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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연희한테 좋은 소식이 생겼어.”
예린은 은혁의 바로 옆에 쿠션을 끼고 앉아 말했다.
“연희씨 몇 달 전에 이혼했다고 했었잖아. 무슨 좋은 소식?”
은혁은 팩 때문에 오물거리며 말했다.
“우진 선배랑 다시 만나거든. 잘 되가는 분위기야.”
“그게 좋은 소식이야?”
말해 무엇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예린이 말했다.
“당연하지. 둘이 잘 어울리잖아. 역시 인연은 따로 있는 건가봐. 멀리 떨어져 있
어도 서로를 잊지 못하잖아. 결국 다시 사랑할 수밖에. 우진 선배도, 연희도 이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거 진심이니? 이제 나 니 맘에 강우진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야?’
“섭섭하지 않아?”
은혁은 예린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제발 섭섭하다는 말은 하지 마라.
“애초부터 기대 같은 거 하지 않았으니까 새삼스럽게 섭섭할 것도 없어. 선배에겐
나보다 연희가 잘 어울려. 사실 나 고백 했었다? 선배 유학 가는 날. 공항에서. 근
데 선배는 하나도 안 당황하는 거 있지? 그래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니까. 어렵게
얘기했는데 선배 반응이 너무 담담한 거야. 실망했지만 선배의 한마디 대답에 그냥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
예린이 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만약 나였다면 기뻐서 마구 날 뛰
었을 텐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을 텐데...
“근데 그 한마디가 뭐야?”
“선배의 심장은 연희 거라는 말. 그 말을 들으니 내가 뭐라 더 말할 수 없었어.
하나뿐인 심장을 이미 줘버렸다는 데 떼를 쓴다고 나를 돌아봐 주는 건 아니니
깐.”
그래도 우리 돌팅이 엄청 마음 아팠겠다. 나한테 왜 말 안했어. 말해줬다면
내 마음 아파도 너 위로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바보 돌팅이. 내 심장의 주인은
너야 돌팅아. 내가 살아 숨 쉬는 시간 모두 다 네거야. 한예린거지.
“선배와 난 인연이 아니었나봐. 연희와 선배 모습을 보면 욕심 부릴 수가 없어.
둘은 꼭 하늘이 맺어준 사람들 같거든. 사실 너한테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창피하
다. 고백했다 차인 건 정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히히. 나 웃기지?”
“아니 하나도 안 웃겨.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한예린 쪼그만 그 가슴에 담아두고
얼마나 아팠니? 유은혁 뒀다 어따 쓸래? 그럴 때 술 사 달라, 같이 놀아 달라 부탁
도 좀 하고 그러면 안 되냐? 유은혁, 한예린 한테는 항상 대기중이란 거 몰라?”
예린은 아무리 은혁이라지만 좀 창피한 생각에 우스갯소리를 한 건데 은혁이 정
색하며 말하니 꽤 당황스러웠다. 그 눈빛은 뭐니? 속상하다는 것도 같고 화난 것도
같고. 그리고 뭐 쪼그만 가슴? 이게. 언제 제대로 보기라도 했어? 왜 이래. 나도
한 몸매 하는 사람이라고. 풋. 은혁의 말에 순간 불끈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며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냐. 바보 돌팅이.”
“아무리 은혁이 너라도 나도 창피한 건 있다. 그래도 그 말 고마워. 위로가 된다.
그리고 언제 니가 내 가슴 봤다고 쪼그마하대?”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볼륨을 자랑하는 자세를 취하는 예린이. 하하 너무 웃겨.
조금 전까지 심각한 얼굴로 얘기하다 은혁의 말에 자존심이 좀 상했는지 저렇게
유혹하는 자세를 취하다니 마누라 너무 귀여워. 앙 깨물어 보자.
은혁은 생각대로 예린의 입술을 느닷없이 막고 자근자근 깨물어 댔다. 예린의 반
항을 가벼이 잠재우고. 아, 부인 입술은 너무 달콤해. 더 이상 나가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 때야 아쉽게 입술을 떼어냈다. 홍조를 띠고 있고 있는 지금 모습은 진짜
너무 안아주고 싶어. 마누라야, 이쁜 내 마누라야.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건 운명
이야. 유은혁에겐 가장 행복한 일이자 가슴 아픈 일이지만.
“으으.”
예린은 은혁이 깨물어 조금 따가운 입술을 부비적 거렸다. 쟤가 왜 이래. 욕구불
만이 지나치게 쌓였나? 남자들은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도 아무렇지 않게 잘 수 있
다던데... 갑자기 은혁이 낯설은 남자로 느껴지며 예린은 경계심이 들었다. 요즘들
어 벌이는 은혁의 스킨십은 전혀 장난스럽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그것보다 사실 예
린은 아까 전의 은혁의 말을 신경쓰고 있었다. 유은혁은 한예린 한테는 항상 대기
중이라는 말. 뭐야. 괜히 감동 되잖아. 유은혁, 진짜 나쁜 놈. 니가 그렇게 말하니
까 니가 이렇게 내게 몹쓸 장난해도 널 미워하질 못하잖아.
