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naver.me/FzS5nEpg
https://naver.me/5zojMIvy
https://naver.me/I544DuZs
https://naver.me/GalxRUWS
https://naver.me/F7IwY3ef
https://naver.me/5CrzXCBz
십일월 /이재무
십일월은 의붓자식 같은 달이다.
시월과 십이월 사이에 엉거주춤 껴서
심란하고 어수선한 달이다.
난방도 안 들어오고
선뜻 내복 입기도 애매해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달이다.
더러 가다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메인은 시월이나 십이월에 다 빼앗기고
그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허드레 행사나 치르게 되는 달이다.
괄호 같은 부록 같은 본문의 각주 같은
산과 강에 깊게 쇄골이 드러나는 달이다.
저녁 땅거미 혹은 어스름과 잘 어울리는
십일월을 내 영혼의 별실로 삼으리라
십일월 / 이재무
십일월을 사랑하리
곡물이 떠난 전답과 배추가 떠난 텃밭과
과일이 떠난 과수원은 불쑥불쑥 늙어가리
산은 쇄골을 드러내고 강물은 여위어가리
마당가 지푸라기가 얼고 새벽 들판 살얼음에
별이 반짝이고 문득 추억처럼
첫눈이 찾아와 눈시울을 적시리
죄가 투명하게 비치고
영혼이 맑아지는 십일월을 나는 사랑하리
11월 /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시인, 1945-)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11월 / (배한봉·시인, 1962-)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11월 / (박용하·시인, 1963-)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1월의 비가 / (도혜숙·시인, 1969-)
길이
어둠을 점화한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바다는 별을 쏘아 올리고
바람,
네가 피워대는 슬픔의 무량함으로
온 산이 머리끝까지
붉게 흔들린다
11월 / (황인숙·시인, 1958-)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수녀 시인, 1945-)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11월의 나무 / (황지우·시인, 1952-)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11월의 나무 / (김경숙·시인)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11월 / (유안진·시인, 1941-)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11월 / (오세영·시인, 1942-)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11月 / (홍경임·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추수 끝낸 들판
찬바람이 홰를 치고
바라보이는 먼 산들
채색옷 단장을 하고는
먼데서 오는 손님을 기다린다
잎을 지운 나무 위에
까치집만 덩그마니
11月 가로수 은행나무
줄을 서서 몇 뼘 남은 햇살에
마냥 졸고 있다
채마밭 식구들 실한 몸매를 자랑하며
초대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길 옆 목장 젖소들 등마루에
남은 가을이 잠시 머문다.
11월 / (정군수·시인, 1945-)
아내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간다
불빛 사이로 잎이 진다
겨울로 가고 있는 은행나무
아내는 말이 없다
그 손금에서도 잎이 지고 있다
문을 닫지 말아야지
겨울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찬바람이 이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다
벌거벗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가고 있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이 밤
그들은 얼마나 긴 성을 쌓을까
구급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다 지려는가
몇 잎 남은 은행잎이
바람에 실려가다
아내와 나의 발등에 떨어진다
11월 안부 / (최원정·시인, 1958-)
황금빛 은행잎이
거리를 뒤덮고
지난 추억도 갈피마다
켜켜이 내려앉아
지나는 이의 발길에
일없이 툭툭 채이는 걸
너도 보았거든
아무리 바쁘더라도
소식 넣어
맑은 이슬 한 잔 하자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 끝내고 나서
11월 / (최갑수·시인, 1973-)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겸연쩍기만 한데
11월을 보내며 / (유한나·시인)
하늘엔 내 마음 닮은
구름 한 점 없이 말짱하게
금화 한 닢 같은
11월이 가는 구나
겨울을 위하여
서둘러 성전에
영혼을 떨구는 사람도
한 잔의 깡소주를
홀로 들이키며
아찔하게 세상을
버티는 사람도
가을과 겨울의
인터체인지 같은
11월의 마지막
계단을 밟는구나
뜰 앞 감나무엔
잊지 못한 사랑인 양
만나지 못한 그리움인 양
아쉬운 듯 애달픈 듯
붉은 감 두 개
까치도 그냥
쳐다보고만 가는...
