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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소 논서첩 다른 판본은 서법이 호매하고 자태가 발견되었다
怀素《论书帖》另一版本被发现 书法豪迈多姿
2021년 09월 10일 18:32 시나컬렉션 소스:이페어케이+
중국 역사상 당대의 걸출한 서예가였다.큰 풀과 작은 풀에 능해 초서로 이름을 날렸고 장욱과 함께 이름을 날리며 '초성(草聖)'으로 추앙받았다.회소의 대물림 작품으로는 《 》가 있다.자서첩'과 《소초천》자문' 지본·'고죽순첩' '성모첩'논서첩 제첩.그중 《논서첩》 묵적본랴오닝(遼寧)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후대에 회소의 서예를 배울 수 있는 귀중한 본보기의 하나이다.
《논서첩》 묵적본의 풍격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다.담평화 "회소 자서첩-소초천자문 종이본 진품도 없다"'고갈라' 필법적 특징도기괴하기 그지없는 몸놀림은 없다.과장이 극에 달한 로맨틱 광기풀 같은 자태와 예술적인 풍격.《고순첩》과는 기품이 판이하다같다.
논서첩 묵적본은 고대 모본이지만 영향은 없다그것은 서예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이 《논서첩》은 전후 800여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다두서가 있다.선화서보>와 같이 송나라가 있었다.선화내부, 원나라 장옌▲명항원변,청고사기·안기·청내부 소장.항씨 소장 시 격차물에는 아직 송휘종 진흙과 금으로 된 책갈피가 있는데, 지금은 산실되었다.그만큼 천 년 가까이 모사본이 기특하다.
최근 저명한 학자 황금상 씨가 또 회소 논서첩을 발견하였다《 》의 또 다른 판본(이하 "제2판")은 청대의 옛 탁본으로, 그 내용을 담고 있다.본문과 이전 판본은 기본적으로 같다치고는 풍격이 판이하여, 업계에 있다.경계가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이 묵적비는 탁본이 완성되었다발제 전반에 걸쳐 회소를 상세히 소개했다《논서첩》의 전대수량과 체장 경위…저명한 금석학자 육심원(陸心源·청말 4대장서가의 하나)은 식문에서 "회소논서첩은 삼희당(三希堂) 本本이 완전무결(不完·글자가 부족하지 않다는 뜻)하고, 후자는 조문민(趙文敏·조맹부) 발(發)이며, 둘째는 이 책에서 '비'가 빠진 '두 가지'이며, 전명은 항묵림(港墨林·항)이다.탁,첩에는 필체가 호탕하고 소탈하며 소탈한 예술적 개성이 눈길을 끈다(아래 사진).
《논서첩》 법첩(묵본), 당석회소서, 청대비첩 탁본은 보기 드물게 더욱 귀중하다.경첩장입니다. 총길이 113.8센티미터,높이 31센티 10줄, 85자(두 글자 부족)서예는 호매하고 소탈하며날렵하고 다채로워 약간의 행초가 있다.운치. 글에는 '당석회소'가 있다.'책'과 같이 뒤에 항목이 있다.원변·육수번 발제.또 저명한 수집가 고사기, 양청표, 대시중광, 왕홍서 등의 감정을 거쳤다. 왕홍서(王鴻西) 등의 감정을 거쳤다.'선화(宣和)' '정화(政和)' '소흥(昭興)' '어서(御書)' '평생진상(御生眞賞·쌀불 인감)' '항원변인(港元邊印)' '항자경가소장(港子京家藏)' '묵림비완(墨林秘完)' '항숙자(杭淑子)' '능중광인( "重光印)' '강상외사( 上上外史)' '주수창행농씨소장(周壽昌行氏所)' '고사(高士)' '고사(高士)' '선기(高士)' '감장인. 지금은 학자 황금상이 소장하고 있다.
회소 논서첩은 비록 제1판본이 있더라도 고대 명첩이다.모사본)은 2판(탁본)과 달리 중국의 훌륭한 전통문화다.여러분, 연구하러 갈 만합니다.따진다. '제2판'을 통해발견도 컸다.'회소 한도 환원'론서첩'의 본래 모습.