“아버지 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
“아니다. 다 알아. 난 오히려 고맙다. 네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주길 바랬단
다. 애비 입장만 내세워 미안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사랑하는 마음까지 늙어 버리는
건 아니거든.”
“아버지가 많이 외로우실거란 생각 미처 못했어요. 아버지께 그런 사연이 있었다
는 것도요. 아버지, 전 그래도 할아버지께 감사드려요. 덕분에 제가 아버지, 어머
니 아들로 태어날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아들이여서 너무 행복했으니까요.”
은혁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난 한번도 너희 엄마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버님을 원망한 것도 금
세 다 용서했지. 난 그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렇게 마음 착하고 따뜻한 사
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니? 니가 그런 면을 많이 닮았지. 그래도 한 구
석에 나도 모르게 숨겨진 빈자리까지는 어쩔수가 없더구나.”
은혁은 아버지의 진심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한 눈을 파실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동안 은혁의 사랑만 중요하게 여겼지. 정작 다른 사람들의 마
음은 들여다 볼 생각을 못했다. 이제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됐으니 아버지의
사랑, 은혁은 기쁘게 인정해 드릴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필요한 법이다.
아버지의 재혼은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가까운 친지와 지인
들을 초대해 식사를 하고 결혼식 대신 결혼 앨범만 따로 촬영했다. 물론 은혁이
직접 두 분의 사진을 촬영했다. 보일 듯 말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는 아버지와 감
격스러우신지 눈물을 보이시는 새어머니, 그 두 분을 진심으로 축복해 드리며 그
모습을 소중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두 분은 여행을 떠나셨다.
마음을 먹은 이후 은혁은 진심으로 새어머니를 받아 들였다. 어머니는 이미 떠나
셨지만 못다한 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새어머니께 대신 하겠노라고 은혁은 다짐했
다.
“형은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직접 두 분의 결혼 사진도 챙겨드리고 제가 다 감
동 했어요.”
촬영 준비를 하면서 서준이 은혁을 향해 말했다. 은혁이 편하게 부르라해도 처음
엔 작가님, 선배님 하던 서준이 이제는 편하게 부르고 있다. 그만큼 서로를 알아가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집 돌팅이가 원하는 일인데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내가 우물안 개구리였다
는걸 이번에 톡톡히 깨달았지.”
“정말 꽉 잡혀 사신다니까. 우물안 개구리요?”
은혁은 서준에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말은 서준에게도 해당되는
거니까.
“난 내 사랑만 봐았던 거야. 내 사랑만 중요하고, 내 마음만 아플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지. 사람들 누구에게나 다 사랑은 중요한 법인데. 다 각자 사연들이 있는 건
데. 난 내 사랑만 힘들고, 나만 어렵게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우물안 개구리처럼.
나만 힘들다. 내 사랑만 어렵다 했지. 그런데 사실 모두에게 사랑은 다 중요하고
어렵고 행복한 일이잖아. 내 감정만큼 다른 사람들의 감정도 소중하다는 걸 그동안
잊고 지냈던 거야.”
“정말 그러네요.”
서준은 촬영 도구를 나르다 말고 멈춰 서며 쓸쓸히 웃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
고 있었다. 내 사랑만 힘들고 아프다. 한서준, 넌 우물안 개구리 중에서도 제일 못
난 개구리야. 넌 너만 아프면 됐지. 다른 사람도 아프게 만들었잖아.
은혁은 말해주고 싶었다. 서준이 지금 힘들어 하는 것도 실은 너무나 사랑하기 때
문이라고. 이 세상에 서준 혼자만 힘들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좀 더 당당해져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
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왜, 왜 갑자기 싫어진 건데?”
“이유? 그딴 거 모르겠다. 그냥 니가 싫어졌어. 싫어지는데 꼭 이유가 있을 필요
없잖아?”
“적어도 사랑한 사람에게 이유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어제까지는 사랑하
다 내일 되면 사랑 안 한다 하니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거야?”
“그렇더라. 사랑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너 정도면 잘난 남자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데 대체 왜 이리 귀찮게 굴어. 정 떨어지게.”
은혁은 외출했다 들어오다 스튜디오 안에서 다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고작 내가 그 정도 밖에 안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 밖에 없다고 했잖아!”
“사랑할 때 무슨 말이 든 못해. 이제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그러니
까 이렇게 찾아와서 다신 귀찮게 하지마.”
“아무것도 아니라고. 진짜 내가 아무것도 아니야? 진심이야?”
“그래.”