그래 가는 것이다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추운 겨울 바람 찬 벌판
쌓인 눈 속이라도
살아있으니 가는 것이다
희망이란 살아있는 것일 뿐이라 해도
사랑이란 더욱 외롭게 할 뿐이라 해도
착한 아이처럼 순순히
계절 따라 갈 일이다
사람의 길
사랑의 길을
11월이 전하는 말 / (반기룡·시인)
한 사람이 서 있네
그 옆에 한 사람이 다가서네
이윽고 11이 되네
서로가 기댈 수 있고 의탁이 되네
직립의 뿌리를 깊게 내린 채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시네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꿈쩍하지 않을 곧은 보행을 하고 싶네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만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올곧은 모습으로
어기여차 어기여차
장단에 맞춰 풍악에 맞춰
사뿐히 사뿐히 걸어가시네
삭풍이 후려쳐도
평형감각 잃지 않을
온전한 11자로 자리매김하고 싶네
11월의 시 / 이외수 / 소설가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을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도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중년의 가슴에 11월이 오면 / 이채 / 시인
청춘의 푸른 잎도 지고 나면 낙엽이라
애당초 만물엔 정함이 없다 해도
사람이 사람인 까닭에
나, 이렇게 늙어감이 쓸쓸하노라
어느 하루도 소용없는 날 없었건만
이제 와 여기 앉았거늘
바람은 웬 말이 그리도 많으냐
천 년을 불고 가도 지칠 줄을 모르네
보란 듯이 이룬 것은 없어도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
가시밭길은 살펴 가며
어두운 길은 밝혀가며
때로는 갈림길에서
두려움과 외로움에 잠 없는 밤이 많아
하고많은 세상일도 웃고 나면 그만이라
착하게 살고 싶었다
늙지 않은 산처럼
늙지 않은 물처럼
늙지 않은 별처럼
아, 나 이렇게 늙어갈 줄 몰랐노라
나 오늘 왜 이러죠 / 나태주 / 시인
가을이 너무 많아요
얼른 가을이 지나가 버리고 차라리
얼음 찬 겨울이 들이닥쳤음 좋겠어요
당신 내게 데리고 온 가을
가을만 덩그러니 남기고 당신
훌쩍 떠나버린 자리
가을과 나만 둘이서 마주 앉은 날들이
너무 많아요
무심히 피어 있는 뜨락의 국화꽃 덤불
국화꽃 덤불 위에 지나가던 바람이 몸을 얹고
흔들거리는 것도 차마 못 보아주겠어요
나날이 단풍의 물이 들어가는 나무들도 그러하지만
일찍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다가
발길에 밟히며 소리 내는 낙엽은
더더욱 못 보아주겠는 맘이에요
나 오늘 왜 이러죠?