글에서 송대 '소흥'·'정화'·'선화'를 제했다쌀불 등 여러 점의 인감 외에도 명나라 소장 대가였던 항원변 등의 발문이 있다.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회소의 비석시초는 송대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애석하게도 그 비석에 원석을 새기지는 못했다.회소의 초기 작품과만년의 작품은 확연히 구별된다.개성 해방의 낭만주의가 다시 진인의 풍모로 돌아온 것도 회소의 고명한 점이었다.
항원변제 석문: 项元汴题跋释文
당나라의 석회소, 자는 장진, 속성은 전, 장사꾼, 이향은 상경이다.조, (현)장삼장지문인이야.율법을 처음 장려하고, 만년에 한묵에 정성을 들여 본을 따르지 않다중도에서 그만두다. 대머리 붓이 총칼이 되다, 하룻밤을 묵다.여름구름 바람 부는 대로 붓의 뜻을 문득 깨닫다'득초서(得草書삼매(三梅)."스이것을 보면 쓰임새를 알 수 있다.뜻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신에 응결된 것이다.당시의 명사는 이백과 대이다숙륜, 떠우치, 전기의 무리들은 모두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세력을 가리켜 "만약 뱀이 독사를 가게 되면 소나기 광풍"이라고 한다.사람들은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 다른 평론자들은 '장장사는 흔들리고, 회초리는 광신하니, 광기로 계속 흔들리면 누가 안 되겠는가?'라고 말한다.그의 노년에 더욱 진보하면, 다시 그와 장지가 싸우고,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저왕이면 저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저승평소 술을 보고 흥이 나려면 글자가 날라야 하는데, 원전의 묘미는 마치 신이 있는 것 같으니 칭찬할 만한 사람이다.
이 논서는 한첩에 판에 박힌 듯 기괴하다.그 협력처는 조계이왕과 같이 일필무원이며 그 팔꿈치에 신이 있는 줄도 모르고 모두 광칭하였다.아마도 회심자가 아닐 것이다.비록 옛날 내가 산 풀은 같지는 않지만그 필법은 이와 같다다 같이 비만한 것이 있다.진짜 풀이 제각기 자태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집착하다.책을 논하면, 놓치지 않는 것이 없다.볜야 어찌 이 기이한 광경을 볼 수 있으랴, 천백 년 아래 내가 '군자는 삼락이 있으니 이 글을 어찌 후세에 보물로 남으랴'라고 하였다.묵림항원변은 두 나무에서 경제하고 있다.
항원변(港元邊, 1525~1590년), 명대 유명수집가, 감상가.자는 자경, 호는 묵림, 별호는 묵림산인, 묵림거사.향엄 거사, 퇴밀암주사람, 퇴밀재 주인, 혜천산초·묵림연로▲원앙호장,칠원오이등, 절강성 자흥인.소즉영민, 박아호고절의사진(絶意士進). 당시 풍아한 선비(風雅士)가 가흥(嘉興)에 오면 반드시 항원변(港元邊)을 방문하였고, 명화가 문팽(文彭)·문가(文嘉) 등이 항원변과 교제를 나누었다.항원변은 감상에 정통하여 진위를 판별하고 극히 사소한 것도 구별하였는데, 당시에는 비교가 안 될 사람이 없었다.공회화를 겸하여 서예를 전유하다.산수학 원대 황공망·예찬, 소박한 필치로 신합처 걸핏하면 승경에 이르렀고, 당지영·원조맹부(元趙孟 。)를 드나들었다.《천상각첩》, 저서로는 《묵림산인 시집》 등이 있다.
