 | 13년3월 | 광릉-남양주 진전읍 | 정유재란,한명회, 사육신,생육신 |
8 | 睿宗 | 황 | 1450 ∼1469 | 1년2월 | 창릉-고양시 용두동 | 전주경기전에 태실 |
9 | 成宗 | 혈 | 1457 ∼1494 | 25년1월 | 선릉-강남구 삼성동 | 경국대전, 사림파 등장 |
10 | 燕山君 | 隆 | 1476 ∼1506 | 11년9월 | 도봉구 방학동 | 무오사화,갑자사화,장녹수 |
11 | 中宗 | 역 | 1488 ∼1544 | 38년2월 | 정릉-강남구 삼성동 | 중종반정 |
12 | 仁宗 | 호 | 1515 ∼1545 | 9월 | 효릉-고양시 덕양구 | 아버지중종 죽었을 때 6일간 단식 |
13 | 明宗 | 환 | 1534 ∼1567 | 22년 | 강릉-노원구 공릉동 | 임꺽정 |
14 | 宣祖 | 연 | 1552 ∼1608 | 40년7월 | 목릉-구리시 동구릉 | 임란(조일전쟁) |
15 | 光海君 | 혼 | 1571 ∼1641 | 15년1월 | 남양주 진건면 | 인조반정으로 18년 간 유배 |
순서 | 묘호 | 이름 | 생몰연 | 재위기간 | 왕릉소재 | 중요업적 |
16 | 仁祖 | 종 | 1595 ∼1649 | 26년2월 | 장릉-파주탄현갈현 | 인조반정 |
17 | 孝宗 | 호 | 1619 ∼1659 | 10년 | 영릉-세종릉 뒤편 | 북벌정책 |
18 | 顯宗 | 연 | 1641 ∼1674 | 15년3월 | 숭릉-구리시 동구릉 | 심양에서 태어남, 예송논쟁 |
19 | 肅宗 | 순 | 1661 ∼1720 | 45년10월 | 명릉-고양시 덕양구 | 장희빈 |
20 | 景宗 | 균 | 1688 ∼1720 | 4년2월 | 의릉-성북구 석관동 | 희빈장씨 아들 |
21 | 英祖 | 금 | 1694 ∼1776 | 51년7월 | 원릉-구리시 동구릉 | 숙빈최씨 아들 |
22 | 正祖 | 산 | 1752 ∼1800 | 14년3월 | 건릉-사도세자 융릉 서쪽 | 1897년대한제국 때 황제로추존,정약용 |
23 | 純祖 | 공 | 1790 ∼1834 | 34년4월 | 인릉-서초구 내곡동 | 11살등극,영조계비 정순왕후 수렴청정 |
24 | 獻宗 | 환 | 1827 ∼1849 | 14년7월 | 경릉-구리시 동구릉 | 안동김씨 세도정치 |
25 | 哲宗 | 변 | 1831 ∼1863 | 14년6월 | 예릉-고양시 서삼릉 | 강화도령 |
26 | 高宗 | 熙 | 1852 ∼1919 | 43년7월 | 흥릉-남양주 금곡동 | 12살 등극, 덕수궁에서 68세로 죽다 |
27 | 純宗 | 척 | 1874 ∼1926 | 9년1월 | 유릉-남양주 금곡동 | 민비의 둘째아들 |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마지막 왕들인 고종, 순종을 제외한 태조에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1392∼1863)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것이다. 고종과 순종의 실록도 있지만 일제가 주도하여 만든거라서 여기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아무튼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이 망라되어 있고 그 편찬을 위해 사관이라는 관직을 두고 독립성과 비밀성 보장하였으며 따라서 진실성, 신빙성이 매우 높다. 다음 왕이 즉위한 후 실록청을 열어서 사초와 실록을 완성한 후에는 그것을 나누어 사고에 보관했는데 임진·병자란을 거치면서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20세기 초까지도 태백산·정족산·적성산·오대산의 사고에 남아서 전해져 내려왔다.
