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史는 고구려 사람의 눈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
日帝와 中華主義에 惡用되고 북한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後식민사학에서 벗어나야』
李鍾旭(이종욱·59) 서강大 교수는 「한국사학계의 파이터」이다. 1989년 부산에서 필사본 「花郞世記(화랑세기)」가 발견되어 그 眞僞(진위)논쟁이 가열되었던 10여 년간 그는 은사이며 한국사학계의 권위였던 李基白(이기백·2004년 6월 별세) 선생의 뜻을 거스르면서 그것이 왜 「眞本」인지에 관한 논리를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럴 무렵 필자는 李基白 선생과 李鍾旭 교수 두 분을 모두 인터뷰했지만 한국적인 학문 풍토에서 스승에게 叛旗(반기)를 든 李鍾旭 교수의 용기에 감명을 받은 바 있다. 그런 그가 최근 力著 「고구려의 역사」(김영사 刊)를 내놓았다. 이번에도 그는 논쟁의 한복판에 설 것 같다. 「고구려의 역사」는 「實證史學(실증사학)」과 「民族史觀(민족사관)」의 고구려史 왜곡과 북한 이데올로그들의 고구려-발해 正統論을 정면에서 통박했다.
─이번에 「고구려의 역사」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民族史觀과 後식민사학에서 벗어나 고구려의 눈으로 고구려 역사를 再구성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後식민사학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은 帝國 일본의 연구자들이 정치행위의 도구로 발명한 고구려史의 틀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몇 세대에 걸쳐 그들의 스승이나 선배들이 왜곡시킨 역사의 틀을 확대 발전시키며 고구려사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광복 이전 日帝의 정치적 목적에 복무한 역사를 「식민사학」이라고 한다면, 광복 이후에도 그것에 추종한 역사는 포스트 식민사학, 즉 「後식민사학」인 것입니다』
─日帝의 대표적인 왜곡 사례는 무엇입니까.
『이마니시(今西龍)는 3세기 중반 桂婁部(계루부)가 王都가 되면서 畿內(기내: 수도권) 4部에 那(나: 小國)의 세력이 가서 살게 되었고, 원래 계루부와 합해 5部로 편성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또 미시나(三品彰英)의 견해는 美川王(미천왕·재위 300~331) 이전의 고구려는 원시적 小國 또는 那 집단에 의한 부족 연합체적 형태였고, 美川王 이후 那 집단이 소멸되고 5部제도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학자들이 고구려의 국가형성과 정치발전, 즉 왕권 정립 시기를 3세기 또는 4세기로 내려 잡았는데, 광복 후에도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군요.
『물론 지금 그러한 일본인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 전체 틀을 무너뜨리지 못해 아직도 太祖大王(태조왕·53~146) 이전의 고구려史를 옳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교과서에는 어떻게 기술되어 있습니까.
『한국의 史學은 「三國志」의 기록에 바탕을 두고 고구려 초기국가 단계에서 계루부를 비롯한 5部가 연맹체를 구성했다는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 결과 諸加聯盟(제가연맹), 諸加會議(제가회의)가 있었던 것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왕들은 피정복국의 지배세력을 제후적인 존재로 편제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채택했지만, 部의 세력과 연맹체를 형성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2002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고등학교 「국사」에서 고구려 초기 수백 년의 역사를 「部체제」 說로 메우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後식민사학이라고 봅니다』
民族史觀에 매몰되면 世界人이 의심해
─더 큰 문제는 북한과 국내 주사파의 「고구려 정통論」 아닙니까.
