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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어디서 많이 뵌 분인데, 누구시더라? ^^ )
지난번 말씀드린대로 제가 대추리의 투쟁에 관한 작은 책을 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마을사진첩 비슷한 것이죠.
책 끝 부분에 현재까지의 투쟁과정을 담은 일지를 간략하게 싣고자 합니다. 그래서 정리를 해 보았는데, 문화예술인들의 작업 과정이 많이 빠져 있어서요.
비닐하우스 콘서트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모두 몇 회에 걸쳐 진행되었는지, 벽화작업의 날짜, 참여하신 단체나 개인의 이름, 특히 최평곤 선생님 문무인상과 파랑새 설치 일자 등등 꼭 들어가야 할 몇 가지를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밖에도 제가 놓친 소중한 날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틀린 곳이 있으면 주저말고 지적해 주십시오. 댓글로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정리한 투쟁일지는 누구나 공유하셔도 좋습니다.
정리되면 게시판에 다시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한미군기지 확장 이전과 대추리 농민들의 저항운동 일지
1987년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 용산미군기지 이전 선거공약
1990년 2월
딕 체니 미국방장관, 한국을 방문해 주한미군 감축 및 역할변경 문제를 협의하고 돌아감.
1990년 6월 25일
이상훈 국방장관과 메네트리 주한미군사령관 간에 ‘용산기지 이전에 관한 합의각서(MOA) 및 양해각서(MOU)’가 서명 교환. 이 협정에 서명했던 이상훈 장관은 정부간 협정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정부대표권한’을 위임받지도 않은 상태였으며,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체결 비준에 대한 국회동의를 규정한 헌법 제60조 1항을 위반.
1993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용산기지이전을 재검토했으나, 천문학적인 이전비용으로 인해 이전논의 전면 유보.
2000년
미국은 자신들의 해외주둔미군재배치 계획을 ‘GPR’(Global Posture Review)이란 이름으로 공식화하고, 적극 추진하기 시작.
2001년 1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33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기지를 효율적으로 재배치하기 위해 전국 20개 미군기지 144만5천평과 미군훈련장 3천900만평 등 총 4천44만5천평을 2011년까지 단계적으로 한국에 반환하며, 그 대신 의정부 24만평과 평택 지역 41만평을 미군에 추가 공여키로 합의
2002년 3월 29일
한미양국, 연합토지관리계획(LPP) 협정에 서명하고 그 내용을 발표. 주내용은 주한미군기지와 훈련장 등 4천114만평을 10년에 걸쳐 돌려받는 대신, 154만평의 새로운 공여지를 미군에 제공한다는 것. 이 가운데 74만평이 평택지역에 해당할 것으로 확인됨.
2002년 4월 26일
‘주한미군기지 신설 확장 반대와 우리땅 되찾기 경기도 운동본부’ 발대식.
2002년 10월
미군기지확장저지 평택대책위원회(위원장 김용한), ‘미군기지확장예정지 땅 1평 사기 운동’ 돌입.
2002년 11월
한미양국, ‘서울 주둔 미군기지 이전을 위한 기본요구서(IMP : Initial Master Plan) 작성에 관한 절차’ 합의. 이 합의문서의 앞머리에는 “1990년 6월 25일 체결된 합의각서(MOA) 및 양해각서(MOU)를 이행하기 위하여...”라고 아예 못 박음. 1990년 합의각서와 양해각서는 위헌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 이는 기지이전 ‘재논의’에 관한 첫 합의문서로써 향후 협상의 시금석이 됨.
2003년 2월
1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회의, 용산기지 이전협상 시작
2003년 3월
한미 국방관계자들의 회담내용과 잇따른 발언이 알려지면서, 경기 북부에 주둔한 2사단과 용산미군기지가 결국 평택으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대두.
