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8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이르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하여 우리 인생이 주 앞에서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시 90:4) 않음을 믿습니다.
이에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이 세상의 인생과 역사가 현실이 아니라 곧 꿈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곧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꿈이 꿈인 이유는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곧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나의 인생과 역사에서 끝이라면 내일은 진짜 나의 삶의 현실로 돌아갈 것이기에 나의 삶의 현실은 그 나라임을 믿습니다.
오늘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티끌이요 먼지이며 없음에 불과한 나에 집중하지 않게 하시고 나를 그 나라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나를 장악하소서.
불구자인 앉은뱅이를 일으켜 준 베드로와 요한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뒤에서 인도하신 성령님께 집중하는 자가 되어 오히려 거룩한 불구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진정한 주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주님, 신학과 교리는 잘 모르나 날 붙잡아 그 나라로 이끄시는 우리 주님의 창세전 언약은 믿사오니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4:23-37
제목 : 초대교회 신자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넘어 천국의 공동체를 사모합니다.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 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기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 나의 묵상
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한 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조치를 일축하였다.
그럼에도 공회는 사도들을 마땅히 처벌할 근거가 없었고,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석방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 통치자들로부터 놓이자마자 동료들에게로 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한 말을 낱낱이 고하였다.
동료들은 그 말을 듣자 다같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 주께서는 우리 주의 종인 우리의 조상 다윗의 입을 빌어서 성령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사람이 날뛰며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였는가?
세상 임금들이 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과 그의 메시야에게 대적하였다.
사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이 성에 모여서 주께서 기름 부으신 주의 거룩한 아들 예수를 대적하였다.
그리하여 주의 손과 뜻으로 미리 정해주신 일들을 모두 행하였다.
모인 무리들이 한 마음으로 드린 기도는 시편 2편을 인용하고 있다(시 2:1-2).
시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다.
시편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이방사람들과 백성들과 세상임금들과 통치자들은 예수를 위협하고 죽음에 넘긴 이들을 가리킨다.
헤롯은 세상임금들을, 본디오 빌라도는 통치자들을 대표한다.
이방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을 가리키고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예수는 이들에 의해 수난당하고 죽음에 넘겨졌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하나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신 일을 수행했을 뿐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수난과 죽음에 넘겨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죄사함과 생명을 얻게 하는 구주가 되게 하셨다.
(행 2:23-24)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제 무리들의 기도는 현재의 상황을 아뢰는 것으로 바뀐다.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능력의 손을 펼치사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4:31절은 성령으로 ‘충만하다’(핌플레미)는 4:8절과 같이 위로부터 부어지는 권능을 말한다.
‘충만하다’는 ‘부정과거형’(filled with)을 사용하고 있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능력의 체험이다.
이는 신자가 마땅히 준행해야 할 일상적인 성령 충만(플레로오)과 대비된다(엡 5:18).
사도들의 기도는 고난으로부터 구출해줄 것을 구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살펴주시고’라는 것으로 국한시킨다.
즉 고난의 상황을 어떻게 다루실지는 하나님께 맡겨놓고 있다.
그들은 다만 고난 중이라도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기를 구한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지고(핌플레미), 설령 수난당하고 죽임당하는 일을 감수하면서도 주의 말씀을 담대히 전한다.
(행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들의 기도와 그들이 받은 성령 충만은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특히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 복음을 전하며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수난을 미리 말씀하셨고, 또한 그의 권능과 뜻이 그의 수난을 미리 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신 것이 아니다.
이에 하나님이 고난의 상황을 살펴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감당하기를 구한다.
그 때 성령으로 충만해지며(핌플레미) 고난을 감수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한다.
그러므로 지상의 어떤 고난도 복음 증거하는 일을 가로막지 못한다.
다만 간절한 기도와 그로 인해 부어지는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 요구된다.
4:32-37절은 초대 교회의 재산공유에 대한 증거이다.
믿는 무리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이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놀라운 권능을 가지고 증거하니 사람들이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한 마음과 한 뜻(생각)으로 하나가 되었다.
마음과 생각(지각)은 인간 생활의 태도를 결정짓는 본래적인 인격의 중심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초대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소유를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가 돈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신 15:4절’의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라는 구약의 말씀을 성취한다.
이에 대한 본보기로 바나바가 언급된다.
구브로 출신으로 레위사람이며 사도들에게서 바나바(위로의 아들)라는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다(36-37절).
바나바의 행동은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이 분명하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집이나 밭을 판 것이 아니었다.
32절에 보는 바와 같이 소유를 그대로 두고 공동사용을 하기도 하였고, 행 12:12에서 마가의 어머니가 집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따라서 바나바의 행동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수 있었다.
바나바의 행동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는 사실은, 초대 교회의 사랑의 공동체가 이미 사라져버린 뒤라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34-35절에 묘사한 재산분배의 방법으로는 공동체의 경제적 궁핍을 오랫동안 메꿔나가지 못하였다.
사실 얼마 안가 예루살렘 공동체는 가난에 시달렸고, 지도자 야고보는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갈 2:10).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가 잠시 보여주었던 공동소유나 무소유의 생활은 이상적 가치이지만 모든 시대 교회에 요구되는 규범은 아니다.
정말 초대교회의 생활규범은 나의 마음을 적이 울린다.
나 역시 마음이 여리고 제법 따뜻한 편이라서 가난한 이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그래서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들을 보면 금전적으로라도 도와주어야 마음이 편하다.
몽골에서나 필리핀에서 사역을 할 때 정말 곤고한 상황에 처한 형제를 보고 내게 있는 선교비를 지원해 준 적이 있다.
사역을 하는 몽골 현지 사역자에게는 긴히 차가 필요하여 차를 사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말을 하는 즉시 나의 이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을 몰랐다면 동네방네 소문을 내서 후원금을 모으고 도움요청을 했을 테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님을 알기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와서야 이런 일을 밝히는 것은 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접할 대상자들은 모두 복음을 아는 이들이기에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음을 알고 주님께 감사를 돌릴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인이며 나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죄인 중에 괴수임을 인정한다.
그런 내 안에 나는 없어지고 오직 예수의 사랑과 보혈의 능력으로 덮으심만 있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가 아무리 내 것을 아껴서 남들을 도와준다고 해도 그 안에는 나도 모르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탐심과 자기 의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며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이런 자입니다.
99가지를 다 지켰을지라도 한 개를 어긴 자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하여 내가 바로 사형에 해당하는 자인 게지요.
하지만 내가 오늘 담대하게 아버지 품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창세전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오니 나를 그 품에 꼬옥 안아주소서.
범죄로 치자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옷으로 나를 덮으시오니 그 은혜 아래 거할 따름입니다.
쉐키나의 영광이 나를 감싸 안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임하는 쉐키나의 영광으로 나를 두르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