육수번제 발석문: 陆树藩题跋释文
회소 《논서첩》, 송휘종내부물, 《서보》합한 87종의 하나.《강촌소하》 젓가락어록: 은첩세유두권, 한 권"삼희당"에서 원선흠잡을 데 없이 조문민(조문민)이 뒤에 있다.조맹부)발이 책에는 '두 글자'가 빠져 있습니다.앞사람은 항묵림(항원변)이다소장 강희중 귀고강촌(고스키)은 또 양초림(양청표), 이강상(리시노리), 왕엄재(왕홍서)의 감식자를 거쳤다.광서 15년 계하귀안 육심원식(男) 수번서.
이 발문은 정보량이 크며, 거기 언급된 고사기와 들보.청표·대좌중광·왕홍서·육심원은 모두 청대에 혁혁한 감정가이자 수확이다장가. 육심원재식문.'화이소'라고 명시했다.《논서첩》은 세상에 남아 있다.두 가지 버전"이라고 적었다.발문을 쓴 사람이 바로 육심원의 장자다육수번. (발문공)우아함)
황금상 학자가 발견한 두 번째 판본(구 탁본)에서확실히 '두 글자', '궤'자와 '어제'자가 빠져 육심원의 식문과 상통한다부적. (아래 사진)
이 글을 감증한 많은 청대의 유명 학자.
고사기(高士奇, 1645~1704년), 청나라 때의 관리사학자. 자는 담인, 호병려, 일명 강촌이다.저장위야오장수향가오가촌사람(지금 자계광언진고가촌), 귀화 전당(지금 저장성 항저우).고귀한 사기는 학식이 깊고 능력이 있다.시문, 서예, 정시증감상에 능하고 소장하고 있는 서화.그는 일생을 부지런히 저술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것이 7부이고, 또 5부는 《사고목(四庫目)》에 편입되었다.
양청표(梁淸標, 1620~1691년), 명말청초저명한 장서가, 문학가가 이신전에 이름을 올리다.자는 옥으로 서 있고, 일자는 창암으로 호가 있다.당촌, 제1호 바나나 숲.직예진정(지금의 허베이성 정)정현)인, 명숭정16년 진사, 청순치원년에 청나라를 내려와 한림원을 보한다.선비, 편수.치원년에 청나라로 좌천되어 홍문원 편수(宏文院 修修), 국사원시강학(國史院時講學), 첨사부첨사( 礼事府 詹事),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郞), 이부좌시랑(李部左侍郞), 병부상서(兵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 형부상서(刑部尙書), 호부상서(戶部尙書), 보화전대학사(保和殿大學士) 등을 역임하였다.『초림시집』 『당촌사』 등이 있다.
대좌중광( 重重光, 1623~1692년), 청대의 저명서화가. 자는 재신, 호는 군의, 호는 섬광, 일로, 강상외사, 울강소.예다오인용동형(龍東形, 지금의 강소성 구용)백토진모장촌) 사람. 순치 9년 (165년)2년) 진사, 관어사, 위사람이 강직하여 용감하게 직언하다공서는 그림을 잘 그려서 강천영, 왕스주, 하데리와 함께 4대가로 불린다.정고의 문장으로 《서벌》 《화전》이 대대로 전해진다.
왕홍서(1645~1723년), 청대의 관리학자, 서예가.초명은 도심(道心)이었으나 중진사(中進士)로 개명했다.자는 계우이고 호는 엄재이다별호는 횡운산 사람, 화정장.언진사람. 강희 12년 진사편집을 수여하고 공부에 출석하여 상서하였다.일찍이 명사관에 들어가 《명》을 지냈다역사'의 총수, 여장옥책 등 공주는 《명사(明史)》를 편찬하고 《패문운부(敗文運府)》를 편찬하였다.후거가(後居家)인 만사(萬士)와 공동으로 《명사고(明史古)》 3110권을 편찬하고 강희제(康熙帝)에게 헌납하여 간행할 수 있었다.일생 동안 서화를 감식하는 데 정통하다.학문은 쌀불과 동기창(東其昌)으로 고풍스러움이 강했다.동기창은 《횡운산인집(橫雲山人集)》 등을 제자로 다시 전한다.