2003년 4월 25일
제임스 솔리건 주한미군사령부 부참모장, “전국에 산재한 미군기지를 장기적으로 평택과 대구부산지역 등 2개권의 중심(HUB)기지로 재편해 나갈 계획”이라고 발표. 연합뉴스는 “미국이 평택 캠프험프리 주변의 400여 만평에 미8군사령부와 2사단을 배치하고, 오산공군기지 주변의 100여 만평에는 주한미군사령부 관련 시설을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 미국기지 확장을 위해 74만평을 요구해 온 지 불과 1년 만에 다시 500만평을 요구해왔다는 소식에 지역사회가 혼란에 빠짐. 확장예정지로 알려진 지역 주민들은 즉각 반발하는 한편, 인근의 상인연합회와 재향군인회 등은 주한미군 이전 환영대회를 개최.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용산기지 이전협상 조속히 마무리하기로 합의
2003년 6월 5일
한미양국, 3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를 갖고 용산기지와 미2사단을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확정.
2003년 6월 16일
손학규 경기도지사,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용산기지와 미2사단의 평택이전에 맞추어 500만평 규모의 ‘국제평화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 그는 “미군의 평택이전을 적극 수용할 것”이라며 “미군과 가족, 일반시민 거주지 및 골프장과 상업시설, 영어마을 등을 갖춘 자족도시를 만들기 위해 2010년까지 8년간 4조원을 투입할 계획”이라고 언급. 이에 대해 기지확장반대대책위는 “주민들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평택을 영구적인 군사도시로 만드는 짓”이라며 강하게 반발.
2003년 6월 27일
조영길 국방장관과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회담을 갖고 공동발표문을 통해 “용산 미군기지의 조기이전 필요성에 동의했다”며 “미군 기지의 한강이남 통합을 2단계에 걸쳐 추진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
2003년 7월 6일
대추분교 운동장에서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 준비위원회(위원장 김지태 대추리 이장)’ 발족.
다음날 팽성읍 이장단은 운영위원회를 열고 “팽성읍 71개 마을 전체가 기지확장반대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향후 새마을부녀회와 새마을지도자까지 운동을 확대해 나가기로” 결의.
2003년 7월 29일
팽성읍 이장협의회, 농민회, 새마을 남녀지도자회, 농촌지도자회, 농업경영인연합회 등 6개 단체가 합류해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읍대책위원회’가 공식 출범. 위원장엔 대책위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해 온 김지태 대추리 이장이 선임.
2003년 8월
민 관 학 종교 정치계가 참여하는 미군기지이전대책협의회 구성
2003년 10월 31일
평택 역 광장에서 ‘미군기지 평택총집결저지 범국민궐기대회’ 개최.
2003년 11월
국방부로부터 토지수용을 위탁받은 토지개발공사, “대추리 일대 토지감정평가가 끝나는 대로 보상절차를 거쳐 수용하겠다”는 안내문을 주민들에게 발송.
2004년 1월 16일
한미양국, 하와이에서 열린 미래한미동맹 6차회의에서 한미연합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를 포함한 용산기지 주둔 미군부대를 오는 2007년까지 평택으로 완전이전 하기로 최종 결론.
2004년 2월 11일
문정현 신부가 이끄는 유랑단 ‘평화바람’, 대추리 지지방문.
2004년 2월 27일
캠프험프리 송유관 파손으로 약 11만3000리터의 유류유출 사고 발생.
2004년 3월
평택시, 자신들이 기초안을 만들고 미군기지이전대책협의회가 검토한 ‘용산기지평택이전지원특별조치법’을 주한미군기지이전대책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에 제출. 평택시는 이 특별법 안을 당분간 시민들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해 빈축을 삼.
2004년 5월 29일
평택 공설운동장에서 ‘5.29 반전평화문화축제’. 3000여 명의 참가자들은 1박2일로 진행된 축제를 마치며 대추리까지 평화행진.
2004년 6월 7일
서울에서 제9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미국은 312만평의 기존 합의 외에도 유엔사와 한미연합사를 옮길 부지 28만평, 주택건설터 50만평 등 모두 390만평을 요구했다가 다시 360만평의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한국측의 330만평 주장으로 협상 결렬.
2004년 7월 23일
한미양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10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회의에서 용산기지 이전협상을 마무리 짓고, 미2사단 재배치 계획 등을 담은 연합토지관리계획(LPP) 수정협상 타결.
안광찬 국방부 정책실장과 리처드 롤리스 미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보를 수석대표로 한 양측 협상단은 캠프험프리 주변 일대의 349만평을 미국측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 용산기지 이전부지는 349만평 중 52평뿐인 확인.