『한국사의 정통은 고조선-삼국시대-大신라(통일신라에 대한 李교수의 호칭)-고려-조선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고려는 大신라의 토지와 인민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그 지배체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渤海(발해)는 고려의 건국에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고구려-발해를 정통으로 보는 역사관은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정치행위입니다』
─고구려인은 현재의 우리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현대 한국인은 다양한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三韓이 통합되면서 옛 고구려인들도 大신라인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유산이 한국사에 이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는 고구려보다 신라의 유산을 많이, 그것도 훨씬 많이 이어받았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서울의 한복판에서까지 고구려 중심주의가 번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0세기에 들어 日帝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고구려를 특별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고 隋·唐(수·당)과 같은 대제국과 맞서 당당히 싸웠던 고구려를 한국인의 자부심이자 영광 그 자체로 삼은 것이죠.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11위를 차지한 오늘에 이르러서까지 民族史觀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오히려 세계인의 경계대상이 될 우려도 있는 거예요』
─중국은 이른바 「東北工程(동북공정)」에 의해 고구려사를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중국內 소수민족인 조선족에게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가르쳐 조선족과 한국의 역사적 관계를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 연구가 아니라 정치행위입니다. 중국에서도 제대로 된 연구자는 고구려史를 중국史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의 正史인 25史에 고구려史는 없습니다. 다만 25史의 東夷列傳 고구려 條에서 중국과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의 습속·제도·산물 등에 대한 기사를 실었을 따름입니다. 물론 고구려 역대 왕 대부분의 이름조차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고구려史가 중국史가 아닌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건국신화는 건국과 관련된 사실들을 신화化·설화化한 것이니 그대로 역사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화化한 이야기를 역사적인 이야기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檀君(단군)신화에서 檀君은 1908세까지 살았습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檀君이 한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 명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화적 연대를 역사적 연대로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고구려 건국연대는 200년 앞당겨야
─고구려의 建國年度가 BC(기원전) 37년이라는 것 역시 신화적 연대입니다. 고구려의 실제 건국연대가 언제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三國史記 고구려 本紀 마지막 부분에, 「고구려 秘記」를 인용하여 「고구려가 900년이 되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중국의 史書에도 「秦漢(진한) 시기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 건국이 기원전 3세기 후반이라면 위의 두 기록이 맞아떨어집니다』
─고구려의 실제 건국연대가 200년 정도 앞으로 가는군요.
『기원전 107년에 漢 武帝의 군대가 현도郡을 설치하는데, 거기에 포함된 영역이 高句麗縣(고구려현), 上은대현, 西개마현 3개 현입니다. 현도군은 고구려현 內에 治所(치소)를 두었습니다. 이는 그 이전에 이미 고구려라는 小國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漢城百濟(한성백제) 시절의 王都로 판단되는 서울 강동구 風納土城(풍납토성)의 발굴 결과, 백제의 건국시기도 三國史記에 기록된 연대(기원전 18년)보다 올라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면서요.
『風納土城의 연대를 측정해 보니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백제도 기원전 2세기에 이미 小國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고구려의 경우에도 첫 도읍지 卒本城(졸본성: 渾江 유역의 桓仁 지방) 지역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건국연대를 측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시조인 朱蒙(주몽)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되어야 하는데요. 만약 혼자라면 그가 수백 년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朱蒙이 처음부터 강력한 영토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세운 小國이 그 후 주위의 고만고만한 小國들을 정복하여 강력한 고구려로 발전했다고 보는 겁니다. 三國史記 고구려 本紀 東明聖王(동명성왕=주몽) 條에는 건국연대인 기원전 37년 한 해 동안에 너무 많은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실제 기원전 37년에 그 많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건국신화에 나오는 기원전 37년의 사건은 오랜 기간에 걸친 이야기가 신화의 시간으로 변경된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는 여러 王代에 일어난 일을 주몽왕代의 일로 정리한 것으로 봅니다. 이런 系譜(계보) 조정은 고조선·백제·신라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고구려의 系譜 조정
─왜 그런 계보 조정이 필요했을까요.