태백산·정족산 사고본은 1910년 일제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으로 옮겼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고 오대산 사고본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으며 남은 27책만이 나중에 서울대로 돌아왔다. 적성산 사고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북한이 가져갔으며,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태백산 사고본 848책은 현재 국가기록원 부산지원에 이관되어 있고 정족산본 1,181책, 오대산본 74책 산엽본 21책 등이 현재 남아 있다. 4군데 사고에는 지금 그곳에 실록은 없지만 4군데 사고지를 답사해 보았으므로 실록내용 중에 다시 더듬어 볼 부분들을 독후감 삼아 적어본다.
겨우 2년11개월 왕위에 있던 정종은 부인김씨의 간곡한 말에 흔들렸다. “상감 불안합니다. 동궁의 눈을 보면 허기진 짐승이 먹이를 노리는 듯 합니다. 하루빨리 임금의 자리를 동궁에게 물려주시고 마음 편히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1400년 11월 방원이 3대 태종에 등극했다. 이에 태종은 정종을 상왕에, 태조를 태상왕으로 격상해 모셨다. 하지만 태조는 방원에게 두 아들을 잃은 아픔에 태상왕 자리를 뿌리치고 옥쇄를 가진 채 함흥으로 돌아갔다. 태종은 용서를 빌기 위해 사람을 보내 문안을 드리곤 했는데 이때 생긴 말이 함흥차사(咸興差使)다. 태종이 미워 문안사가 오는 즉시 활을 쏘아 죽였다는 것이다.
고민에 쌓여 괴로워하는 태종을 위해 태조의 옛 친구 성석린이 자진해 나섰다. “신의 함흥으로 가 부왕의 마음을 돌려보겠나이다.”
성석린은 백마를 타고 이성계가 머문 집 근처에 머물며 밥 짓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를 본 이성계가 부하를 시켜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했고, 석린은 “여행 중인데 하룻밤 묵으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를 알아본 태조는 그를 불러오게 했고 반갑게 맞았다. 석린은 여러 가지 도를 들어가며 아들과의 화해를 청했다.
“그대를 믿은 내가 어리석구만. 도대체 그대는 누구를 위하고 있는가? 만약 방원을 두둔하는 것이라면 한마디도 하지 말고 썩 물러가게.”
“고정하시옵소서. 만약 신의 말이 지금의 주상을 위해서라면 신의 자손들이 대대로 장님이 될 것입니다.”
성석린의 이런 명세에도 태조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그를 죽였으며 이후에도 태조는 몇 년 동안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때 태종의 신하 중 누군가가 “상감마마 무학대사와 부왕은 옛날부터 막역한 사이랍니다. 이분에게 청을 하면 어떻겠습니까?”라 했고 태종은 좋은 묘수라고 생각해 무학을 불러서 사연을 이야기했다.
“부자 사이지만 정말 기막힌 운명이군요. 감히 능력 없는 땡 중인 내가 그만한 능력은 없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하지만 무학은 태종의 간곡한 부탁에 손을 들고 말았다. 함흥에 찾아온 무학을 태조는 반갑게 맞이했다.
“대사께서 이곳까지 웬일이오? 혹시 대사께서도 발칙한 놈을 위해 온 것이라면 그만 돌아가시오.”
태조의 말에 무학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웃었다.
“상감마마 오랜만에 보는 벗에게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소승은 옛날 생각으로 상감마마와 애기나 하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무학의 말에 마음을 놓은 태조는 자기와 한방을 쓰자고 했다. 몇 날을 함께 지냈지만 한 번도 태종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태조에게 확신을 얻은 무학은 어느 날 밤 진심을 말했다.
“제가 드리는 말씀에서 조금도 오해를 하지 마십시오. 상감께서 생각한 것처럼 태종은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태종 역시 상감마마의 아드님 아니십니까? 더구나 지금 보위를 맡기실 아드님은 태종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태종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일구신 대업을 누가 잇겠습니까? 아직까지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태종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또다시 실망한 자들이 칼을 들 것입니다.”
무학대사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태조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며칠 후 한양으로 환궁하겠다고 했다. 소식을 듣고 기쁨에 들뜬 태종은 성 밖에 나가 태조를 맞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하륜이 말했다.