2004년 8월 20일
11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 회의, 미군기지 이전확장을 위한 법적 체계인 포괄협정(UA)과 이행합의서(IA)에 가서명.
한편, 국무총리실 주한미군대책기획단 유종상 부단장을 비롯한 국방부 관계자들은 평택시의회에서 시의원들을 상대로 첫 사업설명회를 개최.
2004년 8월 25일
주한미군대책기획단과 국방부는 팽성읍 회의실에서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주민설명회를 개최했으나, 해당지역 주민들의 퇴장으로 무산.
2004년 8월 28일
캠프험프리(K-6) 앞에서 ‘미군기지 확장저지를 위한 주민 총궐기 대회’. 수용지역 이장단 8명, 항의서한문 낭독 후 혈서와 삭발.
2004년 9월 1일
국방부, 평택대에서 ‘주한미군기지이전관련 평택지역 등 지원특별법에 관한 공청회’를 강행했으나, 주민들의 거센 항의로 무산. 주민들은 “우리의 의견과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특별법이 과연 시민을 위한 특별법이냐”면서 강하게 반발.
주민들이 단상 앞으로 몰려와 항의하자 경찰은 김지태 이장을 비롯한 주민 9명을 평택경찰서로 연행해 조사. 주민들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 앞에서 밤늦도록 촛불시위. 주민촛불시위의 시발일.
2004년 9월 2일
팽성주민들, 미군기지확장을 반대하는 무기한 촛불행사에 돌입할 것을 결의
2004년 10월 19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미군기지 평택이전에 따른 특별법’ 심의 의결.
2004년 11월 4~5일
4일, 국방부, 경찰 800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경계확정을 위한 현장확인작업. 주민 300여 명은 마을 진입도로와 농로를 농기계로 막고 국방부 관계자들의 출입을 저지.
5일 2차 현장확인을 위해 찾아온 국방부 관계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농기계 등으로 막았으나 국방부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저지선을 뚫고 현장확인을 강행.
도두1일 최춘호 이장을 비롯한 4명의 주민이 용인경찰서로 연행. 김덕일 신대1리 이장 실신.
2004년 12월 6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미군기지이전협정안 공청회.
발표자로 나선 권정호 변호사는 “정부가 용산기지이전에 관한 포괄협정(UA)만을 국회동의 대상으로 삼고 비용부담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이 담긴 이행합의서(IA)를 뒤로 감춘 것은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에 대해 국회가 비준동의권을 갖도록 한 헌법 제60조 1항에 위배된다”고 주장. 또한 “이행합의서(IA)가 불법성이 입증된 1990년 용산기지이전합의각서와 양해각서를 ‘참조문건’이라는 이름으로 합법화시시키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
이에 대해 협상실무책임자였던 차영구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용산미군기지이전은 해외미군재배치(GPR)과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기지이전이 우리측의 요구로 시행되는 것이니만큼 비용을 한국측이 전액 부담하는 것은 국제관례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
2004년 12월 8일
17대 정기국회에서 ‘주한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시 등의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 가결.
2004년 12월 9일
17대 정기국회에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미합중국군대의 서울지역으로부터의 이전에 관한 협정 비준동의안’ 재석 191, 찬성 145, 반대 27, 기권 19로 가결.
‘2002년 3월 29일 서명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연합토지관리계획 협정에 관한 개정협정 비준 동의안’ (LPP 개정안) 재석 192, 찬성 137, 반대 29, 기권 26으로 가결.
2004년 12월 18일
황새울 들녘에서 ‘2004 대추리 평화축전 - 들이운다’ 개최.
2005년 2월 14일
유랑단 ‘평화바람’, 당분간 유랑을 접고 대추리로 이주해 정착활동 시작.
2005년 2월 21~28
국방부와 한국토지공사, 대한주택공사, 한국감정원 직원들이 ‘국방조사단’이란 명찰을 달고 대추리와 도두2리에 대한 지장물 조사를 시행. 이에 맞서 주민들이 마을 길목과 들녘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국방부의 물건조사를 저지. 국방조사단과 주민들의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1주일 동안 지속됨.
2005년 2월 22일
전국민중연대, 민주노동당, 전국연합,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114개 시민단체는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결성 선포.
