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95]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의 ‘자리’
오늘, 민족의 최대 명절, 추석秋夕날이다. 대문을 여니, 마을회관 앞마당에 전국 각지에서 추석을 쇠러, 이 세상 최고최대의 피붙이인 어머니(아버지는 거의 없다)를 뵈러 온 총생들의 승용차가 즐비하다<사진>. 해마다 거의 딱 한번쯤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구석기시대처럼 조용하던 동네가 모처럼 살아 숨을 쉬는 듯하다. 60-70년대 한때는 60여가구 400여명이 북적거리던 동네였으나, 지금은 30여가구 100여명으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애기 울음소리는커녕 고샅(골목)에 인적조차 드물고 길냥만 득시글하고 길냥들이 똥만 여기저기 싸제켜, 어느 때는 섬뜩할 정도로 침묵의 동네가 바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것을. 그래도 1년에 한번쯤 객지 대처에서 어떻게든 알탕갈탕 살고 있는 자식들이 제 식구(처와 새끼)들과 어머니를 보고, 성묘를 하러 오는, 이런 미풍양속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제 오후부터 내일까지는 썰물 빠지듯, 늙은 어머니가 눈물 짓든 말든, 차례는 대충대충 지내고, 챙길 것(고추가루, 쌀, 푸성귀 등)은 다 챙겨, 금세 떠날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 놈의 피붙이’가 뭐라고, 어찌 보면 눈물과 슬픔의 연속선상이지 않던가. 주차장이 된 마을회관 앞마당 사진을 찍다말고, 갑자기 5km쯤 떨어진 인근 마을(오수면 신기리) 도로변에 있는 ‘체리암’과 바위 옆에 세워진 ‘풍욕정’이 생각나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데 웬걸, 지난해 가을에 보았던 암각서巖刻書 체리암 세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올해 내내 폭우로, 농로 옆 도랑을 토사가 메워 글자가 묻힌 것이다. 겨우 실장갑으로 토사와 잡풀을 긁어내니, 절반쯤 보이는 붉은 글씨의 체리암滯離巖(글자당 크기는 가로 30cm, 세로 40cm로 해서체. 체는 ‘체류’의 ‘머무를 체’, 리는 ‘떠날 리’자이다).
무슨 바위인지 궁금하시리라. 대하예술소설 <혼불> 9권에 잠깐 나오는 무대이다. 헤어짐이 슬퍼서 발걸음을 자꾸 머뭇머뭇하(아쉬운 이별을 늦춘다)는 바위라는 뜻이다. 혹자는 남는(머무는) 사람은 머물고, 갈(떠날) 사람은 떠나라는 뜻으로, 조선시대부터 마지막 석별惜別을 나누는 자리였다고 한다. 풍욕정風浴亭은 바람으로 목욕을 하는 정자. 그야말로 풍류風流의 정자이다. 그 정자에서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을 술이라도 한잔 걸치며 중얼거린다면, 인간세상에 따로 신선을 부러할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체리암, 무슨 과일 이름같지만, 한자의 뜻이 너무 예쁘다.
그런데, 그 체리암이 1991년경 제방과 도로공사를 하면서 주변을 흙으로 메우고 포장하면서 묻힌 것이다. 이를 안타까이 생각한 마을주민과 오수면의 협조로 지난해 4월 암각서 부분의 흙을 걷어내 30여년만에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은 반드시 칭찬할 일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올해 폭우로 다시 묻혔으니,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관련어를 검색해 보니, 재밌는 이름이 또 있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바위와 정자 아래 또랑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소혼消魂’이었다는데 ‘헤어지는 게 슬퍼 넋이 나가다’거나 ‘이별하는 슬픔이 너무 커 의기意氣를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슬픔이 얼마나 극진하면 넋이 나거거나 그 넋이 이곳을 떠다닌다고 했을까. 체리암은 100-200년의 일이 아니고 영조때 만든 ‘남원부지도’에도 그 이름이 정확히 쓰여 있다. 풍류정이야 1921년 전라선 철도공사때 체리암을 폭파하지 못하게 마을에서 바위 위에 정자를 급히 지었다고 하니, 고작 100년의 역사를 가질 뿐이지만. 오죽했으면, 작가 최명희이 체리암을 소설 무대로 썼을 것인가. 그 체리암이 역사 속에서 추억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잊혀져 가서야 될 말인가.
남원고을 관리들의 전별연餞別宴 장소로 이용했다는 체리암을 생각하면, 이몽룡과 헤어짐이 못내 서러워 춘향이가 버섯발로 달려왔다는 ‘오리정五里亭’이 생각난다.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술 한잔을 따라주며 ‘나를 잊지 말라’던 춘향의 단장斷腸의 통곡소리와 슬픔이 지금까지 판소리 <춘향가>에서 여실히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어찌 사대부와 관리들 뿐이었겠는가. 피끓는 청춘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두고 찢어지는 슬픔을 어찌 짐작이나 할까? 그래서 근처 다리이름을 소혼이라 했을 것이다.
한편, 인근에 '대정저수지'가 있는데, 이곳은 멸종위기인 가시연꽃(전세계 일종 일속의 식물) 군락지로 유명하지만, <혼불>에서는 ‘반보기 풍습’의 무대로 등장하는 곳이다. ‘반보기’는 무엇인가? 예전에 ‘칠거지악’이라는 몹쓸 풍속이 우리 사회를 유령처럼 지배할 때의 이야기이다. 여자는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고,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친정에 못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막걸리인 것을. 당시엔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이동점빵(편의점)이 있었다. 친정어머니인들 얼마나 딸이 보고 싶고, 궁금했을 것인가? 방물장수들을 통해 음력 8월 16일(추석 다음날) 그곳(대말방죽: 대말은 큰마을, 방죽은 저수지의 우리말)으로 딸이 나오게 해달라며 부탁했다. 아마도 그곳이 양쪽 집 중간지점쯤 되었던 모양이다. 친정어머니가 맛있는 음식 등을 바리바리 싸갖고 가 ‘반나절’ 정도 딸을 만나 1년에 단 한번 서러운 회포를 서럽게 푸는 것이다. 20세기 초(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이 풍습이 이어져 왔다고 촌로들의 증언(여인들이 북적거리니 장사꾼까지 있었다한다)을 혼불의 작가가 작품 속에 녹인 것이다. 참, 재밌다. 체리암, 풍욕정, 오리정, 대정저수지, 반보기풍습. 이런 단어를 떠올리는 오늘은 명절, 추석이다. 어차피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