“폐하 태상왕의 노여움이 풀린 것이 아닙니다. 태상왕을 맞을 천막기둥을 반드시 아름드리나무를 쓰십시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태종은 하륜의 간곡한 청에 천막기둥을 아름드리 큰 나무로 세웠다.
태조가 도착하여 천막 쪽에서 기다리는 태종을 보는 순간 그만 분노가 치밀었다. 순간 활을 꺼내 태종을 향해 쏘았다. 그러자 태종은 얼떨결에 천막기둥 뒤로 몸을 피했고 순간 화살은 기둥에 박혔다. 그러자 태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며 “재수가 좋은 놈이야 정말 하늘이 돕는구나.”이렇게 중얼거린 태조는 옥새를 태종에게 집어 던졌다. 눈물을 머금고 옥새를 받아든 태종은 태상왕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기분이 좋아진 태종이 부왕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잔을 올리려고 했다. 이때 곁에 있던 하륜이 급하게 태종을 제지하며 말했다.
“폐하 저기 보이는 술통으로 가셔서 잔에 술을 따라 중관을 시켜 올리셔야 합니다.” 태종은 하륜이 시키는 대로 했다. 술을 받아 마신 태조는 소매 속에서 철여의(鐵如意-鐵槌)를 꺼내 술상에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저 나쁜 놈을 하늘이 도와주는구나. 이젠 어쩔 수가 없구나.”
사실 꼭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재미와 고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역사는 인류의 것이고 조상의 것이다. 잘 아는 듯, 잘 모르는 역사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또 세세한 부분들까지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처럼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조선 중기의 역사에서 연산군에 대해서는 어머니 윤씨가 아버지 성종을 할퀴어 얼굴에 상처를 내는 등으로 포악했으므로 사가로 쫓겨나고 결국은 사약을 받아 죽었는데 나중에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어머니 원수를 갚는 과정에 무오·갑자사화 등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결국 박원종의 반정으로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理安置)되었다가 31살에 죽었다는 정도다. 그러나 이 과정이 너무 드라마틱하다고 할까, 안타깝다고나 할까? 이런 위정자들의 몰이해와 용서받지 못할 행동으로 조선은 외적의 침략과 업신여김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13년간 왕위에 있던 세조는 52세에 죽었는데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는 3남 1녀가 있었다. 둘째아들 해양대군이 1658년 9월 다음 왕위에 올랐을 때 형인 의경세자가 자다가 급사했으므로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고, 세자시절에 한명회의 큰딸과 가례를 올렸는데 그녀는 세자빈이 된지 1년7개월 만에 원손을 낳고는 5일 만에 죽었다. 이때 죽은 한씨는 해양대군 즉 예종의 조카인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의 친언니였다. 두 자매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라는 기묘한 관계였는데 아버지 한명회의 권세로 가능한 일이었다. 예종은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약해 어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왕위에 오른 지 13개월 만에 예종이 죽자 적자로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아직 4살에 불과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고 왕위 결정권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에게 있었다. 이때 신숙주 등이 왕후에게 다음 왕위를 정해 달라고 하자 정희왕후는 중신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경들에게 묻겠소. 다음 임금으로 누가 좋겠소?”
“대비마마 이것은 신들에게 물어볼 것이 아니라 직접 전교를 내리시면 됩니다.”
“그래요? 지금 원자는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병약하오. 내 생각은 자을산군으로 대통을 잇게 하겠소.”
13세이던 자을산군은 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데 성종으로 즉위하자 7년 동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나중에 친정이 시작되자 성종은 김종직 등 젊은 사림과 문신들을 등용해 훈구세력을 견제했는데 이때 간신 임사홍과 유자광은 유배를 갔다. 김종직은 밀양출신으로 영남 성리학의 거두로 선산부사로 있었으나 성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불렀다.