11월의 시 / <임영준>
모두 떠나는가
텅 빈 하늘아래
추레한 인내만이
선을 긋고 있는데
훌훌 털고 사라지는가
아직도 못다 지핀
詩들이 수두룩한데
가랑잎더미에
시름을 떠넘기고
굼뜬 나를 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야만 하는가
11월의 시 / <홍수희>
텅텅 비워
윙윙 우리라
다시는
빈 하늘만
가슴에
채워 넣으리
11월의 시 / <이재곤>
맺히고,
익어서
지닐 수 없을때
텅텅 비워
빈몸으로라도 울리라
다시,
또 다시 살아도
지금같을 삶이 슬퍼서
그때도 지금 같이 울리라
눈에 들여도
가슴에 들여도
채워지지않는 삶의 한도막
슬퍼서 너무슬퍼서
텅텅 비워
빈몸으로라도 울리라
11월의 시 / <이임영>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던
황량한 가을 바람이 몰아치며
모든 걸 다 거두어가는
11월에는
외롭지 않은 사람도
괜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입니다
11월엔 누구도
절망감에 몸을 떨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을 들녘이 황량해도
단지 가을걷이를 끝내고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수확물이 그득한 곳간을 단속하는
풍요로운 농부의 마음이게 하여 주십시오
낮엔 낙엽이 쌓이는 길마다
낭만이 가득하고
밤이면 사람들이 사는 창문마다
따뜻한 불이 켜지게 하시고
지난 계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랑의 대화 속에
평화로움만 넘치게 하여 주소서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이야
머나먼 전설 속 나라에서 불어와
창문을 노크하는 동화인양 알게 하소서
11월 / <고 은>
낙엽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11월 / <박영근>
바람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떨구는 옛기억들을 받아
저렇게 또다른 길을 만들고
홀로 깊어질 만큼 깊어져
다른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우리들 그 헛된 아우성을
쓸어주는구나
혼자 걷는 길이 우리의 육신을 마르게 하는 동안
떨어질 한 잎살의 슬픔도 없이
바람 속으로 몸통과 가지를 치켜든 나무들
마음 속에 일렁이는 殘燈이여
누구를 불러야 하리
부디
깊어져라
삶이 더 헐벗은 날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11월 / <조용미>
한밤
물 마시러 나왔다 달빛이
거실 마루에
수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숨쉬고 있는 걸
가만히 듣는다
창 밖으로 나뭇잎들이
물고기처럼
조용히 떠다니고 있다
더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굉음은
고요로 향하는 노선을 달리고 있다
11월 / <이수희>
내 그림자가
고집을 피우고
슬그머니 꼬리가 무딜까봐
감나무 몇 잎이
가지를 놓지 못합니다
시간의 그늘을 저만치 두고
비릿한 눈물마저 마른
하늘 끝마저 멉니다
그가 내민
연서를 따라가다가
벌레먹은 낙엽이 되고
휑하게 길어진 돌담길
긴장한 상념도 움츠리며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걸립니다
땅위를 걷는 모든 각진 마음들이 뒹굴어
제 가슴만 헐어내고
제 허무함만 세우고
그래도 그의 가슴마다 기슭마다
세상의 뿌 리를 더 환하게
달고 있습니다
11월 /:<이창숙>
조용히 흔들림 없이, 손 내밀지 않고 두려움 없이,
어둠과 사유하기,
나무들이 11월의 집을 짓고 있다
허름하게 집 지을 짚 몇단만 있으면 되지
다 읽지 못한 책은 그냥 덮어두고
쓰지 못한 시(詩)는 바람에게 들려주고
보고 싶음은 붉은 울음으로 떨궈내고
안쓰러움은 발 밑에 묻어 두지
한밤중에도 나무들은 사이사이 눈을 뜬다
흔적지우기 긴 몸 소름돋는 쓸쓸함 꼭꼭 쌓아두기
구석구석 빈자리 채워가기로.
11월 / <최정례>
느닷없이 큰 곰이
천장까지 닿는 검은 그것이 나타나
우리집 고양이를 아이들을 때려눕히고
나를 그러면?
함께 살자고 하면?
이 집 커튼을 찢고 들어와
돌이 된 내 심장을 두들기며
그러면 어떡하지?
창문의 불빛을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현관문에 피아노에
차압딱지를 붙이는 집달리처럼
11월 어느 날
무심한 곰의 얼굴로 들이닥쳐서
TV에서 배 두들기며 웃는 코미디언들
얼굴 위에 재를 뿌리고
소파 위에 내 손바닥 위에
뜨거운 석탄을 올려놓으면
그러면?
이 집 사느라 진 빚
이자의 이자 때문에
넌 역전 앞에 가 신문지나 덮고 누워 있어라
그러는데도
기대고 싶고 조금은 은근히 살고 싶어지면
그러면?
십일월 / <이정림>
바람에
낙엽이 흩어지고 또 날린다.
찌푸린 하늘은 할미꽃
떨어져 날리는 잎사귀마냥 모두들 바쁘다.
푸시시한 얼굴에 초겨울 그림자가 스치고
쪼달림의 모습 모습이다.