『琉璃王(유리왕·재위 BC 19~AD 18년) 때 고구려가 卒本에서 國內城(국내성)으로 천도합니다. 이후 왕들은 자신들을 始祖 주몽과 좀더 가까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卒本시대에 재위했던 여러 왕들을 계보에서 빼고 주몽 한 사람으로 건국신화를 정착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존엄한 존재로 신격화된 始祖王 주몽과 가깝다고 해야 후대 왕의 지위가 강화되거든요』
─그렇다면 李교수께서는 2代(유리왕)부터 「신화가 배제된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리왕 때의 천도는 중국의 사서와 三國史記의 기록이 일치합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유리왕 22년 10월, 즉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습니다. 도읍 국내성은 현재 중국 吉林省 集安市(집안시) 지역이죠. 三國史記 유리왕 條를 보면 천도 이전의 기록은 상당 부분 신화적·설화적 기술이지만, 천도 이후의 기록은 實在한 역사의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고구려 6代 太祖王(태조왕)의 경우 무려 94년간 재위하다가 100세에 76세의 동생 遂成(수성: 7代 次大王)에게 양위했고, 次大王은 폭정을 하다가 재위 22년 만에 明臨答夫(명림답부)의 쿠데타로 살해당했습니다. 다음 왕위는 次大王의 동생 伯固(백고: 新大王)에게 돌아갔는데, 그때 新大王의 나이가 77세입니다. 失傳된 역사를 꿰맞추려고 재위기간을 늘리거나 나이를 올린 것 아닙니까.
『저는 太祖王, 次大王, 新大王은 형제 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력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봅니다. 또한 세 왕 사이에 왕들이 더 있었는데, 이 3人의 왕을 형제 관계로 만들어 놓고 몇 명의 왕은 역사기술에서 지워 버린 것이겠죠. 이런 현상은 고대사회에서 잦은 일입니다. 고구려에서는 태조왕을 「國祖王」이라고도 불렀는데, 그는 영토 확장과 제도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大王이었습니다. 태조왕 이후의 왕을 한 명이라도 더 줄여 놓으면 후대 왕의 권위가 올라갈 수 있거든요. 일종의 계보 조정이죠』
─그러한 계보 조정은 어느 시기에 이루진 것일까요.
『廣開土王(광개토왕) 비문에는 추모왕(朱蒙)-유리왕-대주류왕(=大武神王)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과 대주류왕의 17세 孫이 광개토왕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三國史記에 기록된 계보와 같습니다. 추모왕도 여럿이고, 太祖王도 여럿일 수 있는데, 광개토왕碑를 세운 414년에는 고구려의 王者집단에서의 계보 정리가 이미 끝난 상태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廣開土王碑에서 倭를 主敵으로 기술한 속사정
─광개토왕 碑文을 근거로 내세우는 일본인의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說은 어떻게 보십니까.
『19세기 말에 帝國일본의 참모본부가 광개토왕 碑文을 탁본해서, 그것을 수년간 연구해서 만든 것이 소위 임나일본부說아닙니까. 일본은 광개토왕碑를 이용해 失傳된 그들의 古代史 자체를 조작하고, 강력한 천황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辛卯年(신묘년) 기사 아닙니까. 광개토왕 碑文에서 문제가 된 辛卯年 기사를 두고 일본 측은 「倭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고구려가 이 문구의 主語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倭를 쳐부수고, 백제와 신라를 臣民을 삼았다」고 봅니다.
『신라는 1세기부터 경상북도 일원을 지배하고 있던 영토국가였습니다. 백제는 기원전 2세기부터 주위의 小國을 병합, 기원후엔 경기도까지 진출한 큰 왕국입니다. 백제나 신라의 군사적·경제적 성장단계, 특히 무기체계가 倭보다 훨씬 앞섰는데, 그런 백제와 신라를 아직 古代국가 체제도 갖추지 못한 倭가 어떻게 臣民으로 삼습니까. 그럴 능력이 없는 겁니다』
李鍾旭 교수는 『구절 하나에 매달려 임나일본부가 있었느니 없었느니 하는 것은 학자들이 史料비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광개토왕碑 永樂(영락) 14년(404) 條에는 「倭가 대방(지금의 황해도) 지역으로 침략하여 왕이 몸소 출전하여 왜군을 궤멸시켰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外征의 능력을 갖춘 交戰 상대로 倭를 平價切上(평가절상)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광개토대왕의 즉위 20년 전에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故國壤王(고국양왕)이 平壤城(평양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합니다. 당연히 고구려 사람에게는 백제가 철천지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비문에다 한 번도 「百濟」라고 하지 않고 卑稱(비칭)인 「百殘(백잔)」이라고 쓸 정도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백제 전지왕의 행보입니다. 전지왕은 아신왕의 태자로 즉위 전 倭에 체재하다가 父王의 부음을 듣고 급거 귀국합니다. 그때 倭의 호위병 상당수가 따라왔겠죠. 마침 그 시기에 고구려와 전쟁을 했으니 전지왕을 따라온 왜병도 전투에 투입됐을 겁니다. 결국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깔아뭉개기 위해 主敵을 倭로 바꾼 것 아닌가 합니다』
─隋 양제와 唐 태종의 침략을 막아 내던 고구려가 왜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했을까요.