김종직은 우부승지에 오른 뒤부터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단종을 폐위하여 죽인 세조를 비판했고 세조에게 동조한 한명회와 신숙주를 멸시했다. 함양군수로 부임하여서는 동헌에 유자광의 시가 걸린 현판을 철거하여 불태웠는데 이로 인해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성종비 공혜왕후(한명회의 둘째 딸)가 아들 없이 죽자 후궁 숙의 윤씨가 왕비가 되었고 왕비가 된지 3개월 만에 연산군을 낳았다. 그러나 성종은 왕비보다 소용 정씨와 엄씨를 더 좋아했다. 이는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 때문이었는데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어머니인 제헌왕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제헌왕후는 성종의 총애를 되찾기 위해 두 후궁을 죽이기로 결심했으며 성종이 자주 출입하는 후궁의 처소 길목에 시신의 뼈를 묻는 등 민간비방을 했으나 소용이 없자 두 후궁이 자신과 원자를 죽이려 한다는 투서를 냈다. 성종은 후궁 10여명을 중전 뜰에 모아놓고 문초했고 범인을 찾지 못하던 중 며칠 뒤에 윤씨 처소에 들렀다가 투서의 종이와 똑같은 종이를 발견했고 비상과 푸닥거리를 적은 비방책까지 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제헌왕후 폐위문제가 거론되었지만 원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성종은 왕비에게 비상을 구해다 준 시녀를 처형하고 장모인 신씨에게 궁궐출입을 금했다. 이런 처사에 불만을 품은 제헌왕후 윤씨는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는 일까지 생겼다. 결국 인수대비는 성종에게 윤씨를 폐하라고 했고 성종은 윤씨를 사가로 내쫓았다. 다음 왕비로 인수대비는 소용 정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할머니 정희왕후가 19살 난 숙의 윤씨를 간택했다.
연산군이 7살이 되었을 때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도 있었으나 10년 먹을 재물을 가지고 궁을 나갔다는 등 주변의 음해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중종은 내시 안중경을 시켜 폐비 윤씨의 동정을 살펴보게 했다. 3년 동안 눈물로 지샌 윤씨와 친정어머니 신씨는 안중경을 반갑게 맞았다. 소식을 들은 인수대비는 안중경을 몰래 불렀고 안중경은 성종에게 거짓을 고했다. “폐비는 뉘우침 없이 원자가 장성하면 복수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성종은 마침내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피를 쏟으며 죽어간 윤씨는 어머니 신씨에게 “원자에게 피 묻은 소매와 저의 원통한 사연을 함께 고해 주세요.”라고 했다. 죽은 윤씨는 동대문 밖에 묻혔지만 성종은 묘비도 세우지 못하게 했고 7년 뒤에야 세자의 미래를 생각했던지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 폐비 윤씨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즉위초 4년 동안은 퇴폐풍조와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등 성군정치를 했다.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기도 하고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수업에 도움이 되게 했다. 하지만 연산군이 사림파들을 미워하게 되자 유자광 등 훈구세력들은 이를 악용해 사림파를 침몰시키는 음모를 꾸몄는데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었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폐한 일을 세조가 단종을 폐한 일에 빗대어 비판한 글로 이때 연산군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폐비된 것을 처음 알았고 유자광에게 폐비와 관련된 자들을 심문하게 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리라 했다는 김일손의 진술을 받고는 사림파 핵심인물인 김일,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에게 능지처참 형을 내렸다.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표연말, 홍한, 정여창, 정희량 등은 불고지죄로 귀양 보냈다. 사초를 보여준 이극돈을 비롯해 유순, 윤호손 등은 파면됐다. 유자광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권력을 장악하고는 훈구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를 무오사화라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연산군 10년 3월20일 간신 임사홍은 폐비 윤씨가 아버지 성종의 미움을 사 폐위된 것이 아니라 엄숙의와 정숙의의 투기심으로 인해 폐위되었고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고자질했다. 이에 연산군은 사색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후궁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는 그들이 생모의 원수인 것을 알고는 그들을 불러내 호통을 친후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소금에 절인 후 까치밥이 되게 산에 버리라고도 했다.
이 사건은 대궐을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소식을 들은 인수대비가 칠십 노구를 이끌고 연산군을 꾸짖었지만 연산군은 오히려 막말을 내뱉었다.
