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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이오 복음, 마르코 복음, 사도행전,티토서,계시록 16장 므긷도
'편한 성경' 은 '다음' 가페에서 읽을 수 있어요
이미 예수 믿는 일기 쉽게 편집해서
빈들었으니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참고로 사용하면 되고
아직 예수를 미디 않는 사람들은 편한 성경을 읽어 보고 예수 믿으면 됩니다.
예수 믿는 것도 성령 하나님이 도와 주어야 하니까요
맨처음 믿는 사람들은 요한 복음 부터 읽어야 좋를 것입니다
보혜사 (뜻: 도와 주는 분) 성령에 대하여 잘 가르켜 주니까요
출이집트
머릿말
(히브리어 제목 : (שמות ) , 웨엘레 셰모-스 뜻 : 이름들, 그리고 이들은 ---의 이름이다)
(히브리어에서 당시 세계어인 헬라어로 번역한 70 인역 제목 :
( ΕΞΟΔΟΣ (엑스도스, 탈출,벗어남,떠나기,빠져나오기, 영어 제목 : Exodus )
(고대 이집트 발음 :
헬라어(그리스어) : 70인역 : 메스라임, 아이귚토스, (뜻:'에게해 아래') 개역 성경은 헬라어 '아이귚토스'를 '애굽'으로 번역
중국어 : 애급( 埃及 중국 발음은 아이지(ai ji) ) ,
히브리어 : 미쯔라임
이집트의 현재 아랍어 나라이름 : 마스르(Masr)
이집트 아랍 공화국 (굼후리아트 마스르 알아리비아)
줄여서 이집트, 마스르, 문화어 : 에집트 , 1922년 영국으로 부터 독립 )
모쉐(히브리어), 모우세스(헬라어), 모우지즈 ( 영어)
내 용 : 모쉐가 태어날 때 부터 이집트(헬라어로:아이귚토스)를 빠져나와서
카나안을 눈으로 바로 볼 수 있는 가기 바로 앞까지 기록
이집트와 나일강 설명
나일강은 적도 남쪽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해서 에티오피아,수단, 이집트를 통과하여
지중해로 들어가는 6,690km 길이의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가장 하류지역에 속한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길이 6,690km 가운데 약 1500 km (부산에서 함경도 끝까지 길이)를
약 60 미터의 고도차로 지중해로 들어간다.
이집트 지역에서 강폭은 넓은 곳은 300 미터 좁은 곳은 100 미터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상류지역에서 비가 많이 와도,
이집트에서는 비도 내리지 않는 이집트를 지나 흘러가면서 하류 지역의 강폭이 좁아 홍수가 나서,
상류의 적도 지역에 내린 비로 온갖 영양분 있는 흙들을 하류쪽으로 흘러 가게 하여서,
카이로 북쪽(지중해쪽)은 나일강 줄기가 몇갈래로 나뉘어 흘러서 비옥한 토지의 삼각주가 이루어져 있다.
2022년 현재 고대 이집트 수도 였던 멤피스 근처는 이집트 돌 유적들이 약3,000년간
현재 그 지역의 고대 유물들은 홍수가 나서 진흙탕물이 흘러와서
약 3,000 년 동안 쌓인 약 5 미터 정도의 흙 아래에 묻혀 있다. ( 이강근 '성지가 좋다' 321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셒 때 이집트에서 살았던
카이로 북동쪽 약 50킬로에 위치 하였던 고쉔 지역도 삼각주 지역의 비옥한 땅이었다,
국토의 95% 이상이 사막인 이집트에서, 인구의 90% 이상이 강에서 약 2 킬로 떨어진 나일강 주변에 살고 있다.
이집트는 연간 강우량이 30 mm 미만의 사막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만 나일강물을 수차를 이용해서 발로 퍼 올려 퍼 올려서 농사를 지었으므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 처럼 여겼다. (데바림 11:10)
이집트 사람들은 6,690km로 길어서, 어디서 흘러오는 줄도 알 수 없었고
비도 연간 강수량이 30 미리도 되지 않는 사막 같은 나일강에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하류지역에서는 홍수가 나서,
넘치는 흙탕물이 삼각주 지역의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류 지역의 강폭은 300 미터 정도고, 어떤 곳은 강폭이 100 미터도 되지 않아서,
상류쪽에 비가 많이 내려서 강물이 넘쳐서 홍수가 나는 당연하다. 갈수기의 나일강 수량은 홍수기의 1/60 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 과학적인 사실들을 모르고,
오로지 사람들은 이집트가 나일강 때문에 잘 살아 간다고 옛날에 나일강을 신처럼 섬겼다.
나일강은 너무 길어 여러 나라를 거쳐서 오므로,
1855년 리빙스톤이 나일강은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 된다는 것을 알기 앞까지는 나일강의 길이도 측정할 수 없었다.
그 시기에 맞춰서 강물을 이용하여 거대한 돌들을 옮겨와서 문화가 발달 했다.
나일강의 길이를 안 것은 나일강의 발원지가 빅토리아 호수 였다는 것을 발견한 리빙스톤 선교사 이후로 1900 년대 이후이다.
수단과 이집트 등의 사막 지대에 물을 공급하는 강으로, 길이는 6,690km이며, 유역 면적은 약 300만 7,000㎢에 이른다.
적도 남쪽에서 시작하여 아프리카 동부를 북쪽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상류는 강우량이 증발량에 비해 많은 습윤 기후이며, 중 · 하류는 사막이다.
하류의 평야는 정기적으로 되풀이되는 홍수가 기름진 흙을 날라다 주어 농사가 잘된다.
이집트 · 르완다 · 우간다 · 수단 · 자이르 등의 국가를 흐른다.
하류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로 유적이 많다.
옛날부터 나일 강을 찬양하는 말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일부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이집트에서의 도시 발달은 나일 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에 나일 강은 유량 변동이 심해 홍수가 자주 나서 농업을 망치는 일이 빈번했다.
나일강은 빅토리아 호와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이집트의 지중해로 흘러가는 강이다.
백나일과 청나일 두 지류 덕분에 나일강의 유량은 안정적으로 흐른다.
백나일은 하르툼 하류를 흐르는 유량의 16%만을 공급하지만 상류가 적도의 열대우림 지대에서 흐르기 때문에
나일강의 수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청나일은 84%의 유량을 공급하면서 나일강 유량 변화를 주도한다.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해 비옥한 미립질의 검은 토양이 하류의 충적지대에 공급되는데
이 범람은 에티오피아 고원의 겨울철 강우와 눈 녹은 물 때문이다.
범람의 시작은 하르툼의 경우 4월이며 나일강 하류의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늦어져서
카이로에서는 10월에 최고조에 달한다.
1970년에 준공된 아스완하이 댐은 수단 국경지역까지 형성된 거대한 인공호수인 나세르 호를 만들었다.
댐 건설로 나일강 하류의 유량 변화는 상당한 정도로 안정되었다.
나일강이 상류지역인 남쪽 열대 우림지역에서 비가 오면,
빗물이 몇일 후에 북쪽으로 흘러나가서 범람시킨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일강은 <남쪽지방에서 비가오면 빗물이 북쪽으로 새어나와 범람하는 강>을 의미하는 것이고,
나일강 하류인 이집트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집트의 나일강에서 조금만 벗어 나도 비가 오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다.
이렇게 이집트는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지만,
나일강이 물을 공급하므로 문명이 발생하였는데,
이집트는 나일강 서부의 사하라 사막사막 지역과 동부의 농경 및 거주지역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집트 땅은 '나일강의 선물' 이라고 말한 역사학자 헤르도투스(BC484-425)가 말했듯이
나일강 일대와 그 주변지역의 사막과 광야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은 나일강을 양즈강이나 아마존강처럼 강폭이 넓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넓은 곳은 약 300m 정도이고 좁은 곳은 약 100m 정도로 매우 좁다.
이는 폭이 넓은 곳은 1km는 되는 상류에서 하류로 흐를 때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비가 그나마 오는 삼각주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비해
조금 더 상류에 있는 멤피스나 카이로 같은 지역은 비가 거의 오지 않고,
지류 또한 없으니, 강물이 유입될 요소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수단과의 국경 '아스완 이남지역에서 나일강 하류 나일강이 여러 지류로 나누어 지는 델타 지역 까지
약 1250 KM 를 90 M 의 표고차로 완만하게 흘러 간다.
델타 지역은 남북 길이 180 KM , 동서 너비 200 KM 이르는 비옥한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살았던 고쉔 지역도 이곳의 일부분이다.(창 46:28-47:31)
요셒이 야콥의 아들들을 오라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활한 곳은,
홍수가 날 때마다 흙탕물이 넘쳐서 비옥하게된 고쉔 지역은 나일강 하류 지역 이었다.
아브라함도 메소포타미아 북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칼데아 우르에서 카나안으로 와서 살다가,
카나안 땅에 심한 가뭄이 들어서 이집트로 갔다가 돌아옴 (창 12: 10-20)
아브라함 자손이 자기의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 되어 400 년 살고 나오면서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을 예언(창15:14,15)
이집트는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고 BC322 년에는 헬라에 침략당했다.
BC671 년, BC663 년 바빌로니아에게 침략 당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 도망 가서 살고 있는 것과,
하나님이 이집트도 침략 당할 것을
예사야 ,예레미야, 에즈켈,나훔 등 성경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다.
'조안'과, '높(멤피스)'은 같은 장소이다.
고대 이집트는 수도를 나일강 하류의 '조안'(높(헬라어로 멤피스)) 에서 나일강 상류쪽으로 약 900KM 떨어진
'노의 아몬' 또는 '노' 또는 '노아몬'( 테베, 룩소르) 로 옮겼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들은 노의 아몬(렘 46:25), 노 (에즈켈 30:14), 노아몬(나훔 3:8)
테베, 룩소르는 시간이 흘러 이름이 바뀐같은 장소이다)
카르낙 신전은 면적 5,000 M2에, 16 열의 134 개 기둥들이 있다.
둘레 11 m (직경 3.5 m) 높이 23 m의 중심기둥 23 개와
둘레 8 m (직경2.5 m) 높이 15m 의 기둥 122 개가 있는 거대한 신전이다. 기둥들에는 상형문자로 글들이 새겨져 있다.
제22 왕조로 시작한 쉬샄 왕 BC 922년 남유다 침공 (왕상14:25,26),
BC 610년에 왕위에 오른 파라오 느코는 므긷도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요쉬아 왕을 죽임,
이집트왕 파라오 호프라(BC589-566) (렘 44:30),
예레미야가 이집트의 조안(멤피스)의 타흐판헤스(Tahpanhes)로 끌려감(렘43:6-13),
유프라테스 강 옆 갈그미스에서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전투 (렘 46:2-26)
이집트에 관한 경고 (예사야 30:1-4),
이집트 심판 경고, 국경 요새로 2020년 현재 아스완 댐이 있는 곳으로,
페르시아의 이집트 정복시대에 유대인이 많이 살면서 성전을 건축하였더 곳
수뵈네(뜻: (나일강의) 무역로)까지(에즈켈 29:10, 30:1-26),
구스(에티오피아) 에 대한 심판 (예사야 18 : 1-7)
나일강 삼각주 북동부의 이집트의 조안은 제2 왕조의 수도로 헤브론 보다 7년 후에 세워졌으며,
구약 성경에 여러번 나타 난다.
조안(헬라어로는 멤피스) (민 13 :22, 에즈켈 30 : 14, 예사야 19:11.13, 30:4 )
조안(타흐판헤스,멤피스)는 바벨로나아에서 유다를 다스리라고 세운 총독 그달야를 죽이고 ,
유대사람들이 이집트로 달아나서 간 곳이다 (렘43:7)
이집트로 끌려 가서 놉(멤피스) 에서 죽을 것이다. (호 9:6 )
시편 78 편은 이집트에 내린 10 가지 재앙과 출이집트 사건을 시를 지어 나타낸 것이다.
카이로 남쪽 조안(멤피스)에서 남쪽 약 900 KM 지점 나일 강가에 노아몬 ( 테베 , 2022년 현재 룩소르) 이 있다.
나일강 하류가 지중해와 합해지는 곳에 알렉산더 대왕이 BC 332년에 만든 알렉산드리아는
BC 3세기 무렵 알렉산드 도서관에서,
구약성경을 이스라엘 12 지파에서 6명씩 차출한 72 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에서 당시 세계어 이었던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이다.
신약 시대에는 요셉이 아내 마리아와 갓 태어난 예수를 데리고 유대인들이 사는 곳으로 피난 하였다.(마타이오 2:13-15).
아폴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이었다.(행 18:24)
이집트의 곡물을 로마로 운반하는 항구도 알렉산드리아 이다, (행 27:6, 28:11)
(이집트의 카이로에 (BC 664-525년) 바벨론 군이 주둔하였던 곳에 교회를 세운)
'바벨로니아의 함께 뽑힘을 받은 교인들이 당신들에게 인사하고,
나의 (믿음의) 제자 (아들) 마르코(마르코 복음의 저자)도 인사합니다'. (페트로 알파 5:13)
(참조 : 이강근 성지가 좋다)
계시록 16장에 등장하는 하르 므긷도( 므긷도 언덕) 은 이집트의 투트모스 3 세는 므긷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지도
고대 이집트는 수도를 나일강 하류의 '조안'(높(헬라어로 멤피스)) 에서 나일강 상류쪽으로 약 900KM 떨어진
'노의 아몬' 또는 '노' 또는 '노아몬'( 테베, 룩소르) 로 옮겼다.
1994년 이집트 지도
2000 년대 이집트 지도
2000 연대 지도
조안'과, '높(멤피스)'은 같은 장소이다.
고대 이집트는 수도를 나일강 하류의 '조안'(높(헬라어로 멤피스)) 에서 나일강 상류쪽으로 약 900KM 떨어진
'노의 아몬' 또는 '노' 또는 '노아몬'( 테베, 룩소르) 로 옮겼다.
조안'과, '높(멤피스)'은 같은 장소이다.
고대 이집트는 수도를 나일강 하류의 '조안'(높(헬라어로 멤피스)) 에서 나일강 상류쪽으로 약 900KM 떨어진
'노의 아몬' 또는 '노' 또는 '노아몬'( 테베, 룩소르) 로 옮겼다.
상현문자로 기록된 고대 이집트 역사를 읽을 수 있도록 기록한
이집트의 로제타에서 발견된 비석은 2024년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로제타석 (Rosetta Stone)은
1799년 이집트 북부의 항구도시인 로제타에서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하던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대의 공병대 장교 피에르 부샤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로제타 석은 가로 72cm, 세로 114cm, 두께 28cm인 현무암질 비석이다.
비문은 당시 이집트(프롤레마이오스 왕조; 그리스계 왕조)에서 쓰이던
상형문자(하이에로글리프;hieroglyph),
민중문자(데모틱;demotic),
헬라(그리스)문자 3가지 언어로 표기되었다.
로제타석은 기원전 196년 당시 즉위 1주년을 맞이한 13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톨레미) 5세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혼란스러운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의 안정에 기여한 사제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을 비석에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헬라( 그리스)어로도 기록되어 있어,
비석의 발견은 4세기 이후부터 잊혀진 상형문자를 해독하려는 학자들에게 큰 계기가 되었다.
(당시 언어 학자들은 헬라어(고대 그리스어)에 능통하였다)
장-프랑수아 상폴리옹(Jean-Franois Champollion, 1790-1832)
1815년 영국의 토마스 영은 타원형의 테두리 속의 상형문자가 파라오의 이름임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상형문자가 음절문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지만 해독에 더 이상 새로운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1808년부터 비문의 사본을 구해 해독에 몰두한
프랑스의 샹폴리옹(10개 언어를 통달한 언어의 천재였으며,
당시 모교의 교수로 재직중이었다)은 오벨리스크의 비문 내용과
자신의 헬라(그리스)어와 콥트어(2세기부터 이집트의 크리스토교 사이에서 쓰이던 언어,
고대 이집트어에 바탕을 두고있다)
지식을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1822년 완전하게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다.
출이집트기(이집트(아이귚토스) 빠져나오기)에서는 우리가 살아 가는 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내려 간 것도
요셒이나 야콥의 뜻으로 간 것이 아니라,
요셒의 배(어머니가)다른 형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다차지하는 것이 미워서 죽이려 하다가
이집트로 가는 낙타를 타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로 국제 도로인 '해변길'로 다니는 장사꾼들에게 팔아 버린 것이다.
팔려 가서 포티베라 집에 머문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곳 왕궁의 죄수들이 갇히는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파라오를 만날 수 있었다.
이집트에 간지 430 년이란 세월이 흐른 다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카나안 땅으로 불러 올리려 했다.
키우지 못해서 차마 모쉐 부모들 손으로 죽일 수 없어서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 갈대(파피루스)숲에 버린 모쉐를 하필 이집트 공주가 보았고
이집트 공주는 모쉐를 왕궁에서 키웠으므로,
다음에 이집트 왕을 바로 찾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놓으라 할 수 있었다.
왕궁에 서 공주의 아들로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뛰어난 상형 문자로 된 학문을 공부하여서,
모쉐 5 경을 기록할 수 있었다.
모쉐가 왕궁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어떻게 감히 왕궁에 여러번 파라오가 싫어하는 말을 하기 위해 들어 갈 수 있었으리오.
모쉐는 왕궁의 힘을 입은 혼자 만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도 헛일
40 살에 왕궁을 도망쳐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광야에서 양이나 치며 남은 삶을 보내려 했던 그를
늘그막한 80 살 나이에
하나님이 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서 불러서
모쉐 자신은 그것을 싫어 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을 주어서 이집트 왕궁으로 보내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왕궁에서 자란 모쉐가 아니면,
어느 누구가 왕궁에 들랑 날랑 할 수 있기나 가능했겠는가
홍해를 건넌 것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것
10 계명을 받은 것
모두 사람들은 끼어들지도 못하고 모두 다 하나님이 준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40 년 동안
카나안 입구 까지 움직인 것도
사람의 힘은 하나도 작용하지 않은 오로지 하나님 은혜이다.
우리가 죄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도 사람의 노력은 하나도 필요 없고,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5장 11 절에서 사도 페트로도 말했다.
' 우리는 주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건짐을 받는다' 는 것을 믿는다.
우리들은 주님이 맡겨준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다해 마친후 하늘 나라에서 주님을 만날 때 까지
찬송하면서 실아가도록 해야 한다.
( 파라오 뜻 : 크다란 집, 태양신의 아들, 미쯔라임(헬라어:아이귚토스,이집트) 역대왕들의 명칭 )
하나님의 이름
1)여호와 이레 (여호와가 준비함 창 22 : 14 )
2)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자 출 3 : 14)
3)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 출 17 : 15 )
4)여호와 살롬 ( 평강을 주는 하나님 사사기 6 : 24 )
5)여호와 사바욛 ( 만군의 여호와 시 24 : 10 )
6)여호와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 예레미야 23 : 6 )
7)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거기 있다 에즈켈 48 :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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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상 9장 페니키아
예사야
예레미야
에즈켈
마타이오 복음
마르코 복음
사도행전
계시록 16장 므긷도
열왕기상 9장 페니키아
열왕기상 9장
*** 여호와가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다 ***
1.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짓기를 끝내서, 자기가 이루기를 바라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2.여호와가 앞에 기브온에서 나타난 것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났다.
3.여호와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기도와 당신이 내 앞에서 애타게 부탁한 것을 내가 들었으니,
나는 당신이 지은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끝없이 그 곳에 두며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겠다.
4.당신이 만일 당신의 아버지 다뷛이 행한 것 같이,
마음을 다하여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당신에게 명령한 대로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가서,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내가 당신의 아버지 다뷛에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당신에게서 끊어지지 않겠다' 말했던 대로
당신의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를 끝없이 단단하게 하겠지만,
6.만일 당신이나 당신들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당신들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예배하면
7.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가려놓은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8.이 성전이 높다 하더라도 지나가는 사람마다 놀라고 비웃으며
'여호와가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였지?' 라고 말하면
9.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예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가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렸다'고 말할 것이다.' "
*** 솔로몬과 히람의 약조 ***
10.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두 집을 건축하는데 20년이 걸렸다.
11. (페니키아의) 투로 왕 히람은 솔로몬이 요구하는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공급하였다.
그래서 솔로몬 왕도 (투로와 가까운) 갈릴라이아 땅의 성읍 20 개를 히람에게 주었다.
12.히람이 투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
13.그가 말했다.
"형님 나에게 이런 성읍들을 줍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카불(불모의 땅) 땅이라 부른다.
14.히람이 금120 탈란토( 4,100 KG , 히브리어 120 키카르)를 왕에게 보냈다.
*** 솔로몬의 다른 공적 ***
15.솔로몬 왕이 일꾼을 모은 이유는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벽과
(이스라엘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는 길목에 자리잡은) 하쪼르(요새)와
( 이스라엘 중간의 동서로 연결하고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 므긷도(요새) 와
(이스라엘 남쪽의) 게제르를 건축하려 위해서 였다.
(참조: 하쪼르와 므긷도에는 전쟁시 성밖의 물을 성안으로 끌어 올 수 있는 터널이 있다)
16.앞에 이집트 왕 파라오가 올라와서 게제르를 빼앗아 불을 지르고,
그 성읍에 사는 카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를 위하여 결혼 지참금으로 주었다.
17.솔로몬이 게제르와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였다.