잘 익은 밤나무
밤톨 한 알 없이 다 털리고
주황색 감나무에
달랑 까치밥 한 알뿐이다.
뿌연 하늘이 멍하니 내려 보이는 빈 벌판
허허로운 허수아비
심장도 멈추었다.
소용없는 바람만이 차가워서 흐느끼고
코스모스와 들국화도 흑흑 따라서 운다.
멀거니 할미꽃도 운다.
모두들 앙상하게 남아서 운다.
11월은 / <진 란>
은색 바람으로 몸을 닦으며
시린 들판에 그대라고 써도 좋으리
살얼음 오싹한 하늘 웅덩이에
이마를 기대고 선 나목으로
꼭감은 그대 눈 속에서
불꽃같은 별밤을 꿈 꾸어도 좋으리
봄이 피는 꿈
눈밭에 떨어진 푸를 씨앗들
겨우내 바람 치대는 소리에 귀를 씻으며
하얀 적설로 눈사람이 되어도 좋은
망부석의 전설이 되어도 좋은
11월에 / <고혜경>
달빛에 홀로 선 나목
투명한 새벽에 젖어
멀어지는
가을의 마지막 얼굴 되어
볓 빛보다
더 시리게 떠나간다
사라져 흙이 되는 것마다
의미는 남아
이슬이 채 밟히지 못한 시간 앞에
때를 따라 아름답게 서성이는
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마른 잎
천 년을 두고도 남을
사랑보다 더 깊은 의미의 진실이구나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11월의 노래 /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 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11월의 서 / <이정인>
따스한 봄 빛 향기에 끌려
빗장을 내리고
움 터 자란 새 순은
중년의 울타리에
하얀 목련처럼 감싸는 이 없이
피다 지고
어설프게 타다 진
숯불인가!
무더운 밤
그리운 새벽바람 한 줄기는
어느 새 싸늘한 얼굴로
찾아와 있다.
갈잎 떨어지는
가을 숲에는
잎 새 보다 더 큰 비명으로
세월을 아파하는
역류의 모난 반란만
산만하게 흩어지고
가지에는
마지막 남은 잎 새하나
어둔 밤하늘에
시리도록 하얀 얼굴로 떠 있는
보름달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다.
11월의 풍경, 하나 / <진 란>
몇일 내내 퍼붓던 빗방울들이 멈추었다
목울음에 잠긴 세상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어지는
눅눅한 사잇길에서 눈 악무는 아수라 여자
밤새 지나간 흔적 없는 텅 빈 길 위에
지친 몸으로 드러누었던 은행잎이
도시를 흔들어 깨우는 타이어에 휘쓸려
맨발의 무희처럼 달려가는데
비안개가 피어오르는 흐린 유리창에
당신은 누구시냐고
어디서 쉬었느냐고
젖은 속내 감추어 쓴 편지 한 장
새벽잠 속에 가만히
밀어놓는다
11월의 나무 / <김경숙>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11월의 나무<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測光)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11月의 저녁 / <김 억>
바람에 불리우는
옷 벗은 나무수풀로
작은 새가 날아갈 때,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떠돌며
저녁해는 고요히도 넘어라.
고요히 서서, 귀 기울이며 보아라,
어둑한 설은 회한은 어두워지는 밤과 함께,
안식을 기다리는 맘 위에 내려오며,
빛깔도 없이, 핼금한 달은 또다시 울지 않는가.
나의 영이여, 너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혼자 머리를 숙이고 쪼그리고 있어라.
