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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는 예쁘다] 02
S#1. 분장실 앞 (1회에서 연결)
이윽고 분장실 문 앞에 도착한 선영. 막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인순(E) : 저기요!
멈칫 돌아보는 선영. 인순과 눈이 마주친다.
순간, 어쩔 줄 모르는 인순.
인순 : 저어...
선영 : ?
인순 : ...저...
인순 : (N) 기억해주세요. 알아봐주세요. 인순이에요, 엄마.
따스하고 친절한 미소를 담뿍 지어보이는 선영. 그 시선에 얼굴이 벌개지는 인순.
침묵과 긴장이 흐른다.
선영 : 무슨 일이시죠?
인순 : (헉 놀라) 예?
선영 : (환한 미소)
인순 : (당황) 싸...싸인 좀 해주세요!
부랴부랴 가방을 열고 수첩을 꺼내는 우리의 인순이. 선영에게 공손히 내민다.
선영 : (펜을 집어들고) 이름이 뭐죠?
인순 : (화들짝 놀라) 예?
선영 : 이름이...?
인순 : (긴장) 이,인순인데요. 박인순요.
선영 : 하하, 이름이 재미나네?! 노래두 잘하겠네?
인순 : (맘이 상한다. 이름도 모르는구나) ...네. (애써 웃어보인다) 아마 잘할 걸요.
<인순씨에게...행복하세요!>라고 쓴 뒤 싸인을 멋지게 휘갈기는 선영.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슬며시 훔쳐보는 인순. 마음이 아려온다.
이윽고 싸인을 받고나면, 꾸벅 인사하고 황급히 돌아선다.
인순 : (N)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내가 당신의 딸이라고 말할 자신... 그러기엔 엄마가......
멀어지는 인순의 모습을 잠시 멋적게 지켜보는 선영. 돌아서려다 다시 돌아본다. 왠지 예감이 조금 이상하다.
인순 : (N) ... 엄마가 너무 예뻤다.
S#2. 극장 앞 (밤)
극장을 나오는 인순. 가다 멈춰서서 선영에게 받은 싸인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이윽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설움과 자기 비관이 범벅이 된 그런 감정이 되었다.
길 잃은 아이처럼, 소매로 눈물 콧물 닦으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이 수군수군 바라보지만 아랑곳 않는다.
S#3. 포장마차 (밤)
혼자 앉아 소주 마시고 있는 인순. 안주는 오이나 당근 따위... 이미 얼근히 취했다.
핸드폰 벨이 울린다. 무시하다 마지 못해 받는다.
인순 : 고모,
고모(E) : 엄마 만났냐.
인순 : ...
고모(E) : 아직 안 찾아갔어?
인순 : (자기도 모르게 버럭) 나 버린 엄말 뭐하러 찾아가요? 에?
고모(E) : 버리긴 누가 버렸다 그래? 아, 당장 찾아가라니깐!
인순 : 아,몰라요! 나 안 찾아가! 다 필요없어!
고모(E) : 인순아!
인순 : 근데요, 내 이름 누가 지었어요? 고모가 지었어요?
S#4. 고모집 안방 (밤)
전화기 들고 통화 중인 고모.
고모 : 아,내가 니 이름을 왜 지어? 니 부모가 지었겠지... 거 엉뚱한 소리 작작하구 얼른 찾아가 만나 봐!
니 맘 모르지 않는데...너 그 고집 좀 꺾어라. 고집 땜에 맨날 니 팔자가 고 모양이야, 이것아...
부모 없어 서럽다 그럴 땐 언제고...
S#5. 포장마차 (밤)
전화 중인 인순.
인순 : 고모...내가 지금 좀 바뻐요.... 나두 바쁜 사람이거든요? 나두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요?
혀가 조금 꼬부라졌다.
고모(E) : 너 지금 어딘데?
인순 : 바빠서요, 담에 얘기 합시다 우리! ...(절 꾸벅) 끊습니다아!
전화 뚝 끊어버린다. 소줏잔을 쭉 들이킨다. 다시 물끄러미 설움에 잠기는 인순.
다시 울리는 휴대폰. 발신인 <유상우>라고 떠 있다.
어쩔까 하다가 무시하고 그대로 앉아있는 인순.
S#6. 상우집 상우방 (밤)
책상 앞에 앉아 휴대폰 걸고 있는 상우.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음성이 나온다.
한숨 쉬며 전화기 내려놓는 상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전화는 왜 또 안 받나!!
S#7. 경준집 외경 (밤)
S#8. 경준집 마루 (밤)
불 꺼진 마루. 현관벨이 울리고 있다.
방에서 나오는 경준. 이번엔 문 쾅쾅 두드리는 소리로 이어진다.
경준 : 누구세요!
인순(E) : (애교) 저에요! 선생님!
문 열어주면 꼬꾸라지며 경준에게 기대어오는 인순. 기막혀 바라보는 경준.
경준 : 허, 이 자식이,
인순 : 하하, 선생님... 잘 계셨습니까요?
경준 : (찌푸린다) 술 마셨냐?
인순 : 네, 쬐끔 마셨습니다... 근데 혹시 은석이는 자나요?
경준 : 잔다.
인순 : 아하하, 착한 어린이로군요. 역시.
마뜩찮게 보다가 식탁 쪽으로 가서 물을 마시는 경준.
주저하다가 다가가는 인순. 경준 앞에 얌전히 앉는다. 비틀 넘어질 뻔 한다.
인순 :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거든요.
경준 : (선 채로 덤덤히) 뭔데.
인순 : (용기 낸다) 저...
경준 : 왜.
인순 : 은석이 말인데요. 제가 잘 키울 수 있어요. 저 은석이 엄마 노릇, 최고로 잘 할 수 있어요. 좋은 엄마가 될께요.
경준 : 허,
인순 : (결연히) 사랑해요, 선생님.
경준 : (헉 당황한다) ...
인순 : 저는요...제가요...알아요...부족한 거 알아요. 전과자에 부모두 없고 배운 것 두 짧구...
가진 건 그냥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 뿐인데...그래두 선생님이 제 맘을 받아주시면
정말 열심히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훌륭한...
눈물 훔치는 인순.
심드렁히 듣고 있는 경준.
경준 : 소주 몇 병 마셨냐?
인순 : 예?
경준 : (심드렁) 두 병 이상은 마시지 말라 그랬지?
인순 : 두 병까지는 안 마셨어요. 제정신이에요.
경준 : (찌푸린다) 임마, 사랑고백 같은 거는 말이야. 말짱할 때 하는 거야.
인순 : 말짱해요, 저.
경준 : 들어가 은석이 옆에서 잠이나 자라... (일어나는) 아, 발은 씻구 자라.
인순 : (비장하다) 선생님, 전... 진심이에요.
경준 : (불쾌하다) ...니 진심은 겨우 이 정도 밖에 안되냐?
인순 : (멈칫)
경준 : 나랑 은석이가 니 도피처야? 짜식아,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인순 : (서운하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
경준 : 뭐가 그게 아니야? 니가 지금 한가하게 사랑타령 할 때야?
인순 : ...(무안)
경준 : 더 이상 나 실망시키지 마라.
인순 : ...
경준 : 전과자에, 부모두 없구, 가진 것두 없구, 배운 것두 짧은 게 니 훈장이냐?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인간이, 그런 거 무기로 내세우는 인간이야!
인순 : (당황) 저 그러니까 그게... 그런 걸 무기로 내세운다는 뜻이 아니고요. 선생님...저는...저는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경준.
인순, 허탈하고 무참하다. 무참해서 일어날 수가 없다. 잠시 그대로 고개 떨구고 앉아있다.
S#9. 은석방
들어오는 인순. 어두운 방안. 곤히 잠든 은석을 내려다본다.
이불을 제대로 끌어당겨 덮어주는 인순.
인순 : 은석아... 누나는 왜 맨날 이 모양이냐... (고개 떨군다) 바보...
S#10. 상우집 외경 (밤)
S#11. 거실
상우 부 병국,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티브이 마감뉴스를 보고 있다.
자다가 깬 듯 부스스한 머리로 방에서 나오는 상우 모 명숙. 느슨한 몸뻬 바지 같은 것 입고 있다.
명숙 : (하품 하며) 안 주무세요? 왜요? 잠이 안 와요?
병국 : (대꾸 없이 티브이만 보는)
명숙 : 무슨 고민 있어요? 홍삼차 한 잔 마실래요?
병국 : 됐어..
명숙 : (벽시계 보며) 드라마 다 끝났나아? (하품하며 티브이 앞으로 가는데)
마뜩찮은 얼굴로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는 병국. 골프 채널에 고정한다.