18.그리고 바알랕과 그 땅의 들에 있는 ('지중해 해변 길'과 '왕의 대로' 만나서 가는 로마시대 팔미라) 타드모르와
(참조 : 타드모르란 타마르(대추 야자 나무)가 무성한 땅으로, 로마시대 에는 팔미라 (뜻 : Palm의 라틴어)는
다마스쿠스 북동쪽 280 킬로, 유프라 테스 강 서쪽 200 킬로 되는 곳의 오아시스가 있는 요새 겸 쉼터 이었다.
아브라함이 카나안 땅에 들어올 때 이곳을 지나 왔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다. )
19.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가 다스리는 온 나라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다.
20.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에모리 사람과
헽(힛타이트) 사람과
프리지 사람과
히뷔 사람과
예부스 사람 가운데 남아 있는 모든 사람
21.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죽이지 않고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지금까지 강제노역을 시켰다.
22.다만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를 삼지 않고,
그들은 군인들과 그의 신하와 높은 사람과 지휘관이며
병거와 마병의 지휘관이 되었다.
23. 솔로몬에게 일을 감독하는 감독관 550 명이 일하는 백성을 다스렸다.
24. (이집트의) 파라오의 딸이 다뷛 성에서부터 올라와 솔로몬이 그 여자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를 때에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였다.
25.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바치고,
그리고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향을 피웠다.
그리하여 성전 짓는 일을 마쳤다.
26.솔로몬 왕이 에돔 땅 (이스라엘.요르단, 이집트가 바다에 접하는 곳 아카바만 북쪽 끝의) )홍해 바닷가의
엘랕 근처 에쯔욘게베르에서 배들을 건조하였다.
(참조 : 2016 년 현재 에쯔온 게베르 근처는 바닷 물도 맑고 따뜻하여 이스라엘 휴양지가 되어 있다)
27. (페니키아의 투로왕) 히람이 자기 종 즉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을 솔로몬의 종과 함께 그 배로 보내니
28.그들이 오피르에 가서 거기서 금 420 탈란토(14,400 KG) 을 얻어서 솔로몬 왕에게 가지고 왔다.
(참조 :
'페니키아'라는 말은 헬라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phoinós는 헬라어로 '진홍빛'이라는 뜻으로
이들의 주요수출품목이 바로 진홍빛 염료였기 때문이다.
진홍빛은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귀한 색으로
당시 페니키아해안에서만 나는 뿔고동에서 추출할 수 있었다
오로지 교역을 통한 부의 축적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항구도시를 건설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공정하게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가치와 지불내역 등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페니키아인들은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의 장점을 살려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알파벳'을 최초로 만들어내었다.
BC 2세기 페니키아와 로마는 지중해패권을 놓고 대혈투를 벌였다.
120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로마제국은
카르타고를 건물 한 채 남김없이 불태워버리고
페니키아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도 노예로 팔아버렸다.
로마인들에게 페니키아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을 로마인들은 '포에니전쟁'이라고 부르는데,
Poeni는 Phoenicia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Punic war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Poenicus(Phoenician)이라고 불렀다.
페니키아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 토끼sapan가 많다고 하여 토끼나라Sapania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스페인Spain의 유래가 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케나아니/키나아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Kenaani/Kinaani는 바로 Canaan이다!
최초의 알파벳 문서인 성경을 제작한 가나안사람들이
바로 이들 페니키아인이었던 것이다.
히브리인과 페니키아인은 언어도 문화도 같다.
구약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바로 이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페니키아는 안디옥에서부터
이집트의 경계에 이르는 지중해 동쪽 해변의 긴 지역을 가리키지만
원래의 페니키아는 주로 두로와 시돈의 영토를 말한다.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
즉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이다.
여호수아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기 전에 이 지역에는
함의 후손인 가나안 족속이 살았으며 그들은 열한 가족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가장 힘센 가족은 가나안 가족이었다.
바로 그들이 시돈을 세웠고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가나안 족속이었으며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을 페니키아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여호수아와 사울과 다윗과 그 이후의 왕들의 시대에 정복되지 않고
그들만이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후에
그들은 앗시리아와 갈대아에 의해 정복되고
후에 다시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부유하고 문화가 발전한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상업 도시들의 연합체를 구성하였는데
이 도시들은 각각의 영토와 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역을 발전시켰으며
그래서 여러 지방의 산물이 그들의 시장에서
교환되었다(겔27:1-36).
초기 로마의 경쟁국이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으며
다시스도 마찬가지였다(겔38:13 킹흠정, 세바와 드단과 다시스의 상인들과
그곳의 모든 젊은 사자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노략물을 취하려고 왔느냐? 네가 탈취물을 취하려고 네 무리를 모았느냐?
은과 금을 가져가고 가축과
재물을 빼앗아 가며 큰 노략물을 취하고자 하느냐? 하리라, 하라.).
그들의 말은 유대인들의 말과 거의 비슷하며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배를 만드는 일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의 영토는 해안과 레바논 산의 정상 사이에 있었으며
비옥하여 여러 가지 농작물을 많이 내었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다.
페니키아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없으며 단지 가나안으로만 언급된다.
한편 신약성경은 가나안 여인 혹은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 말하는데
(마15:22; 마르코7:26) 이는 곧 시리아의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페니키아가 시리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세계최초로 갤리선을 발명한 해양문명 페니키아...그리고 그 후예 레바논
페니키아는 지중해 동안(東岸)을 일컫는 고대 지명으로 페니키아인들은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조수의 간만이 없고 알맞은 조건을 갖춘 지중해는 해운업을 증진시켰다.
다시 말해 페니키아는 고대 가나안의 북쪽,
지금으로 보면 레바논을 비롯해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지역에 근거지를 둔 고대의 '해양' 문명이다.
페니키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까지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간 진취적인 해상 무역 문화를 가졌다.
그런 만큼 페니키아의 배는 뛰어난 성능으로 유명했습니다.
돛을 달기는 했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의 힘으로 추진력을 얻어 항해하는 갤리선을 최초로
발명한 것이 페니키아인들이었다.
로마자 알파벳의 시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어느 배보다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노를 젓는 갤리선을 이용해
페니키아는 무역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하지만 페니키아 하면 뭐니해도
'페니키아 문자'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양 무역을 통해 북아프리카와 유럽에 전해진 페니키아 문자는
오늘날 가장 많이, 또 가장 널리 쓰이는 로마자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다.
페니키아인은 초기에는 가나안(Canaanites)계(系)가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아계, 후리르계와 혼혈을 이루어졌다.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페니키아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포이니키스, 즉 '자(紫)색의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페니키아인들이 값 비싼 보랏빛 염료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B.C. 1200년 경 페니키아가 해상 무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페니키아는 본래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B.C. 1500년 경까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B.C. 14세기에 들어 히타이트와 아모리인(Amorites)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페니키아는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독자적인 해양 세력으로 성장했다.
B.C. 1250년경에 이미 페니키아는 동지중해연안과 에게해 연안을 장악했으며,
티레, 시돈, 트리폴리, 아라두스, 비블로스 등의 도시 국가들이 크게 발전했다.
B.C. 12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약해지면서,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스스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이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디니아, 이베리아 반도 등을 식민지화 한 것은 물론이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B.C. 9세기에 이르러 앗시리아 세력이 팽창하면서 페니키아의 독립성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기원전 538년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4세기 무렵 그리이스가 성장하자 페니키아는 B.C 350년에 시돈이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리이스의 한 속주가 되었다.
특히 티레는 B.C. 333년 ~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 B.C. 64년 페니키아 전역이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편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리이스의 통치 하에 있었다.
페니키아의 주요 생산품과 교역품
페니키아는 삼나무·소나무 등의 목재, 티레·비블로스·베리투스에서 생산되던
고운 아마포, 고둥의 분비액에서 추출하는 보랏빛 염료와 염색 옷감,
시돈에서 생산되던 자수제품, 포도주, 금속, 유리 공예품, 채색 유기, 소금, 건어물 등을 주로 수출했다.
또한 지중해연안,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귀금속, 상아, 공예품 등을 사고 팔았으며,
식민지였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은을, 사이프러스에서는 구리를 생산해 거래했다.
페니키아 문화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에게해, 시리아의 문명에서 온 소재와 관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페니키아 유적은 주로 평면 부조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비블로스에서 출토된 아히람(Ahiram, B.C. 11세기 말 비블로스의 왕)의 석회암 석관이다.
페니키아의 문화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페니키아 문자이다.
페니키아는 본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사용했으나
B.C. 15세기 경에 22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고유한 문자체계를 발명했으며, 비블로스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그리이스인들이 이 표기법을 채택하여 오늘날 로마자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다.
1) 페니키아의 종교는 다른 나라의 여러 신들과 상당히 혼합되어 있었다.
신들은 이집트, 그리이스 그리고 로마(칼타고)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신들과 동화되어 왔다.
으뜸가는 여신은 아스다롯(왕상 11:5) 이었을 것이다.
두로에서는 엘과 멜카르트를 섬겼다.
성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과 몹시 같았을 것이다.
성전을 지을 때 페니키아의 일꾼들이 상당히 많이 일을 했기 때문이다.
2) 칼타고, 노라, 모티어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자녀의 희생이 몰록에게 바쳐진 신전의 형태가 있었다.
이 제의는 자녀를 불 사이로 지나서 몰록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그의 시돈 여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시돈의 여신인 아스다롯을 섬겼다.
죽은 후의 사람에게 인사하도록 되어 있는 상황이 당시 사용된 장례의식으로 나타나 있다.
가장 희망을 갖고 있는 곳은 유해를 위해서 남아있는 안전한 은신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훌륭한 무덤을 좋아했다.
2)
두로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 주요한 도시였다.
왕국을 통일함으로써 다윗이 페니키아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바다가 필요했고 두로는 농산물들이 필요했다. 페니키아의 무역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는 그들의 무역 중심지로 멤피스를 허락하였다.
그 결과 이사야는 이집트가 두로의 멸망을 몹시 슬퍼할 것이라고 말한다.(예사야 23:5)
3) 이들은 가끔 노예 거래를 했으며 이것이 상인으로서 나쁜 인상을 남겼다.
주전 7세기의 오딧세이는 이를 증명한다.
요엘 3장 6절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본 지경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그리고 아모스는 백성을 에돔에 넘겨준 두로를 비난하고 있다.(암 1:9이하)
1) 두로는 주전 1200년부터 그 도시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당했던 주전 574년까지
눈에 띄는 두드러진 도시였다.
그 후 시돈이 그곳을 지배하였다. 주전 741년에 두로와 시돈이 히람왕과
그의 후계자인 룰리(Luli)왕의 통치 아래서 연합했을 가능성이 있다.
히람은 두로의 왕들 중에 가장 유명한 왕이었다.
(주전 981-947) 이토바알 즉 에드바알은(주전 879-867) 아스다롯의 제사장이었으며
오므리의 집과 두로 사이에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부인이 그의 딸 이세벨이었다.(왕상 16:31)
엘리야가 페니키아의 도시인 사르밧의 과부를 방문한 것이 바로 이 조약 기간 동안이었다.(왕상 17장)
1) 창세기에는 시돈인들의 기원이 가나안의 후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창 10:5)
그들은 지파동맹 동안에 이스라엘에 약간 위협을 주었음에 틀림없었다.
여호수아는 시돈 건너 기브온을 공격한 백성들의 동맹을 추적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들의 영토 밖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수 11:8)
두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두드러진 도시였던 것 같다. 그것은 요새화 된 도시로 언급되었다.
2) 이들의 건축술은 이스라엘보다 굉장히 선두에 있엇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추방 이전과 이후의 성전들을 위해서 자료를 공급했거나 건축하였기 때문이다.
솔로몬관 다윗은 외관상 두로의 왕 특히 히람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히람은 납달리 족속의 과부와 두로의 놋점장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암시하는 중요한 사실은
그 왕이 장인(匠人) 집 출신이었으나 성장하여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히람의 이스라엘과 혼합된 결혼을 통해서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성경에 참고해 볼 때
분명히 드러나는 몹시 주목할만한 일은 선지자의 경고에 반영되어 있다.
히람 왕 이후 성장해 온 것 같으며 특히 추방 이후에 양자간에 상당한 증오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감정에 빠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어떤 조약이나 음모가 시편 83편 7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와 시돈의 멸망을 슬퍼하고 있으나 빈정거리는 가시가 몇 개 들어있는 것 같다.
4) 신약성경에 두로와 시돈을 언급한 구절들은 지리적인 위치를 참고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도시들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가나안 여인 마 15:21이하, 수로보니게여인 막 7:24이하 ) 페니키아는 튼튼히 요새화 되어 있고 부유하고
무역에 분주한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안에 위치해 있었고 항상 신선한 사람들, 자연 자원, 그리고 현명한 상인들로 축복받은 나라이었기에,
그들은 사방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예사야
머릿말
히브리어 제목 : (ישעיה ) 예샤야 (뜻: 하나님이 건져내다)
헬라어 제목 : 예사이아
(영어 제목 : Isaiah )
예사야 : BC740년-680년(웆지야,요탐,아하즈,히즈키야) 사이에 활동한
예루살렘 귀족 출신(므낫쉐 왕의 사촌)의 남쪽 유다 선지자
므낫쉐 왕이 예사야의 사촌이고, 예사야 아버지(아모쯔)는 히즈키야 왕의 동생 이었다.
미카는 요탐(B.C.750-732), 아하즈(B.C.735-716), 히즈키야(B.C.716-687)가
유다를 다스릴 때 일하여서 예사야와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 이다.
미카는 최고 50 년 동안 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모스(1:1), 호쉐아(1:1). 요나(왕하 14:25) 선지자도 BC 8세기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들이 망하는 것을 아타까워서 여러 선지자를 보내어
죄짓는 자기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경고 하였다.
이 때는 경제적으로 넉넉함을 누릴 때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예사야는 므낫쉐 시대에 톱에 잘려서 죽었다(참조 : 히브리서 11:37)
예사야서의 특징: 왕족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문장이 뛰어나다.
북쪽의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남쪽의 이집트 사이에 이스라엘이 놓여 있어서,
주변 왕국의 흥망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흥망이 좌우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왕족 교육을 받은 예사야는 국제 정세에 밝았다,
예사야 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이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뉘우쳐 고치는(회개)가 강조된다.
예사야 1장-39장은 구약의 성격을 띄고.
40-66 장은 구원과 소망, 용서와 회복의 주 내용으로 신약을 요약해 놓은 것 같다.
1장-39장 까지 배경은 앗시리아 이고,
40-55장 배경은 바빌로니아 이고,
56-65 장은 종말론적 이다
(56:7 나의 거룩한 산, 65:17 새 하늘과 새 땅
56:7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데리고 가서,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받으리니,
이는 내 집은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65:17.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
뒷날의 사건들은 완전히 잊혀질 것이다.
루시퍼 (Lucifer, 금성의 헬라어식 표현) : 빛을 옮기는 악마, 횃불의 운반자
계명성(새벽별, 샛별,금성)으로 번역
예사야 14: 12-15에 단 1 번만 나온다.
사역한 선지자들
●포로이전 이스라엘에게: 아모스, 호쉐아
유 다 에게 : 예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에카, 요엘, 미카,하밬쿸,즈판야
앗시리아에게 : 요나, 나훔
에돔에게 : 오바댜
●포로 가운데(586년) 바벨로니아에서: 에즈켈,다니엘 (다니엘은 묵시문학으로 구분)
●포로귀환후(536년)귀환자들에게: 학가이, 즈카랴 , 말라키
예언서들을 기록한 선지자들
시대 선지자 선지서 기록 장소 시대배경
1. 포로이전 요엘 (BC 835-796) 남유다 웆지야 (아하스)
2. 포로이전 요나 (BC 793-753) 니느웨이 야로브암 2세
3. 포로이전 아모스 (BC 760-755) 북이스라엘 야로브암 2세 말엽
4. 포로이전 호쉐아 (BC 746-724) 북이스라엘 야로브암 2세 말엽에서 사마리아 함락직전
5. 포로이전 예사야 (BC 739-689) 남유다 웆지야 (아하스).히즈키야
6. 포로이전 미카 (BC 737-690) 남유다 요탐,웆지야 (아하스).히즈키야
7. 포로이전 니훔 (BC 664-612) 남유다와 외국 히즈키야 말년/므낫쉐
8. 포로이전 즈판야 (BC 640-609) 남유다 요쉬아
9. 포로이전 하밬쿡 (BC 609-600) 남유다 예호아하즈/예호야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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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벨로니아 포로시대 예레미야 (BC 627-80) 정복당한 유다/ 요쉬아/예호아하즈/예호야킴/
예호야킨/찌드키야/총독 그달야/바벨로니아 /느부칻네짜르
11. 바벨로니아 포로시대 다니엘 (BC 605-30) 바빌로니아 예호야킴/예호야킨/찌드키야 -
(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코레쉬
12. 바벨로니아 포로시대 에즈켈 (BC 593-570) 바빌로니아 찌드키야(느부칻네짜르
13. 바벨로니아 포로시대 오바댜 (BC 586이후 ) 예루살렘 멸망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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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바벨로니아 포로귀환 이후 학가이 (BC 520 년 경) - 즈룹바벨 총독/ 마다이 페르시아 다리오 2세
15. 바벨로니아 포로귀환 이후 즈카르야 (BC 520 년 경) 즈룹바벨 총독 / 마다이 페르시아 다리오 1세
16. 바벨로니아 포로귀환 이후 말라키 (BC 430경) 느헴야 총독 / 마다이 페르시아 다리오 2세
예레미야
머릿말
기록 년대 BC 627-586
(히브리어 제목 : (ירמיה ) 이르메야,이르메야후)
예레미아스 (헬라어 발음, 마타이오 복음 2:17, 27:9)
이르메야 이름은 '여호와가 던지다' 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던져 버린 이스라엘을 넌지시 알려준다.
1.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북동쪽 4 킬로의
다뷛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울 때 ,도우지 않았던 아비아달 제사장들의 후손이 많이 사는
아나톹 지역의 제사장 집안에서
유다의 가장 악한왕 므낫쉐가 다스릴 때 태어나서,
요쉬야 왕 13년 부터 (BC 627년, 예레미야 나이 20세쯤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유다 예루살렘의 멸망(BC 586년)까지 약 40년간 사역했다.
예레미야가 40년간 말씀을 널리 알릴동안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70세가 넘도록 아내도 자녀도 없이 홀로 일하였다.
(참조 : 렘 16 :2."당신은 이 땅에서 아내를 얻지 말며(결혼 하지 말아서) 아들이나 딸을 두지 말라.)
예레미야는 바벨로니아 왕이 올 때 항복하라고 권했다.
예레미야는 때가 되면 새 언약을 세울 때가 온다고 예언하고
예레미야는 열방과 바벨로니아도 멸망할 것을 예언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매국노로 다루었으며,
예례미야서는 예레미야가 입으로 말한 메세지를
예레미야의 비서인 바뤀이 기록한 것이다
2. 이집트는 26대 왕조 (BC664-525)가 들어서면서 잠시 부흥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느부칻네짜르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새로운 강자로 떠 올랐다.
약소국으로 이 지역에 있던 유다는, 앗시리아 속국으로 있다가 앗시리아가 몰락하자 ,
짧은 시간 동안 독립을 주장하였다.
3. BC605년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상업통로에 자리잡고 있어서 번영 하였던
카르케미쉬 전투에서 바빌로니아가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쪽유다 까지 집어 삼킬려고 하였던 앗시리아에게 승리 하였다.
바빌로니아는 이집트 점령 후 예루살렘에 들러서
바빌로니아 1차 포로로 다니엘의 세 친구를 포함하여
소수의 젊은 엘리트들과 성전의 금 기명들을 빼앗아갔다.
그 뒤 유다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요동하다가, 결국 바빌로니아의 속주가 되었다.
4. BC 597년 바빌로니아 2차 포로로 에즈켈을 포함한 유다의 1 만명 가량의 귀족들과 기술자들을 잡아가고,
성전의 다른 보물들을 빼앗아갔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 보다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조상들을 원망하고
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만을 꿈꾸었다.
그러나 에즈켈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고
끌려온 포로들은 70년이 되기 앞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
바빌로니아에서 잘살아 남아서 후손들이 돌아가게 해야한다는 것을 알리고 설득하였다.
그 후손들 가운데 학가이, 즈카르야, 에즈라,느헴야 같은 뛰어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5. BC 586년 바빌로니아 3차 포로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비빌로니아 왕이 찌드키야가 보는 앞에서 두 왕자를 죽이고,
찌드키야는 두 눈이 뽑힌채로 비빌로니아로 끌려 갔다.
성전의 두 청동 기둥과 큰 청동 몰통은 깨트려서 가지고 갔다. (왕하 25:12-14)
나머지 사람들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거나, 이집트와 여라나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비록 적국에 끌려 갔으나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다니엘은 바빌로니아에서 선지자로 활동하였고,
즈룹바벨과 느헴야는 행정가로 그리고 민족 지도자로 재능이 뛰어났다.
에즈라는 바빌로니아에서 율법을 공부하여 아론의 16대 후손임을 알아 내고
유다의 3 대 율법학자로 살아 갔다.
바빌로니아를 무느뜨린 페르시아는
다시 1차, 2차, 3차에 걸쳐서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게 하였다.
6. BC 537 년 1차 귀한 총독 즈룹바벨( 에즈라 1: 1-2)
7. BC 458 년 2차 귀한 (에즈라 7:12-26)
8. BC 445 년 3차 귀한 (느헴야 6:15)
총독 느헴야는 예루살렘에 돌아 와서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52 일만에
예루살렘 성벽 무너진 곳을 다시 쌓았다.