입동 저녁 / <이성선>
벌레소리 고이던 나무 허리가 움푹 패였다
잎 없는 능선도 낮아져 그 아래 눕는다
가지 하나가 팔을 벌여 내 집을 두드린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바라만 본다
저문 시간이 고개 숙이고 마을을 서성거리고
그의 머리 위로 별이 벼꽃처럼 드물다
낡은 문 창에 달빛이 조금씩 줄어든다
달 내리는 소리가 마당을 지나 헛간에 머문다
누군가 떠나고 난 자리가 세상보다 크고 깊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입동이후 / <이성선>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
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
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리운 사람아
내 빈 마음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늦어도 11월에는 / <김행숙>
느릿느릿 잠자리 날고
오후의 볕이 반짝 드는 골목길
가을 냄새가 시작된다
시들어가는 시간
사람들이 종종걸음 치는 저녁 때면
어김없이 등줄기가 시리다
갑자기 햇살이 엷어지고
나뭇잎 하나 툭! 떨어져 내리면
나도 옷깃을 여며야 한다
내일을 기약하는 마른 풀잎처럼
다시 마음을 다잡으리라
늦어도 11월에는.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 <김동규>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娼婦의 賣笑같은 까칠한 소리로
살과 살을 비벼대다 드러눕던 몸짓,
바람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혼절하는 몸소리로 제 허리를 꺾어
속 대를 쥐어 틀어 물기를 말리고
타오르는 들불의 꿈을 꾸며 잠이 든
늙은 갈대의 가쁜 숨소리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는,
빠른 걸음으로 노을이 오고
석양마다 숨이 멎던, 하루를 또 보듬으며
목 젖까지 속울음 차오르던 소리를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11월을 빠져나가며 / <정진규>
흙담장에 걸린 먼지투성이 마른 씨래기 다발들
남루한 내 사랑들이 버석거린다
아직도 이파리들 땅에 내려놓지 못할 몇 그루 은행나무들이 이해되지 않으며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철 지난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다
혼자서 돌아오는 밤거리 골목길에 버려진 고양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나는 자꾸 올라가고 있는데 계단들은 그만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비어지고 있다
빈 계단들이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제 너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위기로만 남아 있구나
골목길 들어서면 겨우 익숙한 저녁 냄새만 인색하게 나를 달랜다
이 또한 전 같지 않다
12월 때문에 11월은 가장 서둔다
끝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들통나고 있다
야적까지 하고 있는 빈터, 그빈터에서도 우리도 서둘러 끝내자
내리는 눈이라도 기념으로 맞아두자
마른 풀대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무와 나무들 사이가 분명해지고
강가에 서면 흐르는 물소리들도 한껏 야위어 속살 다아 보인다
서로 벌어져 있다
가장 견고하다는 네 사유의 책갈피도 여며지지 않는다
머물렀다고 할 수 없다
서둘러 11월은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11월을 보내며 / <정아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늘 목에 가시 되어
남아 있는 가을
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덩달아 통곡을 하게 하고
어디쯤 오고 있는지
내 아픈 겨울
힘들게 오르는 가파른 언덕 길
늦은 가을 국화 한 송이
눈물새 울음 배어 목이 쉬는데
어느 시간 속에 건 찾아내어
함께 있자 한다
함께 있자 한다
11월 이후 / <진 란>
지순한 하늘에 몇 개의 이파리 팔랑이며
따순한 햇살에 맨 몸 다 드러내고
남루한 숨소리 몇 바람 지나더니
욕심 비워 나목일래
검은 둥치의 발등에 풀새들 내려앉은
오후, 곰실곰실 피어난 비탈에 서서
꿈을 몰아 뿌리 올리는 연리봉으로
만나고저, 오래오래 바라다가 눈부처 들어
연리지로 맞잡은 손, 천년고독을 기다리는
나무로 서고저
11월 / 임성구
서녁의 가을이 아주 깊숙이 들어왔다
영식이 집감나무에 매달린 저 웃음 한 통
지금은, 가슴 저미도록 푸른 별로 반짝인다
11월의 화려한 외출 / 조만희
시침과 분침의 정교함이
세월을 잡아 놓을 때쯤
또다시 한 해가
눈 안에 들어온다
일탈의 유혹에도
고뇌하는 삶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일생을 풍미하고 나서야
거친 빗줄기의
훈수 몇 마디에
동경의 그리움 안고
화려한 외출을 한다
11월의 숲 / 한희정
모두 다 떠나고서야 빈자리를 알았다
몸뚱이 혼자 될 때까지 아픈 줄도 몰랐던
요양원 맞대어 앉아 마른 다리 굵고 있다
경고등 반짝여도 비켜설 줄 몰랐다.
