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걱정을 했는데
새벽에는 약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오전에 비가 그치고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한다.
어제 사 놓은 구운 공주알밤 2봉지를 먹고 출발했다.
1시간 가까이 걸려 대흥면 봉수산 성지 근처 주유소에서 주유하면서
아침식사 할 곳과 성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곳이 교과서에도 실렸던 그 유명한 '의좋은 형제' 마을이란다.
한 마을에 따로 농사를 지으며 사는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가을이 되자 추수를 하고 각자 논에 볏가리를 쌓아 놓았다.
형이 생각하기를, 동생은 결혼해 새로 살림이 났기에
쌀이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밤중에 몰래 논으로 나가
자기 볏가리를 덜어 동생 볏가리에 쌓아 놓았다.
그날 밤 동생이 생각하기에 형은 식솔도 많으니
쌀이 더 필요할 거라 여겨 밤중에 나가
자기 볏가리를 덜어 형의 볏가리에 쌓아 놓았다.
이튿날 논에 나가 본 형제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지난밤에 볏가리를 옮겨 놓았는데
전혀 볏가리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밤에도 형제는 같은 행동을 했고,
셋째 날에 드디어 형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로 밤중에 볏가리를 옮겼던 것이다.
61. 대흥 봉수산 순교성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이 마을은 예로부터 ‘의좋은 형제’로 유명한 마을이다.
밤에 몰래 서로의 논에 볏단을 건네줬다는
우애 깊은 이성만·이순 형제의 이야기가 담긴
‘의좋은형제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또 다른 의좋은 형제를 만날 수 있는 성지가 나온다.
바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나누던 의좋은 순교자, 복자 김정득(베드로)과
복자 김광옥(안드레아) 형제를 현양하는 대전교구 대흥봉수산순교성지
(전담 윤인규 신부,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14)다.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한양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오던 길,
각자의 처형지인 대흥과 예산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두 형제는 손을 맞잡고 이렇게 인사했다고 한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였지만,
두 형제의 얼굴은 더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의좋은 순교자, 김정득과 김광옥 형제는
1801년 8월 25일 각각 대흥과 예산의 처형지에서
한 날 한 시에 참수로 순교했다.
62. 홍주 순교성지
충청남도 서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내포 지역 정치, 행정, 문화, 교통, 체신의 중추이자
군사적으로도 서해안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홍성은
그 관할 범위가 넓었던 만큼 순교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홍성의 초기 박해(1791-1801년) 순교자는 8명으로
이 중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이
시복시성이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이다.
중기 박해(1812-1839년)에는 이여삼 바오로 등 4명이 순교했으며,
이후 1866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200명이 순교해
교회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 기록상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한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를 감안하면
실제 순교자는 7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홍주순교자 기념성당 (홍성성당)
63. 해미순교성지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뿐만 아니라
해미 진영은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64.배나드리 성지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
현재 삽교 성당 관할 구역인 용동 3리의 배나드리 교우촌 인근 용동 2리에는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가 있다.
이곳은 본래 예산 본당 관할의 주례 공소 강당이 있던 곳이었다.
1967년 예산 본당에서 삽교 본당이 분가되면서 공소가 폐지되고 강당이 헐리게 되자
공주에서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를 기념하는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순례도장을 찾지못해 삽교성당으로 갔다.
사무장 말이 녹색문옆에 있다고 하여 난감해했는데 다행히
삽교성당에도 순례도장이 있어서 찍을 수 있었다.
삽교성당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65. 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신례원 본당의 공소를 거쳐 2008년 성지본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로 구성돼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김진후(金震厚), 성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66. 신리 성지
충청도 내포 지방으로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이 공동체는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한 거더리, 세거리, 소덜, 강계, 양촌 등 주변 마을이었다.
성지는 지금도 신리란 이름과 함께 남아 있다.
67. 황무실성지
충청도 내포 지방은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면천의 황무실 교우촌도 역시 오래된 교우촌으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다.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신 적이 있는
순교자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은 이곳 황무실 출신이다.
지금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황무실 교우촌의 순교자는
박해 시에 순교한 송 안토니오를 비롯한 9명 외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무명 순교자로서 내포 지방 산야에 잠들고 있다.
다만 그곳을 사목 중심지로 해서 활동했던
성직자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 있다.
68. 솔뫼 성지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충청도의 천주교 신앙은 일찍이 내포지역에서 시작되어 충청도 전지역으로,
더 나아가 전라도 북부나 경기도 또는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솔뫼는 김 신부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김대건은 이곳(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때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 김택현은 대건이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16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다.
69. 원머리 성지
신평 성당 구내에는 두분의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미티아의 묘가 모셔져 있다.
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지역인 원머리, 새터, 용성이라는 곳에
병인박해시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머리에는 적어도 1850년대에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가 충청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1883년에
이미 신평면 한정리(寒井里, 또는 원머리)와 매산리(쇠터 또는 새터)에 공소가 설립되어 있었고,
1886년경 한정리 공소와 매산리 공소의 신자수는 각각 117명과 119명에 이를 정도였다.
70. 요당리성지
요당리는 박해 초기 시대부터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서,
요당리(蓼塘里)란 지명은 ‘여뀌 풀(蓼)이 무성한 못가의 마을’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의 경우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 쪽에서 현재의 발안천을 따라
고잔 저수지를 거쳐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일대까지 밀려 들어왔다.
현재는 남양 방조제로 가로막혀 바닷물의 유입은 중단된 상태다.
이곳은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 성인과 장주기 성인의 6촌
장 토마스(1815~1866) 외에도 순교자 지 타대오(다두, 1819~1869),
임치선(1845~1871, 베드로), 조명오(曺明五, 1823~1872, 베드로),
홍기현(洪基賢, 1851~1871, 베드로), 홍원여(1850~1872, 가롤로)의 고향이기도 하다.
71. 합덕성당
합덕 본당의 전신은 양촌 성당(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인데 1890년에 설립,
초대 퀴를리에 신부가 부임, 1899년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준공된 것으로 제7대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가
6.25 때 납치당해 순교하는 비극이 있었다.
현재 성당 옆에 있는 페랭 신부의 묘소와 함께 순교한 두 평신도의 묘소에는
유해는 없이 유물만이 묻혀 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전 순례를 마치자 기온이 급강하하여
신혼여행 때 쓰고 다녔던 모자와 목도리를 착용했다.
오늘 순례길에는 사과를 많이 팔고 있었다.
대구 사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예산 당진등이 사과가 유명했다.
솔뫼성지에는 생산자 표시가 붙어있는 상품이 많이 진열되어있어서
사과 2봉지와 차종류를 구입했다.
오늘은 성지가 서로 가까이 있었기에 수원교구 요당리 까지 갔다가
합덕성당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려 10곳을 순례했다.
순례자의 집은 숙박 50,000원 인데 방이 크고 넓어 편안했다.
물을 끓여 누룽지와 휴게소에서 구입한 호두빵과 커피까지 마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