예레미야는 강제적으로 이집트로 끌려갔다. (예레미야 40-44장),
이집트에 끌려가서 예언하였다.
예레미야는 성경 밖의 전승에 따르면, 유다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
9.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10.예레미야서는 율법시대가 끝이나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30장-33장) 선지서 이다.
이집트왕 파라오 느코(와 앗시리아 연합국)의 군대가 BC 605년
유프라테스 강 가 (서쪽의 요새) 카르케미쉬에서
새로 일어나는 바빌로니아의 느부칻네짜르 왕에게 패하였다.(예레미야 46:2이하).
메소포타미야 지역을 다스리는 나라가 앗시리아에서 바벨로니아로 바뀌어서,
근동의 역사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자 칼디아인(바벨로니아)들이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왕하24:7) 유다를 속국으로 삼았다.
BC609년에는 요쉬야가 므긷도에서
앗시리아를 도우고자 카르케미쉬로 가는 이집왕 파라오 느코를 막다가 전사하자,
유대 사람들이 요쉬아의 네째 아들 예호아하즈를 23세에 유다 왕으로 세워서 ,
3 개월 유다를 다스렸는데,
파라오 느코가 카르케미쉬 전투에서 지고 이집트로 돌아가면서
요쉬야의 (둘째) 아들 엘리아킴을 왕으로 세우고,
예호아즈는 인질로 이집트로 잡아갔는데 그는 이집트에서 죽었디.
( 요쉬아의 둘째 아들)엘리아킴(예호야킴 ,BC 608-597)은
선지자들을 박해하였고(예레미야 7:26; 36장),
유다 민족의 영적 생활을 타락시켰으며 (예레미야 7:1-15; 13:16-20장-에즈켈 8장 ),
소폭군으로 등장하였다(예레미야 22:13-15; 22:17-19).
예호야킴은 BC 602년에 느부칻네짜르 왕에게 3년을 섬기다가 반역하였으나
이웃의 칼데아,아람,암몬 에서 보낸 습격대의 공격을 받았다(열왕기하 24:1이하).
예호야킴은 느부칻네짜르 왕이 유다에 이르기 앞에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였다.
예호야킴의 아들 예호야킨은 석 달을 다스린후 예루살렘을 포위한 느부칻네짜르 왕에게 항복하였다
(열왕기하 24:8-17; 예레미야 22:24-30; 에즈켈 19:5-9).
예루살렘을 약탈한 후, 바빌로니아 (칼디아) 군주는 수천명의 상류층 사람들을 바빌로니아로 잡아갔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장래 이스라엘의 소망을 나타내는 "좋은 무화과"로 비유하였는데,
이것은 그 땅에 남아 있던 주번자들을 나타내는 "악한 무화과'와 비교를 이룬다.(에례미야 24; 29장).
에즈켈
머릿말
(헬라어 발음 : 에제키엘)
(히브리어 제목 : (יחזקאל ) 에헤즈켈
(영어 : Ezekiel)
에즈켈 뜻: 하나님이 강하게 하다
[1] 시대적 배경
에즈켈의 활동시기는 바빌로니아 포로기 초기인 BC593/592-571/570년이었다
(에즈켈 1:1-2; 29:17).
에즈켈은 부시의 아들로서 제사장 출신이다.
BC 597년 2차 포로로 잡혀갔다 (에즈켈 33:21),
이때는 이미 1 차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이미 3년의 훈련 기간을 마치고
5년 동안 술객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을 때 였다.
하나님의 신(성령)이 임해서 환상을 보기 시작할 때는 잡혀 온지 5년째 되는 때인
이제 에즈켈은 하나님이 환상으로 보여준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해 나가기 시작한다.
예호야킨 왕이 잡혀 온지 5년째에.(에즈켈1:2).
그 이후 중요한 사건이나 환상이 나타난 때도 마찬가지이다.
에즈켈 선지자가 바빌로니아에서 유다의 몰락과 회복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실제로 유다 왕국의 최후를 보고있었다 (예레미야 1:1-3).
이집트왕 파라오 느코(와 앗시리아 연합국)의 군대가 BC 605년
유프라테스 강 가 (서쪽의 요새) 카르케미쉬에서
바빌로니아의 느부칻네짜르 왕에게 패하였다.(예레미야 46:2이하).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강 사이)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스리는 나라가
앗시리아에서 바벨로니아로 바뀌어서, 근동의 역사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자 칼디아인(바벨로니아)들이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왕하24:7) 유다를 속국으로 삼았다.
BC609년에는 요쉬야가 므긷도에서
앗시리아를 도우고자 카르케미쉬로 가는 이집왕 파라오 느코를 막다가 전사하자,
유대 사람들이 요쉬아의 네째 아들 예호아하즈를 23세에 유다 왕으로 세워서 ,
3 개월 유다를 다스렸는데,
파라오 느코가 카르케미쉬 전투에서 지고 이집트로 돌아가면서
요쉬야의 (둘째) 아들 엘리아킴을 왕으로 세우고,
예호아즈는 인질로 이집트로 잡아갔는데 그는 이집트에서 죽었디.
엘리아킴(예호야킴 ,BC 608-597)은 선지자들을 박해하였고(예레미야 7:26; 36장),
유다 민족의 영적 생활을 타락시켰으며 (예레미야 7:1-15; 13:16-20장-에즈켈 8장 ),
소폭군으로 등장하였다(예레미야 22:13-15; 22:17-19).
예호야킴은 BC 602년에 느부칻네짜르 왕에게 3년을 섬기다가 반역하였으나
이웃의 칼데아,아람,암몬 에서 보낸 습격대의 공격을 받았다(열왕기하 24:1이하).
예호야킴은 느부칻네짜르 왕이 유다에 이르기 앞에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였다.
예호야킴의 아들 예호야킨은 석 달을 다스린후 예루살렘을 포위한 느부칻네짜르 왕에게 항복하였다
(열왕기하 24:8-17; 예레미야 22:24-30; 에즈켈 19:5-9).
예루살렘을 약탈한 후, 바빌로니아 (칼디아) 군주는 수천명의 상류층 사람들을 바빌로나아로 포로로 잡아갔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장래 이스라엘의 소망을 나타내는 "좋은 무화과"로 비유하였는데,
이것은 그 땅에 남아 있던 주번자들을 나타내는 "악한 무화과'와 비교를 이룬다.(에례미야 24; 29장).
[2] 에즈켈의 인격
에즈켈은 자독 계열의 제사장 집안에서
부지의 아들로 태어났다(에즈켈 1:3; 40:46; 44:15).
에즈켈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끌려간 곳에서 제사장 일을 약 30 살에서 50살 까지 감당 하였다
율법시대에 하나님에게 제사를 바치던 것을 ,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는 것으로 바꾸었다.
(참조 : 제사장으로 일할 나이 30살-59살 까지, 민수기 4:3)
그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을 잘 알고 있었으며,
BC 597년에 바빌로니아로 끌려 갔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에즈켈 1:4-28)
그는 포로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언자와 보초(파수꾼)의 책임을 맡았다(2,3장).
그의 사역은 예호야킨이 잡혀갔던 첫 해인 BC592년부터 22년째인 BC570년까지 계속되었다
(에즈켈 1:2; 29:17).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앞에, 그는 주로 회개와 심판을 외치던 설교자였다
(에즈켈1-24장).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이교적 관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
그는 계속적으로 경고했다(에즈켈 2:3이하; 3:4-11; 13:14:1이하; 18:2,25; 20:1이하).
예루살렘 멸망 후 절망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그는 위로자와 구원의 사자,
내적 종교의 필요성을 주장한 해설자, 및 선지자가 되었다
(에즈켈 33:11; 34장; 36:25-31; 37:40-48).
그는 곡과 마곡이 지배하는 외국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다
(에즈켈 38,39장),
다른 민족들의 회심에 대해서도 예언하였다
- 제사장 에즈켈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이상 (1장)
-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알릴 사항 (2~3장)
- 이스라엘에 내릴 하나님의 징계 (4~5장)
- 이스라엘의 죄 (6~8장)
- 여호와의 빛이 성전을 떠나다 (9~12장)
- 거짓 예언자와 우상숭배자의 심판 (13~14장)
- 당신의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라 (15~16장)
- 당신의 어렸을 때에 당신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라 (16장, 17장)
- 당신들은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18~19장)
- 그들의 눈 앞에서 슬피 탄식하라 (20~21장)
- 이스라엘에 내린 심판 (22~24장)
- 외국나라들에 대한 심판 (25~32장, 35장, 38~39장)
- 나는 나쁜 사람이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33 장 )
-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울 것이다 (34~35장)
- 새 영과 새 마음을 당신들에게 준다 (36~37장)
- 에즈켈 성전 (40~42장)
- 모든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43~48장)
-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물로 사해바다의 물이 잃어 버렸던 성질을 되살아나게 함. (47장)
북쪽 이스라엘(BC912-BC721 년)은 앗시리아에게 먼저 없어졌다.
그 다음에 앗시리아는 마다이(메대)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없어졌다.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쳐들어가서 이긴 다음에 돌아가다가
BC605 년 남쪽 유다에 들러,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다니엘과 그의 동무들을 포함한 똑똑한 소년들을 끌고 간것이 1차 바벨로니아 포로이다.
예루살렘이 부서지기 12년 앞인 BC598 년에 예호야킴의 아들 예호야킨이 18살에 왕이 되었는데,
왕이 된지 석달 만에 예호야킨과 에즈켈을 포함한 10,000 명의
뛰어난 예루살렘 사람들을 바빌로니아로 데리고 갔다. 이것이 2차 바빌로니아 포로이다.
그때 에즈켈의 나이는 25살 이었다.
계속 바빌로니아에 대해서 반란이나 일으키고 말썽 부리던,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BC586 년 무너뜨리고,
포도 농사나 짓고,
땅을 돌아볼 아주 적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만 남겨 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바빌로니아로 끌고 가서 그곳에 흩어져서 살도록 했다.
이것이 바빌로나아 3 차 포로이다.
마타이오 복음
머릿말
마타이오 복음
( 마타이오가 기록한 예수 일대기)
세관장인 마타이오는 세무직 직업으로 보아
그 당시 유대를 식민지로 삼은 로마의 로마어(라틴어)와 유대 사회에서 사용하는 아람어 같은 글을 아는 사람 이었다.
오랜 옛날 부터 전하여 내려 오는 이야기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160 년경 버가모에서 순교한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Papias 60/75-130/165) 에 의하면,
마타이오는 예수의 말씀을 아람어로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유대를 지배한 나라들을 시대순으로 보면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라- 로마 식민지 시대- 예수의 공생애- 유대전쟁- 주후 80년 무렵의 마타이오 복음서의 배경이다.
헬라어 제목 : (카타(뜻 : --에 의한) 마타이온)
馬太 중국식 발음 : 마타이
(예수 : 히브리어 '예호슈아'의 헬라식 발음)
(예수아 : 히브리어, 예수스 : 헬라어, 뜻 : 여호와가 죄에서 건져냄 )
( (죄에서) 건져냄을 뜻하는 단어 : 호쉐아, 예호슈아, 예슈아, 예사야 )
아람어로 메시야 히브리어로는 마시아(구세주),
헬라어(그리이스어)로 크리스토스 이며,
이름이 아니라 '(올리브) 기름 부었다'(건져내는 사람)는 뜻의 맡은 일(직책)의 이름이다.
즉 예수 크리스토는
'죄에서 건져내는 사람 예수' 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크리스토인 이라는 단어는 3 번 나온다.
( 행 11 :26, 26:28, 페트로 알파 4:16 )
유대인들에게
다른 세 복음서 보다 구약 성경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구약 성경 구절을 가장 많이 인용하여,
즉 예수가 메시야 임을 입증했다.
예수의 사람의 조상 족보를 유대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부터 기록 하였다.
( 마1:23/사7:14, 마2:5-6/미5:2, 마2:14-15/호11:1. 마2:17-18/렘31:15. 마2:23/사11:1,
마3:3/사40:3, 마4:4/데바림8:3, 마4:6/시9:11-12, 마4:7/데바림6:16, 마4:10/데바림6:13,
마4:14-16/사9:1-2, 마8:17/사53:4, 마11:10/말3:1, 마12:17-21/사42:1-3, 마13:14-15/사6:9-10,
마13:35/시78:2, 마15:7-9/사29:13, 마21:4/즈카르야9:9, 마21:42/시118:22, 마22:44/시110:1 )
주후 6 세기 무렵 로마의 수도 원장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 470년 -544년 )가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다가 크리스토가 태어난 해를 시작하는 해로 잡아서,
AD(Anno Domini, 라틴어: 주님의 해)가 오늘날 까지 쓰이고 있다.
AD, BC 개념을 처음 들여온 사람은 8 세기 무렵 영국의 역사학자 버드( Bede, 672/3-735)로
자신의 기록에서 BC와 AD로 나누어서 사용하였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왕은 헤롣 대왕(BC37-BC4) 이었다.
헤롣 대왕의 2 남 헤롣 안티파(BC4-AD39, 루카 3:1, 23:7-12, 마르코 6:16-28, 마 15: 1-12)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예수로 부터 여우라 불리어졌고, 십자가 처형 앞서서 심문도 하였다.
마르코 복음 662 구절 가운데 600 여개가 마타이이오 복음에도 있다.
마타이오는 기본적으로 마르코의 양식을 따르면서 상세한 자료를 더하여,
마르코 복음의 약 2배에 달하는 마타이오 복음 1069 절을 기록하였다.
마타이오는 예수라 이름지어 부르기를 '다뷛의 자손' 이라고 10번 사용했다.
마르코와 루카는 합해서 7 번 사용했다.
예수는 헬라어로 가르치지 않고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사도 요한의 헬라어 문체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특색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사도 요한은 아람어와 헬라어 2 개 국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스라엘 나라 설명 ***
신약시대 때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여서 로마에서 유대에 보낸 총독이 다스렸다는 사실을 알고서 읽어야 이해하기 쉽다.
북쪽 아시아(시리아)와 남쪽 아프리카를 동쪽의 "왕의 대로"와 서쪽의 "지중해 바닷가 길"로 이어주는
좁고 기다란 나라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동에서 서로 잘라보면, 서쪽에 완만한 지중해 해안 평야가 있고 이어 중앙산지로 가파르게 올라간다.
중앙산지에는 예루살렘(해발 790 미터) , 헤브론(해발 927 미터) 같은 이스라엘 중요 성읍들이 있다.
중앙 산지를 넘어가면 내려가는 지형이고, 계속 내려가면 요르단강 협곡에 도달한다.
이곳은 해수면보다 400m 아래로서 지구 상에서 가장 낮다. 계속 동쪽으로 가면 요르단의 가파른 고원으로 다시 올라간다.
이스라엘 동서 단면도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잘라보면, 북쪽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헤르몬산’이 있다.
해발 2,236m인 헤르몬산의 년간 강수량은 1,600mm 로서, 항상 푸르른 지역이다.
헤르몬산의 물은 급하게 내려가면서 해수면 아래 -210m에 있는 갈릴리호수에 도달한다.
갈릴리 호수의 물은 ‘요단강’을 흘러서 최종적으로 해수면 아래 -418m에 있는 사해에 이른다.
사해에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라엘 국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네게브사막’이 있다.
네게브사막 남쪽 끝에 ‘에일랏(Eilat)’ 이라는 항구도시가 있는데 년간 강수량이 24mm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의 국토 모양은 남북의 길이가 500km인, 길고 뾰쪽한 나라이다.
이 작은 나라의 년간 강수량이 최북단은 1,600mm이고, 최남단은 24mm로 그 차이가 아주 크다.
간추린 이스라엘 역사
<#성경의예언들>
이스라엘, 예루살렘, 유대인은 왜 멸망했나
솔로몬 성전 건축: (952 B.C.)
바벨론에 의해 파괴: (587 B.C.)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 (515 B.C.)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 성전을 모독: (168 B.C.)
유대 독립군 마카비 혁명: (166-160 B.C.)
헤롯 성전 재건: (20 B.C. ~ A.D. 26)
헤롯 성전 최종 완공:( A.D. 67)
예루살렘 멸망: (A.D. 70)
<유대 1차 반란 전쟁(66-73)>
67년 강도단인 시카리(Sicrrii),
극우저항단체인,
열심당(Zealots)이 연합하여 내란
67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6만 병력 이끌고 예루살렘 진군
70년 봄 그의 아들 타이투스가 이끄는 4개 군단 예루살렘 포위
70년 8월 30일 전쟁 종식되고,
약 10만 여명의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로마의 콜로세움을 건축하는 노예로 전락
73년 마사다 최후 항전.
<제2차 유대전쟁(132~135년)>
랍비 아퀴바와 바르코크바의 승전
하드리아누스(Hadrian, 117~138 A.D.)의 분노,
유대인 마을 985개를 초토화하고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60만 명 이상 살육 하였다.
시오니즘에 의해 1948년 5월에 이스라엘 독립 때까지
거의 2,000년 동안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신구약 성경에서
구약에서는 '유다'로 표기하고
신약에서는 "유대" 로 표기했다.
유대는 헬라어로 '유다이아' 로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돌아 온 다음 부터,
사람들에 의해 다시 세운 지역으로,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직경 약 40 킬로 도 되지 않은 작은 지역 이었다.
어떤 책에서는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 가운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간다고 예레미야가 처음 예언 했으므로,
' 유대' 인이라고 첫번째 불려졌던 사람은 예레미야 라고 했다.
인구도 BC522 년 즈음에는 약 2 만명을 넘지 못했다.
다음 부터 차츰 커져서 BC440년 느헴야 시대는 약 5 만명,
알렉 산더 BC331년 때는 남쪽 이두메에도 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신약 시대에서 유대는 요르단강 서쪽을 로마가 3개(갈릴라이아,사마리아, 유대)로 나누어
유대라 불렀다.
‘유대 사람’을 가리키는 영어의 Jews는 어원적으로
히브리어 ‘예후다’(유다)의 파생어 ‘예후디’(유다 사람; 에스테르서에 43회)에 기원한 것으로
야콥의 4째 아들 이름으로,
유다 땅 (다음에는 유다 지방) 출신을 유대 사람(Judean)이라 불렀고,
이것이 헬라어로 ‘유다이아’로,
다시 라틴어 ‘유대우스’, 결국 중세 영어의 Iewe에서 오늘의 Jew로 음역되었다.
한글성경이 구약에서는 ‘유다인’으로, 신약에서는 ‘유대인’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32회 사용된 ‘히브리’(이브리)라는 단어의 어원을
아브라함의 조상 ‘에베르’(창 10:21)나,
혹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에베르) 카나안으로 온 조상 아브라함이나(예호슈아 24:2, 3),
고대근동의 용병으로 떠돌아 다니는 것을 한 집단 난민인 하비루(Habiru)와 연계 한다.
(창 14:23; 삼상 13:3, 7; 14:6-7, 특별히 14:21절은 또렷이 이스라엘인과 히브리인을 구별하고 있다;
29:3; 요나 1:9 참조).
이 용어가 주로 외국인들에 의해 이스라엘인들을 지칭하는 별칭과 비웃는 의미로 사용된 것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참조. 창 37-50장; 출 1-15장, 삼상).
신약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인 ‘헬라파’(헬레니스테스)와
구별된 ‘히브리파’(헤브라이오스) 유대인의 경우에서처럼(행 6:1),
주로 언어적인 측면에서 히브리어/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코린도 베타 11:22; 특히 ‘이스라엘’과 구별된 ‘히브리인’, 필맆포서 3:5).
따라서 ‘히브리어/아람어로’(헤브라이스티, 요 5:2; 19:13, 17, 20; 20:16; 계 9:11; 16:16; 참조.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현대히브리어로 ‘이브리트’)라는 표현이 이를 더 뒷받침해 준다.
고전 히브리어(Classical Hebrew)인 고대성경히브리어(Archaic Biblical H., 주전 10-6세기),
표준성경 히브리어(Standard Biblical H., 주전 8-6세기), 후기히브리어(Late H., 주전 5-3세기),
사해문서 히브리어(Dead Sea Scrolls H., 주전 3 - 주후 1세기),
미쉬나 히브리어(Mishnaic H., 주후 1-3/4세기)의 변천을 지나
중세 히브리어(Medieval H.), 특히 티베리아히브리어/마소라히브리어(Tiberain/Masoretic H.
주후 7-10세기)를 거쳐 19세기 초 독일의 ‘하스칼라’(Haskalah,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엘리에젤 벤 예후다(Eliezer Ben-Yehuda, 1858-1922)가
1881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와서 특별히 ‘제2차 이민’(Second Aliyah, 1904-1914)의 탄력을 받으며
미쉬나 철자법에 세파르디(Sephardi) 히브리어 발음을 기초로
‘현대히브리어’(Modern H. 혹은 Israeli H., New H., Standard H., Israeli Standard H. 등 다양하게 불리움)
을 창안하고, 영국 통치 아래서는 1921년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공용어로 채택되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지금까지 유대인의 공식 언어가 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기 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1909년 텔아비브(요페)에 60 여 가정 250명의 유대인이 도착 하였다는 기록이
2020년 현재 텔아비브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안에 남아 있다.
1948년 까지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렸던 나라들
로마(70-313년)/비잔틴(313-636)/아랍(636-1099)/십자군(1099-1291)/맘루크(1291-1516)/
오스만 터어키(1516-1917)/영국(1917-1948) 1948년 5월 이스라엘 나라를 세움.