파킨슨 약봉지 들고 제 그림자 앞에 두고
그 봄날, 아지랑이 속을 주춤주춤 걷고 있다
11월 / 염창권
그림자를 앞세우는 날들이 잦아졌다
캄캄한 지층으로 몰려가는 가랑잎들
골목엔 눈자위 검은 등불 하나 켜진다
잎 다 지운 느티나무 그 밑둥에 기대면
쓸쓸히 저물어간 이번 생의 전언이듯
어둔 밤 몸 뒤척이는 강물소리 들린다
몸 아픈 것들이 짚더미에 불 지피며
뚜렷이 드러난 제 갈비뼈 만져볼 때
맨발로 걷는 하늘엔 그믐달이 돋는다
젖 물릴 듯 다가오는 이 무형의 느낌은
흰 손으로 덥석 안아 날 데려갈 그것은
아마도, 오기로 하면 이맘쯤일 것이다
11월에 다시 부르는 / 전연희
십일월은 모딜리아니 긴 목처럼 여위다
되돌아 달려오면 이마 위에 여린 핏줄
한 줄기 바람이 일어 넝마처럼 이는 보풀
제대로 온 길인지 막차도 떠난 자리
쏟아낸 말들 죄다 돌아오는 바람소리
길 위에 길을 놓치고 시린 눈을 닦는다
25시 편의점 불빛 외투처럼 따사로워
손 시린 이를 위한 내 노래는 유정한가
바람결 낮은 목소리 제 음정을 찾고 있다
11월/ 송인영
오래된 스웨트가 숨겨놓은 보풀처럼 찐 고구마 몸에서 피어오른
김처럼 벗겨진 내 부츠의 생각이 물고 있는
먼, 길
11월/ 허순행
외롭다, 라고 말하자 구름이 몰려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가을이 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물기를 털어냈다
시간이 회색 구름을 꺼내 입었다
새벽이면 깊어진 적막이 하얗게 땅을 덮었다
11월 / 신철규
같은 숫자가 나란히 서 있다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사선으로 비친다
너의 왼뺨에 난 솜털이 하늘거리고
오른뺨은 그늘로 선명해진다
나는 조금 더 햇볕 쪽으로 다가앉는다
첫눈 오면 뭐 할 거야.
그것이 사랑의 속삭임인지 이별의 선언인지 헷갈려서 심장이 아래로 한 치쯤 내려앉는다
몸속의 저울추가 무거워진다
파동처럼 흐르던 마음이 입자가 되어 흩어진다
실내엔 아지랑이처럼 음악이 피어오른다
고요하던 실내에 음악이 켜지면 실내는 그만큼 무거워질까
소리에도 무게가 있을까
흘러간 시간들은 어디에 쌓이는 걸까
그거 알아? 열대지방에도 단풍이 든대. 건기 때 낙엽이 지는데 추위 때문이 아니라 공기가 건조해져서래.