“늙은 것이 뭐라고?”
그러면서 머리로 아버지의 후비인 인수대비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쓰러진 인수대비가 숨을 몰아쉬다가 기절했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이후부터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 신씨가 자유롭게 대궐을 출입하면서 연산군을 만났는데 죽은 어머니 윤씨의 유언과 피 묻은 적삼을 보여 주자 연산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를 죽인 자들을 찾아내 복수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은 성종 때 승지를 지낸 이세좌였다. 그는 당시 왕명으로 약사발을 가지고 갔기 때문으로 귀양 가던 중 곤양 양포역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진했다. 이를 시발로 폐비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무조건 대역죄로 다스려 삼족을 멸했다. 살아있던 윤필상, 이극균, 권주, 성준 등은 참형을 당했고, 이미 죽은 점필제 김종직은 부관참시에 이어 세골표풍(시신을 끄집어내어 가루를 만들어 날리는)까지 자행했다. 이것이 ‘갑자사화’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1506년 연산군 12년 9월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옹립하는 ‘중종반정’* 을 일으켰다.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 신수겸, 장녹수 등은 처형됐고 연산은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갔다. 연산군은 유배지에서 역질로 31살 나이에 죽었고 두 아들 역시 사사되었다. 처음에 유배지에 묻혔으나 신수근의 딸로 연산군의 부인이었던 신씨가 죽은 뒤 함께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했으나 묘호는 받지 못했다.
*중종을 즉위시킨 1등 공신 박원종은 무과에 합격해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다가 연산군 때 퇴직했는데 누이인 월산대군 부인이 연산군에게 능욕당한 뒤 자진하자 복수의 기회를 엿보다 한동네에 살던 이조참판 성희안이 연산군의 폭정에 불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서로 친하게 지냈다. 한 날 연산군이 성희안에게 시를 지어라고 했는데 ‘임금은 본디 청류를 즐기지 않는다.’라고 지었다. 이에 조정에서 쫓겨났고 그 뒤에 연산군을 몰아낼 궁리를 했다.
강희안은 같은 마을에 살던 군자감 부정인 신윤무와 친했다. 신윤무는 조정의 모든 것을 성희안에게 전해주었고 박원종과도 어울리면서 이들은 이조판서 유순정에게 마음을 터놓자 유순정도 모의에 동의했다. 1506년 군사들을 훈련원으로 모이게 한 후 우의정 정수동과 유자광을 불러 감금하고는 군사들과 경복궁으로 달려갔고 신윤무는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의 집으로 가 모조리 척살했다. 반정군이 경복궁으로 갔을 때 내시와 궁녀들은 도망쳤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연산군은 “옥새를 내 놓아라”고 하자
“누가 역모를 꾸몄느냐?”하여
“성희안, 박원종 대감이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옹립하였다.”
옥새를 받아든 성희안과 박원종은 날이 밝자 자순대비를 찾아가
“신 등은 임금의 폭정에 반정을 일으켰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있고 나라의 장래는 매우 어둡습니다. 대비마마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고 했다. 그러자,
“진성보다 총명한 세자가 있으니 그를 왕으로 세우시오.”
그러나 반정에 가담한 유순정 등이 진성대군을 여러 번 간청해 대비의 승낙을 받았다. 이리하여 19세 진성대군이 중종에 즉위하니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아들로 연산군과는 배다른 형제다.
역사를 볼 때 편견을 가지고 봐서는 안 되고 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을 뿐 아니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안타까운 것이 임진왜란인 것 같다. 왜 그토록 무지했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과 징후를 알고도 왜 대비를 못했는지?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하는 안타까움까지. 비 오는 ‘판문점’을 지날 때 집을 헐어 만든 판때기다리를 놓아 개울을 건넜다고 하여 지명이 생겼다는 것까지... 오늘날 남북관계와 그 지명의 아이러니를 생각하는 비애까지. 그래서 나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무려 41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선조라는 인물이 가장 밉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고종도 유능한 왕은 아니지만...