병국 : 엉덩이 비켜 봐.
명숙 : (무안) 알았어요, 들어가 잠이나 잘께요.
병국 : 잠 좀 고만 자고, 상우한테나 차 한 잔 타주지! 애 종일 일하구 와서 피곤한데,
에미라는 사람이 초저녁부터 잠이나 퍼 자고..
명숙 : 예,예, 알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병국 : (티브이에만 시선)
명숙 : (미워 살짝 흘기는데)
S#12. 상우방
침대에 팔 괴고 누운 채, 곰곰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상우.
문 두드리는 소리.
명숙 : (고개 들이밀며) 차 한 잔 타주랴?
상우 : (퉁명) 아뇨. 됐어요. 주무세요.
명숙 : 그럼 과일이라두 먹을래?
상우 : 아뇨. 됐어요. 주무세요.
명숙 : ...무슨 고민 있냐?
상우 : 주무세요, 엄마.
명숙 : (무안) 에효, 알았다, 알았어. 에미는 그래, 잠이나 자는 잠벌레다.
문 닫는 명숙.
왜저러시나 잠깐 보다가 다시 자기 고민에 빠지는 상우.
S#13. 회상 (극장 로비)
저만치 들어오고 있는 선영의 모습.
상우 : 아, 저기 오신다!
인순 : (돌아본다) 누가?
상우 : 팬이라며?
그 순간,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인순.
선영에게 성큼 다가가는 상우.
상우 : 이선생님!
선영 : 어, 유기자. 많이 기다렸죠?
상우 : 아니에요,
선영 : 어우, 미안 미안! 잡지 인터뷰가 있어서...
상우 : 오늘 인기 좋으시네요. 아까부터 기다리는 분이 또...
돌아보는데 어느새 사라져버린 인순이. 멈칫 주위를 둘러보는 상우.
상우 : 어디 갔지?
선영 : 누구?
상우 : (얼떨떨 주위 살피는데)
선영 : 누구 말이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상우.
상우 : 잠시만요,
S#14. 극장 앞
극장을 나오는 상우.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며 인순을 찾는다. 귀신처럼 사라져버렸다.
상우 : 인순아! 인순아!
휴대폰 꺼내서 전화 걸어본다.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S#15. 상우방 (현재)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숨 쉬는 상우.
그 순간, 울리는 휴대폰. 놀라서 얼른 받는 상우.
상우 : 여보세요,
선영(E) : 유기자, 잘 들어갔어요? 나 이선영이에요.
상우 : 예? 아,예...이선생님,
S#16. 선영집 거실 (밤)
통화 중인 선영. 만면에 과장된 미소가 가득하다.
선영 : 오늘 인터뷰 너무 고마웠어요. 시간이 부족해서 참 아쉽드라.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았는데...
(웃고) 아쉽구 고마워서 전화했어요.
S#17. 상우방
통화 중인 상우.
상우 : ... 제가 감사하죠. 어려운 시간 내주신 건데요.
선영(E) : 유기자 사무실루 초대권 몇 장 보냈어요. 친한 분들께 공연 홍보 좀 많이 해주세요.
상우 : 그러셨어요? 하하, 고맙습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S#18. 선영집 거실
통화하는 선영. 자기 감상에 빠져서 한껏 들떠 있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선영 : 그나저나, 우리 유기자... 인상이 너무 좋드라.
부엌에서 나오는 정아. 쥬스잔을 든 채 심드렁하게 한 번 보다가 방 쪽으로 가는데.
선영 : 우리.... 조만간 식사 한 번 해요. 에이, 부담 갖지 말아요. 그냥 왠지 호감이 가서 그래요.
꼭, 옛날부터 알구 지낸 사람처럼 친근감이 들드라니까?
전화 하며 손짓으로 정아를 부른다.
선영 : 그래요...그럼 곧 다시 연락할께요... 잘 자요!
정아 : (다가오는)
선영 : (전화 끊고 정아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앞머리가 넘 길었다. 내일 엄마랑 미용실 가서 마사지두 받구, 옷두 좀 사러가자.
오디션 보러 가는 애가 꼴이 이게 뭐니? 원피스 하나 예쁜 거 봐뒀어.
정아 : 그냥 입던 옷 입구 갈께요. 옷두 많은데...
선영 : (버럭)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사준대두 탈이니?!!
정아 : ...(한숨)
선영 : 기회는 많지 않어. 내가 얼마나 자존심 구겨가며 부탁한 자린지 알어?
아니 협조를 해두 모자랄 판에, 무슨 애가 사사건건 이렇게 딴지야? 니 인생이 걸린 자리야. 최선을 다해얄 거 아냐!!
전화벨 울린다. 얼른 전화 받는 선영. 금새 목소리 바뀐다.
선영 : 네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는 정아.
S#19. 고모집 마당
어두운 마당 한 켠. 서성이며 전화 걸고 있는 인순의 고모 옥선. 긴장한 표정 역력하다.
고모 : 저기...이선영씨 댁인가요? (머뭇하다 침 삼키고) 저어...저기요...나 기억하실라나 몰라...
선용 언니, 나 옥선이에요! 박옥선이요. 용찬오빠 동생요.
S#20. 선영집 거실 (밤)
선영 : 누구...시라구요?
수화기 든 채 충격으로 굳어있는 선영 표정.
S#21. 경준집 앞길 (아침)
가방 멘 은석과 나란히 나오는 인순.
은석의 손을 잡고 학교길 배웅하는 중이다. 골목을 함께 내려가는 중이다.
은석 : 아빠는 왜 아침두 안 먹구 일찍 출근 하셨어요?
인순 : (한숨) 누나가 바보같이 굴어서 그래.
은석 : 어떻게 바보같이 굴었는데요?
인순 : 휴, 너는 참 궁금한 것두 많다. 누나의 사생활이야.
순간, 울리는 인순의 휴대폰. 유상우 이름이 찍혀있다.
힐끔 내려다보다가 안 받는다.
은석 : 왜 전화 안 받아요?
인순 : 받기 싫어서.
은석 : 왜요.
인순 : 누나 옛날 친군데... 나를 만나고 싶나봐.
은석 : 만나면 되잖아요.
인순 : 만날 수가 없어. 누나가 친구한테 거짓말을 했거든.
은석 : 무슨 거짓말요.
인순 : (잠시 생각하다) 누나가 위험한 인간이라는 걸 속였어.
은석 : 위험한 인간이 뭐에요.
인순 : 그건... 니네 아빠한테 물어봐. 암튼 누난 위험한 사람이야...
은석 : (발끈) 아니에요! 누나는 하나도 안 위험해요!!
인순 : (멈칫)
은석 : 누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생각하다가) 진짜로 진짜로 안 위험해요!
인순 : (뭉클한데) 너 이러면... (글썽) 이러면 내가 감동하잖아!
은석 : (흥분했다) 누나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인순 : (글썽하며 씩 웃는다) ...업어주까?
은석 : (주위에 학교가는 아이들 둘러보다가) ...애들이 놀려요.
인순 : 놀리면 어때? 업어줄께. 학교까지!
은석 : ...(망설이다가 좋아라 웃는다) ...좋아요!
낼름 업히는 은석. 씽하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두사람.
다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무시하고 가는 인순.
S#22. 거리 (낮)
거리 벤치에 앉아 벼룩시장 같은 정보지의 구인광고를 꼼꼼히 읽고 있는 인순. (형광펜으로 줄 긋는다)
휴대폰의 문자 신호음이 울린다. 상우에게서 온 문자.
상우(E) : 인순아, 애타게 찾고 있다. 실종 신고 내기 전에 연락 바란다. 상우.
가만히 문자 메시지를 들여다보는 인순. 이윽고 결심을 굳힌다.
S#23. 보도국 사무실 (낮)
바삐 일하고 있는 상우. 통화하며 다른 손으론 노트북의 새기사들을 검색하고 있다.
상우 : 보도 자료는 받았는데요, 몇가지 보완 취재를 좀 할려구요....네, 어디로 어떻 게 찾아뵈면 되죠?
...(볼펜으로 메모) 네...네에.. 거기 압니다...
뒤에서 다가오는 동료 진태.
진태 : 밖에 손님 오셨다.
상우 : (못 듣고) 그럼 오후에...
진태 : (치며) 어이, 유상우... 손님 오셨다구.
상우 : (입모양으로) 누구?
진태 : 박인순씨래.
상우 :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인순이?
진태 : (더 놀란다) 어어,
상우 : (수화기에 대고)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오후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후다닥 전화 끊고 미친 듯 달려나가는 상우. 화색이 만면에 번져있다.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는 진태.
