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첫째 부인 김호남
박정희(朴正熙, 1917년
~ 1979년)
김호남(金好南, 1920년
~ 1991년, 박정희 이혼 후 월상(月像)으로 법명ㅡ불교 승려 출가.)
한병기(韓丙起, 1931년
~ 2016 ) - 박정희 사위
박재옥(朴在玉, 1937년
~ ) - 박정희 장녀
(첫째 부인 김호남의 딸 => 박재옥, 그녀의 자녀들)
아들,한태현,(1959년
~ )/ 딸,한유진,(1961년
~ )/ 아들,한태준,(1963년
~ )
박정희는 첫째부인 가족에게
엄청난 특혜를 줬다.
설악산 케이블카의 대표는 한태현이다.
박정희의 사위 한병기가 '설악케이블카 회장'이었고
아들 한태준, 한태현이 '설악케이블카(주)'의 대주주다.
한병기가 회장인 설악케이블카(주)'의 매출액
99%가 케이블카 운행으로 벌어들이는 돈이다. 2011년 순이익이
37억 원이니 44년간 벌어들인 돈만 계산해도 수백억 원이 넘는다.
단지 박정희의 사위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녀들까지 특혜를 대물림받고 있다.
국립공원은 국민의 재산이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권력을 통해
가족에게 특혜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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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1녀 박재옥
둘째 부인, 이현란(3년동거)아들 낳았으나 바로 사망
셋째 부인, 육영수,1남 2녀, 박지만, 박근혜, 박근령,
박정희의 약력에 세 여인 김호남, 이현란, 육영수.
그 중 김호남은 박정희의 첫째
부인이다.
박정희와 같은 빈농 출신 김호남의
부친은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과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세 살 위인 박정희와 결혼할
때 그녀는 17세로, 양가 부친이 나누어 마시는 막걸리 한 잔에 지금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자녀 혼사가 결정되는 것은 당시로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문제는 박정희. 대구사범에 진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던 그로선 좀 더 나이가
든 뒤에 자신과 맞는 여성과 혼인하길 원한다.
그러나 병이 든 박성빈은 47세에 낳은 막내의 결혼을 꼭 보고 싶어서,
"내가
죽기 전에 막내가 장가가는 건 보고 가야겠다"며 사실상 반강제로 혼인시킨다.
바쩡희 그가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김호남은 딸 박재옥을 키우며
시댁에서 지낸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한 박정희는 타지에서 홀로 교직 생활을 하며 월급을 부인에게 준 적이 없고 방학이 되어 어쩌다 고향에 내려와도 김호남과는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이게 너무 심했던지 박정희가
모처럼 고향에 내려왔을 때, 화가 난
큰형 박상희가 박정희를 강제로 김호남의 방에 집어넣기도 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경우, 그 심정을 백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딸까지 있는 그녀에게
돈 한 푼 준 적이 없다는 건, 그의 인간적인 무책임함 내지 냉혹함 나아가 잔인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호남은 그런 박정희의 구박에도 그 시절 여성답게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착한 며느리였다고 하니 더욱. (박정희는 그런 그녀가 더 미웠을 수도)
박정희가 심상소학교를 사직한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군에서 복무할 때에도 김호남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박정희는 광복 이후 귀국한
뒤 육군 장교로 근무할 때 동료의 결혼식에서 만난 이현란과 동거하다 결혼을 결심하면서 김호남에게 줄기차게 이혼을 요구하나, 그때마다 김호남은 도망치며 이혼을 거부한다.
이현란이 떠난 뒤, 박정희는 부하의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 혼인을 결심한다.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리기 2달 전, 박정희는 김호남을
찾아가 다시금 이혼을 요구한다.
이현란 때문에도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녀는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혼을 승낙하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불교 관련 인사들이 나름 김호남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 정부에서 불교 교단을
지원해준 연유에서 기인해서 그런지. 특히
김호남이 출가한 사실을 알게 된 육영수는 김호남이 머무는 사찰을 적극 지원한다.
이를 부담스러워해 김호남이
타 지역 다른 사찰로 옮기면 육영수가 다시 행방을 찾아내 그 사찰을 지원해주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일례로 상무대가 광주광역시에
있을 무렵에 김호남이 상무대 내의 진중 사찰 무각사로 옮겨 머물렀는데, 이를 안 육영수가 다시 지원을 해주어, 상무대 이전 후에도 지역의 대찰로
남을 만큼 세가 커졌다고. 어쨌든 이런 얘기가 사실이라면 육영수의 따뜻한 인간미 또는 남편이 구설수에 안
오르도록 미리 단속하는 이른바 내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녀의 자식들은...
박정희의 맏딸인 박재옥(80)과 남편 한병기(86)가 박정희의 사진 앞에 서 있다
박정희와 김호남의 딸인 박재옥은
두 사람이 이혼할 때 13살.
이후 친가, 외가, 사촌오빠 박재석,
사촌언니 박영옥(김종필의 처)의 집 등을 전전하다,
계모 육영수 슬하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그녀가 박정희 집에 있을 때,
박정희의 부관으로 그 집에서 출퇴근하던 한병기와 결혼하게 된다. 육영수가 적극 중매를
선 덕분이라고도 한다.
한병기는 육군 대위로 예편해 1961년 32세의 나이로
주 미국 뉴욕 총영사관 영사에 부임하고,
이후 주 칠레, UN, 캐나다 한국대사를 지내는 등 대통령 장인의 덕인지
젊은 나이에 외교관 경험이 일천함에도 승승장구한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강원도 속초, 양양, 고성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실업계에서도 활동하다 현재는
설악산 케이블카를 운영하면서 특혜 덩어리로 구설수에 오른 설악관광(주) 회장이다.
한편 이들 부부의 예전 미국집도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블로그 SECRET OF KOREA를 운영하는 재미 언론인 안치용의
2009년 9월 19일자 글이다.
박정희의 큰 사위 한병기는
1976년
45세 나이에 주 유엔대표부 대사에 임명됩니다.
뉴욕에 있는 유엔대표부는 특1급 대사 자리로 외교부의 최고 베테랑 외교관이 나가는 자리입니다만
한병기는 외교관 등 공직과 민간 기업 등을 오락가락하다 대통령 맏사위여서인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유엔대사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