육심원(陸心源, 1834~1894년)은 청나라 때 유명하다.김석학자. 자는 강보, 강부, 호는 존재, 만호는 잠원노인.귀안(歸安, 지금의 저장후저우) 사람관리는 복건염운사.소장품이 풍부하고, 정금석지학.광서 12년(1886)금석학록 보성서 작성; 18나이(1892)가 풍작이다이관은 눈으로 직접 기록하여 책을 만든다.〈 楼宋樓藏印〉 〈천서정고전도석〉 〈송원명청서화가연표〉 등이 별집되어 있다.
육수번(陸樹번, 1868~1926), 자는 순백(純伯), 호는 의헌(毅軒)이다.부친 육심원(陸心源)으로부터 서화(書畵)·판본목록(版本目錄)을 배웠고, 향시(鄕試)에 응모해 은과(恩科)를 지냈다.1892년 상경하여 벼슬을 받았으며, 흠시독계(흠가독계)를 받고 화령(花嶺)을 달고 내각에서 책아문찬문(書文门文) 등을 지냈다.구제선회를 조직하여 '호주선인(湖州善人)' '육씨선인(陸氏善人)'이라는 아호를 가지고 있었다.1902년 장쑤보용도로 배포돼 장쑤 주재 상의원, 장쑤상무국(江蘇商務局) 총판 등을 지냈다.
회소 논서첩 비각첩(碑刻帖)은 산도 높지 않고 땅도 효험이 없으며, 샘도 깊지 않고 물도 맑지 않으며, 책이 정교하지 못하여 영명이 없으나 후에 충분히 심계할 수 있다.요즘 벌써 네 살이다.근래에 경감되었는데, 지금도 그의 이혼을 위해 예년에 다 이겼다.흔들리는 모양이 기괴하여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어제 <이사> 책을 드렸는데 산중사유야를 들었습니다.
비고: 이 판본은 첫 판본과 다른 내용을 쓴 두 곳이 있다.첫째는 '이일'이 첫 판본인 '전일'과 다른 것이고, 둘째는 '문지(聞知)'가 첫 판본인 '문지(問知)'와 다른 것이다.
비첩본(2본)은 두 판본의 글자 차이를 비교해 볼 때 묵적본(1판)보다 어조 운용에 있어 더욱 정밀한 회소의 깊은 학문적 내공을 보여준다.
우선 품사의 앞뒤 관계를 알아야 한다.'전일(轉日)'은 낙서(落書)를 쓰고 종이를 그으면 황당하다는 뜻으로, '전승왕년(全勝王年)'이라는 다음 구절과 모순된다.'이일'은 '이일'은 떠나고 벗어나고, '이일'은 '과야(過也)' '종야(從也)' '종야(從也)' '방종(放從)'를 가리킨다.'이일'은 지나치게 방종한 필치(즉, 규범에 맞지 않는 글씨를 거부함)에서 벗어나 나중에 자신이 '예년보다 잘 썼다'고 느끼는 것을 말하며, 대의는 글쓰기에 있어 어떤 잘못을 고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더 큰 진보를 이룬 것은 학습에 있어서의 회소의 엄밀한 개성과 잘 맞아떨어지고…. 둘째, 글의 마지막 구절은 '문지(聞知)'라는 단어로 문장을 다듬는 데 있어서 더욱 교묘하고, 당나라 사람들의 문채가 해박한 시대적 특징에 부합하며, '문지(聞知)'는 듣고 알았다.(이미 듣고 알았다는 뜻), 첫 번째 판의 '문지(問知)'는 '남에게 물어볼 줄 모른다'에서 '이미 알고 있다'로 구분된다.'사(事)'가당착이다.
업계에서는 논서첩이 회소 초기 작품 중 하나이며, 이 비첩(2판)이 회소 논서첩 본문의 원고본인 회소 논서첩의 진품본일 가능성이 높아 회소초서의 발전 궤적을 탐구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지적한다.오랜 기간 고적비첩 연구를 해온 티베트인들은 이 고대의 게시물을 처음 봤을 때 예술적 가치와 소장 가치가 높아 유일본이 더욱 소중하다고 말한다.