S#24. 방송국 면회실 혹은 일층 로비
뛰어내려오는 상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미친 듯 둘러보며 인순을 찾는다.
한쪽에 앉아있는 인순. 상우를 발견하고 일어나 손 흔든다.
상우 : (달려간다) 인순아!!!
인순 : 바쁜 데 찾아왔지?
상우 : 하나두 안 바뻐!
인순 : (머쓱해지며) 어, 그래? (멋적어서 괜히 둘러본다) 야아, 나 방송국 첨인데... 되게 신기하다. 아까 연예인 봤다?
상우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왜 전화는 안 받구, 왜 사라진 거야?
인순 : 어? 어어... 좀... 그럴 일이 있었어.
상우 : 무슨 일?
인순 : 말하기가 좀 (난감한 한숨)... 복잡해. (머쓱 웃고) 나중에 설명하면 안될까.
상우 : (허, 기막혀 보다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어? 진짜 실종신고 낼 뻔 했어!!
인순 : 하하, 진짜?
상우 : (정색을 하고) 진짜지 그럼! 점심 안 먹었지?
인순 : 어어,
상우 : 맛있는 거 사줄께. 일단 밥 먹으러 가자.
인순 팔을 이끌고 앞장 서는 상우. 얼떨떨 끌려가는 인순.
S#25. 근처 이탈리아 식당
마주 앉아 식사하는 두사람. 파스타와 샐러드 등이 놓여있다.
들떠 있는 상우.
상우 : 학교는 왜 휴직했어?
인순 : (멈칫한다) 어? 어어...
상우 : 왜? 적성에 잘 안 맞아? (보다가) 하긴 요즘 교사만큼 고달픈 직업이 없지. 다들 입시 땜에 죽어나는데... 골치 아플 거야.
인순 : ... (괴롭다) 상우야,
상우 : 왜.
인순 : 아,아니야. 여기 스파게티 디게 맛있다구.
상우 : 그래? 더 먹을래? 더 시켜줄까?
인순 : 어후, 아니야!
상우 : 그럼 내 꺼 더 먹어. (덜어준다) 이쪽은 포크 안 댔어.
인순 : (당황) 됐어, 됐어. 너 먹어!
상우 : 아, 내일 시간 있어?
인순 : 내일? 왜?
상우 : 아이스 발레 초대권이 생겼는데 보러 갈래? 그런 거 좋아하나?
인순 : 아이스발레? 와아... 재밌겠다!
상우 : 좋았어! 그럼 내일... (수첩을 꺼내본다) 다섯 시니까... 네시 반까지 목동 아이스링크 알지? 그 앞에서 만나자.
인순 : 어, 그럴까?
상우 : 그럴까가 어딨어? 애들 가르칠려면 평소에 이것저것 많이 봐둬야지, 안그러냐? 박인순 선생님!
인순 : (괴로워진다) 상우야.
상우 : 왜? 내일 바빠?
인순 : (결심 어린다) 상우야, 나 선생님 아니야.
상우 : 무슨 말이야?
인순 : 선생님 아니라구. 다 거짓말이었어. 나 대학두 못 다녔구, 지금... 백수야.
상우 : (멍하니)
인순 : 그래두 뭐, 대입 검정고신 합격했구, 언젠간 선생님이 되긴 될지두 몰라. 장래 희망이거든...하하...
그러니까 백프로 거짓말은 아니지?
상우 : (물을 마신다)
인순 : 거짓말 해서 미안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야, 나두 자존심이란 게 있잖아...
(가슴 쓸며 웃고) 휴우...털어놓구나니까 인제야 속이 시원하다.
빨리 자수하구 광명 찾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내발루 찾아온 거야.
상우 : ...(어쩔 바를 모르겠다)
인순 : 뭐, 꼭, 선생님이어야 친구 하는 건 아니지?
상우 : (머뭇머뭇) 어후, 무슨 그런 말두 안되는 소릴! (으하하 웃는다)
다시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하는 상우. 잠시 썰렁한 침묵 흐른다.
인순 : (눈치) 상우야,
상우 : 어?
인순 : 실망했지? 나한테?
상우 : (흠칫하며 버럭) 무슨 소리야!
인순 : (멈칫) 어어,
상우 : 그럴 수 있두 있지, 그게 뭐가 그렇게 챙피해? 직업에 귀천이 어딨냐? (호기롭게 하하 웃는다) 날 겨우 그렇게 봤어?
니가 선생이면 어떻구 선생이 아니면 또 어때?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전화두 안 받구 도망을 다녀?
바보 같이 왜그래? 야아, 박인순 어릴 땐 안그러드니 참 소심해졌네?
인순 : 고맙다, 상우야.
상우 : (웃으며 작게 심호흡... 사실은 실망이 엄청 크단다, 인순아)
S#26. 야외 커피숖
커피 쟁반을 들고 파라솔 아래 야외 테이블로 오는 상우. 마주 앉는 두사람.
인순이는 냉커피. 상우는 에스프레소. 그리고 케익도 한 조각...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에서 동료와 차 마시던 재은. 이쪽의 상우를 발견하고 인사한다.
목례로 답례하는 상우.
인순 : (놀라서) 아나운서 아냐? 저사람?
상우 : 어, 재은이. 우리 일년 후배.
인순 : 우와, 후배야? 저 여자가?
상우 : (별 거 아니란 듯 덤덤히) 음.
인순 : 와아, 너 진짜 성공했구나아...! 하긴, 너두 텔레비전에 나오지? 내가 정신이 이래!
챙겨 본다 그래놓구 아직 못 봤네. 가서 당장 인터넷으루 찾아봐야지.
상우 : (으쓱하며) 에이 뭘... 찾아보지 마. 화면이 잘 안 받아, 내가.
인순 : 그래?
상우 : 난 별로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사람들이 그러드라구... (멋있는 포즈로 커피 한 모금 입에 댄다)
인순 : 그 커피... 안 써?
상우 : 글쎄? 캐나다 있을 때부터 버릇이 돼놔서... (으쓱 웃고) 잘 모르겠어. 쓴 줄은.
인순 : (찌푸리며) 쓰겠다아! 몸에 나쁠텐데! 멋부리느라구 쓴 걸 안 쓰다 그러는 거 아냐? 하하, 맞지? 그지?
상우 : (점점 더 실망스럽다) 난 안 쓰거든? (무안할까봐 웃어준다) ... 케익 하구 같이 먹을 땐 에스프레소가 어울려.
아, 여기 치즈 케익 맛있어. 먹어 봐.
인순 : (케익 한쪽 잘라 먹어본다. 맛이 별로다) ... 만든지 오래 됐나부다.
상우 : (미소) ...여기 케익으루 유명한 집이야. 뉴욕에서 온 빠띠쉐가 만든 거야.
인순 : 에이, 이거보쇼. 내가 빵순이에요, 빵순이, 제빵사! 날짜 지났어, 이거!
상우 : 제빵사? 너 제빵사야?
인순 : (머쓱) 으응... 거기서 자격증 따서 나왔어. 근데 요샌 어딜가두 신원보증이 필요하니까... (쩝하고 한숨) 취직이 잘 안되네.
상우 : 거기...가 어딘데?
인순 : (놀라) 어? 어어... (말해야 하나 이거)
상우 : ?
인순 : (너라면 날...이해할 수 있겠지? 그래, 다 털어놓자...)
상우 : 왜그래? 무슨 말인데?
인순 : (망설이다가 결심 어린다) 나 전과자야. (덤덤하게) 고등학교 때, 사고쳐서 사람을 죽였어. 감방 갔다 왔어.
상우 : (헉하고 커피를 도로 내뱉을 뻔) ...
인순 : (당황) ...내가 너무 놀라게했나부다.
상우 : 아,아냐. (기침한다) 놀란 게 아니고,
인순 : 어떡하냐.... (물을 권한다) 미안해.
상우 : 아냐,아냐. 니가 뭐가 미안해. 갑자기 사레, 사레가 들려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상우. 무슨 말을 해얄지 난처한 기색이다.
인순 : (N) 역시...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너무 무리한 얘기였다. 내가 너무 성급했구나! 미안하다, 상우야....
난감한 표정의 인순.
상우 : 어떡하다...그렇게...
인순 : 어쩌다 보니까... (얼굴 빨개진다) 그렇게 됐어.
순간, 울리는 상우의 휴대폰.
상우 : 네, 부장...... 들어가요, 지금...
인순 : 들어가봐야 되나부다.
상우 : 어. (전화 끊고 시계 본다) 회의가 있어서.
인순 : (당황) 어후, 그럼 얼른 들어가야지! 진작 말을 하지.
일어나는 인순.