나무는 몸 안에 깃든 물을 가두기 위해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낀 태양
나뭇가지들이 만든 가지 족쇄
버림받은 빛
컵을 놓친 손바닥의 새하얀 현기증
손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먼 미래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거울 속에 들어 있는 환영을 손바닥으로 만져보듯이
거울 속으로 무섭게 달려드는 눈동자들
입술이 지워진 얼굴들
칼끝이 뾰족한 것은 무언가 찌를 것이 있기 때문이다
뭉툭한 마음은 찌를 곳도 없이 무너진다
너의 입술에 나비가 앉아 있다
잡으려고 손을 뻗자 사라지는
갈변한 마음들을 하나씩 털어낸다
나는 텅 빈 나무처럼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본다
털실로 만든 새는 노래하지 않는다
십일월의 숲/김연미
무성했던 목소리가 흩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것들은 왜 바닥으로만 다니는지
무게를 지우고 나면 왜 머물 곳이 없는지
나무들보다 오래된 무경계 생각들이
겨울 숲 발목에서 낙엽처럼 흩어진다
비워진 한쪽 가슴을 이제 그만 놓아도 좋지
그가 건넨 상처로 이 가을이 넘어간다
그 흔한 사랑에도 이유를 달고 싶던
돌아선 벼랑의 끝에 십일월이 서 있다
11월을 읽다 / 한희정
깊숙이 들어갈수록 풀리지 않는 문제 같던,
균형 잡아 저울질 하던 나무들의 무장해제
남은 잎
팔랑거리며
여정의 끝을 묻는다
단풍잎 나목들 사이 입맞춤이 더욱 붉다
마주한 눈빛들은 늘 그만큼 거리에서
끝끝내
이루지 못해
기도 속에 남으리
모두 다 비워서야 진정으로 길을 찾네
끝내 침묵으로 남은 엔딩크레딧 장면처럼
십일월
행간을 읽는다,
길은 다시 지워지네
11월 / 김은숙
서리 내린 지상에는
숙연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찬 공기 한 호흡도
조심스레 들이 마시면
저 멀리 둘러서있는 큰 산 웃으며
산자락을 끌어올리네
숨결 저 너머에 가만히 귀를 대는
묵상의 시간
십일월 파 / 정끝별
매운맛 든 햇대파 한 단
달랑달랑 사 들고 와
베란다 빈 화분에 북 주듯
다시 심고 있는 팔순의 엄마
일파만파 쏟아질 듯 웅크린 등허리
십일월의 추억 / 차용국
떠나는 너를 막을 수는 없어도
그리움마저 그냥 보낼 수는 없기에
빨간 단풍잎 하나
십일월의 책갈피에 담아 두었습니다
네가 보고 싶을 때면
십일월의 책장을 펼쳐 보면서
아직도 뜨겁게 불타는 사연들을
빼곡히 적고 또 지우곤 합니다
떠나는 너를 잡을 수는 없어도
추억이 이토록 뜨거운데
어찌 떠나는 것이 다 이별일 수 있을까요
십일월의 거리를 함께 걸어가는데
시월과 십일월 사이 / 조유리
거기 절개지가 있다
짝짝 찢으며
하던 말, 뚝뚝 끊으며
주소록을 삭제한 얼굴들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미간부터 단추를 푸는 동안
매일 있는 일처럼
손발톱은 아무렇지 않게 자라고
하오에 내다 널은 억새에서 바람이 태어나
끝물을 휘젓는다
쓸모 있는 것들이 듬성듬성해지고
어디론가 서두르는 이목구비
알아볼 수 있는 건
뒷걸음질로 뒷걸음질로 접히는
나잇살뿐, 들고 내릴 수조차 없는
한 자루 뒤통수뿐
십일월의 첫날/ 서연정
좌판 옆에 서너 명 둘레가 향기롭다
소올솔 김이 솟는 종이컵의 유자차
나팔꽃 울타리 감듯 온기가 건너간다
행인 뜸한 짬짬이 쉬지 않는 뜨개질
단순한 반복 속에 무늬가 그려지고
젖은 꿈 말리는 햇살이 어제보다 깊숙하다
11월, 숲길에서 / 염혜순
단풍 빛이 눈부시게 아름다워도
버려야할 옷이라고
바람 한 번에도 후드득 잎을 떨구며
나무가 말없이 웃었다
숲길에 켜켜이 내려앉은 이파리들은
저마다 다른 빛
자기만의 빛으로 물든다는 건
나름의 삶을 지켜왔다는 것
하나도 같은 잎은 없는 것처럼