선조의 폐정은 무엇일까. 선조 23년(1590년)왜국이 침략할 것인지 않을 것인지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게 되는데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2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로 올라왔으므로 선조는 비 오는 밤에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했다.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면서. 분조를 만들어 광해군이 의병을 독려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그것을 인정해 주지도 않았다. 물론 이전에 심의겸과 김효원의 파벌싸움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고,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기축사옥으로 번져 선조가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임금이 조정을 장악하지 못하고 분란을 조정(調整)하지도 조종하지도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조는 임란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도 자신처럼 후궁의 아들이었지만 인정해 주지 않았고, 후비인 의안왕후 박씨가 죽자 나이 51살에 영흥부원군 김제남의 19살 난 딸을 계비로 맞고 이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늙어 막에 그 아들에 빠져 후계자로 삼으려다 영창대군은 물론 김제남의 집안까지 한방에 몰아넣고 말았던 선조. 그는 41년(1608년) 2월 경운궁에서 57세로 죽었다. 그러자 소북파 유영경이 3살 난 영창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인목왕후에게 수렴청정을 건의했다. 하지만 인목왕후는 세자이던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교지를 내렸는데 현실성이 없다고 본 때문이었다.
광해군이 용상에 오른 5년 뒤, 서인의 거두 박순의 서자 박응서가 문경새재에서 발생한 재물탈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데 포도대장 한희길은 체포된 이들이 서출이기는 하지만 명문자제들이었으므로 어떤 작당을 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했다. 박응서를 문초하자 박응서는 서자를 천대하는 나라를 뒤집기 위해 군자금을 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가 이이첨의 귀에 들어갔고 이이첨은 포도대장과 밤새도록 모의한 뒤 다음날 포도대장이 박응서를 불러 살아날 방법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박응서도 쾌히 승낙했고 국문장에서
“역적모의를 하였다. 지금 임금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모셔다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영창대군의 모후 인목대비도 물론 아는 바이다. 인목대비 친정 아버지 영흥부원근 김제남이 배후의 인물이다.”고 말했다.
광해군은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판의금 박승종 등을 거느리고 친국을 벌인 후 영창대군을 폐서인하고, 김제남을 사사해 일족을 멸했다. 또 인목대비의 어머니 부부인 노씨는 제주도로 귀양 보내어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이이첨 일파는 끝까지 영창대군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에 광해군은 “서인이 된 의는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다. 죽일 수는 없으니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고 했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 가 위리안치(울타리가 튼튼한 집에 갇혔고) 군사들이 지켰다. 어린 영창은 어머니가 그리워 울었다. 강화부사 정항은 영창대군의 방에 오래도록 불을 지피도록 했는데 그러자 영창은 뜨겁다고 소리 지르다가 죽었다.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에 인목대비는 기절하고 영창대군의 누나 정명공주는 울기만 했다고 전한다.
이순신을 백의종군토록 한 일 등 선조의 폐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고,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형제인 영창대군과 능창군, 형 임해군을 죽이고 청나라와는 실리 외교를 펼친다고 하였지만 칼날 위를 걸었던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제주도로 귀양 가서는 거기서 18년을 더 살았다. 광해군에 이어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이 등극하나 그가 인조다. 그도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떠밀려서 왕이 되다보니 제대로 할 수 일이 없었는지 아니면 능력부족이었는지? 1624년 인조반정 공신책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에 이어, 1627년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큰아들인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의문을 죽음을 맞았고 둘째아들 효종이 북벌계획을 세우기도 추진하기도 했으나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는 역사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 왕들은 태종이나 세종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혹은 물려받았더라도 제대로 왕업을 수행한 왕은 몇 안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역사의 불행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래살고 가장 오래 왕위에 있은 영조는 어땠을까?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본처인 인경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시녀 출신인 희빈 장씨 사이에 경종을 낳았다. 경종은 병약해 재위 4년 만에 죽었으며, 또 숙빈 최씨에게 난 아들이 경종 다음을 있는 영조다. 영조는 세자시절부터 당파싸움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즉위 초부터 당파를 초월해 고르게 등용하는 당평책을 폈는데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에,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에 임명하는 등 서로를 견제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세자시절인 11살 때 13살의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과 가례를 올렸으나 31살 즉위 때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나마 정빈 이씨가 정의군 행을 낳았지만 정의군은 10살 때 갑자기 죽었으므로 자식이 없던 중 후궁 귀인 이씨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비극의 사도세자다. 영조 12년 왕자 선, 즉 사도가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 영조의 나이가 42세였다.
