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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나온 한자어들은 모두 몰입을 위해 설정된 설정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들을 뒤로하고
1576년 병자년 8월 7일에 고려군은 출정했습니다.
병사의 수는 마자파힛 (刺蠻/자만 이라고 불렀음)이 더 많은 것 같아보였지만,
저들은 기병과 포병 같은 고급병종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습니다.
다만 장거리 상륙전이기에
동원할 수 있는 고려의 병력은 극히 제한되었습니다.
잘 못하면 이 것에 발목을 잡힐 수 있을 것이었고.
발목을 잡히고 말았습니다.
한편 함대가 작전지역 근해에 도착한 1576년 중후반,
독로강변이 개간되어 추가적인 세수를 걷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구려의 위상을 회복하게되면서 수도가 평양성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개경 이북 지방이 갈수록 개척됨에 따라서
수도권인 패서지방과 수도인 평양성이
도리어 개경 이북에서 경제적으로 뒤쳐지는 지역이 되고 만것입니다.
이러한 원인 중 하나에는 기존의 수도 개경에서
행정기능이 대규모 이전을 할 것을 예상하고
지역에 대규모 제한을 걸어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상징성을 위하여 평양성을 재건했으나,
그것을 보조할 행정기관은 비용등의 변명을 대며,
이전이 늦어졌고. 결국 일종의 별궁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되었습니다.
특히 사냥을 좋아했던 과종 왕연산의 지시로 주변에 사냥터를 확보하게 되면서,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휴양지로서의 기능만이 각인된것이 컸습니다.
후대의 왕들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남았습니다.
하나는 정치적 위험과 정당성을 확보하여,
다른 곳, 이를테면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나,
기존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천도하는 것.
둘째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평양 전체를 재계획해서
효율적인 행정수도로 변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 비용만 충당이 된다면, 정치적 위험을 감당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습니다.
1577년 1월 9일
조향(祚響)세자 왕용이 이끄는 군대가 드디어 상륙해 첫 교전을 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수군이 이곳에서 해안을 틀어막고,
일방적인 공성전이 일어난 다음,
섬의 소유권을 양도 받는 것으로
지난 전쟁과 같은 방식의 진행방식이 될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먼 거리를 항해해온 탓에,
함대의 식량이 떨어져 다시 보충하려고 돌아간 사이,
적이 기습하여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1월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조정에서는 피 속에 얼음이 흐른다고 불리는
가죽옷 하나 입고도 눈썹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유목민들 위주로 파견했지만,
이들은 해안가에서부터 이곳의 계절이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것은
저번 병인출병 (바칸섬 전쟁)의 참전자들 사이의 농담내지 전설로만 생각되던
갑주입은 코끼리들의 돌격이었습니다.
바칸섬은 자만 제국의 외각이었고 작은 섬이었기에,
코끼리를 이용한 대규모 공세가 없었지만,
수마트라 섬 (樹痲墟蘭)은 바로 말레이 (目紫夷) 반도를 통해 남만 본토와 연결되있었기에,
남만에서 모집된 수많은 코끼리 부대가 고려인들의 침략을 막고자 섬 각지에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고려인들이고 말갈인들이고, 화북인들이고,
아달(阿撻 / Atayal, 이 세계의 고려가 대만 섬을 부르는 말)인이고
그들은 이 '곡길희'들이 상상 속의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막 깨달았을 뿐이었습니다.
거기에 열대우림의 습지는 질병의 온상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화승총의 승지를 좀먹어 발사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려군은 하던대로 화망을 형성하여 적군을 제압하려고했지만,
많은 총기가 불량이 나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코끼리를 제압하는데 매우 효과가 좋은 대형화약병기를 다루는 병사들조차도
4천여명이 되었음에도 그들은 반격다운 반격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화차를 내팽겨치고 탈주하기까지했습니다.
다행인점은, 지난 병인출병에서 자만의 해군 대부분을 수장시킨 뒤었기 때문에,
퇴각과정이 질서롭지 못했을지언정,
해안에서 대기하던 수송함으로 집결한다음 다시 남양군도에 도착해
충원과 재보급을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혼란스러운 후퇴과정에서 재해권마자 확보되지 못했다면,
고려군은 전멸했을 것이었습니다.