2005년 3월 3일
국방부, 주민들의 저항으로 지장물 조사에 애를 먹자 항공기를 이용해 촬영조사 강행.
2005년 3월 5일
대추분교에서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출범식.
2005년 3월 15일
미군기지 확장이전에 반대하는 국민 1032명, 용산미군기지이전협정과 LPP개정협정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
2005년 4월 19일
주민촛불집회 200일째
2005년 4월 21일
국방부의 하청을 받은 토지공사직원들이 몰래 마을로 들어와 이의신청하지 않은 주민들의 집을 조사하다가 주민들에게 발각.
2005년 5월 9일
작가 김지혜, 마을 노인들과 53년 전 사라진 옛 대추리의 심리지도를 제작해 캠프 험프리 담장 앞에 설치.
2005년 6월 15일
국방부, 주민들에게 물건감정평가 및 보상가를 개별적으로 통보.
이에 맞서 평택범대위와 시민단체, 주민들은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방적인 토지강제수용에 항의.
2005년 6월 27일
촛불집회 300일째
2005년 7월 6일
대추분교에서 ‘주한미군철수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저지 노동자대회’ 개최.
2005년 7월 10일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한반도 전쟁반대 평화대행진’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추분교에서 열림. 인간띠잇기 행사를 경찰이 저지하면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수백명 부상.
2005년 8월 8일
대추분교에 경찰 난입. “학교 입구에 세워진 돌탑이 시위용품으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며 쌓아 둔 돌탑을 무너뜨려 트럭에 싣고 감. 항의하는 주민들을 강제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태순 할머니와 홍옥기 아주머니가 부상해 병원으로 응급후송됨.
2005년 8월 9일 ~ 10월 25일
도두리출신 가수 정태춘과 박은옥,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평화, 그 먼길을 간다’ 거리공연을 12주간 진행(매주 화요일)
2005년 8월 17일
대추분교 내 ‘솔부엉이 마을도서관’ 개관. 대추분교에 책 보내기 캠페인 벌임.
2005년 8월 23일
국방부, 대추분교를 사용하고 있는 두레풍물보존회 송영민 단장에게 “9월 10일까지 학교를 비우지 않으면 벌금 700만원을 부과할 것”이라고 최후통첩.
2005년 8월 26일
국방부, 주민설명회를 한다며 진압경찰 200여 명을 동원해 대추분교 문을 절단하고 침입. 항의하는 주민들을 연행한 뒤 ‘주민 없는 강제 주민설명회’ 강행. 평택 대책위 이호성 상황실장 연행.
2005년 8월 31일
솔부엉이 라디오 첫 마을방송
2005년 9월 1일
촛불집회 1주년
2005년 9월 3일
대추분교에서 촛불집회 1주년 기념 문화행사
2005년 9월 4일
대추분교 2층 교실을 스튜디오로 꾸며서 ‘황새울 하루사진관’ 시작. 한 달에 한 두 번꼴로 주민들의 초상사진을 찍어 드림.
2005 9월 16일
천정배 법무부장관, 대추리 김지태 이장 등 32명 앞으로 ‘대추초교 출입금지 및 점유사용방해금지 가처분신청’
2005년 9월 27일
평택지원 앞에서 ‘대추분교 출입금지 가처분신청’ 규탄집회
2005년 9월 29일
마이크 제이 텔리엔토 주니어 대령, 인터넷신문 기자단을 캠프험프리에 초대한 자리에서 “기지부지 285만평에 2.5m 두께의 흙을 덮고 그 위에 건물을 지을 계획이며, 기지가 확장되면 캠프험프리는 기존 136만평에서 약 430만평으로 늘어나며, 수용인원도 현재 9천명에서 4만4500명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
2005년 10월 9일
‘기차길옆 작은학교’, 대추분교 앞 담장에 벽화 작업
2005년 10월 13일
평택시청 앞에서 우리땅 지키기 1인 시위 릴레이 시작
2005년 10월 29일
미군기지확장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 평택역 앞에서 기자회견 후 2차 평화대행진이 열리는 12월 11일까지 철야 천막농성에 돌입.
2005년 11월 6일
한 해 농사의 풍년에 감사하는 대추리 도두리 들녘 잔치.