S#27. 방송국 앞길
나란히 걸어오는 인순과 상우. 둘다 말이 없다. 어색하고 서먹하다.
눈치 보며 맘이 복잡해지는 인순. 맘이 더 복잡한 상우.
상우 : 어떡하다 그랬냐?
인순 : (흠칫) 어? 어어...설명하긴 좀... 복잡하구 (웃는다) 넌 좀 다른 사람하구 다를 거 같아서,
기왕 털어논 김에 다 털어놓자 용기 낸 거야.
상우 : ...
인순 : 그러니까 나... 이상하게 안 볼 거지?
상우 : (마음 들킬까 흠칫) 이상하긴 무슨! 너 날 겨우 그 정도루 봤어?
인순 : (웃는다) 그런 건 아니구...
상우 :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지어. 잘은 모르겠지만...혹시나 해서 말인데...
너무 그 일로 위축되거나 좌절하며 살지 마. 그래선 안돼.
인순 : (쑥스럽게 끄덕인다)
상우 : 힘 내, 인순아... 용기를 갖구 살아야 돼. (한숨) 우리 사회는 정말 문제가 많아.
왜 사람의 진실을 안 보구, 조건만 보는 거지? 내가 사회부 있을 때, 수 많은 범죄자들을 만났는데...
인순 : 어어,
상우 : 정말 모두들 개인으루 만나보면 천사가 따로 없어. 환경 때문에,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범죄자가 되는 거야.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존엄해. 그 누구도 손가락질 당하거나, 취업에 제한을 받을 이유가 없어.
인순 : ...고맙다.
상우 : (스스로의 열변과 논리에 도취되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두 넌, 니 자신일 뿐이야! 누가 뭐래두 넌, 내친구 박인순이구!
그런 걸루 절대 위축되지 마! 알겠어?
인순 : (뭉클해진다) 고마워, 상우야... 정말 고맙다.
상우 : 고맙긴!
인순 : 얼른 들어가 봐.
상우 : 그래 그럼 조심해서 가라! (따스하게 웃어보인다)
손 들어보이고 서둘러 건물 쪽으로 가는 상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인순. 고마워서 눈물이 글썽 맺혀온다. 가다가 다시 돌아본다.
인순 : (N)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상우는 변했다. 그것두 너무 멋지게 변해버렸다.
어릴 땐 분명, 겁쟁이 땅꼬마였는데... 저토록 편견 없고, 정의롭고, 커다란 어른으로 자라버린 것이다!
미안해, 상우야...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어! 니가 이렇게 훌쩍 크는 동안, 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니!!
건물 안으로 멀어지는 상우의 늠름한 어깨, 올곧고 의연한 그의 뒷모습...
S#28. 보도국 사무실
표정 싹 바뀐 채, 멍하니 후들거리며 들어오는 상우. 망연자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살인 전과자라니!
한숨 쉬며 자리에 앉아있다. 노트북에 무심코 살인...이라고 쳐본다. 살인... 살인...무섭고 아찔하다.
띵한 머리를 부여잡는다. 충격과 두려움과 슬픔과 호기 부렸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뭐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 식은땀이 흐른다.
다가오는 재은.
재은 : 아까.. 여자친구에요?
상우 : (흠칫 노트북 덮고) 어? 어어...
재은 : 청순하게 생기셨드라.
상우 : (한숨 내쉰다)
그때 뒤에서 커피 한 잔 들고 다가오는 진태.
진태 : 야아...내가 인순이 인순이 할때 알아봤어야 되는 건데.
상우 : (난감)
진태 : 진도 얼마나 나간 사이야? 인순씨하군.
재은 : 어머, 이름이 인순씨에요?
상우 : 아냐! 아무 사이 아냐! 중학교 동창이야.
진태 : 동창 좋아하신다아~ 아니든데? 딱 보니까!
상우 : (인상 구기며) 아니라니까아.
진태 : 곱게 말할 때 형님한테 이실직고 해라.. 수수하니 인상 좋든데? 불어 봐봐.
상우 : 불긴 뭘 불어! (인상 쓴다) 내가 뭐 피리냐? 불게.
진태 : (능글대며) 안 웃긴 거 알지?
기분 나쁘다는 듯 휑하니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가버리는 상우.
황당한 진태. 신경 쓰이는 재은.
S#29. 보도국 부조정실
뉴스 진행 중이다. 문화 산책 코너를 진행 하고 있는 아나운서 재은.
한쪽에 앉아 지켜보고있는 데스크 재식. 곁에 서 있는 상우를 돌아본다.
재식 : 요새 데이트 한다며?
상우 : 누가 그래요?
재식 : 짜식, 다 소문 났어. 조만간 국수 먹는 거냐?
상우 : (심드렁해지며) 아니에요. 헛소문이에요.
브이티알 화면에 선영의 인터뷰가 나가고 있다.
팔짱 끼고 보다가 씁쓸히 자기 생각에 잠겨있는 상우.
S#30. 브이티알 화면 (공연장 객석. 지난번 상우가 했던 인터뷰)
객석에 앉아 인터뷰 중인 선영. 분장한 차림으로.
선영 : 그동안 제가 해 왔던 수많은 배역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역할이에요.
인간의 원초적 고독과 소외를 다룬 많은 작품을 했지만, 이 작품처럼 테마가 가슴에 절절이 와 닿았던 작품은 드물었어요.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시대를 초월해서 공감하는 보편적 감정인 것 같아요.
이 작품은... 결국 집착이나 열정이 외로움에 다름 아니다,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정말 좋은 작품 이에요. 많이들 오셔서 아름다운 옛 추억을 회상하는 뜻깊은 시간 보내시길 바랄께요.
S#31. 부조정실
브이티알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우.
상우 : (심드렁히 혼잣말) 추억은 추억일 때만 아름다운 거에요, 아줌마.
재식 : 먼 헛소리야, 갑자기?
상우 : 네... (씁쓸히 웃는) 헛소립니다.
S#32. 까페
들어오는 선영.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고모 옥선. 초라한 아줌마 행색이 까페의 분위기와 영 맞지 않는다.
선영을 발견하자 얼른 일어나는 옥선.
옥선 : 여기에요!
다가가는 선영. 감회 어려 바라보는 두사람.
선영 : 오랜만이에요.
옥선 : (화려한 선영의 분위기에 압도...어쩔 줄 모르고) 오랜만이에요, 언니.
선영 : 여전하네요? 하나두 안 늙었어.
옥선 : 아휴, 안 늙긴요. 언니 소식은 간간이 텔레비전으루 보며 살았는데... 언니야 말루 고대루에요.
다가오는 종업원. 물 가져다주며 선영을 알아보고 인사한다.
선영 : 커피 주세요. 어메리칸으루.
옥선 : (반한 듯 보다가) 성형수술두 안 한 것 같은데 어쩌믄 고대루세요. 주름두 하나 없구... 혹시 보톡스 맞으셨어요?
선영 : (마뜩찮다) 무슨 주름이 없다 그래. 세월에 장사 어딨어요. 가까이서 봄 자글 자글해.
옥선 : (자세히 보려는)
선영 : (피하며) 오랜만에 만나 무슨 인사가 그래?... (불편하다) 무슨 일이에요?
옥선 : 언니야말루 무슨 인사가 그러세요? 아무리 우리가 마지막에 안 좋았어두..
선영 : 나 바쁜 사람이에요. (시계 본다) 용건만 말해요,
옥선 : 혹시...궁금한 거 없으세요?
선영 : (떨떠름) 궁금한 게 어딨어. 없어요. 그게 용건이에요?
옥선 : 울 엄마... (눈물 훔치며) 돌아가셨어요.
선영 : (멈칫 보다 쌀쌀맞게) 안되셨네요.
옥선 : (어처구니 없다는) 어쩌믄 피두 눈물두 없는 사람이네에!
선영 : 뭐에요?
옥선 : 아무리 미웠어두 사람이 죽었다는데, 안되셨네요, 그게 다에요?
아유, 울 엄마 눈이 옳았네! 사람이 이거 뿐이 안되니까 그 반대를 하셨지!
선영 : (사람들 시선 때문에 화 참는다) 이거 봐, 누가 누구한테 큰소리야? 지금?
옥선 : 큰소리는 누가 큰소리를 쳤다 그래요? 기껏 자기 딸 키워줬드니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선영 : (멈칫 시선 흔들린다)
옥선 : 나 만나믄 젤 먼저 애 얘기부터 물어봐야 제대루 된 사람 아녜요? 독한 줄은 진작 알었지만, 이 정돈 줄은 몰랐네요!
선영 : ... (외면하고) 그애... 어딨어요, 지금.