우월한 기술력과 사기, 규율을 가지고 있었으나,
적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당황한 조정은
본토에서 부대를 차출하여 하나 더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질병, 상상 속의 괴물, 요상한 기후, 알수없는 복장의 적군,
뒤틀린 형태가 가득찬 이교도의 사원, 괴상한 냄새가 나고 먹을 수 없는 식생,
물이 많음에도 모두가 아파지는 식수의 부족 등의 보고에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40년 가까이 3명의 왕을 섬기면서, 전장에서 충절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된
유연산 장군은 제외였습니다.
(장군이 이렇게 안죽을수 있나요?)
그는 부산항에서 조정을 왕궁을 향해 절을 한다음,
다시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그의 인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원정을 떠났습니다.
충성스러운 무슬림들이 이렇게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지만,
1577년 2월 20일
또 유목민들 사이에서 이단이 성행합니다.
저들은 기존의 민간신앙을 유지하고 곡해하여 괴상한 풍습을 가지고는 했었는데,
적어도 예언자님 (그분과 평화가 함께하길)의 말씀은 그런
뒤틀린 야만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말씀입니다.
당장 조정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시절이 오면, 이단자들은 즐거운 신학공부를 다시 하러,
머리도 식힐겸 좀 더 시원한 지방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ㅅ^.
유목민이 사람 (고려인)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된다고요?
말하고 목초지하고 먹을 것을 뺏은 다음에
얼음덩어리에 던져놓으면 알아서 땅을 개간하고
오만스러움이 사라져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북국(北國/시베리아)은 고려가 고려인을 단련시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최고의 재산입니다.
1577년 9월 1일
"전하 상인들이 소팔라(우매야/牛賣也)라는 고을을 세워,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감독하는
또 다른 무역거점을 세우는 것을 윤허해달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더냐?"
"멀다고 하옵니다."
"그러니까, 어디더냐?"
"멀다고 하옵니다."
예산은 투자되었지만,
아무도 그곳이 어디있는 지는 몰랐습니다.
이번에는 심지어 다르-알 이슬람을 너머 정말 알 수 없는 어딘가였습니다.
유연산 장군은 이미 계획을 배 위에서 준비해놓은 상태였습니다.
화포가 없는 저들의 약점을 이용해,
명나라와의 국경에서 가져올 수 있는 모든 화포를 챙겨왔습니다.
총통과 불랑기,화차, 화전,
화염창 (초기의 화염방사기, 그리스의 불처럼 기름을 쓰는 건 아니었고 폭죽처럼 불꽃을 튕기는 방식)
등의 병기를 선박에 무리할 정도로 선적한 다음
남양군도에 퇴각해있던
조향세자의 상륙군과 합류해,
다시 수송함에 탑승하고
소난에 상륙하였습니다.
1578년 8월 21일
드디어 유연산 장군의 첫 전투가 일어났고.
고려군에게 첫 승리가 안겨졌습니다.
사격단계:
고려군과 자만군 모두 이미 화승총을 도입한 상태였지만,
아직 조총수는 양측의 사격보병 중에서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고려군은 수노궁 (연노)와 각궁을 준비했고,
자만군은 궁병과 투창병이 중심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에 자만군이 가지고 있지 않은 화포가 추가되면,
사격단계는 고려군에게 아주 유리했습니다.
고려군이 가져온 화약병기중에서는
열대우림의 열악한 상황에서는, 기습에 취약하고
신뢰도가 떨어지는 총통보다는
본래 신뢰도가 조잡한 구조덕에 부족했지만,
험지에서는 별로 신뢰도의 영향을 받지않는 불랑기가 대활약을 했습니다.
자만군도 불랑기가 전파된 이후였지만,
포술을 중시하는 고려군보다는 역시 대응이 느렸습니다.
충격단계:
상당히 비슷한 양상인 사격전과는 달리
근접전은 양측의 병종이 달라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는데,
자만군은 정통적인 방법으로, 사격전을 최소화 한다음,
장창병과 장갑 코끼리, 그리고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근접전을 추구했습니다.
반면, 고려군은 사격전을 유지하기 위해,
적의 근접을 저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병과 도패수를 운용했으며,
유목민들이 주축이된 경기병대는 방진의 돌파보다는,
교전을 회피하며 피해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물론 모든 고려의 기병이 경기병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목민이 부족하거나 상황이 우세한 경우,
고려의 기병대는 돌격 후 말에서 내린다음 시위에 화살을 올리고,
사격하기 시작하는 것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대기병전투를 위해 준비된 중기병들이
무더운 날씨에 노출되 순식간에 지쳐버리자,
전투는 '후방의 대포들만 처다보고있는' 방식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9월 13일 드디어 전투는 자만군의 패퇴로 일단락되었습니다.