오랫동안 지병을 앓아오면서도 마을을 지키기 위해 미군기지확장반대 운동을 벌여왔던 도두1리 최춘호 이장 별세.
2005년 11월 8일
도두1리 최춘호 이장을 추모하는 들녘 노제
2005년 11월 14일
유랑단 ‘평화바람’이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엮어 만든 책 ‘들이 운다’(도서출판 리북) 출간 기념 마을잔치
2005년 11월 15일
아침 일찍 상경한 주민들, 국방부 앞에서 ‘들이 운다’ 출간기념 고사를 지냄.
오후에 문정현 신부와 주민들이 미 대사에게 항의서한과 책을 전달하려 했으나 경찰의 포위로 그 자리에 앉아 밤샘농성.
2005년 11월 21일
불교인권위, 팽성주민대책위에 올해의 인권상 수여.
2005년 11월 22일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4대 종단 124인 성직자, ‘생명평화 위협하는 미군기지 강제토지수용 반대 호소문’ 발표.
2005년 11월 23일
중앙토지수용위원회, 평택미군기지 확장부지 중 협의매수를 거부한 120만평에 대해 강제수용을 결정. 법원에 보상금을 공탁함으로써 수용토지 소유권이 국방부로 이전됨.
이에 항의하는 주민과 평화활동가 200여 명이 한국토지공사 회의장에 진입 시도하였으나 경찰에 저지당함. 토지공사 건물 앞에서 밤샘농성.
2005년 11월 24일
중앙토지수용위원회의 강제수용 결정을 규탄하는 농성장에 경찰 난입. 문정현 신부와 김지태 이장 등 대표단 연행.
2005년 12월 9일
프랑스 농민운동가 조세 보베, 평택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기 위해 방한. 대추리 방문
2005년 12월 11일
대추분교에서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를 위한 2차 평화대행진 열림.
2005년 12월 20일
‘한겨레 21’ 589호, ‘대추리에 사실래요’라는 표제로 팽성 농민들의 고단한 싸움을 보도.
2005년 12월 22일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 청와대 앞에서 토지 강제수용에 항의하는 기자회견
2006년 1월 3일 ~ 1월 14일
팽성주민 40여명, 트랙터를 이끌고 전국 1200km 평화순례
2006년 1월 10일
‘한겨레 21’ 평택 농민들과 함께 하는 평화캠페인 시작.
2006년 1월 11일
대추리를 평화촌으로 만들기 위한 마을지킴이 캠페인 시작.
무료법률사무소, 마을사진관, 찻집 문을 열다.
2006년 1월 13일
팽성농민 트렉터 순례단, 전국 순례를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도중 안성 부근에서 경찰과 대치. 밤샘농성.
2006년 1월 14일
트랙터 순례단 대추리 귀환. 촛불집회 500일째.
2006년 1월 24일 ~
도두리 출신 가수 정태춘을 주축으로 비닐하우스 콘서트 시작
2006년 1월 25일
오영숙 수녀, 김혜경 민주노동당 전 대표를 시작으로 권영길 의원, 만화가 장차현실, 박원순 변호사 등이 릴레이 체험에 동참)
2006년 2월 3일
평택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는 문화예술인모임 ‘들사람들’, 한양대 앞에서 ‘하루주점’
2006년 2월 7일
주민들,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포기하며 평택시청에 주민등록증 반납
2006년 2월 12일
대추분교와 황새울들녘에서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를 위한 3차 평화대행진’
2006년 2월 14일
유랑단 평화바람, 대추리 이주 1주년.
2006년 2월 24일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영농발대식
2006년 3월 6일
국방부, 경찰과 철거용역깡패 수천명을 앞세우고 대추분교에 대한 행정대집행을 시도했으나,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철수함.
2006년 3월 15일
2차 행정대집행. 경찰 50여개 중대와 철거용역깡패, 포클레인을 앞세운 국방부가 들녘 곳곳으로 난입해 땅을 파헤침.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주민이 부상당하고 연행됨. 가수 정태춘과 시인 송경동 연행. 평화활동가 박래군 조백기에게 구속영장 발부.
2006년 3월 16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 전국에서 트랙터를 끌고와 대추리 도두리 들녘에 ‘평화의 논갈이’ 시행.
2006년 3월 24일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한국사회포럼’ 폐막식에서 대추리 영상 상영.