옥선 : 궁금하기는 합니까?
선영 : 어딨는데요!
옥선 : 아, 엄마두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선영 : 이거 보세요,
옥선 : (부어있다)
선영 : 나 당신네 집안에 원한 많아요. 피차 따지기 시작하면 끝 없으니까 이쯤에서 관두구...!
우리 애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요?
옥선 : (빈정 상해서) 인제야 엄만 척 하시네.
선영 : 뭐요?
옥선 : (한숨) 아, 그래요! 관둡시다, 관둬요! 오늘은 내가... 인순이 봐서 참아주지요!!
선영 : (굳는다) 인순이?
옥선 : ...딸 이름두 몰라요?
선영 : 인순이에요? 이름이?
옥선 : (뜨악)
선영 : 허, 어머니답게 지으셨네.
선영,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다. 울음을 참느라 눈이 빨개졌다. 손수건 꺼내 눈을 훔친다.
맘이 좀 누그러지는 옥선.
옥선 : 그동안 엄마 있단 얘기 안 했어요. 즈이 엄마 죽은 줄 알구 살다가... 며칠 전에 내가 얘길 해줬네요.
(넌지시 본다) 이혼하셨드라고요? 테레비 나온 거 봤어요.
선영 : (굳어있다)
옥선 : 근데... 안 만나겠다 그래서... 아무래두 내가 나서야겠다 싶어서, 찾아왔어요.
선영 : 날... 안 만난대요?
옥선 : 네. 뭐 지두 사는 꼴이 별루구... 아무래두 원망이 깊지 않겠어요?
맘은 이해가 가는데... 아무리 그래두 부모 자식인데... 만나는 게 도리가 아니겠어요?
선영 : 어떻게 사는데요? 뭐 하구 사는데요?
옥선 : (냅킨으로 눈시울 닦으며) 직접 만나서 보세요. 엄마가 돼서 어쩌믄 한 번두 안 찾아와요?
(한숨) 아, 지금 인순이 그 기집애 땜에 우리까지 사는 꼴이 어떤지 아세요?
선영 : 무슨 말이에요?
옥선 : (떨떠름) 아니에요, 됐어요. 걍, 만나서 직접 들으세요. 그게 좋겠어요.
S#33. 선영 승용차 안
운전하는 선영. 운전대 잡은 손이 영 후들거린다.
스트레스 받았다. 배가 살살 꼬여온다. 배를 잠깐 쓸어내리며 인상 쓴다. 아픈 감회에 젖는다.
선영 : (혼잣말) 인순이......
이윽고 눈물이 왈칵 솟는다.
휴대폰 울린다. 전화 받는 선영.
선영 : 어, 정아야...어디니? ...알았어, 엄마 금방 그리루 갈께.
S#34. 영화사 사무실-오디션 장소
감독 앞에 서서 대본(영화 시나리오)을 읽고 있는 정아. 컬을 넣은 머리에 예쁜 원피스 차림이다.
그러나 대사는 거의 책을 읽는 수준이다. 격앙된 장면인데 별 억양의 높낮이가 없다.
정아 : 말두 안돼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요? 어떻게 나보구 그런 일을 하라는 거에요?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못 합니다! 나는 못해요!!
떨떠름한 감독 표정.
한쪽에 앉아있는 선영. 감독 눈치 보고 있다.
감독 : 됐어요, 그만 읽어두 되겠어요..
정아 : (얼굴 빨개져서 인사 꾸벅)
감독 : (미안한 웃음) 어머님 닮아서 얼굴은 미인인데... 연기는 아직 덜 닮으셨나봅니다..
선영 : (일어난다) 내가 보기엔 잘하는데 왜.
감독 : (마뜩찮다) 글쎄요. 일단 이 역은 나이두 좀 안 맞구요... 다음 기회에 한 번 다시 보죠.
선영 : 아, 그래요? 그럼...뭐 할 수 없죠. (애써 웃는다) 여기저기서 보자 그러는데, 담엔 우리가 어떨지 모르겠네요.
감독 : 예에...(떨떠름) 암튼 오늘 수고했어요...어머님 뒤를 이어 대성하시길 빌께요.
정아 : (다시 꾸벅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선영 : 저녁 같이 드시죠, 감독님.
감독 : (시계본다) 아,이거... 죄송합니다. 오늘은 약속이 쭉 밀려있어서요.
선영 : (무안) 어...그래요? 아유, 이거 아쉽네에. (애써 웃어보인다) 등심 맛있게 하는 집이 있어서 예약두 해놨는데...
참, 너무 아쉽다아.
감독 : (좀 귀찮은) 하하, 먹은 걸루 하겠습니다.
S#35. 상우집 부엌 (밤)
식사하는 상우 부모와 상우.
그릴에 고기를 굽고 있는 상우 모 명숙. 상우 부 병국의 밥 위로 고기를 얹어준다.
받는 족족 상우 쪽으로 밀어주는 병국.
상우 : 전 됐어요, 아버지. 저 요새 배가 자꾸 나와서 체중 조절 중이에요.
명숙 : 아유, 거보세요. 당신이 드세요. 요새 얼굴이 너무 안 좋아요, 당신.
병국 : (버럭) 아, 내가 혈압인 거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나보구 먹구 죽으라는 건가?
명숙 : (기죽어) 아니, 나는 그게 아니구요... 아휴, 고기 몇 점 먹는다구 혈압 안 올라요. 너무 안 먹으면 그게 병 돼요.
요새 통 입맛 없다 그러시구선.
병국 : 상우야, 니 엄마 이렇게 무식한 거 티낼 때는 내가 돌겠다.
명숙 : (무안)
상우 : (눈치)
병국 : 혈압으루 오늘 내일 하는 나한테, 고기 몇 점 먹는다구 혈압 안 오른단다.
상우 : (한숨) 엄마가 아버지 생각해서 그러시는 거죠. 요새 아버지 우울해서 걱정 많이 하세요.
그리구 아버지가 뭘 오늘 내일 하세요?
병국 : (고기를 상우 밥에 얹어주며) 너 많이 먹어라. 힘들텐데. 기자의 생명은 체력이다, 체력.
상우 : (눈치) 엄마, 앉으세요. 엄마두 드세요.
명숙 : 됐다. 난 됐어. 너 많이 먹어라. 나야 뭐 맨날 부엌데긴데...고기를 어떻게 먹겠니.
상우 : (한숨)
명숙 : 그 아가씬 어떻게 됐니.
병국 : 누구? 만나는 아가씨 있냐?
상우 : 아,아니에요. 없어요. 엄마, 그거 아니에요! 그거 잊어주세요!
병국 : (의아한데) 뭐냐. 둘이서만.
상우 : 아, 아버지, 엄마랑 연극 보러 가실래요? 이선영씨 아시죠? 그 분 나오는 건데요. 재밌어요.
두 분 같이 보러 가세요. 초대권 받았어요.
병국 : 이선영이 누구냐.
명숙 : 이선영두 몰르세요? 옴마, 너 그 사람한테 초대권 받았어? 친해?
상우 : 엄마 그분 좋아하세요? 보실래요?
명숙 : 에이, 내가 연극을 뭘 알어. (하면서도 좋은) 언제 하는데?
상우 : 아버지하구 내일 당장 가세요.
병국 : 됐다. 난 바쁘다.
명숙 : 아유, 나두 됐다.
상우 : 그러지 말구 가세요. 당장 표 가져올께요.
일어나는 상우.
S#36. 상우방 (밤)
들어오는 상우. 연극표 찾는데 문자 메시지가 울린다.
<내일 4시 반이었나? 아까 너무 급하게 들었나 봐. 연락 바람^^* 박인순>
마뜩찮은 인상이 되는 상우. 가기 싫다. 만나기 싫다.
괴로워진 상우, 침대에 털썩 기대었다가 다시 일어난다. 이윽고 문자에 답장 쓰기 시작한다.
<미안하다, 내일 급한 출장이 생겨서...>까지 쓰다가 취소 버튼을 꾹 누른다. 깊은 한숨 쉰다.
참자, 그래도 추억에 대한 예의를 다하자. <4시 반 맞아!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와라^^>
다시 답장 써서 보낸다. 보내놓고 또 후회된다. 침대에 팔 괴고 눕는다.
상우 : (한숨)... 암튼 맘 착해서 탈이다, 유상우.
S#37. 미화집 방안 (밤)
휴대폰 들여다보는 인순. 기분이 너무 좋다.
곁에 앉아 라면 먹으며 힐끔 보는 미화. (역시 한껏 멋내고 있으나 누가 봐도 요상하고 심란한 차림??)