『중국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들어서면 그 주변국들은 으레 守勢的 입장에 들어갔습니다. 三國史記엔 「고구려가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잃고, 나라 안의 인심을 잃어 멸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고구려가 隋·唐에 대해 끝까지 대결정책을 쓴 것은 장쾌한 측면도 있지만, 「벼랑 끝 외교」로 결국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淵蓋蘇文은 국가시스템 파괴한 무능력자
─당시 고구려 집권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어떻게 보십니까.
『淵蓋蘇文은 연회를 베풀고 그 자리에 참석한 大人 100여 명을 몰살하고 왕궁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죽인 다음 그 몸을 몇 동강 내어 시궁창에 버렸습니다. 왕과 大人 100여 명을 한꺼번에 죽인 것은 고구려를 움직여 온 국가시스템을 파괴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개소문은 국정을 장악해서는 안 될 무능력자입니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킨 후 安市城(안시성)의 城主를 제압하지 못했어요. 그런 리더십으론 다른 지방세력도 제어하지 못했을 거예요』
─唐 태종의 원정군을 물리친 사람이 안시성 城主와 城民들입니다. 연개소문의 통제 밖에 있던 지방군이 唐軍을 물리친 것이죠.
『백제가 망한 이듬해 唐軍에 의해 평양성은 포위당했고 요동 영토는 거의 해마다 침입을 당했는데, 그것은 수도와 지방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런 펀치를 해마다 맞아선 長期戰에 견디기 어렵죠. 결국 연개소문이 죽은 지 2년 만에 고구려는 그의 아들 셋의 권력 다툼 속에서 패망했습니다』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고구려의 중요한 산업은 정복사업으로 보입니다. 영역 내에 여러 피정복 종족이 거주하는 多重的 구조를 지닌 나라이며, 그들에 대한 통치수단도 행정력이 아니라 군사력에 의존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엔 坐食者(좌식자), 즉 놀고 먹는 사람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전문적인 戰士 집단이겠죠.
『당시 신라는 현재의 面 정도 단위에도 지방관을 파견합니다. 고구려는 郡 태수도 제대로 파견 못 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신라의 국가시스템이 고구려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절도 모르고 하는 시주」
─2002년 이후 우리 고교 국사 교과서에선 발해를 「南北國 시대의 北國」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늘날 우리 「한국」과 「한국인」을 만든 역사가 바로 「한국史」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기술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자기 씨족의 역사를 쓴다고 할 때, 始祖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씨족 전체를 다루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나에게 피를 전해 준 이가 누구냐를 따져서 쓰는 방법입니다. 작은아버지·큰아버지나 조부·증조부·고조부의 형제들은 나에게 피를 준 사람이 아니니까 제외하거나 略述하고, 아버지-조부-증조부-고조부 이렇게 직계 조상 중심으로 쓰는 겁니다. 저는 후자의 방식으로 역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현대 한국인에게 발해는 무엇입니까.
