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 수20:1~9절 2024. 8. 4. 말씀
* 죄인이 사는 길
오늘 본문의 내용은 도피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도피성 이야기 역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전에 말씀하신 규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자기 마음대로 원칙을 정해서 자기들 편리대로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에 맞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이라는 원칙 아래서 불평 불만이 아니라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도피성 역시 이스라엘 안에 어떤 원칙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성은 어떤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까? 2,3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고 합니다. 도피성이란 살인을 한 사람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피하는 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살인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살인을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도피성입니다.
민35장에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가 이 성으로 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죽은 자의 친족의 보복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내려진 조치입니다. 피의 보복자란 죽은 자의 억울함을 복수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죽은 자의 가까운 친족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복수로부터 살인자를 보호하는 것이 도피성입니다. 6절에 "그 살인자는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합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자는 재판을 통해서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음이 판명되면 그 도피성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사느냐면 도피성에 거하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유의 몸이 된 그에게 옛 죄에 대해서 복수하거나 책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피성 제도를 이스라엘 안에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유의 몸이 되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누구 덕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실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 형제가 너 때문에 죽었다는 것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만약 도피성이 없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 의해서 살인에 대한 대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한 살인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성에 거하고 있던 대제사장이 죽으면 살인자는 더 이상 도피성에 매일 필요 없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자유의 몸이 된 이상 피해자의 친족들도 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죄의 몸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피의 은혜로 사는 자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도피성을 두시고, 그 도피성에는 대제사장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곧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서 자유를 얻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그도 도피성이라는 제도에 매어 있어야 합니다. 성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라고 하는 은혜 안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자유였음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장자 재앙에서 죽어야 할 자들이었지만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고 그들 안에 도피성을 세우신 것입니다. 도피성을 볼 때마다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를 항상 상기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피성의 의미를 상기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의 의미와 정신이 이스라엘 안에 확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 도피성의 원칙에 세워진 정신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만남 속에서 발생되어지는 여러 가지 실수와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원칙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고 제사장이 죽은 후 자유를 얻음으로서 '내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주어진 생명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피의 복수자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할 자신이 도피성 때문에 보호를 받고, 또 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를 깨달음이 있는지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도피성의 제도는 없지만, 도피성의 의미가 우리에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죽임을 당해야 할 자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피해자는 가해자가 도피성으로 피함으로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유의 몸으로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인 자가 보호를 받고 나중에는 자유를 얻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피해자의 입장입니다. 결국 가해자나 피해자나 동일하게 도피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내 의지도 아니고 내 계획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모든 일들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진짜 우연입니까?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서 증언하기 위하여 그런 일들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됩니다. 결국 가해자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 십자가의 증언자
인간 관계에서야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해자고 예수님은 피해자이십니다. 내가 피해를 입은 것보다는 내가 예수님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로 용서하시기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이고 내가 죽어야 할 자인데 예수님의 피가 나를 살렸고 나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를 자유케 한 주님의 은혜가 성도와의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보호받는 존재이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에서 자유케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형제를 만나는 모든 관계에서 주님의 은혜가 놀랍고 크다는 것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로는 형제라고 하면서도 조그만 문제를 가지고 자존심 싸움을 하고,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 가지고 싸우고 다툽니다.
입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은혜를 아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용서의 은혜를 안다면 그 앎은 필히 보여야 합니다. 형제를 통해서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서 증언되고 드러나야 합니다. 은혜와 믿음은 감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고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들 관계에서 가해자가 있게 하고 피해자가 있게도 하십니다. 다른 형제의 조그만 실수 때문에 상처 입을 수도 있고 또 내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나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힌 형제를 바라보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친히 도피성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가해자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도피성 되신 주님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생각하십시오. 용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도피성은 십자가입니다. 도피성은 불쌍히 여기는 성입니다. 불쌍히 여김으로서 죽임을 당해야 할 내가 살았습니다. 우리 성도는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우리도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로서 십자가를 증언하라고 우리를 새롭게 태어난 자로 존재케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