영조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는데 이는 그의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아버지 숙종이 인경왕후 민씨를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폐위시켜 사가로 내보내자 희빈 장씨, 즉 장희빈이 왕후가 되었고 희빈은 나중에라도 인경황후가 복위 될 것을 우려해 인경왕후가 죽기를 염원한 굿을 궁중에서 했고 이것을 숙종이 밤중에 보게 되었다. 그것은 희빈이 민씨의 초상을 걸어놓고 무당이 춤추며 활을 쏘는데 초상의 눈, 목, 가슴에 화살이 꽂혀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장님이 경문을 외고 있었는데 숙종은 교만방자한 장씨의 행동을 직접 보게 됨으로써 인경왕후 복위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런 울적한 마음에 불이 켜진 궁녀의 방도 엿보게 되는데 무수리 최씨가 생일상을 차려놓고 폐비 인경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중죄에 처해질 일이었지만 임금은 무수리를 책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후회스럽고 인현왕후가 보고 싶어졌다. 숙종은 인자한 말투로 “중전에게 올린 음식과 술이 먹고 싶구나.”고 했다.
무수리 최씨는 그날 밤 성은을 입었고 숙종 20년9월 연잉군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영조다. 소식을 안 장희빈이 발악하면서 인두로 무수리를 고문했지만 숙종은 오히려 그녀를 종4품 숙원을 거쳐서 내명부 정1품인 숙빈으로 올렸다. 그리고 인경왕후도 복위시켰는데 왕후가 복위되자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내려갔고 복위된 인경왕후가 숙빈을 감싸주어서 숙빈은 연잉군을 보호할 수 있었다.
장희빈의 아들이자 숙종의 큰아들 경종은 병약하여 후사가 없었으므로 연잉군은 왕세제에 책봉되었고 경종이 재위 4년(1724년)만에 죽자 영조는 31살에 즉위하여 83살(1776년)까지 살았고 52년간 왕위에 있었다.
12년 귀인 이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사도세자다.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때 영조 나이 42세였다. 그런데 사도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정빈 이씨에게 경의군 행이 있어 먼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경의군은 영조 4년에 죽었으며 효장이란 시호를 받았다. 나중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 난 아들을 이 효장세자에게 양자로 보내 왕통을 잇게 했는데 이이가 정조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가 총애하던 문숙이로부터 시작된다. 문숙이는 영조를 꼬드겨 자신의 친정동생인 문성국을 육상궁소감 자리로 불러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장안의 호걸로 자처하던 건달이었는데 육상궁에서 밤낮 술과 도박으로 지냈다. 그러면서 그는 세자를 보호하던 소론을 내치기 위한 밀정역할도 하고 있었다. 소론파는 희망을 사도세자에 걸고 반대파인 노론을 내치기 위해 유언비어를 조작하고 미신까지 이용했는데 당시 황해도에 생불을 자처하는 여자가 세자를 지지하고 선동하였다. 첩보를 들은 조정에서는 이경옥을 암행어사로 황해도로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이경옥은 황해도 봉산 어느 시골에서 무녀가 기도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녀는 기도하러온 사람들에게 부자 되게, 아들을 낳게, 벼슬을 하게 기도한 뒤에 “벼슬을 하려면 늙은 세력을 없애고 젊은 세력이 일어서야 한다. 늙은 세력은 노망한 임금과 노론의 간신들이다. 젊은 세력은 왕세자와 소론의 중신들이다. 늙은 세력을 없애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이경옥은 곧바로 황해감사와 각 읍 수령에게 명하여 무당들을 검거해 엄하게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고, 저주받은 영조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성국은 영의정 김상로를 찾아가 만난 다음날 누이에게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자질했다. 사실 동궁의 반역심을 조장한 것은 동궁측근인 소론들이었다. 이쯤 되자 노론파는 그들을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런 공격에 영부사 이천보와 우의정 민백상이 차례로 자결했다. 사도세자는 자신을 감싸주던 가신들이 자결해 버리자 마침내 실성한 사람같이 되었다. 그는 부왕이 자신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사도는 기생이고 여승이고 가리지 않고 농락했는데 이런 행동이 영조로부터 미친 자식으로 취급되고 극도로 아버지를 무서워해 정신병 증세까지 보인 것이다.