1894년 까지 이스라엘 나라를 현재의 땅에 세울 것이라는 것을 꿈도 꾸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나름대로 각 나라의 풍습에 물들어 가면서 살아들 갔다.
1894년 10월
프랑스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 출신 드레프스는 장교 였지만
단지 유대인 이라는 이유 때문에 엄청 억울하게 감옥 살이를 하였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시오니즘 운동을 하였다
1 차 대전이 끝이 나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이 다스리고 있었다.
2 차 대전이 한창일 때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프랑스 , 도이칠란드 등
유럽 여러나라에서 반 유대 사상이 나타 났다. 특히 히틀러는 600 만명 이라는 엄청난 유대인들을 학살 하였다.
2 차 대전이 끝이 나고 1947년 유엔에서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땅에 세운 다고 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나라를 텔아비브(요페 ) 박물관에서
이스라엘 초대 수상 베구리온이 선포 하였다
텔아비브 시내 인구는 405,300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텔아비브(뜻 : 봄의 언덕, 에즈켈 3:15 에서 만든 이름)의 규모는 커졌고 ,
2007 년 중동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가 되었다
나라가 세워 지자 마자 중동 국가들과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도록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자기들이 돌아 갈 땅이 없으니까.
1968년에는 동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자리)도 빼 앗았다.
그리하여 2018년에 이르렀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국가 나라를 선포할 때 인구는 80만명 가까이 였으나,
2022년 이스라엘 인구는 960 만명으로
계속 다른 나라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남북 길이 500 킬로 동서 길이 90 킬로 북위 30-33 도 (제주도 33 도)에 놓여서,
여름은 기온이 높고 건조한, 비가 적게 오는 기간이 계속되고,
12월에서 3월 사이 겨울은 약간 따뜻하면서 지중해 쪽에서 편서풍이 불어서
비는 서쪽에 뿌리고 동쪽에는 거의 비를 뿌리지 않는 지중해성 기후이다.
동쪽에는 4월과 9월 사이 사막 열풍이 불어 오는 예루살렘 남쪽 40-130 킬로 길이의 유대 광야이다
연간 강수량 500-700mm
(건조지역 300-400mm,사막250 mm미만, 갈릴라이 800-1,000mm,
예루살렘 800mm 사해 주변 50 mm미만 ),
이스라엘은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논 농사는 없고 밭 농사 뿐이다
땅은 석회암 지대가 되어서 천연적인 동굴이 많다
성경에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번 나온다.
시리아-아프리카 지진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80-100년 마다 큰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으로 많은 유적들이 파괴 되었다.
시편 46편 3절에서 (지진 다음에 쓰나미 현상으로 지중해) 바닷물이 솟굳치고 뛰놀아 밀려 오거나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겁낼 것 없다. (셀라)
(참조: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 현상이 닥쳐도 겁날 것 없다는 뜻)
예수 당시에 로마에서 이스라엘에 보낸 총독 폰티오 필라토가 머물렀던
지중해 옆의 행정수도 카이샤레이아도 2014년 현재 지진으로 다 부서지고 일부 시설만 남아 있었다.
지중해 옆의 카르멜 산에서 약 40 킬로 남쪽에 건설한 카이샤레이아에는
카르멜 산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도교 흔적도 남아 있다.
비가 적게 내리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는 겨울의 우기 때 물을 받아서 저장 하는 곳이 많이 있으며,
빗물을 모아서 빗물 모으는 방법도 엄청 많이 있다.
풀과 나무가 거의 자라지 못하는 (사막 비슷한) 남쪽 지역의 광야(황무지) 70 % 이다.
모쉐의 출이집트 시대 법궤를 만든 쉬타 나무는
건조한 기후에 살아 갈 수 있게 뿌리가 70 미터 정도 내려 간다고 한다.
유대인의 절기 달력은 우리나라 음력과 거의 같다고 한다
초막절(7월 15일)은 우리 나라 음력8 월 15일 추석과 같은 날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는 9월 -12 월 겨울 철 이라서 나뭇 잎은 다 떨어지고 풀만 파릇 파릇하다고 하였다
그 때에 내리는 비를 이른비라고 성경에는 이야기 한다.
우기라 하지만 내리는 비의 양이 적어서 우산은 쓰지 않고
큰 모자만 쓰고 다니면 좋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에는 비가 적게 내려서 그런 비를 맞으면 좋다고들 한다고 한다
내가 이스라엘에 2014년 12 월 달에 갔는데
그런 풍경 이었다
건기는 2-7 월 달인데
보리나 밀을 그 때에 추수 한다고 하였다
그 비를 늦은 비라 하였다
서쪽은 지중해, 동쪽은 아라비아 사막으로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 쪽 나라들의 무력에 시달려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 키워 갔다.
아라비아 예멘에서 이스라엘 지중해 연안의 가자 항구 까지 6 개월정도 걸리는 향로 길이 옛날 부터 있었다.
이스라엘 남쪽 지방에만 매 30 킬로마다 "아브닷" 이라는 목욕도 하면서 쉬어 가도록
향로길 대상들을 보호해 주고 세금을 받는 곳이 5 군데나 있었다"
아브닷"에는 낙타를 몰고 향로와 유향을 싣고 가는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여러개의 방들이 마련 되어 있었다.
갓 태어난 예수를 찾아 왔던 동방 박사들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왔다.
참조 : 이강근 성지 여행.
면적은 약 22,000 kM2 로 한 반도 면적의 1/10 밖에 되지 않지만,
남북 길이가 약 500KM(서울-부산 거리), 동서 폭은 약 100 KM 미만으로 좁고 기다랗게 생겼다
요페(뜻:아름다움)는 텔아비브로 편입 되었고, 이스라엘의 주요 항구가 되어 있다
바닷 길로 오는 모든 것들은 이곳으로 들어 온다
솔로몬 시대와 그앞의 세대 에도 그러하였다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질 때에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던 사람들이 이 항구로 들어 왔다
국토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중해 바닷가쪽으로는 느린 경사를 이루고,
요르단강(뜻: 단으로 부터 흘러내리는 강)쪽으로는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꾸불렁한 요르단강 길이 약360 KM(직선 거리 약190 KM)이다.
지중해 옆의 옛 항구 이었던 곳은 남쪽 가자에서 북쪽 지돈 까지
2017년 현재 좋은 휴양시설이 많다
즉 예루살렘에서 예리코 까지 거리는 32 KM 이지만, 높이 차이는 1,000 미터 이다.
고대 이스라엘 도로는 2 개의 주요 도로가 있었는데, 국제도로인 '지중해 바닷가 길'과,
요르단강 동쪽으로 남북으로 남쪽 홍해 옆 에시온게벨에서 북쪽 다마스쿠스 까지
'왕의 대로' (King's Way)가 구약 성경에 여러번 나타나 있다.
예멘에서 지중해 연안 로마 시대에 (지중해 바닷 가의 이스라엘 행정 수도 카이사에르)항에서
바닷 길로 향료를 실어 나르던 낙타로 2 달반 걸렸다.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관문 텔아비브(욮페)에서 자동차로 동쪽으로 약 1 시간을 달리면,
해발 800 미터에 위치한 예루살렘(뜻:평화)에 도착하고,
거기서 자동차로 약 30 분 정도 달리면 지구에서 가장 낮은 해발 -300 미터에 위치한 예리코가 나타나고,
거기서 남동쪽으로 가면 해발 -400 미터에 위치한 사해가 보인다.
예리코는 오아시스 이다.
예리코 주위에 대추야자 나무들이 많고,
예리코 지역에서 일하였던 엘리사 물이 그 옆으로 많이 흘러 가고 있다.
2014년 현재 예리코는 고고학적 발굴을 하느라,
흙더미와 둘러친 울타리 밖에 다른 것은 볼 수 없다
2014년 예리코 인구는 약 2 만명이다. 팔레스타인이 많이 산다.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사해 바닷속 약 20 미터에 위치해 있다.
지중해에서 불어 오는 편서풍이 서쪽 지중해 바닷가 지역에는 넉넉한 비를 뿌려주지만,
해발 600- 1,000 미터의 서부 산악 지대를 넘지 못하고 동쪽으로 가면서 사라진다.
보통 90 %의 비를 서쪽에 뿌리고, 나머지 10 %의 비를 동쪽에 뿌린다.
이런 편서풍과 남쪽에서 불어오는 힘센 더운 바람 때문에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동쪽에 유대 광야가 만들어 졌다.
뛰넘절이 있는 양력 4 월 부터 초막절이 있는 10 월 까지는 건기이기 때문에
풀이 잘 자라지 않고 10월 초막절(추수 감사절)이 지나면
이른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풀을 잘 자라게 한다.
헤르몬산(해발 +2760 미터), 에발산(해발 +940 미터), 그리짐산(+854 미터)
(에발산 꼭대기와 그리짐산 꼭대기 거리 2.4 KM)
우리 나라로 치면 위도가 제주도(33도) 보다 남쪽(예루살렘 32도)이기 때문에, 겨울에도 대한민국보다 따뜻하다.
사해는 해발 -400 미터에 위치하기 때문에 12월에도 사해에 들어갈 수 있다.
사해 근처도 거의 같은 기온으로 12월에도 건조하고 따뜻하다.
예루살렘은 지대가 높기 때문에 겨울에 가끔 눈도 온다고 했다.
이슬람 지배하에서 평화롭게 살던 유대인들과 아랍이 갈등하게 된 것은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2000년 동안 눈물 흘리며 남몰래 기도하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질 때가 왔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하였다.
1897년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헤르츨은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하였다.
처음에는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 참석하였지만, 점차 전 세계 유대인들이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1917년 영국으로부터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지지를 얻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1925년 3월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천 명이었으나,
1933년에는 23만 8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갑작스러운 유대인의 증가는 아랍인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시온주의는 더욱 불붙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날마다 먹는 것은, 밥이 아니라 빵이다.
가운데가 텅 비어 있어 거기에 온갖 다른 것들을 넣어서 먹을 수 있다
헴버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스라엘에는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벼 농사가 없다.
기존 성경에 "떡" 으로 번역 해 놓은 것은 중국어 성경 병( 餠 떡병)을 참조 했기 때문이다.
1900년 대 초에는 조선에서는 떡은 쉽게 알 수 있었으나 빵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쌀 가루를 만들어서 떡을 해 먹기는 쉬웠으나
밀을 재배하여 가루로 만들어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논이 없고 밭 밖에 없다.
성경에도 밭은 있어도 논이 없다,
쌀 농사는 강수량이 연간 1000 밀리 이상 내리는 곳에만 가능하다.
2014년 현재 인구
(유대인 600만명(75%), 아랍인 160 만명 (21%),러시아인 100만명, 드르드족 기타 40 만명)
종교 : 유대교 80%, 이슬람교 15 %, 크리스토교( 2 %, 로마 카톨릭, 그리이스 정교, 개신교)
언어 :히브리어(공용어), 아랍어(공용어), 영어
2014년 현재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의 예수가 태어난 곳 옆에는,
히에로니무스(영어 :제롬 Zerom AD347-420) 를 기념하는 곳이 있다.
성경을 구약은 히브리어와 (헬라 시대의 세계어인 헬라어) 70인 역에서 로마의 언어 라틴어로,
신약은 (헬라시대 세계어인) 헬라어에서 로마 시대의 세계어인 라틴어로 번역했다.
구테베르크는 1440년 금속 활자를 발명하여 42행 성경 발간 등
마틴 루터가 만든 여러가지를 인쇄술로 널리 알리는데 이바지 하였다.
다시 (로마에서 사용하는) 라틴어에서 영어, 독일어,프랑스어로 번역 되어 세계로 퍼졌다.
조선은 세종이 1446년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반포하여서
1900 년대 까지는 여자들은 공부도 시키지 않고 집안 살림 도와 주며 살았지만,
배우기 쉬운 한글을 빠르게 배워서,
대한민국이 예수 믿는 사람이 많도록 하여, 나라가 발전하는데 남자들과 같은 영향력을 끼쳤다.
마타이오 복음 맨끝에 말라키에서 신약시대 까지 약 400 년간 이스라엘 중간사를 덧붙였다.
(참조: 성경과 관련된 6 개 제국 1.이집트. 2. 앗시리아, 3. 바빌로니아,4. 페르시아, 5. 헬라,6. 로마)
마르코 복음
머릿말
제목 ΚΑΤΑ ΜΑΡΚΟΝ(카타 마르콘, 마르코에 의한)이라는 헬라어 제목에서 나옴.
저자의 이름을 반영.
저자 로마식 이름으로 '마르코'(뜻 : 큰 망치)는 히브리식 이름으로는 '요한'이다( 행 15 :37)
마르코 요한은 당시 유대의 사정에 밝았으며, 아람어에 익숙했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페트로가 아람어로 설교하는 것을 헬라어로 바꾸는 페트로의 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다음에 페트로가 가르친 예수의 행적과 설교인 '마르코 복음'을 기록했다고,
사도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AD60-130)와 폴리갑(AD69-169)이 이야기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의 수 제자 페트로가 아람어로 이야기 한 것을 이야기 한 것을
페트로의 제자 (페트로 알파 5:13) 마르코가
페트로 순교한 다음 헬라어로 적은게 마르코 복음이다.
즉 마르코 복음은 예수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기 시작할 때
페트로가 보고 들은 것을
마르코가 글을 잘 모르던 페트로가 이야기 한 것을 마르코가 글로 적은 것이다.
이집트의 알랙산드리아 에는 2024 년 현재 성 마르코 교회가 있다. 이강근 성지가 좋다 325 회
기록연대 A.D. 65-70년. 페트로 순교(A.D. 65년경) 이 다음에
그의 통역관이었던 마르코가 페트로의 설교를 기록했다는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 of Lyons, AD132~202) 의 주장과,
13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멸망(A.D. 70년)이 미래형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기록 연대의 추정이 비교적 쉽다. 4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 되었다.
A.D64년에 네로는 로마에 화재를 내고, 그 원인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고, 페트로도 순교 되어,
마르코가 페트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페트로가 불러주는대로 마르코 복음을 기록 하였다는 것이다.
기록목적 1. 크리스토가 핍박 받은 것을 기록함으로써
괴로움당하는 외국(특히 로마교회)의 성도들의 용기를 북돋아서 힘을 내게하기 위하여
2.크리스토의 땅위의 행적을 후대에 남기기 위하여
주제 :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예수는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고난과 죽임을 당했지만,
다시 살아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배경 : 네로 황제의 박해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이었다.
로마의 예수 믿는 교인들은 본서의 내용을 페트로의 설교를 통하여 많이 알고는 있었으나,
실제적인 기록물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특징 1.네로 황제(AD48-68)시대에 로마에서 박해 받는 크리스토인을 위해서
2. 간결함-내용과 문체가 매우 단순하고, 저자의 덧붙인 설명이나
해석 없이 사실만을 객관적으로 기록
3. 고난에 중점을 둠- 전체 내용의 1/4 이상을 예수의 고난 기사를 다루었다.
4. 사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기록-예수와 제자들과 군중들의 반응이나 감정을 삭제하거나
덧붙임 없이 사실 그대로 글로 나타내었다.
마르코는 페트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마르코 복음을 기록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세례자 요한 부터 기록하고 있다.
마타이오 복음이 왕으로 온 메시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마르코 복음은 종으로 온 메시아의 수난을 중심으로 펼치고 있다.
마타이오 복음이 예수의 전기를 기록 하듯이 시간순서로 기록하는데 비해,
마르코 복음은 사건들을 주제별로 기록하고 있다.
마타이오 복음과 같이 구약성경은 인용하지 않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가르침이나 비유를 기록하지 않고,
예수가 열심히 일한 것만 다루었다.
독일의 신약성경 비평가 그리스바하(Griesbach, 1745-1812)가
마타이오, 마르코,루카 복음 이 세 성경을 공관복음이라고 한 이후
계속 모든 성경학자들은 이 세 성경을 공관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말은 "같이 본다"는 뜻이며 그래서 세 성경은 공통점들이 많다.
어떤 것은 문자적으로도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세 성경은 아주 다른 특징도 있다.
그런데 공관복음이라고 할 때
같은 내용, 같은 사건, 같은 관점, 용어, 문장 등에 있어 일치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세 복음서가 공통의 자료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는 이야기도 된다.
1835년 라크만(Lachmann)에 의하여 마르코복음 우선설이 나오면서
지금은 누구나 세 복음서 중에 마르코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이라는 설이 마치 정설같이 내려오고 있다.
지난 18세기까지 마타이오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으며
마르코복음은 마타이오복음을 발췌하여 간단히 요약한 것이며,
루카복음은 조금 더 보충한 것이라고 말했다.
18세기말에 들어오면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르코복음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가장 오래된 성경,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이며, 가장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중요한 발견은 마르코복음을 근거로 하여 마타이오복음과 루카복음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르코복음은 661절로 되어 있다.
그 중에 마타이오복음에 606절이, 루카복음에 320절이 병행하고 있다.
마타이오가 채택하지 아니한 55절 중에 31절을 루카가 사용하고 있다.
마르코복음의 24절만이 마타이오복음과 루카복음에 인용되지 않고 있다.
마타이오나 루카가 복음서를 쓸 때 예수의 생애의 많은 사건들을 나열할 때
마르코의 순서를 참고로 하고 있다.
마르코는 신약 성경에 그래도 많이 나타나는 인물이다.
마르코는 예루살렘 상류 계급의 부인인 마리아의 아들로 그의 집은 초대 교회의 집회소로 사용되었다.
그의 이름이 (히브리어) 요한이라는 이름과 (라틴어) 마르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요한, 마르코 또는 요한 마르코로 쓰여지고 있다.
요한이 본명일 것이고, 마르코는 로마식 이름이요, 개명한 이름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의 집은 아주 유명한 집이 되었다.
그의 집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먹은 장소로 유명하고,
펜테코스테(오십(50))절 때 초대 교회가 탄생한 장소였다.
그 후 제자들은 이곳에서 자주 모였으며,
감옥에 갇혔던 페트로가 찾아간 곳도 이 곳 마르코 집의 이층이었다.
이 집은 120명이나 모여 기도할 수 있을 만큼 넓은 2층집이었으며,
집안일을 거드는 하녀가 있을 정도로 부유하게 사는 집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집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도 파괴되지 않아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아주 넓은 홀을 가진 집이었다.
2019년 현재 이 마르코 집의 이층은 기념교회가 있다.
마르코는 예수의 직제자는 아니었다.
후에 마르코는 페트로를 수행하면서 페트로로의 사랑을 아주 많이 받으면서 신앙이 자라났는데
페트로는 이 마르코를 가리켜 그의 제자(아들)이라고 하였다.
페트로 알파 5:13에서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빌로니아에 있는 교회가 당신들에게 문안하고
내 제자(아들) 마르코도 그리하느니라.
(이집트의 카이로에 (BC 664-525년) 바벨론 군이 주둔하였던 곳에 교회를 세운)
바벨로니아의 함께 뽑힘을 받은 교인들이 당신들에게 인사하고,
나의 (믿음의) 제자 (아들) 마르코(마르코 복음의 저자)도 인사합니다.
(참조 : 이강근 성지가 좋다)
그는 유명한 선교사인 외삼촌 바르나바의 생질(조카)이었다.
마르코의 집에 제자들이 모여서 어디로 가는 것을 본 마르코는
예수와 제자들이 간 마르코 아버지의 소유인 올리브 기름짜는 틀이 있는
겟세마니 동산(과수원)으로 찾아갔는데. 그 때 마침 예수가 붙잡혀 가는 것이었다.
마르코복음에는 이때에 한 청년이 베 홑이불을 두르고 주님을 따르다가
무리에게 잡히게 되니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청년이 있다고 쓰고 있는데
이것만이 예수와 관계된 저자 마르코 자신의 이야기라고 본다.
마르코가 본격적으로 교회사에 나타나게 된 것은
파울로와 바르나바가 시리아의 안티옥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 였다.
이때 예루살렘은 아주 큰 가뭄이 들었고, 두 사도는 구제금을 모아서 상경한 것이었습니다.
두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마르코를 데리고 시리아의 안티옥에 왔으며,
이때 안티옥 교회는 두 사람의 사도를 선교사로 세워
키프로스와 아시아(터이키 지역) 지방을 선교하게 되었다.
이때 두 사도는 마르코를 데리고 기프로스 섬으로 갔다.
키프로스 섬은 바르나바의 고향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 때의 전도를 파울로의 제1차 전도 여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마르코는 지중해를 건너 아시아(터어키)팜필리아 지방의 수도 페르가모라는 항구에 이르렀을 때에
사도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하나님은 더욱 더 역사하여서 더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역사로 선을 이루게 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마르코는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마르코는 이집트에 내려가 알렉산드리아에 콥트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마르코의 신앙이나 인격은 페트로를 만나면서 자라났다.
마르코는 페트로를 통하여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페트로도 내 제자(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통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가 마르코의 집에서 모였고,
초대 교회의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페트로였기 때문에 페트로와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인 파피아스는 마르코는 페트로로의 통역자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페트로는 아람어 즉 근대화된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이었고,
세계는 헬라어가 공용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통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르코는 일찍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외국어에 능통하였고,
페트로는 그렇지 못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로마에서 페트로가 설교할 때 교인들은 통역하는 마르코에게 부탁하여
예수의 일생에 대하여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페트로로가 들려준 대로 예수의 일생을 기록하게 되었다.
