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여 申禹汝 (1882-1923)】 "1922년 고려혁명군 연해주 총지부 서부사령관"
1882년 7월 28일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웅기면(雄基面)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본명은 신대필(申大弼)이다. 1910년 부모와 함께 만주로 이주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 수신사(守信社) 구사평(九沙坪)의 학교 앞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여, 경신향(敬信鄕) 금당촌(金塘村) 대표로 연설하였다. 이날 독립선언식장에는 훈춘 일대 학교 교사와 학생, 한인 4,0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참석하였다.
1919년 5월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민단(新民團)에 참여하였다. 신민단 단장 김규면(金圭冕) 등과 군자금 모집 등을 협의하고 신민단 금당촌 지단장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을 피해 러시아 수이푼으로 이동한 전 신민단 소대장 박정하(朴禎夏)·한경서(韓京瑞) 등과 교류하였다. 1921년 10월 수이푼 협피구(夾皮溝) 솔밭관(松田館)에서 조직된 한족공산당에 참여하고, 군사부 사령부장에 선출되었다. '우리동무군'이라고 불린 이 부대는 집행부장 이중집(李中執), 선전부장 유진구(柳珍球), 군사부장 현동규(玄東奎) 등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해 11월 수이푼에서 각 단체가 연합하여 조직한 연맹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2월 20일 훈춘 방면으로 15명, 흑정자(黑頂子)로 9명의 암살대를 파견하였다.
1922년 8월 수이푼 부근에 무관학교를 세워 사관 양성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9월 솔밭관을 중심으로 한족공산당무장단의 확장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 왕팔발자(王八脖子) 서부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이때 고려혁명군에 참여한 인원은 2,000여 명이었다. 단장은 오하묵(吳夏黙)이었으며, 4개 지역에 지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서부사령부대는 한족공산당·군정서·국민회 계열이 주를 이루었다. 러시아 적군 제5군에 편성되었던 고려혁명군은 이때 그로데코보(현 포그라니치니)와 한카호(興凱湖) 전투에 참전하였다.
1922년 11월 20일 국경지대인 초모정자(草帽頂子)로 돌아가 옛 신민단 동지들과 국내 침투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2년 말 러시아내전 종전 이후 한인무장부대가 강제로 무장 해제되자, 시모노보(현 추카노보)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