2006년 3월 29일
박래군, 조백기에 대한 구속적부심 심사에서 석방허가 결정.
2006년 3월 30~31일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 국방부의 행정대집행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가운데 들녘에 볍씨를 뿌림.
2006년 4월 7일
3차 행정대집행. 국방부, 농민들의 농사강행에 맞서 들녘으로 향하는 농수로를 파괴하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부음. 하루종일 경찰과 주민들 대치. 부상자와 연행자 속출. 경찰이 돌아간 뒤 주민들은 밤새 삽과 손으로 아직 굳지 않은 콘크리트를 걷어내 물길을 틈. 경찰에 연행됐던 마을 지킴이 장도정, 신용관 구속.
2006년 4월 19일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 사월혁명회가 주관하는 ‘제17회 사월혁명상’ 수상.
2006년 4월 23일
촛불집회 600일째
2006년 4월 29일
대추분교에서 풍년기원 굿. 리영희 선생 대추리 지지방문.
2006년 4월 30일
평택시청에서 주민대표자와 국방부 관계자가 협상 테이블에 앉았으나, “이주가 전제되지 않는 협상은 의미 없다”는 국방부의 주장으로 협상 난항. 그러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데 양측이 동의.
2006년 5월 4일
국방부, “지속적으로 대화한다”고 발표한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4차 행정대집행 강행. 이른바 ‘여명의 황새울’ 작전을 위해 경찰 115개 중대 1만2천여 명, 수도군단과 700특공연대 2800여 명, 용역업체 직원 700여 명이 동원됨. 무장경찰의 호위 아래 철거용역깡패들은 대추분교를 파괴하고, 군공병대는 들녘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폐쇄한 채 물웅덩이와 철조망 작업을 진행.
이날을 전후해 600여 명의 연행자가 발생, 이 가운데 200여 명이 입건, 40여 명에게는 ‘특수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 부상자만 200여 명에 달함.
2006년 5월 5일
전날의 강제집행에 항의하는 주민과 평화활동가 100여명 연행(이 가운데 23명 구속). 군인들은 들녘으로 향하는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에게 진압봉을 휘두르고, 엎어뜨린 채 포승줄로 포박. 마을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 검문검색 강화.
2006년 5월 6일
대추리 김지태 이장 소유의 우사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 발생. 경찰은 불을 끄러 달려가는 주민들을 저지.
2006년 5월 8일
광화문 일대에서 대추리에 대한 강제 폭력집행에 항의하는 서울시민 촛불집회
2006년 5월 9일
윤광웅 굴방부 장관, 대추리 도두리 진입작전에 성공한 군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들녘에 설치한 군막사를 방문.
2006년 5월 10일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 기자회견을 갖고 “군을 투입해 민간인을 짓밟으라 명령한 노무현 대통령의 망월동 참배를 막겠다”고 결의.
2006년 5월 11일
도두2리에 투입된 공병대, 감정평가도 받지 않은 개인소유 창고와 비닐하우스 파손.
2006년 5월 12일
도두2리에 상수도 공급 중단. 주민들, 상수도 공급을 요구하며 항의농성. 며칠 뒤 상수도 공급이 재개되었으나, 27일에 다시 상수도를 끊는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함.
한편, 무리한 강제집행에 대한 여론 악화를 의식한 한명숙 총리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고, 정부의 대화노력이 부족했던 점을 인정하면서도 군병력 투입과 강제집행을 두둔함.
2006년 5월 13일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 평택 군병력 철수와 평화적 해결을 위한 5백18인 시국선언문 발표.
대추리에서는 군용헬기 8대가 저공비행하며 주민들을 불안케 함.
서울 광화문에서는 공권력 투입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열림.
2006년 5월 14일
대추리에서 군병력 투입에 항의하는 범국민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에 막혀 본정리 앞 거리에서 집회 진행.
2006년 5월 18일
국방부, 마을입구 곳곳에 감시카메라 설치
2006년 6월 1일
평택대책위 강상원 집행위원장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자진출두했으나, 곧바로 구속.
2006년 6월 5일
국방부, 시추기계를 동원해 지질조사 시행. 이에 항의하는 주민 수십명이 경찰의 폭력으로 부상.