『발해가 오늘날 한국 사람에게 뭘 전해주었습니까. 망할 때 발해 왕자 大光顯(대광현)이 유민 몇만 명을 데리고 高麗(고려)에 투항했고, 그들이 평안도의 한 지역에 정착한 정도입니다. 고려는 신라의 전통을 90% 이상 이어받은 나라입니다. 王家만 바뀌었을 뿐 지배층도 거의 신라인 출신이었습니다. 발해가 오늘날 한국인을 형성하는 데 피를 주었습니까, 제도를 물려주었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발해가 한국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북한이 고구려-발해에다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은 「절 모르고 시주」를 하는 격입니다. 傍系(방계)를 直系보다 더 높은 위치에 놓으면 그건 우스운 족보나 가족사가 되는 거죠. 李교수께서는 발해를 건국한 大祚榮(대조영)을 靺鞨人(말갈인)이라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발해에서 唐에 보낸 국서에 그들의 국호가 「靺鞨」이라 자처했다는 사실이 「新唐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해의 3代 국왕 大門藝(대문예)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다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 그리고 자신을 「고구려왕」이라 칭했습니다. 三國史記에도 大祚榮이 「고구려 遺將(유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발해 王家를 굳이 靺鞨族(말갈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발해왕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고구려 국왕을 자칭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역사기록에는 「渤海」란 용어가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처음 발해 사람들이 나라를 세울 때 국명을 「靺鞨」이라고 했습니다. 713년에 唐에서 「靺鞨」의 왕에게 「渤海郡王」이란 칭호를 내리면서 渤海라는 국명을 사용합니다. 만일 大祚榮이 고구려 사람이라면 왜 「靺鞨」을 자칭했겠습니까. 고구려인보다 신분적으로 훨씬 格이 떨어지는 종족인데요』
渤海의 國書에 나타난 外交的 레토릭
─고구려는 唐이 신라와 연합하여 멸망시킨 나라인데, 만약 발해가 唐에 국서를 보내면서 「내가 바로 고구려 後身이오」 했다면 그것은 「한 판 붙자」는 얘기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선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고, 唐에 보낸 국서에선 「靺鞨」을 자처한 것은 모두 외교적 레토릭으로 보입니다. 우리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말갈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朱蒙이 나라 세울 때 이미 압록강 중ㆍ상류 지역에는 「靺鞨」로 기록된 종족이 있었어요. 朱蒙이 그들을 제압하고 그 위에 군림한 것입니다. 고구려가 생기면서 끝날 때까지 고구려 땅에 고구려인과 말갈족이 공존한 거죠. 고구려는 신라를 칠 때 말갈軍을 동원합니다. 唐 태종이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했을 때도 고구려는 말갈 군단을 보내 대항시킵니다. 다만 고구려인과 말갈족이 융합해서 산 것이 아니라 서로 거주 지역을 달리했던 겁니다. 따라서 말갈 군단을 지휘하는 자는 당연히 말갈인이었을 겁니다. 大祚榮은 고구려 장군이기는 하지만 말갈 출신으로서 말갈군을 지휘했다고 봅니다』
─일본에 10여 차례 파견된 발해 使臣들은 거의가 高씨 등 고구려 상층계급 출신으로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남의 나라에 사신으로 간 고위 관직자가 거의 고구려 계통이라면,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출신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지요. 발해는 10%의 고구려인 출신이 상층구조, 90%의 말갈인이 하층구조를 이루는 사회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발해 역사가 조선왕조 말기까지 한국史에 끼어든 적이 없는데, 광복 후 사학자 孫晉泰(손진태) 선생이 「조선민족사 개론」을 쓰면서 발해사를 附錄에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 우리 교과서의 통일신라 뒷부분에 발해가 들어갔습니다. 2002년 제7차 국정교과서 과정에서는 아예 「통일신라」가 없어지고 「南北國 시대」로 기술해서 신라와 발해가 대등하게 취급된 것입니다. 발해에는 분명히 고구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발해의 主流세력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唐에서 20만 명의 고구려인을 끌고 갔습니다. 신라도 7000명을 잡아갔죠. 고구려 왕과 왕자, 귀족 등 중심세력은 다 잡혀갔습니다. 남아 있던 고구려인이 발해의 상층부에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발해의 국왕과 더 많은 수의 지배계급은 말갈인이었을 겁니다』
靺鞨의 후예가 세운 金과 淸
─唐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大祚榮 아버지 乞乞仲象(걸걸중상)은 고구려인이고, 그의 동지 乞四比羽(걸사비우)는 말갈인으로서 두 세력이 연합하였다는 견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구려 역사는 좀더 심도 있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토 내에 말갈족이 여기저기 살았습니다. 서북쪽에는 거란족도 살았습니다. 고구려는 肅愼(숙신)도 정벌했습니다. 압록강과 송화강 일대를 둘러싼 대륙 내에 여러 종족들이 산 것이죠. 고구려인이 왕을 배출한 때는 고구려가 되었고, 말갈족이 왕을 배출했을 때는 말갈 또는 발해, 거란이 왕을 배출하면 遼(요)나라, 女眞族(여진족)이 세운 나라는 金(금)입니다』