페트로가 설교하면서 말하던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페트로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마르코를 통하여 남겨놓아서 예수의 공생애가 밝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페트로가 순교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기록한 것이라고 하면 65년 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 후에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순교하였고,
그의 유해는 지중해를 건너 베니스(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로 왔으며
성 마르코성당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는 말을 하고 있다.
당시 마르코복음이 기록될 당시 로마는 그 사정이 아주 좋지 못하였다.
네로의 박해가 한창 진행되었고, 그 때문에 페트로와 파울로 같은 큰 지도자들이 순교하였고,
성도들은 카타곰에 갇히게 되었다.
이런 사정 아래 마르코는 먼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어야 했다.
위기에 처해있는 성도들에게 순교 신앙을 심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죽음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수난 받는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르코가 독자들에게 강조하려는 것은 좀 더 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보다도 사탄보다도 강한 분이었다.
그의 복음서의 마지막에 그는 죽음보다도 강한 분이라고 외치고 있다.
마르코의 중요한 관심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여기 있지 않고 살아났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는 능력이 많아서 죽음까지도 이기고 다시 살아났다.
마르코 복음은 수난의 신학이 아니라, 승리의 신학이여, 승리의 복음(헬라어:유앙겔리온,기쁜 소식)을 증거 한다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 8 일의 기록은 복음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마타이오 21-28장, 마르코 11-16 장, 루카 21-24 장, 요한 12ㅡ21장
베다니아 (토: 옥합 기름부음 받음)
벧파게 (일 : 예루살렘 승리 입성)
성전 (월 : 성전 청결)
성전 (화: 논쟁)
올리브산 (화: 심판)
베다니아 (수: 침묵)
다락방 (목: 마지막 저녁식사)
성전 (금: 고난)
골고다 (금: 죽음)
골고다 (토 : 무덤)
골고다 (일: 부활)
사도행전
머릿말
헬라어 제목 : ΠΡΑΞΕΙΣ ΑΠΟΣΤΟΛΩΝ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 영어 제목 : ACTS
"프락시스(행위,행적,행동)" + "아포스톨로스(사도)"
"프락세이스"는 "프락시스"의 복수주격 표현이며
"아포스톨론"은 "아포스톨로스"의 복수속격(소유격)표현이다.
그리고 영어로 번역하면 "ACTS OF APOSTLES" 이다.
그런데 영어성경에는 그냥 줄여서 "ACTS"라고만 표기한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도들의 설교와 증언모음집이다.
스테판의 설교를 제외하고는, 5개의 페트로의 설교와 4개의 파울로의 설교들이 주요한 내용이다.
아울러 예수 크리스토에 관한 42개의 증언들이 사도행전에 포함되어 있다.
예수가 하늘 나라로 가면 보내 주겠다는 보혜사(뜻: 도움이) 성령이다.(요14:16,26)
성령의 도움으로,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겁도 없이 용감하게 복음(유앙겔리온:헬라어)을 퍼트리는 것이 사도행전의 주제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다.
성령충만함을 받지 않고서, 겁도 없이 용감하게 복음 (유앙겔리온:헬라어)을 퍼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도행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사도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었으니
당신들이 알바가 아니지만 오직 성령이 당신들에에게 임하면,
당신들이 (다이나마이트 같이 폭발력 있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이 말씀을 마치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사도행전 1:7-9
이러한 예수의 명령을 마음 깊이 새겨야한다.
사도행전은 우리 마음에 늘 존재한다. 성령행전이니까.
사도행전 내용은 사도들이 일한 때의 사건 기록이다.
저자 루카는 파울로와 같이 전도 여행을 다녔으므로, 파울로 사도의 관한 내용이 많다.
사도행전을 인물을 중심하여 분류하면
1:-11 장 까지는 페트로가 중심인물이고,13:-28 장 까지는 파울로가 중심인물이다.
페트로는 예수의 12제자의 수제자로써 예루살렘과 유대의 복음화를 위하여 노력한 사람이고,
파울로는 예수의 제자를 핍박하다가 특별한 부름을 받고,
헬라어나 라틴어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외국인 전도를 위하여 힘을 쓴 사람이다.
파울로가 다녀 갔단 모든 곳은 비잔틴 시대에 교회들이 세워 졌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일어 난다.
파울로는 로마가 세계에 만들어 놓은 도로를 따라 다니면서 ,
예수의 복음을 순교 당할 때 까지 알렸다.
본서의 저자는, 루카복음의 저자인 " 루카"이다.
루카는 파울로의 같이 일하는 열심있는 사람으로 제 2차 전도여행하다가 ,
(트로아에서) 파울로를 만나 필맆포에서 전도하였고.
다시 파울로와 합류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 뒤 루카는 파울로와 함께 로마에 가서 그와 함께 있었다.
사도행전에서는 파울로가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 “ευαγγελιον” 유 앙겔리온(헬라어)“ 복음 (기쁜소식)을 알렸다는 내용만으로 끝맺고 있고,
파울로가 풀려남과 순교에 대하여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록 연대를 AD 61 - 63년으로 보고 있다.
“유 앙겔리온“의 유래
페르시아는 B.C. 538년에 제국인 바벨로니아를 정복하고 세계제국의 권좌에 올랐다.
그동안 바벨로니아가 지배하였던 많은 나라들을 페르시아가 인수하고서 행정구역 개편,
납세부과 등 새로운 정책으로 통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후 페르시아는 지배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먼 지방까지 자주 원정을 나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지역을 벗어나 마케도니아(유럽)로 진출하여 거기에서 헬라(그리이스)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헬라(그리이스)는 규모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대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헬라(그리이스) 남자들은
페르시아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기로 최종 결정하고
모두 아테네의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지는 전쟁터로 나가 맞섰다.
당시 전쟁에서 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민족이 멸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항하였다가 패하면 그 결과는 참혹한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개인들의 재산은 모조리 약탈당하고 건물들과 도시들은 불에 타 페허가 된다.
모든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붙잡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간다.
전쟁에서 대항하였다가 패한 나라는 이처럼 비참하게 역사의 종말을 맞는다.
헬라(그리이스)가 페르시아를 대항하여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이제 페르시아에 의하여 헬라(그리이스)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무서운 죽음의 종말을 기다려야 했고
더러는 들이나 산속으로 피난하여 거기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전쟁터의 소식은 감감하였고 헬라(그리이스) 주민들은
매일 불안과 두려움과 함께 마음을 조리고 있었다.
어느 날 전쟁터 쪽에서 멀리 한 군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헬라(그리이스) 아테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 군인을 지켜보았다.
42킬로가 넘는 거리에서 달려온 그 병사는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동포들 앞에 다가와서는 힘없이 쓰러지면서
“승리는 우리에게” 한마디를 웨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유 앙겔리온”하며 웨치기를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큰소리로“유 앙겔리온”하며 즐거워 하였다.
이때의 전쟁을 역사에서는 필로폰네서스 전쟁이라 하는데
그 후 헬라(그리이스) 왕 알렉산더가 B.C.331년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서 세계제국이 되었다.
“유 앙겔리온”은 헬라어 (그리스어)로“ευαγγελιον”으로 표기하는데
ευ는 기쁨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란 뜻으로
이 두 단어를 합하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란 뜻이 된다.
이 단어는 그들이 그 때의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준 그 병사를 생각하며
즐겨 사용했던 새로 만들어진 단어였다.
초대교회에서는 크리스토의 복음의 기쁨이 너무나 크고 위대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약350년전 한때
헬라(그리이스)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유 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크리스토교 복음의 특성
첫 번째 특성으로 복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경험되는 기쁨은 관계된 자들에게만 해당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하거나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쪽은 기쁨이 되지만 패한 쪽은 기쁘지 않다.
그러나 크리스토교 복음은 양쪽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도 기쁨이 되지만 너에게도 기쁨이 되고 그에게도 기쁨이 된다.
부한 사람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이웃나라나 먼 다른 나라 사람이나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한다.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은 세상에는 없다.
그러나 복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하는 신비한 특성이 있다.
복음의 두 번째 특성은 기쁨의 지속성이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그때 잠간이요 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물거품처럼 식어지고 사라진다.
행복을 안겨 줄것 처럼 보였던 그 기쁨은 사라져 없어지고 허전함과 아쉬움만 남겨준다.
잠시 나타나 보였다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온통 쉽게 변하고 사라지고 부패해버리는 거짓된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참 기쁨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은 오래토록 지속하는 참 기쁨을 제공한다.
어제도 기뻐했지만 오늘도 기쁘고 내일도 기쁨이 된다.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어도 기쁨의 감정은 변하지 않고 여전하다.
어려움과 가난과 고난이 닥쳐와도 변하지 않고 핍박이 와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고 빼앗기지도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참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참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참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크리스토 안에서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이해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복음은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제공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신비한 복음의 특성이다.
복음의 세 번째 특성은 큰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제공하는 기쁨들은 순간적이면서도 극히 작은 것들 뿐 이다.
사람들은 유치하고 저급하고 작은 기쁨에 매달려 좋아하고 즐거워한다.
모두 다 허풍스럽고 사소한 것들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처럼 복음의 신비스런 특성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차별을 두려고
“유 앙겔리온“ 이라고 하는 특별한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롬1:16)
오늘날에도 복음이 바르게 전하여 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듣는 자들이 그 내용을 바르게 듣고 이해하기만 한다면
참되고 크고 신비한 기쁨의 삶을 누구나 체험하며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AD 64년의 네로의 핍박이나 AD 70년의 예루살렘 무너짐에 대하여 다루지 않아
역시 이 연대설을 뒷받침 해 준다.
기록장소와 대상
지중해 옆의 항구도시 카이사레이나 로마에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고
일반적으로 모든 크리스토인들이 그 대상이다.
그러나 특별히 데오빌로를 위하여 기록하였다.
기록목적
예루살렘에서 부터 시작되어 로마에 까지 퍼져나간 교회의 발전을 기록하기 위함이며,
유대 사람들에게 크리스토교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논리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 본서를 기록하였다.
또한 헬라의 신비적 다신교에 대하여 크리스토교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
논리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핵심어 및 내용
사도행전의 핵심어는 " 성령과 성장"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에 대하여 30회 이상이나 다루었다.
성령은 신자들을 데리고 가고, 지키며. 보다듬을 뿐 만 아니라, 신자들에게 확신과 힘을 준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숫자와 지적 능력이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를 포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아람어와 유대인
주전 약 6 세기 무렵에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 보다는 그 당시 바빌로니아 언어로 사용된 아람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다음에도 아람어를 사용하였으며,
예수 시대에도 아람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요한의 아들 시므온 에게는 케파( 바위라는 뜻의 아람어),
탈리다(소녀야) 쿰(일어나라)도 아람어,
겓세마니( 기름 짜는 장소 라는 뜻의 아람어),
에바다( 열리라는 뜻의 아람어),
골고다(해골 이라는 뜻의 아람어)
레마 사바크다니!(아람어) (뜻: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랍오니(큰 (대(大) 선생님 이라는 뜻의 아람어) 등이 있다.
* 헬라어와 유대인
주전 6 세기 무렵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사로잡혀 갔다가,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로 돌아 오지 않고 그 곳에 눌러앉아서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주로 바빌로니아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다가
알렉산더 대왕의 동쪽 원정 다음 부터는 헬라어 보급을 받아,
외국에 살던 유대인 대부분은 헬라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10. 티토서
*** 머릿말 *** 헬라어 제목 : ΠΡΟΣ ΤΙΤΟΝ (프로스 티톤, (헬라인) 티토(뜻:존경하다)에게 보내는 편지 ) 기록 연대 : AD : 63-65 기록 목적과 대상 : 파울로가 로마 감옥에서 석방된 후 4차 전도여행으로 그의 소원인 띵끝 스페인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전승에 따르면 루카의 친동생인 티토와 같이 크레타 섬을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고, 개척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어려운 자리에 있는 크레타 교회에서 교회를 돌보(목회)는 헬라( 그리이스) 사람으로, 강하고 담대한 성격으로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하는 티토에게 교회를 돌보는 사람의 길잡이를 알려 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다. 티토는 파울로가 전도하여 예수 믿게 된 믿음의 아들이며 신실한 동역자이다 중대한 임무를 띠고 코린토 교회에 몇 차례나 파송될 만큼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파울로가 그를 크게 아끼고 그로 인하여 위로 받을 정도로 매사에 헌신적이고 진실한 사람이다 말썽 많은 코린토 교인들을 잘 인도하고 그들에게 존경받은 것으로 보아 현명하고 열성적이며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크레타 교회의 부족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크레타 교회에 남겨질 정도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다 파울로의 전도 사역 초기에 복음을 영접하고 파울로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다 안티옥 교회의 대표로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였고 코린토 교회에 몇 차례 파송되었으며 크레타 교회에서 사역하였다 파울로 부터 서신을 받았으며 니코볼리에서 파울로 합류하였고 달마티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티토의 헌신은 고난 당하는 파울로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반목과 질시로 혼란에 처해 있던 코린토 교인들에게 큰 감화를 주어, 그들을 화목케 하고 바른 신앙으로 인도케 하였다 이처럼 열심으로 주를 섬기고 간절함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의 모습이 될 때, 그것을 보는 우리의 이웃과 우리의 교회가 크게 도전을 받을 수 있으며, 우리로 인해 크게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티토가 파울로의 동역자로서 주의 복음을 외국에 널리 전파하고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파울의 두터운 인간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티토는 파울로 서신에 13회 기록되어 있다. (갈 2:3, 코린도 베타 2:13, 7:6, 8:23 기타). 전승에 따르면 크레타 섬의 첫 주교이다. 사도행전과 파울로의 편지들에 언급되어 알려지게 된 티토는 개종한 크리스토교인이었는데, 파울로는 예루살렘에서 보수주의자들이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했을 때, 티모데의 경우와는 다르게 티토가 페리토메(할례)받도록 허락하지 않았다(갈라티아 2장). 또한 코린토 교회와 관련된 일에서 그는 파울로에게 칭찬을 받았다. 티토는 특히 유대의 가난한 크리스토교인들을 위해 헌금 모으는 일을 맡아서 파울로의 대리로 코린토 교회에 파견되어 티모데가 하던 일을 대신하게 된다. 티모데 베타 4장 10절에 따르면, 전도하러 (유고슬라비아) 달미티아로 갔다. 그러나 주교 생활의 규범을 담고 있는 티토에게 보낸 파울로의 편지는 티토가 바울로의 대리자로 크레타 섬에서 열심히 사도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티토는 크레타 섬의 주교가 되었다. 티토의 유해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크레타 섬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중간에 있는 섬이다. 파울로 당시에 많은 사람이 크레타 섬에 살고 있었다. 섬의 가장 높은 산의 높이는 2,100 미터 이다. 크레타 섬은 지중해안에 있는 것으로서 아프리카 해안 까지 300 킬로, 그리이스 본토 까지 300 킬로, 소아시아 쪽으로도 비슷한 거리로 떨어져서 무역으로 발달한 도시국가 이었다. 길이가 258㎞요, 너비가 11㎞에서 56㎞나 된다. 그 섬의 총 면적은 8,285㎢ 로 제주도 4.5 배 크기 며 북위 35도 (부산과 비슷한 위도)에 있지만 지중해성 기후로 온화하다. 섬의 북쪽에는 협착하지만 비옥한 해안 평야가 연안 산맥으로 뻗어 있으며, 그 뒤에는 그보다 좀 더 높은 또 하나의 산맥이 놓여 있고, 세번째의 산맥이 뻗어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프실로리티(Psiloriti)산으로서 그 높이는 해발 2,458m 이다. 이 산이 바로 고대의 그리이스 전설에서 이교의 주신 제우스가 탄생했다고 하는 고대의 이다(Ida) 산이다. 한국에선 크레타의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해외에서 크레타는 손꼽히는 여행지다. 특히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가지. 매년 외국 관광객 수백만 명이 크레타에 방문한다. 매년 트립어드바이저가 전세계 여행자들에게 투표를 받아 '세계 최고의 여행지' 랭킹을 매기는데, 크레타는 이 랭킹에서 늘 최상위권에 랭크된다. 최근 들어 크레타섬에 방문하는 한국인 숫자도 점차 늘고 있다. 크레타섬 현지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행사도 있다. 아테네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크레타섬에 갈 수 있다. 하니아, 이라클리오에 각각 공항과 항구가 있다. 크레타섬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사마리아 협곡, 크노소스 궁전, 하니아 항구, 엘라포니시, 발로스, 프레벨리, 아르카디우 수도원 같은 곳들이 있다. 크레타 섬과 크노소스 궁전 2018년 현재 크레타 섬은 크노소스 궁전 때문에 유명한 관광지 이다 잊혀있던 환상의 섬 ... 크레타섬과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전은 미케네 문명이 사라지면서 우리에게는 잊혀진 문명 잊혀진 역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단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에서 만들어진 환상속의 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영원히 잊혀지리라는 법은 없는 듯 크노소스 궁은 1900년 이후 영국인 아서 에번스 경에 의해서 우리에게 살아있는 역사라고 밝혀졌다. ♧ 하인리히 슐리만과 아서 에번스경 살로몽 레나크 “에번스의 발굴은 고고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의 발굴 덕분에 우리는 슐리만의 발굴을 통해 알게 된 문명보다 훨씬 더 앞서고 더 찬란한 문명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에번스의 발굴은 에게해의 고대 문명에서 페니키아인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 모든 학설을 뒤엎어버렸다.” 트로이․미케네․티린스를 발굴해 전설을 역사로 바꾼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의 꿈을 이룰 네 번째 무대로 미궁과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고향인 크레타를 점찍었다. 미노스왕의 궁전은 크레타섬 크노소스의 산기슭에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은 도기 파편이 널려 있고,올리브 나무들로 뒤덮인 자갈밭이었다. 발굴 허가는 쉽게 얻었지만 땅주인들이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값을 터무니없이 높여 부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슐리만과 다른 땅주인 사이에 끼어들어 사기 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슐리만은 화가 나서 아테네로 돌아갔다. 그는 미노스 왕궁이 크노소스에 있다고 확신하고 다시 가려고 했지만 1890년 나폴리의 한 광장을 지나다가 쓰러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백만장자였지만 옷차림이 아주 초라해 사람들이 그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아 죽었다). 크노소스를 발굴하는 행운은 아서 에번스에게 돌아갔다. 1851년 영국에서 태어난 에번스는 고고학에 관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선사시대 고고학에 조예가 깊은 지질학자였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모험가 기질이 있던 그는 1870년대 말기부터 ‘맨체스터 가디언’의 통신원이 되어 발칸 반도를 돌아다니면서 고대 유물을 수집하고,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저항하는 슬라브 민족의 투쟁을 도왔다. 1881년 오스트리아 당국에 체포되어 발칸에서 추방된 그는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팔리는 미케네 출토 골동품에 매료되었다. 주로 무늬가 새겨진 작은 인장과 보석이었는데, 골동품 상인들은 그것이 크레타섬에서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인장과 보석에서 그는 ‘최소한 두 가지 문자 체계로 기록된 흔적’를 발견했다. 그는 선형문자 B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크레타의 문자 문명 유물을 좀더 많이 발견하기 위해 1884년 크레타로 갔다. 에번스는 슐리만이 발굴하려던 크노소스를 찾았다. 그 역시 그곳을 파헤치면 뭔가 엄청난 결과가 나오리라고 예감했다. 그는 2년여 동안 땅 주인들을 설득해 1896년 그 땅을 전부 사들였다. 호메로스가‘오디세이’에서‘포도꽃 피는 풍요한 섬,바다에 떠있는 부유한 나라’라고 노래한 크레타. 그곳에서 제일 큰 도시 이라클리온 항구에서 남쪽으로 6㎞ 떨어진 올리브밭에서 1900년부터 시작된 발굴은 그로부터 3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첫 삽을 뜬 날 에번스는 건물과 유물을 발굴했다. 둘째날에는 퇴색한 벽화들이 그려진 가옥을 찾아냈다.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얼마 후 그는 ‘크레타’라고 표기된 점토 서판 2,000개를 찾아냈다. 그 뒤를 이어 벽화와 조각상들이 나왔다. 그는 기쁨에 들떠 런던의 ‘타임스‘신문에 전보를 쳐서 자기가 ‘미노아 문명’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미노스 왕에게서 딴‘미노아(미노스의)’라는 말이 크레타섬에 있었던 문명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아이디어에 흡족해 했다. 얼마가 더 흐르자 크노소스 유적지는 8,100㎡ 넘게 확장되었다. 나중에는 24㎢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임이 드러났다. 이를 두고 에번스는 다음과 같이 추리했다. 그 성은 슐리만이 미케네와 티린스에서 발굴한 성들과 같은 시대의 것이며 서로 관계가 깊다. 즉 에번스가 발견한 성이 훨씬 당당하고 장엄한 것으로 미뤄 크레타가 에게해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들의 중심지였고 미케네와 티린스에 있는 성들은 거기에 복종하는 지방도시였다. 왕궁은 아주 큰 네모꼴 안뜰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방이 수백 개 있었다. 벽은 돌로 되어 있었고 평평한 지붕을 둥근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층마다 방과 복도,넓은 홀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다가 길을 잃는 일이 자주 생겼다. 미궁에 대한 전설을 모르는 사람조차 미로(迷路)라는 말을 저절로 떠올릴 지경이었다. 에번스와 그의 동료들은 특히 주택의 안락함에서 미노아 문명이 지니닌 현대성을 확인했다. 고고학자들은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 궁전안에서 방의 환기와 밝기를 책임지는 채광시설과 물길을 끌어온 인공 수도관 시설, 빗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시설을 발견했고 미노스 궁전의 동쪽 측면에 있는 현대식 화장실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틸리소스나 팔라이카스트로에 살던 미노아 문명인의 소박한 주거지에도 현대 부르주아 계층의 편리함과 호화로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에번스와 그의 동료들을 끊임없이 놀라게 했다. 막심 콜리뇽은 방들의 장식과 안락함, 특히 가변식 벽이 있는 거실, 욕실, 방을 서늘하게 하는 물 저장 탱크, 전망이 좋은 베란다 등 세심하게 갖춰놓은 설비에 대하여 언급했다. 아돌프 레나크는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미노스는 궁정 회랑 위로 복잡하게 얽힌 모든 계단과 모든 복도로 통하는 3층을 올렸다. 그리고 무용과 투우를 위하여 계단석으로 둘러싸인 포장된 마당이 있었다. 옥좌가 있는 넓은 알현실 옆에는 우리가 보기에도 위생에 전혀 문제가 없는 요길과 심지어 세면대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안락함과 세련됨은 유럽의 중산계층도 누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므로 매우 놀랍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또한 에번스는 발굴 초기에 크레타섬에서 그가 찾고자 했던 것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나중에 ‘선문자B'라고 부르게 된 문자가 기록되어 있는 100여개의 점토판들이었다. 이어서 상형문자와 선문자 A로 쓰여진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에번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 문서들은 왕실의 기록, 법령집, 서신, 계약서, 법정 판결문이나 상품목록들이라고 한다. 그는 궁전에서 18개의 창고를 발견했는데, 그중에 몇몇 창고에는 아직도 저장용 항아리들이 남아 있었다. 1909년 이후 에번스는 훈장을 받고 1911년에는 작위를 수여받았다. 1941년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에번스는 자신의 삶을 고고학에 바쳤다. ♧ 완전히 다른 문명 (미케네보다 앞선 문명) 아서 에번스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이 미케네 문명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궁전은 요새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았고 발굴해낸 수백개의 유물 가운데 전쟁이나 군대와 관련이 있는 것은 극히 적었다. 대부분의 도자기가 본토에서 발견된 도자기와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에번스는 점차 이 라비린토스 궁전의 주인이 미케네인일 것이라는 생각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월이 더 흐른후에 미케네인들이 그곳에 살았을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른 문명을 상대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에번스는 첫 번째로 그것이 미케네 문명의 지역적 변종이 아닐까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는 미케네인들에게 순식간에 정복당한 토착문명, 즉 그 유명한 에테오크레타 문명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 문명과의 유사점이 없는 숱한 유물들을 보면서 그는 마침내 이것이 미케네 문명과는 무관한 문명, 특히 미케네 문명보다 앞선 시대의 문명일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에번스는 그가 발굴해낸 것들이 슐리만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05년에 열린 제13회 선사시대 고고학 및 인류학 국제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을 계승한 후계자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상고시대에 대한 연구에서 진전을 이룬 바이다. 