한해의 날들도 같은 날은 없었다
그날이 그날 같던 지난날들이
제각각의 빛으로 떨어져 내렸다
폭풍 속 하루도
푸름이 가고 나니 단풍이다
입술조차 말라버린 잎들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길 위에
아직 고운 단풍잎 하나 떨어져 얹힌다
가을 숲이 바람의 손길에 앞섶을 푸는 동안
목련, 감출 것 없는 가지 끝에는
어느새 하얀 솜털에 싸인 꽃눈이 달렸다
11월이 숲을 지날 즈음엔
한해를 살아온 시간들이 낙엽처럼 날리는데
아직 올해가 다 가지 않았다고 속삭이는 소리와
이젠 너무 늦었나 하는 두려움 사이에서
월말에 받아든 얇은 월급봉투처럼
가벼이 팔랑이는 달력이 보인다
오래된 달력 뒤에 새 달력을 걸면
달력에도 꽃눈이 생길까
동짓달 어느 날 / 안영준
자연을 잠재우고
가을은 조용히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게을러진 동녁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늦장부리고 있다
계절에 순응하는
농수로의 왜가리
찬바람 외면하지 않고
종일 들녁에서 보낸다
하루를 갈무리한 해는
서둘러 서산을 넘고
교대한 가로등
눈 비비고 보초 선다
11월에서 / 김경철
선을 넘은 찬 바람이
화려한 옷을 벗은
11월에서
체력이 바닥 난
나뭇잎을
마구 흔든다
다시못올
세월을
탓하지도 못하고
힘겹게 버티던
나무에서 떨어져
차가운 바닥을 뒹굴다
빗질 한 번에
한곳으로 모인
나뭇잎
퇴비가 되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간다
십일월의 엽서/ 이현우
어느새 녹슨 깡통이 되었구나
가을마저도.
모든 가로수가 환상을 접고
생존의 쓸쓸함에 잠기는 순간
넋을 지펴 네 곁으로 가리니
기억하라
텅 빈 가지 끝에 저 혼자 남아
단풍 들지 못하는 은행나무 잎.
11월 / 서정우
배경의 쓸쓸함을 견딜 수 없어
갈 곳 잃은 추위는 도시로 몰리고
가로수가 내리는 몇 장
야윈 잎새의 흔들림
떨어지는 것이 아닌 떨구는 소리가 자꾸 들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지난 계절 무모하게 푸른 노래야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지?
11월 / 황인숙
달이
빈 둥지처럼 떠 있다
한 조각씩 깨어져
흘러가는
강얼음 같은 구름 사이에
그곳에서
내 손은 차가웠다
내 가슴도, 배도, 다리도, 발도 차가웠다
내 입술은 차가웠다
콧등도 각막도 눈썹도 이마도 차가웠다
머리카락도 차가웠다
뱀인 나의 피는 얼어가고 있었다.
달빛이 한기로 가득찬 그곳에서
나는 밤 속에서도 응달에서
영원히 그 곁을 벗어날 것 같지 않은
낡은 달을 본다
이제는 더 이상 추억을 지어내지 못할
죽은 새의 둥지를.
11월 / 이상례
그 고운 단풍 비 맞아 떨어 지고
하늘에 붉은 꽃이 가득하다
술잔을 몇 순배 돌린 후
외시 버선 신고
모자란 꿈들 아스라한 새벽
수평선 너머 물새 한마리
나를 온통 꽃 피우는 일
십일월/ 홍성란
사람은 두고 마음만 사랑할 수 있을까
널 사랑한 게 아니라 네 마음을 사랑했다고
가을도 다 지난 산언덕
가끔 지는
가랑잎
널 보내고 네 마음 다시 그립다고
먼 파도소리처럼 살 비비는 가랑잎 떼와
오백 년 그 너머 가인에게
말해줘도
좋을까
11월 / 박형준
의자에 다 타버린
연탄이 놓여 있는 줄 알았다.
골목에 쌓인 상자처럼 무뚝뚝하다.
문 닫힌 연탄가게 앞을 지날 때면
주름살에 가린 쑥 들어간 눈
언제나 거리의 사람들을 쫓는 늙은 여인.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린 채 앉아 있다.
늙은 여인이 의자에 앉아 사람을 쬔다.
아침의 부신 빛에 다 타버린 연탄
하얗게 허물어져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