─우리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말갈은 先秦(선진) 시대엔 물길·肅愼(숙신), 고려시대 시대엔 여진족으로 불렸습니다. 여진족이 세운 金나라는 중국의 華北을 점령, 중국 역사상 두 번째의 征服國家가 되었습니다. 중국 역사상의 마지막 기마민족 征服國家인 淸도 여진족의 後身인 滿洲族(만주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부용민족인 말갈의 후예가 두 번에 걸쳐 중국대륙을 먹은 셈인데, 그것을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 특히 金의 태조 阿骨陀(아골타)의 족보에 스스로를 황해도에 살았던 新羅金氏 함보의 6대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孫晉泰 선생이 전국 역사교사들에게 강연하면서 발해 역사는 물론 金나라 역사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분이 6·25 때 납북되는 바람에 그의 저서「조선민족사 개론」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역사 밖에 쓰지 못했어요. 그 후에 계속 글을 썼으면 아마 金나라도 우리 역사의 附錄으로 넣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한국」과 「한국인」을 만든 역사가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발해와 金은 우리에게 피를 전해 준 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正史에 넣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중국 사람이 끝내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강변한다면 우리는 「金·淸의 역사를 한국사의 附錄 혹은 外史로 취급한다」는 대항논리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孫晉泰 선생이 발해를 우리 역사로 넣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고려시대에 이르러 여진족이 金나라를 세웠는데, 그들은 한국인과 거의 단절되어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孫晉泰 선생이 발해나 金나라를 강조한 것은 시대적인 측면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제 막 한국이 日帝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너무나 보잘것없으니 이참에 국민의식을 고취하고 국민을 단합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를 좀더 강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압록강 이북의 땅은 우리 역사와 관계가 없어진 곳입니다』
6·25를 겪었다면 국가가 민족보다 중요함을 깨달아야
─이제 우리도 역사를 너무 민족주의에 치우쳐서 바라보는 자세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언젠가 우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보니까, 머리말 한 페이지에 「민족사」란 말이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제는 민족사관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8·15 광복 직후의 정치상황에서 孫晉泰는 선생은 「金春秋(후일의 太宗武烈王)가 唐에 請兵하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켰으니 反族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신라인의 입장에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백제의 의자왕이 낙동강 서쪽을 다 점령하고, 金春秋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북쪽에서는 고구려가 밀고 내려와 신라의 10여 城을 탈취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가 「우리 땅 가져가라」고 물러서겠어요? 그때는 삼국이 서로를 같은 민족으로 보지도 않던 시대였습니다.
역사는 그 시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6·25 때 한국이 유엔군의 도움을 받은 것을 「反민족 행위」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억지죠. 그런데도 지금 우리 교육 일선에서 그런 역사를 우리가 스스로 후손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6·25를 겪은 한국인이라면 국가가 민족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 |
첫댓글 리플이 하나도 없는게...;; 제생각하고 대부분 일치하는거 같아 기분은 좋은데..회원님들은 전혀 무반응이라는게..
저도 좋아 보입니다. 민족사관에서 벗어나자는 것도 맘에 들고..."역사는 그 시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 다만 신묘년 기사에 나타난 '왜'의 존재에 대해서 '왜가 그럴 능력이 없는데 무슨소리냐'는 식의 반응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인기몰이에 초연한 진짜 학자같으신분... 현 우리나라 사학자중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 되는 신라빠적 주장이나 일삼다가 공개 회의에서 아들 뻘도 안 되는 이한테 망신이나 당하는 게?
@마법의활 '06년에 올라온 글에 답글을 달아 주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