서준은 울컥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계속 차갑게 말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너희 아
버지 말씀대로 우린 어울리지 않아. 아직 내 미래도 불확실해. 자신 있게 널 내게
달라고 말할 수가 없어 난. 니가 대한기업 따님인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랑할 엄두
도 못 냈겠지. 사랑하지 말걸 그랬어. 너 이렇게 아프게 만들줄 알았으면... 정작
아무것도 아닌 건 나야. 은비야.
은혁은 밖에서 서준과 은비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난 아버지의 반대도 이겨낼 수 있었고, 다 버리고 나올수도 있었어. 그런데...아
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미안했어. 갈게. 다신 찾아오지 않을 거야. 잘 지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은비가 스튜디오를 나갔다. 은혁은 불
길한 예감에 서준을 쫓아나가게 했다. 은혁의 예감대로 은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냥 가버리면 되잖아. 은비는 그대로 뛰쳐나와 차도로 뛰어
들었다. 그보다 한 발 앞서 서준이 은비를 잡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흑흑... 그냥 사라져 버리면 되잖아... 내가 없어도 아무렇
지도 않을 거잖아!”
“진은비! 넌 그렇게 나를 몰라? 이게 무슨 짓이야. 대체 왜 이러니? 다 너를 위해
서인데. 나 때문에 왜 니 목숨을 버리려고 해. 내가 뭐라고.”
“흑흑... 그걸 몰라서 물어. 나도 한서준 밖에 없단 말이야.”
“왜 이리 바보 같니. 내가 너 보내주려고 얼마나 참았는데. 보고 싶은 것도, 목소
라도 듣고 싶은 걸 겨우 참았는데...”
서준은 은비를 끌어 안았다. 그래 다시 한번 부딪혀 보겠다고.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은혁은 두 사람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은혁과도 알고
아버지와 친분이 깊은 분이었다. 그래서 은혁은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했다.
아버지가 서준을 지원해 주기로 그래서 아버지를 믿고 서준을 지켜보기로 했다. 결
국 서준과 은비는 교제를 허락 맡았다. 서준이라면 은비 아버지가 내걸은 조건을
꼭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1년 안에 사진 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서준의 능력을 증
명한다면 더 이상 반대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서준이 자신의 사랑
을 이렇게 지킬 수 있게 되어 정말 좋았다.
번쩍 번쩍. 우르르 쾅쾅. 번쩍 번쩍. 우르르 쾅쾅.
태풍의 영향으로 천둥 번개와 함께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 돌팅이 많이 무서울 텐데...”
은혁은 예린이 걱정됐다. 예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지금처럼 천둥 번개도 치고
비도 많이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단순하게 무서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신적인 공포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은... 은혁아,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천둥도... 무서워... 무서워...”
울먹거리며 공포에 질린 표정의 예린을 은혁은 다독여 침대에 눕혔다. 같이 옆에
누워 가볍게 토닥여 주며 예린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곧 그칠 거야. 괜찮아. 괜찮아. 옆에 있어 줄게. 진정해. 다 괜찮을 거
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과 다정한 목소리에 이윽고 예린의 잦은 떨림이 사그라 들
었다. 곧 은혁의 품에서 예린이 새근새근 잠들었다. 눈가엔 눈물방울까지 맺혀선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예린이. 마치 은혁의 품이 어머니품처럼 느껴지는 듯 했
다.
‘이구 돌팅이. 그렇게 편안해? 진정되서 다행이지만 이렇게 섹시한 남편 품에서
어쩌면 이렇게 편안하게 잠들 수 있어? 바보 돌팅이.’
잠든 예린을 내려다 보며 은혁은 그제야 안심하고 웃었다. 은혁의 품이 많이 편한
가 보다. 저렇게 금세 깊게 잠이 든 걸 보면. 그런데 돌팅아, 난 니가 날 남자로
보고 남자로 느끼고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유은혁에게 유일한 여자가 한예린인
것처럼 말이야.
은혁은 예린을 품안으로 더 끌어 안았다. 예린도 꿈틀거리더니 더 바싹 기대온다.
상큼한 과일 향내가 느껴졌다. 은혁은 예린의 이마에 긴 입맞춤을 한 후 기분 좋게
잠들었다.
유은혁과 한예린이 결혼하고 처음으로 한방에서 같이 잠든 역사적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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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진짜 많이 무덥네요. 장마가 떠나자마자 무더위라니.
요즘 날씨가 진짜 많이 괴롭히는거 같아요. 다들 더위 때문에 고생 많으시죠?
오랜만에 다음편을 가지고 왔어요. 일주일만인거 같은데.
달팽이를 기다려주시는 분들을 위해 더위와도 싸우면서 들고 왔답니다. 헤헤^^
계속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드리고요. 휴가계획도 잘 세우시고 무더운 여름 날씨
건강 조심하세요!! ^^ 전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슝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