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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모래구미/ 이은봉
은하수 추천 0 조회 31 15.08.22 17: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모래구미/ 이은봉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섬으로만 기억하지 마라

선착장 뒤 산굽이를 넘으면 아주 조그만, 아주 아담한, 아주 귀여운, 아주 안으로 깊이 파인 모래구미를 만나리라

그렇다 하의도에는 모래구미도 있다

가늘고 여린 모래알들로 빛나는, 모래알들로 여름 한철 돈 좀 벌려는,

모래구미까지 가려면 일단 선착장에서 배를 내려야 한다

그런 뒤에는 여기저기 산나리꽃들 황홀해 하는, 칠게들 무더기로 기어다니는, 자귀나무 꽃들 환장하는, 함부로 잠자리들 짝짓기 하는,

아득한 비탈길 느릿느릿 차로 달려야 한다

호랑가시나무에 민소매를 찔리고 해당화 붉은 열매에 가슴을 긁히며 비탈길 두세두세 걸어도 좋다

모래구미에 이르러 헐값에 빌려주는 몽골식 텐트에 누워 바닷바람을 맞으면 숭숭 가슴에 구멍이 뚫리리라

시원한 마음 부추겨 금모래로 빛나는 모래구미 위 주춤주춤 걸어 다녀도 좋다

수영복 갈아입고 물속으로 들지 않아도 아싸 호랑나비, 하는 마음 절로 일리라

백사장 곁으로 펼쳐지는 너럭바위를 뒤지다 보면 금세 다슬기며 참고동, 한 바가지 딸 수도 있다

발길을 돌려 산비탈 길 걸으면 붉은 칸나꽃, 한쪽 눈 살짝 감으며 당신을 맞으리라

이 섬 청년회장의 젊은 애인 같은 샛노란 원추리꽃도 젖은 손 앞치마에 문지르며 당신을 반기리라

이 섬 하의도에는 낡고 허름한 대통령 생가 말고도 찾을 곳이 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한 움큼 옛 애인의 젖가슴 같은 모래구미, 쬐그만 해수욕장도 좀 있다는 것을!

 

- 계간 《시평》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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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의도는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전학할 때까지 살았던 외딴 섬이다. 목포항에서 뱃길로 58㎞ 떨어진 하의도는 쾌속선 엔젤호로 1시간 20분, 차를 실을 수 있는 짐배인 조양페리호로 2시간 40분이 걸린다. 김 대통령의 생전엔 각각 하루 한 차례씩 운항하던 배들이 '김대중 특수'에 힘입어 지금은 모두 다섯 차례나 오간다. 그렇다고 해도 외지인들이 하의도에 간다는 것은 여전히 큰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의도의 '荷衣'는 본디 중국에서 ‘연꽃잎으로 만든 옷’을 나타내는 말인데, ‘세상의 번거로운 일을 뜬구름같이 생각하고 은둔해 사는 구도자의 옷’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어느 섬인들 세상번뇌를 떠나 살기에 적합지 않으랴만 이 시가 소개한 '모래구미'등의 형상을 보면 그 말에 곧장 수긍이 간다.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돌도끼와 고인돌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가 결코 만만치는 않으리라.

 

 그러나 작은 섬이라 하여 그 세월들이 마냥 탱자탱자 평화롭기만 했겠는가. 고려 말엽 왜구가 창궐할 때는 주민 모두가 뭍으로 소개되었고, 임진왜란 후 본격적으로 사람이 유입되면서는 권력자의 수탈에 시달렸다. 그리고 논 반 소금밭 반인 이곳 지역 경제적 특성으로 근년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천일염이 외국산 소금 앞에 위기를 맞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해안선이 복잡하고 간척지가 많은 신안군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일염 생산지다.

 

 상황이 그러하니 소금은 하의도 사람들에게 쌀 못지않은 수입원이고, 지역 경제도 소금값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복원된 생가가 있는 '후광리' 마을도 염전지대 한쪽에 위치하고 있다. 농토든 염전이든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겐 삶의 원천이요 자부심이다. 더구나 하의도 사람들은 토지를 두고 3백년 넘게 권력과 맞섰던 통한의 역사를 겪어왔기에 그 자부심과 애착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한다.

 

 1623년 조선 인조 임금은 선조 임금의 딸인 정명공주에게 공주의 4대손까지 하의3도(하의도, 신의면의 상태도와 하태도)의 농지 20결(약 8만 평)에 대한 세금을 조정을 대신하여 받아먹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4대손까지의 기한이 지난 1720년 경 공주의 후손들은 ‘하의3도 전체를 하사받았다’고 주장하며 사유농지 140결을 포함한 모든 농지에 대해 강제로 세금을 징수했다. 호조에 납부해오던 세금에 더해 부과된 어처구니없는 이중납세였다.

 

 농민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조정에 하소연을 했으나 개선되지 않았다. 조정이 바뀔 때마다 민원을 내며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던 하의도의 농민들은 1870년에야 소유권을 인정받아 이중납세의 질곡에서 해방되는 감격을 맛본다. 그러나 이 세월도 불과 29년에 그치고 1899년 모든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된데 이어 1908년에는 권력과 결탁한 정명공주의 8대손 일가에게 다시 그 소유권이 넘어가고 만다.

 

 하의도 민초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소송을 제기해 1912년 승소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공주의 후손들이 땅을 다 팔아넘겨버린 뒤였다. 땅은 돌고 돌아 일본인 소유가 되었고, 하의도 농민들은 온갖 협박과 폭력 속에서도 소작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줄기차게 펼쳤지만 결실을 보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1946년엔 농민들이 미 군정청 농지관리기관의 징수원들과 충돌했다가 폭동으로 규정되어 진압당한 사건도 겪었다.

 

 1949년 농지 무상 환원 청원을 해 1950년 조봉암 농림부장관 등의 노력으로 마침내 국회에서 무상 반환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쟁으로 환원 업무가 중단되었는데 정부는 1956년 유상불하를 결정해 1960년까지 불하 대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그렇다고 이때부터 하의도의 농지가 온전하게 하의도 농민의 것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행정기관의 업무 소홀로 농지 소유권 이전 등기가 되지 않은 것이 1993년에야 발견된 것이다.

 

 소유권 이전 등기가 완료된 때가 1994년이니, 1623년 정명공주의 무토사패(나라에서 받을 토지세를 대신 받음)에서 비롯된 하의도의 농지탈환운동은 371년 만에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뼈아픈 역사를 꽤뚫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후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그 역사를 재조명하고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을 이곳에다 지었다.

 

 연화부수(蓮花浮水) 하의도 3대 명물로 김대중 대통령 생가, 큰바위얼굴, 모래구미 해수욕장을 꼽는다. 나는 여기에다 이 농민운동기념관을 추가하여 4대 명물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김대중 대통령 생가복원사업도 대구지역 노인복지대학 노인회 노인들이 마련한 1백20만원의 정성어린 성금기탁으로 마무리되어 동서화합의 표본이 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의도를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섬으로만 기억하지 마라' '한 움큼 옛 애인의 젖가슴 같은 모래구미, 쬐그만 해수욕장도 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짐짓 말하지만, '아싸 호랑나비'하며 몸이 시키는 관능적 경탄에도 불구하고, 하의도에서 우리는 김대중을 먼저 기억해야 하리라. 김대중의 상징처럼 여겼던 '큰바위얼굴'도 최근 그 또렷한 형상이 점차 무뎌져간다고 들었다. 하지만 '행동하는 양심'의 김대중 정신마저 잊히고 허물어져서는 안 되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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