논서첩의 내력에 대해서는 발문에 다음과 같이 명기되어 있다.
논서첩(論書帖)은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 회소(會蘇)의 책으로, 두 가지 판본이 존재하며, 비슷한 서풍(書風)을 담고 있다.
하나는 논서첩(論書帖) 묵적본(墨籍本)으로, 선화서보(宣和書譜)에 기록되거나 당(唐)·송(宋) 연간에 걸쳐 모사본이다.운필이 유유자적하며 의기가 부드럽다.세로 28.6cm, 가로 40.5cm, 9줄, 85자.편지 앞에는 송휘종(宋徽宗) 조길(趙吉) 금서(金書)가 '당승회소행서론서첩(唐僧會所行書論書帖)', 글 뒤에는 건륭황제행서석문(建隆皇帝行書釋文), 조맹부(趙孟 、), 항원변(港元邊) 등이 발제했다.권중에는 "선화", "정화", "소흥", "추계곡도서", "내부도서"가 찍혀 있다지인(之印) 항자경가소장 건륭 가경(嘉慶) 선통어감지보(宣統御監之寶) 등의 감장인이 랴오닝성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둘째, 《논서첩》 비첩본(탁본), 일명 《논서첩(論書帖)》 법첩으로 《강촌소하록(江村所夏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청나라 비첩에 탁본되었다.길이 113.8cm, 높이 31cm, 10행, 85자(두 글자가 부족)로 세로가 유창하고 풍채가 뛰어나며 행초운(行草雲)을 겸한다.글에는 '당석회소서(唐釋會所書)'라는 글귀가 있고, 글 뒤에는 항원변(港元邊)·육수번(陸樹번)의 발제문이 있다.또 저명한 수집가 고사기, 양청표, 대시중광, 왕홍서 등의 감정을 거쳤다. 왕홍서(王鴻西) 등의 감정을 거쳤다.선화(宣和), 정화(政和), 소흥(昭興), 어서(御書), 평생진상(平生眞賞), 항원변인(港元邊印), 항자경가소장(港子京家藏), 묵림비완(墨林秘 、), 항숙자(杭淑子), 대역중광인( 重重光印), 강상외사(江上外史), 고수창행(周壽昌行) 등 농사(農氏)가 소장(藏藏), 비석사(秘石士)인(고사(秘石史印)가(秘石印)의 도서로 도서가 도서에 도본.
회소(會蘇, 737~799), 초성(草聖), 당대의 걸출한 서예가.자는 장진(藏眞), 속성은 돈(錢), 영주영릉(永州永陵·현재의 호남영릉) 사람이다.어려서부터 출가하여 경선한 후에 예문, 초서를 특히 좋아하였다.술을 즐겨 마시며 그 술과 함께 흥이 나 절벽의 현수막과 의복기구가 없는 것이 없으니, 이를 '취승'이라 불렀다.초서삼매로 '광승(狂僧)'이라 불렸다.회소의 서예는 구양문을 처음 배웠고, 후사는 오동(회소의 이종사촌 형제)으로부터 초서를 배웠다.우동은 장욱의 제자이니, 필법을 알려주겠다.762년(보응초년)에는 영릉에서 나와 역형양(歷形陽)을 거쳐 광주(廣州)로 가 담주(潭州)에 머물다가 악주(岳州)를 거쳐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다.772년 낙양을 거쳐 안진경을 만나 찾아뵙고 승유(僧儒)가 책을 논하여 서단(書壇)의 성사가 되었다.당대의 명사들, 예를 들면 이백, 노상, 대숙륜, 첸치 등은 모두 노래하여 칭송하였다.화이소는 광초로 알려져 장욱과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일명 '광소광소라 불렸다.전세의 묵적에는 《자서첩(自書帖)》《소초천자문(小草千字文)》지본(紙本) 《고순첩(苦淳帖)》《논서첩(論書帖)》 등의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