깨어진 전열 사이로 기병대들은 그들이 가장 잘하는 행위인 추적전을 개시했으며,
얇은 옷만을 입고 있는 남만의 병사들은, 무너진 상태에서는
추적자들의 화살에 쉽게 무력화되고 쓰러졌습니다.
그들의 코끼리조차 화약의 폭음 앞에서는 자신들의 편을 밟아죽일 뿐이었습니다.
1579년 9월 2일
지난번의 유목민의 이단세력에 대한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상소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기회에 유목민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관리들을 전부 정리할 생각인지,
수많은 자들의 목록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렸습니다.
물론 주상은 이단자들을 단죄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려인의 진정한 신앙을 곡해했고 욕보였습니다.
이들을 놔두는 것은 이상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아,
종교적, 정치적 인물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며,
명분에 불과한 종교적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이러한 고발을 무시하면 신하들의 반발을 사 행정적으로도 타격이 올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평화가 오기전, 전쟁이 잘 풀리지 않는 이 기회에 희생양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물인 조문효 병조상서가 살생부에 있다는 것은
이러한 정치적 시도를 단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조문효 병조판서는 그가 친분이 있는 유연산 장군과 함께,
오래 고려의 병사(兵事)를 처리해왔으며,
정복군주 무종 시절에 이미 그의 유명함이 조정에 알려져
무종 스스로가 그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전쟁 중에 병사와 관련된 인물을 내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고려의 문신 중, 이 전쟁의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이였습니다.
조만간 영서지방에 유황을 이용한 화포총감이 새워질 것이었는데,
이를 계획하고 적극 지원한것이 그일 정도로, 환갑을 넘긴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보기드문 인재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면직이 된 것은 결국 상소문을 올린 정대균 중서시랑이었습니다.
고려군은 저번 전투에서 패주한 적군을 찾아내 와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북쪽에서 계속해서 또 다른 군세가 밀려오는 것으로 보아,
전쟁이 끝나려면 멀은 것 같다는 불안감이 고려에 감돌았습니다.
물론 더 시간이 쥐어진다면 분명히 승리하겠지만,
이미 재정은 빚을 내고 있는지가 수년이 지났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승전하고도 다시 경제의 활력을 찾는데, 수십년이 걸릴것입니다.
1580년 1월 9일
화북인들 중에서, 금강불교를 믿는 학자가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권력욕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부와 연관되는 일 없이 학문을 추구 했습니다.
그가 딤미가 아니라 진정한 무슬림이었다면...!
분명 이 나라의 신학에 커다란 공헌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유불교는,
배조교(陪鳥敎/탱그리신앙), 십자교와 구교 (球敎 / 유구(류큐)의 토속신앙)와는 달리
적국 명나라의 것이라는 명분으로 지속적으로 탄압받는 상태였습니다.
15세기 후반, 세조(실제역사에서 공민왕)의 아들
평조는 고려를 진주(眞主/الله/알라)에게 봉헌하기 위해서
해서지방에서 온 47살의 늙은 회교도를 중용했었습니다.
그는 안성(安晟)이라는 사람으로, 곧 첫 회정시중 (回政侍中 / شيخ الإسلام /세이흐 알-이슬람)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안성은 이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75살에 늙어죽을때까지
고려인들이 진정한 믿음을 얻어, 영혼을 구원받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노력한 박애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세운 수많은 원칙 중 딤미들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불교는 왜로, 유교는 명으로'.
물론 고려의 역사가 이교도의 국외추방과 박애로 얼룩진 것은 아니지만
1508년 무진법란이 있었고
1526년 12월 1일에서 1527년 4월 18일에는 정해유갱
(분서갱유에서 따와서 부르는 말, 당시의 회정시중 이가(李嘉)가
명나라 내통자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신망있고 유능한 유교도는 전부 잡아서
봉천(奉天)으로 압송하여 역모죄로 다스린 일) 사건이 있었습니다.
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된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관용주의를 표출하고 있습니다만,
역시나 불교도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고려의 관용입니다.
소난은 함락되었고, 함대의 기항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드디어 수군의 작전반경이 확보되었습니다.