슐리만의 발굴 이후 미케네 문명의 기원을 둘러싸고 의문이 제기되었다. 에번스는 더욱 오랜 옛날의 문명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북유럽 기원론과 근동 기원론을 일축해버렸다. 금제 봉납 양날 도끼 미노아인들이 이 양날도끼를 '라브리스(labrys)'라고 불렀음. 도끼는 미노안 종교의 신성한 상징임. 이 궁정의 동쪽 면의 중간에 거대한 계단(Grand Staircase)이 있는데 , 이것을 따라 내려가면 동쪽 날개(East Wing)에 이른다. 이 동쪽날개에는 왕과 여왕을 위한 분리된 왕가의 아파트들(Royal Apartments)이 있다. 거기에는 훌륭한 프레스코화와 욕실, 화장실, 왕좌의 방들이 있는 거대한 방들이 있다. 이 남쪽에는 양날도끼의 사당(Shrine of the Double Axes)이 있다. 궁전의 이 날개는 5층의 높이로 올라가 있다. 왕가의 아파트의 북쪽에는 도기류와 보석 세공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기술자들의 작업장이 있다. 명판(銘板, tablets)이 있는 기록보존소(Archive Room)가 궁전의 북쪽에 있으며, 또한 채색된 황소 부조(bull relief)가 있는 발코니와 극장 지역이 북쪽에 있다. 이 극장지역에는 왕가의 길(Royal Road)이 있는데, 큰 궁전(Great Palace)과 작은 궁전(Little Palace)을 북동쪽 끝에서 연결해준다. 궁전 주위에는 궁정 관리들과 부유한 시민들의 대저택이 있는데, 구조가 화려하고 많은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궁전의 남쪽 입사데스(Yipsades) 언덕 위에는 거대한 집들이 있다. 여기에는 남쪽 왕가의 묘지 사당(Royal Tomb-Shrine)이 있다. 궁전의 마지막 파괴는 BC1400년 이후에 일어났는데, 자연 재해에 기인히고 B.C. 1450년 이후에 궁전은 미케네 지배자에 의해 점령당했다. ♧ 크레타 섬의 연표 BC 3200 초기 미노아 시대의 시작 BC 2200 중기 미노아 시대의 시작 BC 2200 최초의 궁전들의 건설 (크노소스, 파이스토스, 말리아, 자크로) BC 1700 최초의 궁전들의 파괴 BC 1650 궁전 재건 (제2 궁전시대) BC 1500 산토린섬의 화산분화 BC 1450 미노아 궁전 파괴와 미케네 침임 BC 1370 크노소스의 완전 파괴 BC 1100 - 800 청동기 문명의 소멸과 도시국가 사회의 발전 BC 500 고르틴 법전 BC 4세기 말 - 1세기 (헬레니즘 시대) 크레타섬 도시국가들 사이의 끝없는 경쟁 크레타의 해적질 BC 67 로마의 크레타섬 정복. 크레타섬은 키레나이크(고르틴의 수도)지방으로 통합 324 크레타섬, 동로마 제국에 병합 823 아라비아의 정복 961 동로마 제국, 크레타섬 탈환 1204 제4차 십자군 정복때 크레타섬은 베네치아에 귀속 1201 - 1669 베네치아의 점령 (필명이 엘그레코인 화가 테오토코풀로스와 <에로토 크리토스>의 저자 코르나로와 함께 14세기부터 크레타섬의 르네상스 를 맞음 1415 부온델몬티, 크레타섬 여행 1669 - 1898 오스만 제국의 점령 1817 지버의 탐사 1821 그리스 독립전쟁 1830 - 1840 크레타섬은 이집트의 부왕 지배하에 놓임 1834 패슐리의 탐사 1857 페로와 트농의 탐사 1865 스프랫의 탐사 1866 아르카디 수도원 파괴 1878 크노소스에서 미노스 칼로카이리노스의 첫 번째 동굴 1866 슐리만, 크노소스 방문 1894 에번스의 첫 번째 크레타섬 탐사, 크레타섬 자치권 획득, 게오르그 왕자 위원 장으로서 도착 1900 크레타섬 발굴작업 시작 (크노소스, 파이스토스) 1913 크레타섬, 그리스에 병합 (런던조약) 1915 하치다키스의 말리아 궁전 발견과 1920년 프랑스인들에 의한 발굴작업 재개 1923 마지막 회교도들이 출발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로 대치됨 1941 독일의 침입과 크레타섬의 황폐화 1961 자크로 궁전 발견 B.C. 2천년 대에 크레타는 이른바 미노스 문명이라고 일컫는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다. 이 문명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및 이집트의 문명과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거기에 반전설(半傳說)적인 왕이 살았는데 그의 이름이 미노스였다. 그 왕은 너무나 크고도 놀랍도록 복잡한 하나의 미궁을 건축하였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 미궁으로 인하여 저 유명한 테세우스(Theseus)와 미노타우로스(Minotaur)의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노스 왕은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고 광범위한 해상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질서 정연하고 정교한, 그러면서도 관료적인 체제를 보여주는 번문욕례(煩文縟禮-규칙, 예절, 절차등이 지나치게 형식적이어서 번거롭고 까다로움)와도 같은 법률 조직을 입안하여 실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크레타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문자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크레타가 그것의 문명의 도달했다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B.C. 1400년 경의 미노스 왕 시대였다. 그때 이후로 크레타는 고대의 미노스 시대에 누리던 그 비길 데 없는 위치로 두번 다시 오르지 못하였다. 한 때 부하고 강하고 고도로 발달되었던 탓으로 크레타는 후기에 와서 아시아의 예술과 학문들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크레타 섬은 헬라인들의 식민지가 되었고, 헬라 문화사의 비교적 전성기 얼마 동안에 그 섬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크리스토교의 최초기의 여러 해 동안에 크레타인들은 부정직과 무신용으로 널리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티토서 1:12). 이 섬은 B.C. 1세기 동안에 해적들의 본부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윽고 해적들은 소탕되었고, B.C. 67년에 그 섬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크레타인들은 외국 군대에서 용병으로 계속 복무하였다. 크레타 섬은 그리이스 본토의 남쪽 끝에서 96㎞ 지점, 고대에 있어서 아카디아 사람들은 갑다라라고, 이집트 사람들은 겝듀라고 히브리인들은 갚토르: 플레쉩(팔레스티나) 사람들의 고향 크레테 섬 (아모스 9:7, 예레미야 47:4) 이라고 불렀다. 크레타 섬이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BC 2000-1400년까지 계속된 에게 문명의 중심지로서이다. 가장 유명하고 또 그 문화의 집약이라고도 생각되는 것은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아 궁전이다. 이것은 매우 큰 것인데, (170-180m)×(160-170m)의 면적에 부분적으로는 4층, 단층만에도 100개 이상의 방이 있다. 그리고 이 궁전은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또 크레테 문자라고 불리우는 회화문자가 BC 2100-1150년에 이 곳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크레타 섬의 동쪽에 있는 키프로스는 BC57년 로마령으로 되고, BC22년 부터는 지방 총독이 있었다. 크레타 섬에는 유대교 회당도 많이 있었다. 티토가 목회할 당시 크레타 섬의 수도 역할을 한 고르티스(Gortis) 에 티토 기념 교회가 있다. 고르티스 왕국이 있었던 크레타 섬은 법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노예의 권리, 여성의 권리도 돌에 새겨 놓았다. AD 5세게 무렵에 만들어진 벽에 헬라어(그리아스) 대문자로 법이 적혀 있었다. 글은 특이하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줄을 바꾸어 왼쪽에서 오른쪽 이렇게 적혔있다 2018년 현재 크레타 섬의 예수 믿는 바율은 90% 이상이라고 이강근의 성지여행에서 말하였다. 크레타 섬 동쪽 약 600 킬로에 있는 키프로스 (구약 시대: 킽팀 민 24:24, 렘 2:10, 에즈켈27:6, 단 11:30)섬에는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서 키프로스 섬으로 가서 키프로스 섬에서 AD58년 파울로와 바르나바를 만나서 장로로 세워져서 목회하고 있다가 죽은 라나카(Larnaca)의 '라자로 기념교회', (헬라어로 적혀 있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의 외삼촌으로 AD116년 돌에 맞아서 순교한 '바르나바 기념 교회'가 있다 사도행전 13장 6-8절 6. 섬 (동쪽 끝 살라미에서 서쪽 끝 파보 까지 약 220 킬로의 먼길과 산악 지대를 거치는)전체를 지나 가면서 파포에 가서 '바리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났다. 7. 그가 (키프로스 섬의) 총독 세르기오 파울로와 함께 있으니, 세르기오 파울로는 슬기있는 사람이었다.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8. 이 마술사(남자 무당) 엘루마 (뜻: 남자 무당, 마술사)는 그들을 방해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참조 :파포에는 로마에서 보낸 총독 관저가 있었으며, 코린도 베타 11장 24절에 사도 파울로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한장소가 파포 라고 하면서 파포에 파울로 채찍 기념교회가 중세 시대 때 부터 이어져 내려 온다고 하였다. 이강근 성지 여행) 1장- 장로와 감독의 자격 2장- 크리스토인의 품성 3장- 크리스토인의 사회적 의무 |
11. 요한계시록 16장 므긷도
머 릿 말 헬라어 제목 : ΑΠΟΚΑΛΥΨΙΣ ΙΩΑΝΝΟΥ (아포칼맆시스 요안누 ) ( 영어 : Revelation ) ( 啓 열 계, 示보일 시, 錄 기록할 록 : 사람의 슬기로서는 알 수 없는 참된 것을 신의 영감으로 기록한 책 ) (묵시록 : 默 잠잠할 묵 示錄 ) 기록 연대 : AD 90-96 로마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 통치 시대 (예수의 제자들인)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하고, 사도들 가운데 요한 사도만이 남아서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사도 요한은 주후 6-100년 즉 94 살 까지 이 땅에 살다가 하늘 나라로 갔다. 기록 목적과 대상 : 괴롭힘 받고 있는 교회에 굳세고 씩씩힌 믿음을 주고, 하나님이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굳게 하여, 크리스토(메시아, 구세주)가 다시 오는 것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하였다. 소아시아 (현재의 터어키 지방)에 있는 7 개 교회를 위해서 기록하였다. 고운 베옷( 세마포(細 가늘 세, 麻 삼 마, 布 베 포, fine linen)) : 올이 가는 실로 짠 고급스런 옷 요근래는 문명이 발달하여 이런 고급스런 옷감이 수두룩하지만, 불과 50년 앞인 1950년 대에만 하더라도 목화나, 삼을 여러단계 손길을 거쳐 가는 베를 만들기란 아주 어려웠다. 그래서 누에 고치로 가느다란 실을 뽑아 만든 비단(명주)은 고급 옷 이었다. 특히 여자들은 그런 옷감을 만드는데 하루 시간의 30% 이상을 소비해야 했고, 또 옷감을 만들드라도 간단한 물감인 빨강, 검정 두 가지 정도 밖에 물들일 수 없었다. ,삼 껍질을 1 mm 정도 크기로 쪼게서 그것을 이어서 실을 만들거나, 목화로 만든 솜을 물레에서 무명실을 만들어서, 실을 날줄은 베틀에 감고, 씨줄을 북에 담아서 베틀에서 베를 만들고, 짠 베를 알맞게 자르고, 바늘로 꿰메어 만들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1900 년대 앞에는 2000년대 지금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은, 그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고급스런 옷이었다. 옛 사람들의 옷은 고구려 같은 옛 무덤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 성경들을 계속해서 참조하지 않고는 연구할 수 없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404구절 중에서 278구절은 구약에 대한 관련 구절을 포함한다. 요한계시록에는 구약에 대한 관련 구절이나 암시가 500개도 넘는다고 집계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시편, 다니엘, 즈카르야 , 창세기, 예사야, 예레미야, 에즈켈, 요엘 등이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다. # # # # # # # # # # # * 요한계시록 1장 *** 머릿말 *** 1.(앞으로 될 일을) 예수 크리스토가 미리 보여준 (계시(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그에게 주어 반드시 빠르게 일어날 일들을 그의 종들에게 보이려고 그의 (심부름꾼) 천사를 그 종 (당시 나이 90살이 넘은)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한 것이다. (참조 : 팥트모스섬의 산 중턱에는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계시의 동굴(The Holy Cave of the Apocalypse)'이 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낮에는 채석공으로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되었다고 하며 이 동굴에서 기도 중에 계시를 받아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눈이 어두워 그의 제자인 프로코로(Prochoros) 가 계시의 내용을 대서했다고 하는데, 동굴 입구에는 요한의 계시의 내용을 대서하는 프로코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 6장 5절에도 나오는 프로코로 는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일곱 명 중 한 사람으로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 속에 크리스토교가 그 어둡고 암울한 시대를 보내고 있을 때, 사도 요한은 이곳 망망대해의 고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 파트모스 섬에 끌려와 유배생활을 했다. 95세의 노구를 이끌고 낮에는 중노동을 하고 밤과 새벽에는 동굴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은 그런 당신의 종 요한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의 말씀과 함께 장차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심으로써 인류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게 하였다. "예수 크리스토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크리스토 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 1;1~3) ) 2.그(요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크리스토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퍼뜨렸다.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배우지 못해서 글자도 모르고, 책도 없는 시기였기 때문에 읽어 주는 것을) 듣는 사람들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워 지기 때문이다. *** 일곱교회에 보내는 인사말 *** 4.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요한이 시무 하였던 에페소 교회에서 약 200 킬로 거리 안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지금도 있고, 그 앞에도 있었고, 앞으로 올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靈)과 5.그리고 몸과 마음을 바친 증인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고,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예수 크리스토를 통하여, (헬라식 인사) 은혜와 (히브리식 인사) 평화가 당신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건져주였습니다(해방하였습니다, 놓아주었다). 6.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제사장으로 만든 그에게 빛과 능력(힘,권세)이 끝없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7.보십시오! 그는 구름을 타고 올 것입니다. 각 사람들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고, 그리고 땅에 있는 모든 (믿지 않는) 민족(백성)들이 그것 때문에 울부짖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멘! 8.주 하나님이 말했다. "나는 알파( A: 헬라어(그리이스) 첫 글자)와 오메가( Ω : 헬라어 마지막 글자)이다. ( 뜻 : 처음(시작)이자 마지막이다 ) 이제도 있고, 그앞에도 있었고, 앞으로 올 사람이며, 전능한 분이다." *** 사도 요한이 본 빛이나는 예수 크리스토 *** 9.나 요한은 당신들의 믿음의 형제로서, 예수 안에서 어려움을 같이 겪고 (하늘) 나라 백성으로 참아내는 것(인내,수난)에 같이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재위 AD 81-96년) 때 (요한이 시무 하였던 에페소 교회에서 약 90 킬로 떨어진) (에게해의) 파트모스(팥모,영어 Patmous)라 부르는 섬에 (귀양가서 AD94-98년 18 개월 동안 ) 있었습니다. (참조: 도미티안 황제가 암살 당한 후, 요한은 풀려나서, 에페소 교회로 갔다. 파트모스 섬은 에페소 남서쪽으로 90 킬로 떨어진 남북 길이 16 킬로 동서 길이 9킬로 중간 부분 너비 1 킬로의 작은 섬으로 로마 시대의 죄수들을 보내는 유배지 였다 2018년 현재는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파트모스 섬의 꼭대기에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수 백년 뒤 즉 지금 부터 약 1400년 앞에 , 그리이스 정교회에서 설립한 '성 요한 수도원'의 벽에는 신약시대 성경 구절들을 벽화 그림으로 그려 놓아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예수의 가르침을 알수 있도록 하였다. 이강근 성지 여행) 10.(파트모스 동굴에 있을 때) 주님의 날(주일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11. "당신이 보는 것을 두루마리책에 써서 일곱교회 (로마 시대에 소아시아(터키) 일대의 교역과 무역의 중심지에 세워진) 에페소, (상업과 무역으로 번성해 있었던 곳에 세워진) 스뮈르나, (참조 : BC 3-2 세기 무렵 헬라 시대에 항구 도시로 발달 하였다.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와서 살고 있어서 예수를 믿었다. 스뮈르나 교회의 초대 감독은 사도 요한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폴리갑은 AD69년 경에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폴리갑은 AD115-156 년 까지 이 교회 감독이었다. 사도 요한이 에페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폴리갑은 에페소 교회에서 약 30 킬로 떨어진 자기 고향 서뮈르나 교회에서 사역 하였다. 사도 요한과는 20 년 동안 친구처럼 지냈다. 156년에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2018년 현재까지 7 교회 가운데 유일하게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에게해에서 24킬로 내륙에 위치한 제우스 신전이 있는 곳에 세워진) 페르가, (필맆포에서 파울로의 전도로 유럽 최초의 예수 믿는 사람이 된 루디아의 고향에 세워진) 뒤아테이라, (여신 퀴벨레 신전이 있어서 부도덕한 이교도 예배가 행해지던 곳에 세워진) 사르데, ( 에페소 교회의 전도 활동으로 생겨났을 것이라 추정되는 농업과 함께 직물, 가죽 제품 가공이 발달 하였던 곳에 세워진) 필라델페이아(뜻:형제사랑), (파울로가 로마시대에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에 서 열심히 전도한 곳(콜로싸이 2:1)에 에바브라가 세운교회(콜로싸이 4:12,13), 안약으로 유명한 곳) 라오디케이아 " 일곱교회에 보내라 말했다. 12.그래서 몸을 돌리고 나에게 말한 목소리를 알아 보려고 돌릴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 13.촛대들의 사이에 인자(사람의 아들,a son of man) 같은 (닮은)분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은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그의 발은 풀무(용광로)불에서 단련된 빛나는 청동 같고, ( His feet were like bronze (청동) glowing in a furnace) 그의 목소리는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 like the sound of rushing waters ) 16.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양쪽에 날을 세운 칼이 나오고 ( a sharp double-edged sword )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빛나는 것 같았다. ( the sun shining in all its brilliance ) 17.내가 그를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같이 되었다. 그러자 그가 오른손을 나에게 얹고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18.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앞에 죽었었다. 그러나 보아라. 이제 끝없이 살아 있어 죽음과 지옥(헬라어 : 하데스, 영어 : Hades)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19.그러므로 당신이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록하라. 20.당신이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숨은 뜻(비밀) 이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일꾼(사자(使者))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요한게시록 2장 ***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 ( 참조 : 에페소 도시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어키에 위치한 도시이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의 수도였다. 지중해 동부에는 안티옥과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에페소가 번창하고 있었다. 에페소는 이 도시들을 로마로 이어주는 땅길과 바닷길이 만나는 곳 이었다. 항구 도시로서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얼마나 번창하고 화려 했던가를 짐작할만 하다. 에페소에는 아르테미 신전이 있었다. 아르테미 신전은 고대 7대 불거사의라 할만큼 거대하였다. 길이 129.5미터, 폭 67미터의 터에 18.2미터짜리 돌 기둥이 127개나 되었다. 사도행전 19:27 에 나오는 에페소의 아르테미 신전(the temple of the great goddess Artemis[or Diana], θεᾶς Ἀρτέμιδος ἱερὸν)은 크기는 높이가 파르테논 신전의 2배, 크기는 파르테논 신전의 4배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파울로는 에페소에서 2년 3개월간(주후 55-57년경) 머물며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강론하였다. 아르테미 신상은 젖통이 17 개나 달린 해괴망측한 신상이다. 이 여신상이 세워진 신전은 대리석으로 된 기둥이 127개나 될 정도였고, 수천명의 남녀사제들이 신전에서 일했다. 여기에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은 창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곳은 도망다니는 죄지은 사람들의 숨어 있는곳이 되기도 했고, 왕들과 상인들에게는 은행역활도 했다. 사도행전 19 :34 참조, 2019년 현재 박물관에 신상이 남아 있다. 에페소 교회는 (AD31-AD100 년) 사도시대에 있었던 교회이다. 파울로가 3년 머무르면서 개척하고, 티모데가 시무하였다. 도미티안 황제가 AD 64년 .사도 파울로가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AD 66년 이후는 사도요한이 시무 하였는데 사도 요한도 불러서 고문을 가한 다음 사도 요한을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 보냈다. 도미티안 황제가 암살 당한 (AD96년)다음 , 사도 요한은 유배에서 벗어나 에페소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심하던 AD 37년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대리고 에페소로 왔다. 에페소에는 2018년 현재 한적한 산중에 마리아가 미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집터 유적과 사도요한의 무덤이 있다. 이강근 성지여행) 1. 에페소 교회의 사자 (지도자)에게 이것을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는 분이 말했다. 2. "내가 당신들의 행위(공적,작품)와 고통(수고,애씀,고난)와 당신들이 참아내며 살아가는 것(헬라어로 휘포모넨,인내,수난))을 알고 있다. 또 나쁜 사람들을 받아 들이지 아니한 것과 스스로 일꾼(사도)라고 하였지만, (주님이 한 일을 보고 들은 사도가) 아닌 사람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당신들이 드러낸 것과 3. 또 당신들이 참으면서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알고 있다. 4. 그러나 당신들에게 꾸짖을 것이 있다. 당신들의 처음 (예수 믿을 때)의 아가페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실패, 죄에 빠졌는지)를 생각하고 뉘우치고 고쳐서 처음 행동(행위,사건)을 하여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뉘우치고 고치지 아니하면, 내가 당신들에게 가서 당신들의 촛대(등경,등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다. 6. 오직 당신들에게 이것이 있으니 당신들이 니콜라 당의 행동을 미워하는구나. 나도 이것을 미워한다. (니콜라 당 : 계 2:14,15, 민 22장-25장) (참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며, 우상 앞에서 남여 사이에 문란한 짓을 하여 발람의 가르침과 닮았다) 7.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라. (환란과 핍박을)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겠다. *** 스뮈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 8. 그리고 스뮈르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 말했다. (참조 : 스뮈르나 교회는 AD100-AD313 년 있었고, 또 근래에는 2018년 현재도 이슬람 국가 튀르키예(터어키)에서 다시 지은 교회가 있다고 하였다) 9. 내가 당신들의 어려움과 가난을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당신들은 부요한 사람이다. 유대인이 아니면서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면서, 그러나 사탄의 집회소(모임) 같은 집단의 사람들의 비웃음도 알고 있다. 10. 당신들은 앞으로 받을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마귀가 앞으로 당신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당신들이 10 일 동안 어려움을 받을 것이다. 당신들이 죽기까지 몸과 마음을 바쳐라. 그렇게 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당신들에게 주겠다. 11.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라. (환란과 핍박을) 이기는 사람은 둘째 죽음의 피해(hurt by the second death) 를 받지 않을 것이다. *** 페르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 12.그리고 페르가모 교회의 사자( the angel of the church )에게 편지하라. 양쪽에 날이 서있는 칼을 가지고 있는 분이 말했다. 13.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알고 있다. 거기는 사탄의 보좌이다. ( 참조 : 페르가모는 소아시아 무시아의 정치적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이곳에 제우스 신전이 있었다. 2018년 현재 로마신전의 페허 흔적과 원형극장이 있다. 히포크라테스가 직접 와서 의술을 행허였고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을만큼 의술이 유명 하였다. 이강근) 당신들이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나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증인 안티파가 당신들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참조: 안티파는 페르가모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도미티안 황제 때 청동 가마에 쪄 죽임을 당했으며(AD95~96)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였다. 안티파(αντιπας)란 αντι“...대신에, ...을 위하여”+ πας “모든, 온갖, 전체”로서 “페르가모를 대표해서, 성도를 대표해서” 순교한자란 뜻이다. 안티파는 “황제숭배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성도들을 가르쳤으며, 이로 인하여 황제 예배 종파에 붙잡혀 순교 당하였다.) 14. 그러나 당신들에게 두어 가지 꾸짖을 것이 있다. 거기 당신들에게 발람의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발람이 발랔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그리고 (모압 여자들과 종교의식에서) 음란한 짓을 하도록 하였다. (참조 : 민 : 22 : 28-30, 25 : 1-5, 31 : 16 싵팀에 머물고 있을 때, 많은 숫자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종교의식을 통하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 신들에게 예배했다. 그 때문에 24,000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전염병(성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 15. 이와 같이 당신들에게도 니콜라 당의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16. 그러므로 뉘우쳐 고쳐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당신들에게 빨리 가서 내 입의 칼(말씀)로 그들과 싸울 것이다. 17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환란과 핍박을)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주겠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받는 사람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 *** 뒤아테이라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 18. 그리고 뒤아테이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발은 빛이 나는 청동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말했다. (참조: 그곳은 교통의 요지로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베짜는 곳과 염색,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여,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조합을 만들어서 자기들을 지켜 준다고 여기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남여 사이에 음란한 짓을 하면서 제사하였고, 그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19. 내가 당신들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기는 것과 인내를 알고 있다. 당신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20. 그러나 당신들에게 꾸짖을 일이 있다. 스스로 자신을 선지자라 부르는 여자 이제벨 ( 히브리어, 헬라어 : 예자벨 )을 당신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 여자가 나의 종들을 꼬셔서 음란한 짓을 하도록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다. 21. 