영조 32년 사도세자가 모친상을 당한 후에는 정신적으로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이 가운데 영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문씨와 친정 동생 문성국이 사사건건 세자를 고자질했다. 이에 세자는 영조에게 인간취급을 못 받고 울화병이 심해져 내관들을 매질하거나 칼로 비복을 찔러 죽이는 일까지 여러 차례 저질렀다.
영조의 탕평책은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영조가 즉위할 무렵 노론파는 연잉군인 영조를, 소론파는 밀성군을 지지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당파싸움에 신물을 느낀 영조가 즉위함으로써 노론파의 원한은 어느 정도 풀어졌지만 소론파의 불평은 더욱 격화되었다. 영조 4년 반란이 일어나 밀풍군을 충동질하고 이인좌를 대원수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란음모를 사전에 알게 된 최규서가 이를 왕에게 알렸다.
“지금 영조는 어미가 없는 가짜 임금이다. 왕대비 명령으로 남원군을 모시려는 의병이 일어났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실제로 청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인좌가 반란군의 대원수를 지칭하고 청주병영을 점령한 것이었다. 이에 조정은 반란군에 맞서 양성, 진위, 안성, 용인의 수령을 무관으로 대체하고 병조판사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로 파견해 진압에 나서 이인좌와 청주목사를 자칭하던 권서봉을 사로잡고 반란을 진압했다. 60여명은 참형을 당했고 밀풍군은 1년 후에 사약을 받았다. 이때 승병과 함께 이인좌를 사로잡은 농민 신길만은 그 공으로 일약 동지중부부사가 되었다.
영조는 이런 반란의 원인이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서 기인되었음을 알고 당평책으로 화해를 시도했다. 양 파의 거두를 좌우에 불러서 친히 두 손으로 그들의 손을 잡고
“이제부터 경들과 경들의 동지들은 분쟁을 벗어던지고 나와 손을 잡고 국사에 함께 힘씁시다. 나도 앞으로 어느 당파를 두둔하지 않고 능력과 충성만을 믿고 등용하겠소.”
그러나 그들은 시원한 대답대신 상소하겠다고만 했다. 그러자 영조는 지금 당장 와해를 하지 않으면 끝까지 손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왕의 끈질긴 설득에도 그들은 한 달 동안만 함께 조정에서 일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했다. 물론 이후에도 당파싸움은 계속되었다. 오직 우의정 송인명과 어사 박문수 만이 영조의 당평책을 지지했을 뿐이었다.
끝으로 『고종실록』을 살펴보자. 대한제국의 첫 황제이기도 한 고종은 12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45년간 재위하다가 1919년 68세 때 죽었다. 묘는 남양주 금곡리 흥릉이다. 『고종실록』은 본문 48권과 목록 4권을 합쳐 52권으로 실록의 본명은 『고종순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의훈흥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실록』?이고, 약칭은 『고종태황제실록』이다.
『고종실록』은『순종실록』과 함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주관하여 편찬되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실록은 『순종실록』과 함께 1927년 4월1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3월 31일 완료되었다. 고종 3년 대원군에 의해 천주교 탄압으로 8,000여 명이 학살되고, 1871년 신미양요로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지고, 1876년 민씨 정권의 개방정책으로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고,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이 문제를 둘러싸고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1895년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고, 8월 미우라 공사에 의한 민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1897년 10월 대한제국 수립으로 광무라는 연호 선포, 1904년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을 파견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결국 고종은 7월 20일 황제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7.14 일요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