이쯤이면 승기를 완벽하게 잡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적의 삼만대군과 섬에서 공존하는 상태였으므로,
이번에 다시 전투에서 패한다면,
이 이상의 재정적자를 피하고 발을 빼는 것이 현명할 것이었습니다.
고려에게 있어 인도교(印度敎/힌두교)란
남양군도의 원주민들이 있기고해서,
고려가 상당히 관용적으로 보고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천축해를 통해야하니까,
남천축의 인도교도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신앙을 위한 길이었고요.
하지만 이렇게 인도교들과의 필요없는 싸움이 계속된다면,
어느 시대나 그러했듯, 그들을 경계하고 처리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대중의 인식이 전환되게 되는 법입니다.
1580년 4월 3일
남만의 여러 의로운 군주들이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 지하드를 지키기 위해
의용군을 보내주었습니다.
알라 후 아크바르!
고려군의 군세가 원정에서 모자라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자발성 때문이 컸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군이 현지군을 빨리 편성하여 소모시키는것에
어느정도의 전문성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1581년 신사년 새해, 떡국도 보급받지 못한 우리군은,
떡국은 고려에서!를 외치며 적군을 선제공격했습니다.
저번 방카전투의 경우, 수비전이었기에 병종의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했었지만,
이번에는 화포를 지키는 방식이 아니라,
순조롭게 화포를 설치하고 적에게 내려꽂으면서
사격진이 전진섬멸하는 이상적인 운용을 보여줬습니다.
적국인 자만국의 정규군이 중심이된 전투였는데,
경량화된 조총을 메고있던 조공국들과는 달리
대부분 장창병으로 무장하고 있는 추태를 보여주며
고려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조공을 받는 자칭 제국이라는 오랑캐는,
마치 왜 제국을 보는 것처럼,
발전하여 주군에게 반역하고자하는 원거리의 속국들보다,
현저히 뒤처지고 의욕없고 부패한 맨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퇴폐한 국가는 멸망시켜 이상적인 고려의 도덕율법적인 정치체제에 복속시켜야합니다!
오랑캐를 증오하십시오!
떡국의 힘!
물론 3월 1일 인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먼젓번 전투는 사기치만을 공격하여 이겼고,
이것은 패잔병들을 추적한 끝에 얻은 성과입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재정이 버티지 못합니다.
1581년 3월 4일,
유구의 지도층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동조하는 상인들을 이용하여,
일본열도에서의 통상권을 얻어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유구인들은 영리하고 재치있으며, 무엇보다 고분고분합니다.
단 한번도 반란을 일으킨적이 없는, 모범신민으로서
그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물론 지나치게 저열한 야만문화로 되돌아가버리면 나름대로 골치아프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미개한 풍속을 고쳐나갈때,
쿠란과 하디스, 그리고 샤리아를 바탕으로 그 틈새를 메꿔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알라님 손바닥 안입니다.
인샬라.
`1581년 6월 2일에 드디어 종전협상이 맺어졌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빚을 한 대여섯번은 빌렸을 정도로 경제는 나락에 빠졌습니다.
아주 큰 실책이었습니다.
계획만 철저했어도 순식간에 끝나는 것이었지만,
무작정 이길것이라고 생각하고 선전포고부터 했으니, 자업자득입니다.
이로써 명나라 정벌이나 일본열도 정벌은 또 수십년 뒤로 미루어졌습니다.
한편 방카섬은 고려인들에게 불리던 이름 그대로,
'소난'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긴축재정의 뒤에는 또다른 전쟁이 기다리고있겠죠?
무한히 도덕적일 것입니다.
1584년 9월 30일, 방카섬의 무역상들 일부가
다른 무역기회를 잡고자 명나라의 상해로 이동했습니다.
상인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은 위기에서 구해줬건만,
'너무나도 안전'하다며 다른 사자의 주둥아리 앞에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이들의 규모는 상당해, 후에 상해 조차지라는 지역을 만들게 됩니다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이며,
아직까지는 고려촌이라고 불리는 작은 규모의 통상지역에 불과합니다.
1584년 11월 1일, 고려상인들은 소난에서 했었듯,
어느 정도의 기반시설과 자치권을 현지 지도자에게서 타내었습니다.
설마하니, 아직도 빚이 천 두카트가 넘는데...
다음은 용을 잡는 술탄의 이야기가 될까요?
다음화를 플레이하고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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