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 인생의 주인송인가 인생은 연극… 역할 해내야 할 운명 일탈하면 ‘미친사람’ 취급받기 십상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역할도 있다‘
그 사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필자처럼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 이탈리아의 노벨상 수상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엔리코 4세’를 권하고 싶다.
이야기의 시작은 막이 오르는 시점에서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작품의 주인공이 청년이었던 그 시절,그를 비롯한 한 무리의 이탈리아 귀족이 각기 역사상의 유명 인물로 분장해 참가하는 가장행렬을 벌인다.주인공은 독일의 하인리히 4세의 전기 및 역사적 배경을 꼼꼼히 연구하고 황제 복장으로 참가한다.그에게는 마틸다라는 짝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그런데 여인은 그에게 무관심하였다.이유는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행렬에서 그의 연적은 그를 골탕먹이려 그가 탄 말의 엉덩이를 흉기로 찔러 날뛰게 한다.그는 말에서 떨어져 머리를 땅에 부딪치고 기절한다.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정신이상으로 자신이 정말 하인리히 4세라고 믿고 행동한다.그의 누이는 시골에 저택을 마련,궁전같이 꾸미고 그의 신하처럼 연기할 사람들을 고용해 그가 연극 속에서나마 황제로 지내게 한다.
그로부터 12년후,어느날 주인공은 정신을 되찾고 자신이 황제가 아님을 깨닫는다.하지만 젊은 자신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버렸음을 알고 황제 연극을 계속한다.그후 또 8년이 지난 어느날,그의 누이가 찾아와 보곤 그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조카에게 치료를 부탁한다.그녀가 사망한 뒤 조카 디놀리 후작은 약혼자인 프리다,그녀의 어머니 마틸다(주인공의 옛 연인),마틸다의 정부 벨크레디와 함께 정신과 의사를 데리고 찾아온다.
알현을 허락하며 등장한 주인공은 이제 쉰살 가까이 되었고 세월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짙은 화장과 함께 머리를 염색하였다.손님들은 미친 가짜 황제 앞에서 가장행렬 당시처럼 행동하고 주인공은 맑은 정신으로 그들의 어설픈 연기를 바라본다.
손님들은 알현실에서 황제 복장의 주인공과 가장행렬때의 상대역 마틸다의 실물 크기 초상화를 발견한다.의사는 이것들을 이용해 주인공을 치료하겠다고 말한다.그것은 젊은 시절의 마틸다와 거의 닮은 딸 프리다와 주인공의 조카 디놀리를 초상화 인물과 똑같이 분장시켜 초상화 앞에 서 있게 한 뒤 주인공이 다시 들어오면 프리다가 갑자기 초상화에서 걸어나오게 하여 그 충격으로 환자가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었다.
과연 의사의 지시대로 프리다가 초상화에서 걸어나오자 깜짝 놀란 주인공은 제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한다.그는 정신이상으로 잃어버린 세월과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와 연극을 하며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 없는 동안 흘러버린 시간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한편,적중하는 것 같았던 의사의 요법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지난 20년간 주인공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예술의 세계에서 산 셈이다.황제의 역할을 하는 한 그는 마음 속에서 계속 청년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고,마틸다도 초상화 속에서처럼 끝없이 젊은 여인이었다.그러다 보니 주인공은 이제는 늙어버린 어머니 대신 딸을 마틸다로 알아보게 된 것이다.그림에서 걸어나오는 프리다를 보고 주인공은 순간적으로 마틸다를 짝사랑하던 젊은 날로 돌아간다.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프리다를 와락 끌어안는다.수줍은 이의 20년 동안 유예당한 애정표현이 분출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주인공은 그동안 약하게나마 파악하고 있던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를 놓쳐버린다.다시 미친 것이다.피란델로에게 생명은 감히 고정된 틀에 끼우거나 과학의 자로 측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이다.의사는 병을 고치려다 오히려 악화시킨 셈이다.
이때,주인공의 광증을 미심쩍어하고 있던 벨크레디는 그가 프리다를 끌어안자 “미치지 않았으면서 더이상 광기의 가면 뒤로 숨지 말라”고 외치며 그를 제지하려 한다.벨크레디는 바로 주인공을 말에서 떨어지게 한 범인이며 현재 마틸다의 정부다.그 점에 생각이 미친 주인공은 순간적인 복수심으로 달려드는 그를 칼로 찌른다.20년 전에 당한 수모를 이제야 갚은 것이다.벨크레디는 죽는다.
이제 사람들은 주인공이 절대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한다.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평생을 연극 속의 황제로 살아가야 할 운명에 처해진다.그가 연극 밖으로 나온 것은 불과 한순간이었다.그러나 그 한순간의 행동은 그를 영원히 연극 속에 가둬버렸다.
‘엔리코 4세’의 주인공은 집단이나 명분이란 이름으로 고정된 역할을 강요당하는 무수한 소시민의 대표다.작품에 주인공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그에게는 이웃들이,어떤 면에선 장난삼아 씌워준 역할이 있을 뿐이다.사람들은 그 역할을 통해 그를 판단한다.그리고 그가 자기 역할에서 이탈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혹시 변신을 해서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된다면 몰라도.의사가 하려던 것이 바로 무리 속에 끼일 수 있는 또 한 사람의 소시민을 복제하는 작업이었다.개개인의 특수한 사정이나 생명현상의 예측불가능성 따위엔 관심도 없고 알아낼 능력도 없다.다른 사람과 달라보이면 무조건 비정상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주어진 상황을 피하거나 소극적으로 끌려가지 않는다.오히려 몸과 마음을 바쳐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살아냄으로써 희생자가 아닌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그것이 시간의 파괴력을 이기는 방법이다.그의 광증과 치열한 연기는 바로 그의 삶에 대한 애착과 철저한 승부정신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피란델로는 누구/이탈리아 출신 20세기 대표적 극작가 피란델로에 관하여: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의 피란델로(1867∼1936)는 시집 6권,소설 7편,단편소설집 14권,장막극 27편,단막극 16편 그리고 다수의 평론과 수필 등을 남긴 다작의 작가다.평론가들은 피란델로가 20세기 서구 드라마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극작가라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한다.그런데도 세계적으로 그의 작품이 그 가치만큼 읽히고 상연되지 않는 것은 그의 작품이 상당한 지적 훈련을 요구하는 내용과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전집이 아직 영어로도 완역되지 않은 실정이지만,‘헨리 4세’외엔 어떤 작품도 한국어 번역판이 아직 선보이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헨리 4세’를 비롯해 ‘저자를 찾는 여섯 인물’‘각자 자기 방식대로’,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게 옳은 겁니다’‘오늘밤 우리는 즉흥극을 공연합니다’ 등은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는 학생 및 학자들이 꼭 읽어야 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