그리고 내가 그 여자에게 뉘우쳐 고칠 기회를 주었지만, 자기의 음란한 짓을 뉘우쳐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22. 보아라! 내가 그 여자를 침대에 던질 것이며, 또 그 여자와 더불어 간음하는 사람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뉘우치지 않으면 큰 어려움 가운데에 던질 것이다. 23. 그리고 내가 그 여자의 아들딸(지손,주민)을 죽여서 없이하겠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분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당신들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아 주겠다. 24. 뒤아테이라에 남아 있어 이 가르침을 받지 않아서,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당신들에게 말하는데, 다른 짐으로 당신들에게 지울 것은 없다. 25. 다만 당신들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환란과 핍박을) 이기는 사람과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27. 그리고 쇠막대기로 흙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28. 나도 내 아버지에게 받은 것 처럼 , 또 그들에게 새벽 별을 주겠다. 29.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 요한계시록 3장 *** 사르데이 교회에 보내는 편지 *** 1.그리고 사르데이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이 이것들을 말했다. " 내가 당신의 행위를 알고 있다. 당신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신앙적으로는) 죽은 사람이다. (참조: (사르데이는 루디아(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군사적, 상업적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여신 퀴벨레의 신전이 있어서 부도덕한 예배가 행하여지고 있었다. ) 2. 일어나 깨어 있어서 썩지 않고 남은 것이나 힘있게 하도록 정신 차리고 있으라, 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 3 . 그러므로 당신이 어떻게 (기쁜소식을) 받아서 따라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그리고 지키어 뉘우치고 고쳐라. 만일 정신차리지 않고 있으면, 어느 때에 당신에게 갈는지 알지 못하는 도둑 같이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데이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사람 몇 사람이 당신에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나에게) 알맞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5. (환란과 핍박을)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며.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인정(확인,시인)할 것이다. 6.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 " *** 필라델페이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 7.그리고 필라델페이아(2018년 현재명 알라세히르 Alasaher)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참되어 다뷛의 열쇠를 가진 분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말했다. (예사야 22;22) 8. " 보아라! 내가 당신의 앞에 열린 문을 두었었지만, 닫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신의 행위를 알고 있다. 당신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나의 말을 지키며 나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9. 보아라! (유대인이 아니면서)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거짓말 하는 사탄의 집회소 같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당신에게 주어 그들로 와서 당신의 발 앞에 절하게 하여, 내가 당신을 아가페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겠다. 10. 당신이 '참고 견디라'는 나의 명령을 지켰으니, 내가 또한 당신을 시험의 짧은 시간으로 부터 지켜 주겠다. 이는 앞으로 온 세상에 닥쳐서 땅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할 때이다. 11. 내가 빠르게 오리니, 당신이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당신의 면류관(상급,빛,자랑)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환란과 핍박을) 이기는 사람은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겠다. 13.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라. " ***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 14.그리고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사자에게 이 사실을 편지하라. 하나님 창조의 근본이면서, 참된 분이고, (맨처음 우주를 만들 때) 지켜본 분이면서, 믿을 만한 분이 말했다 15. " 내가 당신의 행위를 알고 있다. 당신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당신이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바란다. 16. 당신이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당신을 내뱉아 버리겠다. " 17. 당신은 말한다. '나는 부자이다. 부요하여 모자라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당신의 비참한 것과 불쌍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참조 : 라오디케이아,λαοδικεία)는 백성(라오스,λαός) + ‘정의, 공의 (디케,δίκη )’의 합성어로 ‘백성의 공의’, ‘백성의 옳은 판단’이란 뜻이다. 라오디게아는 안티오쿠스 2세가 건설한 소아시아의 한 성읍에서 출발한다. 에게 해와 유브라데 강을 잇는 아시아 무역 로를 낀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금융업등과 성업이 발달했다. 아울러 오늘 날로 치면 제약조제 학교(medicine school)가 있었다. 이곳은 안약 제조가 유명했는데 ‘갓부기아의 가루’라 불리는 약을 정제해서 판매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발판으로 삼은 라오디게아는 부요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는 곳이다. 라오디케이아 도시는 금이 나서 부유한 도시이며, 안약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라오디케이아는 필라델페이아 동남쪽 약 72 킬로미터, 에페소에서는 동쪽으로 약 160 킬로미터에 위치한 라이커스(Lycus) 계곡에 있는 여러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아시아 지역의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로 북쪽으로 10킬로미터 지점에는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폴리스가 있고, , 동쪽으로 14킬로미터 지점에는 콜로싸이가 위치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시리아(수리아)의 셀레우코스(SELEUCID) 왕가의 안티오코스(ANTIOCHUS) 2세가 그의 왕비 라오데스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케이아라 불렀다. 라오디케이아는 근처의 히에라폴리스 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었을 뿐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이라 불리우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폴리스 온천 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케이아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케이아의 온천 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이 말씀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파울로의 전도로 복음이 들어갔다.(콜로싸이 2:1)) 18. 내가 당신에게 타이르는데, 나한테 불에 녹여서 제련한(refined in the fire)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이도록 하라. 19.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만큼 꾸짖으면서 열심을 내도록 가르치니, (잘못을) 뉘우쳐 고치도록 하라. 20. 보아라! 내가 바깥에 서서 문을 두드리니, 만일 누구든지 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다. 21. (환란과 핍박을)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의자)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겠다. 22.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라. 요한계시록 4장 *** 하늘 나라에서의 예배 *** 1. 이 일 다음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려있는 큰 문이 있었다. 내가 들은 그 소리 처음에 나에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다음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겠다."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하늘에 보좌가 놓여 있고, 그 보좌 위에 앉은 분이 있었다. 3. 앉은 분의 모양이 벽옥(푸른빛나는 옥,jasper)과 홍보석 같고 그리고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았다. 4. 그리고 보좌에 둘려 24개의 보좌(throne 왕의 좌석)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24명의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crowns of gold on their heads)을 쓰고 앉아 있었다. 5. 보좌로부터 번갯불이 번쩍거리면서 '우르릉 쾅쾅'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7 개의 등불 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 ( the seven spirits of God )이었다. 6. 보좌( throne )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 like a sea of glass, clear as crystal ) 가 있고, 보좌를 가운데 두고 둘러서서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였다. ( 뜻: 눈들이 기득하다는 것은 어느 곳이든지 다 볼 수 있다)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마타이오 복음)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마르코 복음)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루카 복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요한 복음) 같았다. 8 네 생물은 그들의 하나마다(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쪽과 둘레(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였다. (뜻 : 여섯 날개가 있는 것은 어디던 다 갈 수 있고, 눈들이 가득 하다는 것은 어느 곳이든지 다 볼 수 있다) 그들이 밤낮 쉬지도 않고 말하였다. '거룩하다! (헬라어:하기오스) 거룩하다! (헬라어:하기오스) 거룩하다!(헬라어:하기오스) 주 하나님 곧 전능한 이여! 그앞에도 있었고 이제도 있고 앞으로 올 분이다.'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아서 끝없이 살아 있는 분을 빛나게 하고 높임과 고마움을 돌릴 때에 10. 24명의 장로들이 보좌에 앉은 분 앞에 엎드려 끝없이 살아 있는 분에게 절하고 자기의 관(冠, crowns)을 보좌 앞에 던지며 노래(찬양)했다.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알맞게 빛나고 높임과 권능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있었고 또 만들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 두루마리와 어린 양 *** 1. 그리고 내가 보았다. 보좌에 앉은 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양쪽으로 기록하였고 (허락 없이 펴 볼 수 없게) 도장을 7 군데 찍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2. 그리고 보니 힘있는 천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그 두루마리의 도장 찍은 것을 떼어내고, 펴서 읽을 수 있겠느냐?' 하였지만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4. 그 두루마리를 펴서 보기에 맞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로 내가 콘 소리로 울었다. 5.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lion) 다뷛의 자손이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에 7 군데 도장 찍혀있는 것을 뗄 것이다. '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었다.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은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았다. 8. 그 책을 받으니 네 생물과 24 사람의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현악기와 향이 가득한 금 사발(쟁반)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부르기를, "두루마리를 가지고 그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도장 찍어 놓은 것을 떼기에 알맞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여 모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과 백성들과 나라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 하여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사서, 헬라어 에고라시스) 하나님에게 바쳤다.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제사장들을 만들고, 그리하여 그들이 땅 안에서 왕으로 다스릴 것이다." 11. 내가 또 보고 들으니,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서있는 많은 천사의 목소리가 있으니 그 숫자가 많고 또 많았다.. 12 큰 목소리으로 노래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능력(power)과 부(wealth)와 슬기(wisdom)와 힘(strength)과 높임(honor)과 빛남(glory)과 찬송 (praise)을 가지고 가는 것이 맞다. "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들어진 것(피조물)들이 노래했다. "보좌에 앉은 분 어린 양을 노래하여 높여서 빛나게 하고 권능을 끝없이 돌려라." 14. 네 생물이 말했다. "아멘(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장로들이 엎드려 절했다 . 요한계시록 6장 *** 일곱개 봉인에 대한 심판 *** 1. 어린 양이 일곱개 인증표시 가운데의 하나를 여는 것을 내가 보았다. 네 생물들 가운데 하나가 우뢰와 같이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나와라" 2. 이에 내가 보니 (정복을 뜻하는)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사람이 활을 가지고 있었으며 면류관(crown)을 받고 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였다. 3. 둘째 인증표시를 열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했다. "나와라" 4. 이에 다른 (전쟁을 뜻하는) 붉은 말이 나왔다.. 그 탄 사람이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없애고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 5. 셋째 인증표시를 열 때에 내가 들었다. 셋째 생물이 말했다. "나와라" 하니 내가 보니 (기근을 뜻하는) 검은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었다.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말했다. " (하루 품 삯) 한 데나리온에 밀 한 코이니크스(1 리터)이고, (하루품삯인) 한 데나리온에 보리 3 코이니크스(3 리터) 이다. 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7. 넷째 인증표시를 열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목소리를 들으니 말했다. "나오라." 8. 내가 보니 엷은 초록(청황)색(창백한)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죽음'이니 죽음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땅 1/4 의 권력을 얻어 칼과 굶주림과 죽음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였다. 9. 다섯째 인증표시를 열 때에 내가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알리는 것(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10.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거룩하고 순수한 대주재여! 땅에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않기를 어느 때까지 하려합니까?" 11. 그러자 각각 그들에게 흰 가운( white robes, gown ) 을 주며 그들에게 말했다. "아직 조금만 더 쉬어라. 당신들의 친구 종들과 형제들도 당신들 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인원수가 찰 때 까지이다." 12. 여섯째 인증표시를 여는 때에 내가 보았다.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염소(산양의) 검은 털로 만든 옷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세차게 부는 바람에 흔들려, 다 익지 않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고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힘있는 사람들과, 모든 종과, 자유가 있는 사람들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했다.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은 분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려라" 17. "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되었으니 누가 능히 설 수 있느냐?" 요한계시록 7장 *** 이스라엘의 144,000 명 *** 1. 이 다음에 내가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았다. 땅의 사방의 바람이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2. 그리고 보았다. 다른 천사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인증표시를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력을 받은 네 천사를 보고서 큰 소리로 외쳐 3. 소리쳤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증표시를 할 때 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말라." 4. 내가 인증표시를 받은 사람들의 숫자를 들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가운데에서 인증표시를 받은 사람들은 144,000 명 이었다. 5. 인증표시를 받은 사람들은 유다 지파 12,000 명, 르우벤 지파 12,000 명, 갇 지파 12,000 명. 6. 아쉐르 지파 12,000 명, 낲탈리 지파 12,000 명, 므낫쉐 지파 12,000 명, 7. 시므온 지파 12,000 명, 레뷔 지파 12,000 명, 잇싸카르 지파 12,000 명, 8. 즈불론 지파 12,000 명, 요셒 지파 12,000 명, 빈야민 지파에 인증표시를 받은 사람이 12,000 명 이었다. ( 참조 : 단 지파를 빼고, 요셒 지파를 더함,요셒은 맏아들의 몫으로 므낫쉐,에프라임 지파임) 김진홍 구약 12 지파, 신약 12 제자 , 숫자 1,000 많다 12x12 x1,000 = 144,000 이라고 설명) ***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예배 ** 9. 이 일 다음에 내가 보았다.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 언어들이 다른 각 나라와 민족과 백성들이 끌리는 흰 옷을 입고 그들의 손에 대추야자 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죄에서 건져내는 것은 보좌에 앉은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에게 절하며 12. 말했다. "아멘! 찬송 (praise)과 빛남(glory)과 슬기(wisdom)와 고마움(thanks)과 높임(honor)과 권능( power) 과 힘(strength)이 끝없이 우리 하나님에게 아멘! " 13. 그러자 장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했다. " 끌리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리고 어디서 왔느냐?" 14. 그래서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내 주여! 당신이 알고 있습니다. " 그러자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들은 큰 어려움에서 나오는 사람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 15. 이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 보좌 위에 앉은 분이 그들 위에 천막을 칠 것이다. 16. 그들이 다시는 배고프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태양,햇빛)나 아무 뜨거운 열기도 그들을 다치게 못한다. 17.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에 있는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지도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데리고 가며,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8장 *** 7 번째 인증표시 *** 1. 일곱째 인증표시를 열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였다. 2. 내가 보니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다. 3. 그리고 다른 천사가 금 향로(golden censer)를 가지고 와서 제단 옆에 서서 있었다. 그래서 많은 향을 그에게 주었다. 모든 성도의 기도를 더해서, 보좌 앞 금 제단에 바칠려고 하였다. 4. 그러자 향의 연기가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니, 우르릉 쾅쾅 우레 같은 소리가 나고 그리고 찟어 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번개불 갈은 빛이 번쩍이면서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다. *** 일곱 나팔 *** 6.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 준비를 하였다.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어다. 그러자 우박과 피가 섞인 불(fire mixed with blood)이 일어나서 땅에 쏟아졌다. 땅의 1/3 이 타 버리고, 나무의 1/3 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다.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자 바다의 1/3 이 피빛으로 바뀌었다.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1/3 이 죽고, 배들의 1/3 이 부서졌다.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1/3 과 여러 물샘에 떨어졌다. 11. 이 별 이름은 앞신도스(헬라어, 뜻 : 쓴 쑥) 이었다. 물의 1/3 이 쓴 쑥물이 되니, 그 물이 쓴 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 물로 부터 많은 사람이 죽었다.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다. 해 1/3 과 달 1/3 과 별들의 1/3 이 부딪침을 받았다. 그 1/3 이 어두워지니, 낮에는 1/3 이 적게 비취고 밤도 그렇게 되었다. 13. 그래서 내가 보고 그리고 내가 들었다. 한 독수리(비행기)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참조 : 독수리는 1 km 만 떨어져도 사람 눈으로 잘 볼 수 없다.) "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재앙,헬라어 우아이), 화(헬라어 우아이), 화(헬라어 우아이)가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막 불려고 하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요한게시록 9장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 하나가 있었다. 그가 끝 없이 깊은 곳(지옥, abyss)의 열쇠를 받았다. 2. 그가 끝 없이 깊은 곳(지옥)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왔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 때문에 어두워지며 3. 그러자 연기로 부터 메뚜기들이 땅 위로 나왔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력과 같은 권력을 받았다. 4. 그러자 그들에게 말했다.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나무는 해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증표시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롭게 하라."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였다. 그 아픔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하는 것과 같았다.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부탁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였다. 7.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이 메뚜기들의 모양 같이 (많) 았다. 그 머리에 금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 또 철 갑옷 같은 것을 입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치는 권력이 있었다. 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지옥(헬라어 : 아뷔쏘)의 심부름꾼(사자(使者))이었다..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받돈(뜻:파괴)이고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폴뤼온(죽음,파괴자)이었다. 12. 첫 번째 재앙은 지나갔지만, 보아라 아직도 이 다음에 재앙 두 개가 닥칠 것이다.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목소리가 났다. 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했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어 놓은 네 천사를 풀어 놓아라." 15. 그래서 네 천사를 풀어 주었다.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가 될 때에 사람 1/3 을 죽이기로 준비된 천사들이었다. 16. 마병대의 수는 2억(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숫자를 들었다. 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을 보았다.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가슴방패가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으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왔다. 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 때문에 사람 1/3 이 죽임을 당했다. 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였다.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뉘우쳐 고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보지도 못하고, 들을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는 금이나 은이나 청동(구리 합금)이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예배하였다. 21. 그리고 사람죽이는 것과 (점을 치는) 복술과 음란한 짓과 도둑질을 뉘우쳐 고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10장 *** 천사와 작은 책 *** 1. 그리고 내가 보았다.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에 둘러 싸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았다. 2. 그의 손에는 펴 진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의 오른 발은 바다를, 그의 왼 발은 땅을 밟고 있었다. 3. 그리고 사자(lion)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가 외칠 때에 우레소리 일곱개가 울리는 것 같은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났다. 4.그리고 천둥 일곱개가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했다. "우레소리 일곱개가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난 것은 확실히 알리기만 하고 기록하지 말아라. " 5. 그리고 천사가 바다와 땅을 밟고 그의 오른 손을 하늘을 보고서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6.그리고 끝없이 살아 있는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만든 분을 가리켜 다짐하였다. 왜냐하면 기간(시간)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 이었다. ( there should be time no longer: ) 7. 그리고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알린 기쁜소식과 같이, 하나님의 그 숨은 뜻이 이루어졌다. 8. 하늘에서 나서 나에게 들리던 소리가 또 다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 9. 내가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하였다. 천사가 말했다. "가지고 가서 먹어라. 당신 배에는 쓰겠지만, 당신 입에서는 꿀 같이 달 것이다."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먹으니, 내 입에서는 꿀 같이 달았지만, 먹은 다음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 (참조 :에즈켈 3: 1,2,3 ) 11.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많은 백성들과 그리고 나라들과 그리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임금(대통령,수상)들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 요한계시록 11장 *** 두 증인 *** 1. 또 나에게 갈대 막대자(a reed like a measuring rod) 를 주며 말했다. "일어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측량하라. 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어라.