김지태 이장, 국방부와 대화하기 위해 경찰에 자진출두했으나 곧바로 구속.
2006년 6월 6일
문정현 신부, 김지태 이장의 석방을 촉구하며 평택경찰서 앞에서 단식 농성 돌입
2006년 6월 7일
서울광화문에서 평택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주최한 ‘들이운다, 문화한마당’ 열림.
2006년 6월 8일
문정현 신부, 평택경찰서 앞에서 청와대 앞으로 장소를 옮겨 무기한 단식투쟁 진행.
2006년 6월 9일
평택관련 구속자 전원 옥중단식농성 돌입
2006년 6월 16일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상경하여 청와대 앞까지 삼보일배로 평화행진을 하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중단됨.
2006년 6월 18일
강제집행에 항의하는 3차 범국민대회.
160개 중대 1만6천여명의 경찰이 대추리 도두리 봉쇄.
2006년 6월 20일
수원지법 평택지원, 대추리 김지태 이장과 평택 대책위 강상원 집행위원장에 대한 구속적부심에 기각판정. 이에 대해 민변과 녹색연합, 참여연대, 민언련 등 시민사회단체는 연대성명서를 발표하고 법원의 판결을 규탄.
2006년 6월 21일
문정현 신부, 오랜 단식으로 건강 악화되어 21일간의 단식을 마무리하고 마을로 복귀.
2006년 6월 22일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소속 법학과 교수 59인, ‘대한민국 군대가 행한 위헌적 반인권적 평택 대추리 토지 강제접수에 항의하는 법률가 선언‘ 발표
2006년 7월 6일
청와대 앞에서 평택 대추리까지 285리 평화대행진 ‘평화야 걷자’ 시작. 285만평의 땅을 되찾기 위한 285리 걷기 행진에 571명이 참여.
2006년 7월 8일
285리 평화대행진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던 행진단, 원정3거리에서 각목으로 무장한 상인들에게 폭행당함. 이를 수수방관하던 경찰은 항의하는 행진단 50여명을 연행.
2006년 7월 19일 ~ 22일
전북지역 평화단체, 군산미군기지에서 평택 대추리까지 자전거 평화행진.
2006년 7월 28일
평택시의회, 101회 임시회의에서 대추리에 주둔하는 군경 위로금 2억7천만원 의결.
2006년 8월 19일
김지태 이장 석방을 촉구하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탄원서 법원에 제출
2006년 8월 22일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 면담요구 기자회견
2006년 8월 25일
재미청년협의회, 미주동포 전국협회, 일본 피폭2세 모임, 오키나와 시민행동 등 해외 단체 항의성명 발표.
2006년 9월 1일
촛불집회 2주년
2006년 9월 12일
마을파괴가 임박한 가운데, 민교협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동성애자인권연대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줄이어 항의성명을 발표
2006년 9월 13일
국방부, 빈집철거를 위해 포클래인과 철거용역깡패들을 앞세워 마을 진입. 무리한 집행으로 주민이 살고 있는 집마저 파괴함.
2006년 9월 15일
마을파괴에 항의하는 서울시민 1천여명이 국방부 앞에서 항의시위
2006년 9월 24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와 구속자 석방을 촉구하는 평화대행진 개최
2006년 10월 13일 ~ 11월 1일
도두리 출신 가수 정태춘과 문예인들, 종로 보신각 앞에서 ‘2006 들이운다’ 거리 콘서트 30일간 진행
2006년 11월 3일
수원지법 평택지원 성지용 부장판사, 대추리 김지태 이장에게 징역 2년의 실형 선고
2006년 11월 8일
국방부의 추가 철조망 작업으로 대추리 아이들 등굣길 막힘. 28km의 철조망 추가됨.
2006년 11월 17일
국가인권위원회, “경찰의 대추리 도두리 지역 무차별 불심검문 및 외지인 출입금지 조치는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며 경찰에 시정 권고조치
2006년 11월 19일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은 뒤 반전평화운동에 나선 ‘반전 엄마’ 신디 시헨, 평택 미군 확장이전 반대와 이라크 파병 한국군 철수를 요구하기 위해 방한. 20일에 대추리 방문.
2006년 11월 30일
무너진 대추분교 운동장에서 ‘잊지마, 기억해! 대추리운동회’.