미화 : 야,야, 뭘 그렇게 감동먹은 표정으루 앉아있어? 누군데?
인순 : 아냐.
다가와서 라면 먹는다.
미화 : 누군데?
인순 : 미화야, 우리가... 세상을 너무 삐딱하게 보구만 살았어. 반성해야 돼.
미화 : 허, 얘가 뭘 잘못 잡수셨나아. (본다) 누가 너한테 사귀자 그러냐? 너 좋대?
인순 : 어? 어어... 글쎄 뭐... (씩 웃는다) 맘대루 생각하셔!
미화 : 역시... 애가 이상하게 히히거린다 그랬다. 야, 넌 그걸 믿냐? 정신 똑바로 차리셔. 너 사기꾼한테 걸린 거야.
인순 : 야, 무슨 사기꾼... 니 눈엔 세상 사람이 다 사기꾼으루 보이냐?
미화 : 제정신이믄 누가 널 좋다 그러겠냐? (미안한 듯 웃고) 거,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말구, 상황을 자세히 읊어 봐.
내가 그 놈 진실을 가려줄께. 내가 요새 종교에 귀의하야 손을 씻어서 그렇지, 사기루 밥먹구 산 세월이 얼만데?
척보믄 딱안다. 아, 일단 너는 애가 넘 순진해.
인순 : 나 안 순진하거든?
미화 : 하긴 뭐... 순진한 애가 감방엘 갔겠냐마는.
인순 : (삐딱하게 본다)
미화 : (히죽) 읊어보라니깐? 어떤 놈인데?
S#38. 아이스링크 앞
한쪽에 서서 신문 같은 것 보며 기다리고 있는 상우.
멀리서 상우를 발견하는 인순. 상우야! 소리 치며 반갑게 마구 손 흔들어보인다.
짐짓 반가운 척 씩 웃어주는 상우. 그런데 인순 곁에 꼬마가 하나 매달려있다.
멈칫 다시 보는 상우. 이윽고 상우 앞에 다다르는 인순.
인순 : 인사드려, 은석아... 누나 친구야.
상우 : ?
은석 : 안녕하세요. 서은석입니다.
상우 : 누구...?
인순 : 어, 내 아들.
상우 : 허,
은석 : 네. 누나 아들이에요.
상우 : 무슨 촌수가 그래? 누나 아들?
인순 : 흐흐, 자세한 건 묻지 마. 다쳐. (은석 보고 찡긋)
은석 : 히히...
상우 : (뭐가 뭔지)
인순 : 아, 어린이 표 한 장 더 샀어. 표는 걱정 마. (둘러본다) 상우야, 나 이런 데 태어나서 첨 와봐. 너무 설레!
은석 : 저두요!
상우 : 에이...설마... 이거 순 촌놈들이잖아? (너스레) 사실은 나두 첨이야.
은석 : 우하하, 아저씨 재밌어요!
상우 : 누군 누나구 누군 아저씨냐. (귀엽다는 듯 머리 마구 쓸어주고) 어쨌든 들어 가자, 응석아. (앞장 서는데)
은석 : (따라가며) 은석이에요, 아저씨.
S#39. 아이스링크
발레공연이 한창 진행 중이다. 공연에 빠져있는 인순과 은석과 상우.
신이 나서 무대를 바라보는 인순의 옆모습을 문득 가만히 바라보는 상우. 기분이 점점 묘해진다.
S#40. 동네 극장 (어린시절 회상)
변두리 낡은 소극장. 화면 가득 영화가 상연 중이다. 쥬라기공원 1편이다(1993년 개봉)
중학생 상우와 나란히 앉아 영화 보는 중학생 인순이.
공룡이 포효하면 움찔 놀라 시선을 떨구는 상우. 담담하게 영화를 보고 있는 인순이.
이윽고 시선 들어 가만히 인순의 옆모습만 바라보는 상우. 인순이가 좋다. 너무 좋다.
인순이의 눈, 코, 입을 반한 듯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상우. 영화 따위, 관심없다.
팝콘 봉지를 들며 인순을 툭툭 친다. 돌아보는 인순.
상우 : 인순아...(수줍게) 이거...먹으면서 봐.
인순 : 어, 됐어. 너 먹어. (다시 영화에만 골몰한다)
무안해지는 상우. 자기도 다시 화면을 바라본다.
순간, 거대한 공룡이 잡아먹을 듯 닥치는 장면. 으아악, 하면서 인순에게 기대는 상우. 놀라는 인순.
S#41. 아이스링크 (현재)
공연 관람 중인 인순과 상우.
인순의 옆모습을 보던 상우, 이상한 자괴감에 젖어 문득 시선을 스르르 내린다.
인순 : (툭 치며) 상우야,
상우 : (놀라) 어?
인순 : 이거 먹을래? (팝콘 봉지 건네준다)
상우 : 어어...고맙다.
다시 공연에 빠져 신이 난 인순.
팝콘을 아작아작 씹기 시작하는 상우. 점점 기분이 떨떠름해진다.
S#42. 경준 학교 교무실 (낮)
교무일지 같은 것 작성 중인 경준.
쇼핑 봉투 하나 들고 다가오는 영양사 미진.
미진 : (애교) 서선생님, 아직 퇴근 안하셨네요.
경준 : (돌아본다)
미진 : 이거 은석이 갖다 주세요. 점심 때 후식으루... 떡이 많이 남았길래...
경준 : 고마워요. 이거 번번이 신세만 지네요.
미진 : 어머, 신세는요 무슨. 은석이 보고 싶다아. 잘 지내죠?
경준 : 잘지내요.
미진 : 언제 집에 한 번 초대해주세요. 아, 오늘은 어떠세요?
경준 : 오늘은 안되겠는데요? 은석이 인순이하구 어디 놀러갔어요.
미진 : (굳는) 인순이...? 어머, 그 제자요? 살인.. 엄머 (입 막고) 죄송합니다.
경준 : (살짝 찌푸리는)
미진 : 선생님,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 애한테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거 보믄, 정말 존경스러우세요. 존경해요, 선생님.
경준 : 비꼬는 걸루 들립니다.
미진 : 어머...그럴 리가요.
경준 : 그럼 인순일 꼭 채용 못하실 건 뭡니까.
미진 : 예? 그거야... 학교잖아요.
경준 : (일어나며 씁쓸히 웃는다) 떡 잘 먹을께요.
일어나 나간다. 샐쭉해지는 미진.
S#43. 중국 음식점 (밤)
짜장면과 탕수육 먹는 상우와 인순과 은석. 거의 다 먹고 그릇이 비어가는 중이다.
하품하는 은석.
인순 : 졸리는구나?
은석 : 네... (일어나며) 오줌 누고 아빠한테 전화 좀 하고 올께요.
휴대폰 건네주는 인순.
인순 : 여기서 하지! 뭐, 비밀 얘기라두 있어?
은석 : (킥 웃고) 네. 남자끼리만 아는 얘기에요. 누난 몰라두 돼요.
전화기 들고 화장실쪽으로 사라지는 은석.
상우 : 짜식, 맹랑하네.
인순 : (웃다가) 상우야...
상우 : 왜.
인순 : 오늘 고맙다.
상우 : 어어...뭘. 기본이지.
인순 : 담에는 내가 한 턱 낼께. 언제 시간...
상우 : (당황) 저기 말이야, 인순아... 내가 당분간 좀 바빠질 거 같애.
인순 : 어, 그래?
상우 : 응. 어쩜 거의 시간을 낼 수 없을지두 몰라. 부장한테 찍혔거든.
골때리는 놈인데,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는지... 특집 프로그램을 통으루 맡겼어. 아아주 바빠질 거 같애.
인순 : 어어...그렇구나.
상우 : (시선 피하며 과장스레) 기자 일이란 게 진짜 못해먹을 짓이야. 도대체 자기 시간이라군 가질 수가 없어요.
후우, 앞으루 고생 길이 훤-하다. 앞으루 한 달 내내 밤샘은 기본이거덩.
인순 : 어어...고생이 많겠다.
상우 : 휴, 내가 넘 맘이 약해서...하라면 거절을 못해요. 앞으로 연락 못해두 이해해라. 바쁜 거 지나가믄 한 번 보자.
인순 : 어휴, 그래. 그럼 몸 조심하면서 살살 일해.
상우 : 음...(시선 안 마주치려 애쓰는데) 근데 저 꼬맹이라군 먼 관계냐?
인순 : 어어...(쑥스럽게 웃고) 쟤네 아빠가 우리 선생님인데...고등학교 때 담임.
상우 : 그래?
인순 : 음... 선생님이 나 교도소 있을 때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 지금 내가 제대로 살 수 있게 해주신 분.