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외국인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거룩한 성을 42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참조 :루카 21:24)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력을 주겠다. 그들이 (염소(산양)털로 짠) 굵은 베옷을 입고 1,260 일을 예언할 것이다.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와 두 촛대이다.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며,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빛으로 바뀌게 할 것이다. 아무 때든지 바라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칠 것이다.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끝없이 깊은 곳(헬라어 : 압비쏘)으로 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8. 그들의 주검(시체)이 큰 성 길에 있을 것이다. 그 성은 영(靈)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헬라어:아이귚토스)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다. 9.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과 여러 국가의 백성들이 그 주검을 삼일 반 동안을 보면서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에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선물을 보낼 것이다.. 11. 삼 일 반 다음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니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주 두려워하였다. 12. 하늘로부터 큰 목소로 " 이리로 올라오라 " 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구름에 둘러 쌓여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였다. 13. 그 시간에 큰 지진이 나서 성의 1/10 이 부서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000 명이었다. 그 남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빛나게 하였다. 14. 둘째 재앙은 지나갔지만 보아라 셋째 재앙이 빠르게 닥칠 것이다. *** 7 째 나팔 ***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하늘에 큰 소리가 나서 말했다. "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크리스토(메시아,구세주)의 나라가 되어 그가 끝없이 왕 노릇 할 것이다." 16.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24명의 장로가 엎드려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에게 절하며 17. 말했다. "고맙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주 하나님 즉 전능한 분이 친히 큰 권력을 잡고 왕 노릇 합니다." 18. "(하나님을 믿지 않는)외국인들이 분노하니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사람을 심판하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지위가) 낮은 사람이든지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지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며 또 땅을 없어지게 하는 사람들을 죽일 때입니다." 19. 그리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그의 성전 안에 그(하나님)의 언약(법령,계약)이 있는 궤(상자)가 보이며 그리고 번개불이 번쩍이고, (우르릉 쾅쾅) 우레 같은 큰 소리가 들렸다. 지진과 큰 우박이 있었다. 요한계시록 12장 *** 여자와 용 *** 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엿다. 해(태양)로 둘러싸인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써고 있었다. ( A great and wondrous sign appeared in heaven : a woman clothed with the sun, with the moon under her feet and a crown of twelve stars on her head. ) 2. 이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여 아이를 낳게 되자, 아파서 애써 부르짖었다. 3. 그리고 하늘에 다른 이적(another sign appeared in heaven)이 보였다. 그런데 보아라! 한 큰 붉은 용이 있는데 머리가 일곱개, 뿔이 열개, 그의 여러 머리에 일곱개의 왕관을 가지고 있었다. 4. 그의 꼬리가 하늘의 별 1/3 을 끌어다가 땅에 던졌다. 용이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앞에서, 그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그 여자의 아이를 삼키고자 하였다. 5. 그러는 가운데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는 앞으로 쇠 막대기(홀)로 세계를 다스릴 남자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져 갔다. 6. 그리고 그 여자는 (비가 많이 오지않는 연간약 500 밀리 미만이어서 풀과 나무가 거의 자라지 못하는) 광야로 달아나서 거기서 1,260 날 동안 그를 키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한 곳이 있었다. 7. 그리고 하늘에 전쟁이 있었다. 미카엘과 그의 사자(천사)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 때, 용(사탄, 헬라어: 드라콘)과 그의 사자(천사)들도 싸웠다. 8. 그러나 더 이상 하늘에서 이기는 곳이 없었다. 9. 그래서 큰 용이 내어쫓겼다. 옛날에는 뱀으로 마귀 또는 사탄이라 불렀으며, 온 세계를 꾀였다. 그가 땅으로 내쫓기고 그의 사자(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겼다. 10. 그리고 내가 또 하늘에서 말하는 큰 소리를 들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죄에서 건져냄과 능력과 나라와 그리고 그(하나님)의 크리스토의 권력(힘,세력, 기적)이 이루어져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형제들을 일러바치던 사람들이 좇겨났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일러바치던 사람들이었다. 11. 그래서 그들이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리고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 때문에 저를 이겼다. 그리하여 자기들이 죽기까지 목숨(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머무는 사람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재앙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에, 크게 소리 질러 화내며 당신들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다. 13. 용(사탄, 헬라어:드라콘)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괴롭혔다.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비행기(우주선)를 타고)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그 뱀의 얼굴을 피하여 그곳이 어디든지 , 1 년 그리고 몇 년 그리고 반 년을 키웠다. 15. 그러자 그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물 같이 뿜어서, 여자를 물에 떠내려 보낼려고 하였다.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뿜어낸 강물을 삼켰다.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었다. 요한계시록 13장 *** 두 짐승 *** 1. 그리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을 보았다. 10 개의 뿔과 7 개의 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하나님에게) 대들어 더럽히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 And I saw a beast coming out of the sea. He had ten horns and seven heads, with ten crowns on his horns, and on each head a blasphemous name . ) 2. 그런데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리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리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았다. 용이 자기의 군대(권력,병력)와 보좌와 놀라운(고상한,큰) 다스리는 권력(통치권,정부)을 그에게 주었다. 3. 그런데 그의 머리의 하나가 다쳐서 죽게 될 것 같았는데, 그 죽게 될 것 같던 다친 곳이 나았다. 그러자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뒤따라 갔다. 4. 그러자 용에게 엎드려 절했다. 왜냐하면 용이 짐승에게 다스리는 권력(통치권,정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짐승에게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것에 맞붙어서 싸우겠느냐? " 5.또 짐승이 놀라운(고상한,큰) (하나님을) 깔보는 말하는 입을 받고, 또 42 달 동안 일할 다스리는 권력(통치권,정부)을 그에게 주었다.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보고 비웃었다. 그의 이름과 그의 집 즉 하늘에 사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7. 그리고 그가 성도들과 싸움을 일으키도록 내버려두어 성도들과 싸워서 그래서 이겼다. 그리고 각 민족과 그리고 백성과 그리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통치권,정부)을 그에게 주었다.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우주가 만들어진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다 그 짐승에게 엎드려 절할 것이다. 9. 누구든지 귀를 가지고 있다면 들어라. 10. 만일 포로로 사로잡혀갈 사람이라면 포로로 잡혀 잡혀 갈 것이고, 만일 칼에 죽을 사람이라면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성도들이 참아내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11.그리고 내가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였다. 12.그리고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력을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사람들을 죽게 되었던 다친 곳이 나은 처음 짐승에게 절하게 하였다. 13. 그리고 큰 이적(놀라운 일,기적)을 행하였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였다. 14. 짐승 앞에서 받은 이적을 행하는 것 때문에 땅에 사는 사람들을 꼬셔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칼에 다친 곳을 가지고 있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아라. " 15. 그가 (권력 통치권,정부를) 나누어주고,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였다. 그리고 짐승의 우상에게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였다. 16. 그가 모든 사람 즉 (지위가)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밖에는 사는 것과 그리고 파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숫자이었다. 18. 슬기가 여기 있으니 밝은 판단력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숫자인데, 그의 숫자는 666 이었다. (참조 : 네로 황제의 히브리어를 숫자로 하면 666 이 된다는 학설도 있다) 요한계시록 14장 *** 어린양과 그의 백성 *** 1. 그런데 내가 보았다, 보아라! 어린 양이 지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었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레 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하프(헬라어 : 키다라) 연주하는 사람들이 그 하프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데, 땅에서 죄에서 건져냄을 받은 144,000 명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사람이 없었다.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 이었다. 어린 양이 어디로 데리고 가든지 따라가는 사람이며, 사람 가운데에서 죄에서 건져냄을 받은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6. 그리고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에 날아가는데 땅에 사는 사람들 즉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백성에게 알릴 끝없는 복음(헬라어 : 유앙겔리온,기쁜소식)을 가지고 있었다. 7.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를 빛나게 하라. 왜냐하면 그의 심판의 시간이 닥쳤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든 분에게 예배하라." 8. 그리고 다른 천사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빌로니아(로마)야!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란한 짓으로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곳이다." 9. 그리고 다른 천사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엎드려 절하고, 이마에나 손에 인증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의 진노의 잔에서 순수한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 앞과 그리고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어려움을 받을 것이다. 11. 그리고 그들을 아프게 하는 연기가 끝없이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엎드려 절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밤낮 쉬지도 못 할 것이다. 12. 성도들의 참을성이 여기에 있으니,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13. 그리고 내가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기록하라. 지금 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복이 있다) 성령이 말하였다. ' 그렇다. 그들이 애쓰던 것을 그치고 쉬리니, 왜냐하면 그들의 행한 일이 따르기 때문이다.' " 14. 그리고 내가 보았다. 그런데 보아라!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분(like a son of man)이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있었다. 15. 그리고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보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16. 그러자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낫을 땅에 휘두르니 땅의 곡식이 거두어졌다. 17. 그리고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있었다. 18. 그리고 불에 대한 권력을 가진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서, 날카로운 낫 가진 사람을 보고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 날카로운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어라. 그 포도가 익었기 때문이다."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큰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졌다. 20. 그러자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와서 말의 굴레(재갈,bridle)까지 1,600 스타디온 (300 킬로 미터)에 퍼졌다. 요한계시록 15장 ***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 *** 1. 그리고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았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데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었다. 2. 그리고 불이 섞인 맑은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숫자를 이기고 벗어난 사람들이 맑은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이 준 하프(헬라어:키다라)를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3. 하나님의 종 모쉐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한 이여! 하는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 온 땅(민족들,나라들,만국)의 왕이여! 주님의 길은 바르고 참되다." 4. 주여! 누가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노래하지 않겠느냐? 오직 주님만 거룩하다. 주님이 바르게 다스리는 일이 나타났으니, 모든 나라가 와서 주님에게 예배할 것이다. 5. 그리고 이 일 다음에 하늘에 법궤가 있는 성전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 부터 나와서 맑고 빛나는(번쩍이는) 고운 베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있었다. 7.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끝없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사발(쟁반,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었다. 8. 하나님의 빛남과 능력 때문에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찼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들어갈 사람이 없었다. 요한계시록 16장 ***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큰 그릇 *** 1. 그리고 성전에서 큰 소리로 일곱 천사에게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당신들은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사발(대접,쟁반)을 땅에 쏟아라. " 2. 그러자 첫째가 가서 그 사발(대접,쟁반)을 땅에 쏟았다. 그러자 짐승의 인증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에게, 나쁘고 독한 종기가 났다. 3. 그리고 둘째가 그사발(대접,쟁반)을 바다에 쏟았다. 바다가 죽은 사람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었다. 4. 그리고 셋째가 그 사발(대접,쟁반)을 강과 물이 솟아 나는 곳(springs)에 쏟으니 피로 바뀌었다. 5. 내가 물을 차지한 천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앞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거룩한 이여! 이렇게 심판하니 바릅니다. 6. 왜냐하면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7. 그리고 내가 제단(altar)으로 부터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렇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한 이여! 심판하는 것이 참되고 바릅니다. " 8. 그리고 넷째가 그사발(대접,쟁반) 을 해에 쏟았다. 해가 권력을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웠다. 9. 그러자 사람들이 높은 열에 타서 죽었다.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이름을 비웃으면서, 그리고 주님이 빛이 나도록 뉘우쳐 고치지도 않았다. 10. 그리고 다섯째가 그 사발(대접, 쟁반)을 짐승의 보좌에 쏟았다. 그의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었다. 11. 그리고 아픈 것과 종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욕하고 그들의 행위를 뉘우쳐 고치지 않았다. 12. 그리고 여섯째가 그 사발(대접, 쟁반)을 큰 강 유프라테스에 쏟았다. 그러자 강물이 말라서 해 돋는 쪽으로(동쪽에서) 부터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다. 13. 그리고 개구리들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내가 보았다.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었다. 왜냐하면 이적을 행하여 온 세계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전능한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았다. 15. 봐라! 내가 (아무도 모르게) 도둑 같이 올 것이다. 깨어서 자기 옷을 주의하여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복이 있다) 16. 그리고 세 영이 히브리어로 (히브리어 '하르 므긷도'를 헬라어로 '하르(뜻: 언덕)마게돈'(뜻:(해발 약 50 미터 되는 이스라엘의) 뜻:므긷도 언덕) 이라 음역한')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았다. (참 조 : 예루살렘 북쪽 70 킬로에 위치한 므긷도 언덕은 이스라엘의 이즈르엘 평원에 있는 곳으로 BC 3,500 년 전부터, 지중해 옆의 해안 도로가에 위치한 길목 이므로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앗시리아 바벨로나아 등 여러나라와 전쟁이 벌여졌던 곳이다. 유다의 예레미야 시대에 종교개혁을 하던 요쉬아 왕도 므긷도에서 이집트왕 파라오 느코가 바빌로니아와 전투중에 있는 앗시리아를 도우러 가는데 파라오 느코를 막다가 므긷도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9,30, 역대하 35:20-24 , 2014 년 현재는 발굴이 한창 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가와 국가와의 전쟁 기록을 남긴 사람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BC1481-1425 )다. 투트모세 3세가 남긴 전쟁의 기록은 카르낙의 아문 신전에 남아있는데, 상세한 전쟁의 기록은 전쟁 전술의 역사에서 꼭 한번 다루고 가는 소재라고 한다. 대군이 이동할 수 있는 평원이 아니라, 상대편이 예측하지 못한 협곡을 통해서 방어군의 허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최초의 전쟁 장소가 므긷도다. 카나안 땅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이스르엘 골짜기의 므긷도가 도대체 왜, 그리고 얼마나 중요하길래, 므긷도가 역사의 첫 전장터가 되었까? 고대의 민족과 국가들은 예로부터 서로 교역을 하면서 문화를 서로 주고 받았다. 므긷도는 히타이트 제국이 있었던 오늘날의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오가는 지중해 해안길(Via Maris)이 지나는 길목이고, 고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 메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카나안 땅에 들어와서 해안길로 가든지, 중앙산지 길로 가든지, 또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가든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므긷도는 반드시 거쳐야가하는 교통의 중심지 였다. 그러니, 므긷도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나라들 그리고 히타이트 제국의 교차로이며 관문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지리적인 중요성을 이미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가 알아챘다. 그리고는 므긷도를 점령하는 것이 천개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과 같다고 이름지어서 BC 15세기에 역사에 기록할 만한 첫 국제전을 치룬 것이다. 므긷도의 전술상의 중요성 때문에 성경에도 므긷도와 관련된 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이 있다. 예호슈아가 카나안 정복 전쟁을 할 때에 므긷도를 점령하였다는 물론이고(예호슈아 12:21), 사사 드보라와 바랔 의 전쟁에서도 므긷도 앞의 평원과 물가들은 주요한 전쟁터였다. (사사기 5:19).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아합의 아들이자 당시 왕이었던 요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켜 요람을 나봇의 포도원 터에서 죽일 때에 함께 있었던 남왕국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예후를 피해서 도망하다 죽은 곳이 므긷도다(왕하 9:27). 요쉬아가 이집트 파라오 느코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곳도 므긷도이다(왕하 23:29). 이집트의 BC1468년경 투트모세 3세는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 곳의 중요성을 간파한 솔로몬은 이곳에 오늘날의 기갑부대라 말할 수 있는 전차부대의 주둔지로 병거성을 쌓았다(왕상 9:15), 그도 그럴 것이 므긷도가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이즈르엘 골짜기를 적들에게 빼앗길 경우, 사마리아 지역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까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 므긷도의 무장과 방어에 공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아합 때에는 므긷도를 더욱 요새화 시켰다. 방어에 용의하도록 수로 공사를 했고, 이곳 저곳에 현재 발굴된 것만으로도 450필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17개의 마굿간 들을 만들어서 전략적인 방어요새이자, 병거성으로 체계화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다. 이곳 므긷도와 므긷도가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이즈르엘 골짜기를 빼았겼을 경우, 왕국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므긷도가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서 지켜내야만 했다. 고대 서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기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던 므긷도, 그리고 왕국과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던 므긷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이야기는 나중에 요한에게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으로 선과 악이 겨루는 전장의 모티브가 된다. 므긷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유대 크리스토교인들은 요한의 편지를 받아보며, 아마겟돈에서 벌어질 전쟁의 예언을 읽으면서, 피 비린내 나는 전장터인 므긷도를 떠올렸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으리만치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했던 그 땅을 말이다. 므깃도(아마겟돈), 2005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성경지구로 알려진 므긷도, 하솔, 브엘세바는 오늘날 이스라엘에 위치한 고대도시유적으로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도시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도시들이자, 고대 근동의 중요한 무역로의 일부였던 성경지구는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므긷도는 BC 4000년 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긷도는 이집트와 다마스쿠스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 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 년 므긷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도시는 예호슈아에 의해 점령되지 못할 만큼 강한 카나안의 요새였으며(사사기 1:27 ~ 28), 아마도 다뷛에게 정복된 것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에 이르러 므긷도는 견고하게 수축되어 가장 강력한 북쪽 요새가 되었다(왕상 9:15-19), 특히 솔로몬이 세운 마병장과 기병대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순사적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국제로를 장악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므긷도는 BC 923년에 이집트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합 왕에 의해 재건 되었다. BC 609년에 요쉬아 왕은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코 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8-30). 그후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다. 므긷도 1798년 나폴레옹이 주둔하였고, 1917년 영국의 알렌비(Allenby)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므긷도였다. 므긷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BC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카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므긷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긷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곳에서 발굴된 마병장에는 말들의 고삐를 매어 놓았던 구멍이 뚫린 돌들이 말구유와 함께 늘어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 (BC 869-850) 므긷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7. 일곱째가 그 사발(대접, 쟁반)을 대기권에 쏟았다. 큰 소리가 성전의 보좌로부터 나서 말했다. "이루어졌다." (It is done) 18. 그러자 번개와 소리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그리고 큰 지진이 있었다. 그러한 것은 사람이 땅 위에 있은 뒤로 부터 그렇게 큰 지진은 없었다. 19 그러자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모든 나라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빌로니아가 하나님 앞에 기억한 것이 되어 그의 세찬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았다. 20 그리고 각 섬도 없어지고, 산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21. 그리고 무게가 한 탈란토(40 킬로)나 되는 큰 돌덩이들(운석)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떨어졌다. 사람들이 그 돌덩이들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욕했다. 왜냐하면 큰 돌덩이들(운석(隕石), hailstones)의 재앙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