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비하면 천국이구만. 지금은 연애할 장소도 많고 건물도 좋잖아요. 하하하.”
녹음이 짙은 태능선수촌에서 만난 김호철(52세) 배구 감독은 20년 전을 떠올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1970, 80년대 한국 배구 코트를 주름잡던 만능 세터 김호철. 88올림픽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 20년간 이탈리아에서 선수로 감독으로 화려하게 활약하다 지난 2003년, “현대가 어려우면 도우러 오겠다”던 친정 팀과의 약속을 지키러 돌아온 그는 포부대로 3년 만에 현대캐피탈을 한국 배구의 최고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선수가 아니라 대표팀 감독으로 태능선수촌에 입성했다.
배구가 있어 행복하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훈련과 전략 분석으로 하루가 바쁘지만 그에게 이곳이 천국인 것은 40년을 넘게 함께 한 '배구' 때문이리라.
“배구는 리시브, 토스, 공격, 이렇게 단 세 번만에 공을 넘겨야 해요. 순발력과 판단력이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제 포지션이었던 세터는 순간 판단력으로 경기를 풀어 가는 중요한 자리죠.”
선수 시절에는 자유자재로 상대방을 속여 공격을 성공시키는 묘미에, 감독인 지금은 가르친 것을 선수들이 해내는 것을 보는 쾌감에 그의 배구 인생은 지루할 틈이 없다. 그는 176cm에서 멈춰 버린 키 때문에 한때 좌절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한계를 발판 삼아 최고의 '세터'가 되었다.
“중학교 때 세터로 전향하면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이 토스 높이를 '27센티미터, 32센티미터'라고 정확하게 요구하셨죠. 그 덕분에 정확한 기술을 배웠습니다.”
물론 그는 지금 다른 방식으로 선수들을 독려한다. 전략은 감독이 세우지만 실제 경기장에서 뛰는 것은 선수들이기에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훈련하는 것. 또한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과학적인 자료를 가지고 일대일 맞춤형으로 관리한다.
과학적이고 인격적인 훈련법
“첫해는 한 번이라도 이긴다. 2년째는 대등한 경기를 펼친다. 3년째는 우리가 이긴다.” 2003년 극비리에 현대캐피탈 감독으로 영입되었을 때 김 감독이 약속한 것은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첫해에 1승10패했으나, 이듬해 정규 리그에서 2승2패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지난 2005-2006 시즌에서는 통합 우승을 거머쥐며 9년째 거듭된 삼성화재의 단독 행진을 막았다.
“처음 현대캐피탈에 돌아왔을 때는 만족스러운 게 없더라고요. 전략도 없고 패배 의식이 가득했죠.”
당장 포지션별로 맞춤형 체력 훈련을 실시하고 상대방의 공격 패턴을 분석하여 수치화했다. 기교 이전에 힘과 높이를 갖춘 강한 배구를 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정신력 무장을 위해 선수들 스스로 목표를 세우게 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었다. 선수들과 함께 비도 맞고 눈밭도 구르며 솔선수범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쉬는 시간조차 선수들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일부러 개그 프로그램 <웃찾사>도 보고 최신 유행 가요도 들었다.
또한 의사소통 관련 책도 보고 직접 전문가를 만나 선수마다 다르게 코치하는 법도 배웠다. 강약을 조절하도록 정확한 눈으로 충고해 준 아내의 몫도 컸다. 한국 선수만의 순발력과 기동력,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에 덧붙여 선수들 각자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덕분에 노장 공격수 후인정도, 성깔 있는 세터 권영민도 한 수 나은 플레이를 펼쳤다. 작년에는 과감하게 숀 루니를 영입, 고공 플레이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김호철식 배구가 전수될 때쯤
“사람들이 저더러 행운아라고 합니다. 하지만 행운은 거저 오지 않죠. 전 노력형입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어떤 부분이 모자라다 싶으면 밤을 새서라도 해답을 찾아요.”
단신의 한계를 딛고 '컴퓨터 세터'로 자리 잡기까지, 만년 2등이던 팀을 최고의 팀으로 올리기까지 그의 몸은 얼마나 혹사당했을까.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과 연구로 보냈을까. 그럼에도 성공했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그는 선수들에게 미안하고 부담스럽다.
“아직 이릅니다. 김호철을 탄생시킨 한국 배구계에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돌려주는 것, 그래서 후배들이 그것을 배우고 또다시 가르치게 될 때쯤, 성공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죠.”
승부의 세계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법, 최고 팀을 고수하기보다는 오히려 관중과 함께 호흡하는 '재미있는 배구'를 하고 싶다는 김호철 감독. 침체된 한국 배구를 부활시키기 위해 그는 모든 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다양한 팬 서비스를 하도록 지금도 '김호철식으로'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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