상우 : 어어...
인순 :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구... 그리구... (머뭇) 좋아하는 사람이야.
상우 : 유부남을!?
인순 : 아아니! 혼자 되셨어. 내가 적극적으루 매달리는 중이야. 진작 너한테 얘기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 나서...
(미안한 듯 수줍은 듯)
상우 : (멈칫) ...그렇구나... (안도한다. 자기도 모르게) 다행이다!
인순 : 뭐가?
상우 : 어? 어어... 그런 훌륭한 선생님이 아직두 우리 사회에 계시다니 그거보다 큰 다행이 어딨어?
(둘러댄다) 야, 니가 착하게 사니까 그런 분을 만났구나.
인순 : (웃는다) 그런가?
상우 : (짐짓) 야, 이거...근데...섭섭하네,
인순 : 에이...
상우 : 섭섭하다니까 진짜!
인순 : (다시 미안한 듯 웃고) 너야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날텐데 뭐!
근데 상우야, 내가 고민이 많아... 아직은 내가 너무 모자란 게 많아서, 선생님 옆에 서기는 부족한 거 같아...
그래두 언젠간... 받아주실 거라고 믿구는 있는데...
상우 : (정색) 안 받아줘? 그 선생? 아니 니가 뭐가 부족해서 안 받아줘?
인순 : (쑥스럽게 웃는다)
달려오는 은석.
인순 : 아빠한테 전화했어?
은석 : 네. 누나랑 짜장면 먹었다구 자랑했어요.
인순 : 아빠는? 저녁 드셨대?
상우 : (복잡해지며 넌지시 본다. 뭐가 다 예상과 어긋난다. 그리고 기분이 뒤죽박죽 묘해진다)
S#44. 경준집 앞 골목 (밤)
상우의 승용차가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는 인순. 잠든 은석을 들춰 업는다.
인순 : 고마웠어, 오늘!
상우 : 갈께! 잘 지내라.
인순 : 잘 가! 건강하구!!
손 흔들어보이는 인순. 차 돌리는 상우.
그 순간, 대문에서 나오는 경준. 부스스 잠에서 깬 은석이 경준에게 매달린다.
은석을 안고 안으로 들어가는 경준. 차를 돌리던 상우와 눈 마주친다.
목례하는 상우. 멈칫 보다 답례하는 경준.
마치 부부처럼 은석을 안고 다정하게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인순과 경준.
S#45. 상우 승용차 안 (밤)
차를 돌리며 가만히 백미러로 그들을 지켜보는 상우. 알 수 없는 심통이 슬며시 난다.
속력을 줄인다. 대문 안으로 사라져가는 인순의 모습을 기막힌 듯 유심히 보다가,
상우 : 허, ...무슨 기집애가... 홀애비 사는 집에...
그러든가 말든가, 내가 무슨 상관인가. 근데 내 기분이 왜 이러지...
에잇, 하고 엑셀을 밟는 상우.
S#46. 경준집 마루 (밤)
잠든 은석을 소파에 눕히는 경준. 따라 들어오며 은석의 신발을 벗기는 인순.
경준 : 남자 친구라며?
인순 : (피식) 은석이가 그래요?
경준 : 재밌는 아저씨라 그러든데?
인순 : 중학교 동창이에요. 아, 방송국 기자에요. 텔레비전에두 나와요.
경준 : 으응.
인순 : (빤히 보다가) 선생님...
경준 : 왜?
인순 : 혹시 질투 안 나세요?
경준 : 질투?
인순 : (짐짓) 그 친구 저 좋아해요. 진짜에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쟤 정말 순수하구 좋은 애거든요?
경준 : (웃는다) 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인순 : (실망) 샘 안나세요?
경준 : 하하,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샘이나? 축하한다.
인순 : 선생님,
경준 : 언제 밥 한 번 먹자. 좋은 녀석인지 아닌지 만나봐야 알지. (시계 본다) 그만 가봐라. 늦기 전에.
인순 : (섭섭하게 보다가) 저...은석이 옆에 자고가면 안되나요?
경준 : 잠자리 여기저기 바꾸는 버릇. 별루 안 좋아. 친구 기다릴텐데 어서 가 봐.
인순 : 선생님,
경준 : 취직 자리 좀 알아봤어?
인순 : ...알아보구 있어요.
경준 : 포기하지 말구, 끝까지 매달려 봐. 니가 최선을 다하면 다 통하게 돼 있어.
넌 다 좋은데 항상 그게 문제야. 포기가 빨라.
인순 : (삐뚜름) 네에...알겠습니다.
경준 : 뭐 불만 있냐?
인순 : 아뇨. 불만 없어요. (불만 있다)
경준 : 그럼 가봐라. (소파로 가서 티브이 뉴스 켜는데)
인순 : (엉거주춤 일어나며 쓸쓸하게 바라보는)...
S#47. 미화집 앞 (밤)
원룸 건물 복도. 현관문 앞으로 걸어오는 인순. 열쇠로 문 열려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멈칫 선다.
문 밖으로 다 새나오는 미화와 미화 남자 친구의 음성.
들어가지 못하고 한 쪽 벽에 쭈그려 앉는 인순.
미화(E) : (키득대며) 야,야, 이러지마아... 인순이 와.
남자친구(E) : 오라 그래! 와서 보라 그래! 아후, 걔는 언제까지 있냐?
미화(E) : 몰라, 나두 미치겠어...애가 눈치가 없어요, 워낙.
다시 히히덕거리는 소리 울려퍼진다.
덤덤하게 그대로 쭈그려 앉아있는 인순.
인순 : ...
S#48. 거리 (밤)
밤거리를 서성이는 인순. 동네를 계속 맴맴 돌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갈 데가 없다.
다시 돌아서서 왔던 길로 가려다가 문득 눈에 뭔가 들어온다. 동네 게시판에 붙어있는 연극 포스터들.
가만히 다가가는 인순. 포스터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S#49. 공연장 앞길 (밤)
조심스레 걸어오는 인순. 공연장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고개 숙이고 신발을 툭툭 차본다.
인순 : (N) 결국 여기까지... 또... 와버렸다. 하지만 이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갈 곳 없는 내 신발, 이 자식이 저지른 짓이다.....
돌아가자, 박인순! 만나지 않기로 했잖아! 만날 자신 없잖아!
결연히 돌아서는 인순. 몇 미터 쯤 가다가 다시 머뭇 돌아본다.
아득한 시선으로 공연장을 바라본다.
S#50. 공연장 무대 (밤)
연극 공연 중인 선영. 중년 남자 배우(남편 역할)와 마주 앉아 대사 읊는 중이다.
술잔을 들고 테이블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선영.
선영 : 내가 어렸을 때, 어느날 밤 엄마 아버지가 끔찍하게 싸웠어요. 한 밤 중에 아버지가 나에게 오셔서
‘엘리스,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자,’ 라고 말씀하셨죠. 그게 엄마와는 마지막이었어요.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고향을 떠났죠... (감회어린다) 아직두 그 길이 눈에 선해요.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남배우 : 지겨운 옛날 얘기 고만 좀 할 수 없어?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옛날에, 어렸을 때, 옛날에, 어렸을 때,
그거 밖엔 할 줄 아는 얘기가 없는 건가?? (일어난다) 내 코트 어딨나? 약속 시간 늦겠어.
선영 : (발끈 일어나며) 바로 이게 당신의...!! 당신과...나와... (대사 잊어먹고 버벅 거리는)
남배우 : (당황한다)
선영,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비며 아무 것도 안 떠오른다.
대사 하라는 제스츄어를 보내던 남배우, 포기하고 다음 대사로 넘어간다.
남배우 : 그래, 내가 죄인이야. 알았다구, 알아들었어!! 코트나 찾아 줘.
선영 : ...(그냥 그대로 굳어있다)
남배우 : (당황)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S#51. 무대 뒤
멍하니 내려오는 선영. 식은땀 닦고 있다.
따라오는 남배우.
남배우 : 무슨 일이에요, 선영씨.
선영 : 미안해요. 갑자기 대사가 생각이 안 났어.
남배우 : 그런 말이 어딨습니까? 아, 한 두 번 했어요?
선영 : ...(차갑게 그대로 가는데)
남배우 : (기막혀 보다가) 관객들한테 사과라두 해야는 거 아닙니까?
선영 : ...(그대로 저만치 가버리는)
남배우 : 이거 봐요, 이선영씨!!
나가버리는 선영.
어이없어 바라보는 남배우.
남배우 : (화난다) 눈꼴셔 못보겠네! (들으라고) 한물 간지가 언젠데 아직두 저러구 사나?!
S#52. 대기실
분장 지운 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영.
가방 열어 쪽지를 한 장 꺼낸다. 인순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다. <박인순 123-456-7890>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결심... 휴대폰을 든다. 그러나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는다.
자신이 없다. 도저히 전화하지 못하겠다. 다시 전화를 들어 단축 버튼 누른다.
선영 : (매섭게) 너 지금 어디니? ... 잤어? ... 너 지금 잠이 오니? 오디션 떨어지구 느낀 거 없어? ...
(히스테리) 뭐? 지금 그걸 대답이라구 하는 거야? 누군 편해서 세상 사는 줄 알어?
다들 행복해서 사는 거 아니야! 다들 얼마나 버티구 발버둥치면서 사는 줄 알어?
...(다가오는 스탭 모습에 화 참는다) 알았어! 엄마 지금 들어가니까 가서 얘기 하자!!
공연 스탭 한 사람. 물잔을 건네준다.
선영 : (이마의 식은땀 닦으며) 고마워요.
스탭 : 많이 편찮으신가봐요.
선영 : (배 움켜잡고) 어어... 속이 좀 안 좋네. 밥 먹은 게 잘못 됐나 봐.
스탭 : 체하셨어요?
선영 : 글쎄...그런 건지.
스탭 : 약 구해드릴까요.
선영 : 아냐, 집에 가서 먹을께.
S#53. 복도
대기실 나와 주차장 쪽으로 가는 선영.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온 몸에 오한이 난다.
힘겹게 걸어가는 그녀를 저만치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인순이.
그리움과 아쉬움, 설움이 교차한 복잡한 표정으로 숨어서 바라보는 중이다.
인순 : (N) 딱 한 번만 보고 가는 거야, 딱 한 번!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냥 가긴 아까우니까.
S#54. 지하 주차장
승용차로 다가가는 선영. 점점 더 혈색이 파리해지고 있다.
차 문을 열고 타려는 그 순간, 마침내 균형을 잃는다. 정신이 가물가물 하다.
배를 움켜잡고 애써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멀찌기서 지켜보다가 돌아서는 인순. 뭔가 이상한 느낌에 다시 돌아본다.
차 문 앞에 꼬꾸라져 있는 선영. 화들짝 놀라서 달려오는 인순이.
인순 : 괜찮으세요?
선영 : (시선이 흐렷다 맑아졌다 한다)
눈 마주치는 두사람.
인순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선영. 낯익은 그 얼굴에 멈칫 시선이 굳었다가 다시 정신을 놓는다.
인순 : 정신 차리세... (허겁지겁 둘러본다) 도와주세요! 누구 안 계세요??
신음 소리와 함께 인순의 팔에 몸을 늘어뜨리며 푹 쓰러지는 선영.
당황하는 인순. 안되겠다, 부축하여 그대로 선영을 들춰업는다.
S#55. 공연장 앞길 (밤)
선영을 업은 채 마구 달리고 있는 인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인순 : 정신 놓지 마세요! 금방 병원 도착하니까 정신 차리셔야 돼요!
소매로 마구 눈물을 닦으며 달린다. 두렵다. 그리고 슬프다.
S#56. 병원 응급실 앞
선영을 업은 채 달려오는 인순.
S#57. 응급실 안
침대에 누워있는 선영. 레지던트와 간호사가 링거를 꽂아주고 있다.
곁에 서서 초조하게 지켜보는 인순.
인순 : 무슨 병이에요? 괜찮으신 건가요?
레지던트 : 위경련이에요. 큰 걱정은 안 하셔두 될 거 같은데요.
인순 : (안도)
레지던트 : 따님이세요?
인순 : 예... (하다가 헉 놀라) 예? 아,아뇨. 길에서 우연히... 우연히 만났어요. 정말이거든요?
레지던트, 간호사 : (무슨 소린가 보면)
인순 : 그럼...(당황스럽다) 가족한테 연락을...해야 하겠죠?
간호사 : 저희가 연락할께요. 걱정 마시구 들어가세요.
인순 : 예에...
S#58. 병원 복도
황급히 들어오는 정아.
S#59. 응급실
늦은 시간. 한적한 응급실 안. 식은땀 흘리며 잠들어있는 선영.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인순. 눈, 코, 입, 머리카락, 옷... 처음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바라본다.
감은 눈 위로 흘러내린 선영의 머리카락. 머리카락을 올려주고 싶다. 가만히 손가락을 가까이 댄다.
그런데 차마 떨려 손을 대지 못하겠다.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이윽고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올려준다. 심호흡한다. 다시 가만히 보다가.
인순 : (들릴락말락 하게) ... 나두 머리카락 굵은데...
눈물과 미소가 동시에 살짝 번진다.
순간, 뒤에서 들어오는 정아. 간호사에게 이선영씨 어디 계세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흠칫 놀라는 인순. 후다닥 커튼 뒤로 몸을 숨기며 응급실을 빠져나간다.
침상으로 다가오는 정아.
정아 : 엄마!
황급히 응급실을 나가는 인순. 선영에게 와락 안기는 정아 모습을 멈칫 바라보고 있다.
눈을 스르르 뜨는 선영.
정아 : 엄마, 괜찮아? 괜찮아요?
선영 : 어어...
가만히 지켜보다가 돌아서는 인순. 방을 빠져나간다.
S#60. 병원 복도
쓸쓸히 걸어가는 인순.
S#61. 응급실
침대에 몸을 일으키고 기대어 앉아있는 선영.
다가와 링거를 살피는 간호사.
선영 : 나 여기 데려온 그 아이... 어디 갔어요?
정아 : 누구요? 누가 엄말 데려왔는데요?
간호사 : 아아, 같이 오신 아가씨요? 방금 나가셨는데요.
선영 : (첨부터 예감이 이상했다)
간호사 : 이선생님 참 좋아하는 팬이신가봐요.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저흰 다 따님인 줄 알았어요.
선영 : !!
후다닥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선영.
정아 : (놀라서) 엄마!
S#62. 응급실 앞
뛰어나오는 선영. 주위를 살핀다. 인순의 모습이 안 보인다. 미친 듯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S#63. 병원 앞길
두리번거리며 달려나오는 선영.
순간, 저만치 정문을 막 빠져나가고 있는 인순의 모습이 보인다.
선영 : 잠깐만요.
못 듣고 그대로 나가고 있는 인순.
선영 : 인순아!!
스르르 걸음이 멈춰지는 인순.
인순 : (N) 인순아... 그건 분명히 인,순,아...였다.
이윽고 돌아보는 인순. 세상이 멎는 것 같다. 그대로 화면이 멎는다.
S#64. 회상-어린시절 놀이터 (해질녘-화면 흑백 처리)
8,9,세 무렵의 꼬마 인순이, 놀이터에서 친구와 시소를 타고 있다.
친구 엄마가 와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씩 둘 씩 집으로 가버리는 아이들.
모두들 떠나고 혼자 남는 인순이. 시소도 못 타고 혼자 모래 장난을 하며 어두워져가는 놀이터에 앉아있다.
인순 : (N) 어릴 때... 내 소원은...놀이터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내 이름이 불리는 거 였다...
S#65. 교도소 앞길 (회상-5년 전 쯤)
교도관(E) : 수감번호 3982... 출소를 명한다.
눈발이 날리는 추운 겨울이다.
교도소 문이 열리면 나이대가 제각각인 한무리의 여자수감생들이 쏟아져나온다.
출소하는 인순, 초췌한 모습으로 무리에 섞여 나오는 중이다.
출소자들을 마중 나온 가족들. 한쪽에서 끌어안고 울고 불고 난리다.
아무도 인순을 마중 나오지 않았다. 덤덤히 가방을 들고 찬바람 속을 걸어가는 인순.
인순 : (N) 수감번호 3982로 불리워진 그 때두... 내 이름 인순이를, 누군가 한 번만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비록...... 조금 늦기는 했지만...
S#66. 병원 앞길 (현재)
망연자실 마주 보고 서 있는 선영과 인순.
선영 : 인순아!
인순 : (굳어있다)
선영 : 인순이 맞지? ...엄마야.
다가오는 선영. 이윽고 인순을 와락 끌어안는다.
멍하니 안겨있는 인순. 이윽고 두 사람 눈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인순 : 어...(엄마...라는 말이 맴맴 돌 뿐 나오지 않는다)
선영 : 미안해.
인순 : (울컥한다)
선영 :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원망 많이 했지?
인순 : (목이 메어 아무 말도 안 나온다)
선영 : 우리 애기... 우리 불쌍한 인순이...미안해...
부둥켜 안고 엉엉 소리내서 우는 두 사람 모습에서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