엠네스티인터네셔널(국제사면위원회), 대추리 김지태 이장을 ‘양심수’로 지정.
2006년 12월 8일
프레스센터에서 ‘김지태 위원장 석방과 평택미군기지확장 전면 재협상, 반전평화를 촉구하는 각계 대표자 218인 선언’ 발표
2006년 12월 13일
도두 1리 김치배(62) 노인, 실종 20일만에 사체로 발견. 베트남 참전 고엽제 후유증을 앓던 고인은 경찰과 군인들의 마을 난입에 공포감을 가져왔으며, 이들을 피해 다니려다 군인들이 파 놓은 물웅덩이와 철조망에 갇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국방부, 평택미군기지확장 사업 4, 5년 연기 가능성을 언급.
2006년 12월 14일
민주언론시민연합, ‘황새울방송국’에 제8회 민주시민언론상 심사위원특별상 수여.
2006년 12월 15일
수원지법 평택지원, 대추리 건 구속자 선고 공판.
김지태 이장 실형 2년, 정만군 홍진성 김문영 실형 1년 6월, 노수희 전국연합 공동의장 등 3명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 선고.
2006년 12월 22일
서울지법에서 김지태 이장에 대한 2심 첫 공판
<한겨레21> 640호, 올해의 인물로 대추리 사람들을 선정하고, 표지기사 게재.
<오마이뉴스>, 올해의 인물로 대추리 사람들을 선정하고, 기획기사 게재.
2006년 12월 28일
안양교도소 앞에서 ‘김지태 위원장 석방을 위한 4개 종단 연합 기도회’ 열림.
2006년 12월 26일
대추리 농협창고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성탄 미사와 문정현 신부 사제서품 40주년 기념행사 열림
2006년 12월 28일
대추리 김지태 이장, 안양교도소에서 보석으로 석방
2007년 1월
‘들사람들’, 민예총이 수여하는 ‘올해의 민족예술상’ 수상.
첫댓글 노순택씨 이 사진 꼭 갖고 싶다. 태어나서 사진을 별로 찍어본 적이 없어. 그래서 늘 책을 낼 때, 술취한 상태로 후닥닥 디카로 찍어서 싣고는 했지. 그런데 이 사진을 보니까, 글 쓰고 싶다. 글 써서 책으로 낼 때 이 사진 쓰고 싶다. 참 잘생기고 멋져 보인다. 이걸 어떻게 받지? 내 개인메일은 hi3097한메일인데....
네, 선생님.....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예쁘게 프린트도 한 장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진파일은 쓸만한 용량으로 곧 보내드리도록 하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투쟁일지에 추가 할 내용이 없는지 검토도 좀 해주세요.
노을 아빠 정말 대단하시네요. 노순택씨 덕분에 대추리에서 있었던 일이 잘 정리가 되었네요. 부탁이 있는데요 기왕이면 평화의 텐트촌 이야기도 실어주시면 어떠실지요.
이 투쟁일지는 이 싸움을 최종 정리하는 일지가 아닙니다. 계속 추가해 나가야 할 일지지요. 대추리 도두리 어르신들이, 그리고 그 마을을 지키기 위해 손을 걷어붙이고 주민들과 함께한 많은 평화일꾼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투쟁과정에 대한 기록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평화의 텐트촌이 어떤 제안을 통해 정확하게 언제부터 어느 정도의 규모로 진행됐었죠? 참가했던 단체나 개인 등에 대한 정보를 좀 나누어 주십시오.
정 선생님, 혹시 지난번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에 낭독하셨던 편지를 제가 좀 받을 수 없을까요? 이번 책에 그 편지를 싣고 싶어 허락을 구합니다.
<카페 게시판> 1401번에 있군요.
아,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보신각 거리예술제 10월 13일 부터 11월 11일까지 입니다. 그리고 지난 봄 현장 참여예술제 2006 들이운다 "배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월 14일 부터 3개월 동안 진행했다고 고쳐주시면 감사...음 그리구 2003년 12월 황새울 대보름 공연도 있었는데 날짜와 타이틀은 한수님께서 알려주시길...노들나루님 수고하세요^^ 인휘형 사진 죽이네요^^헤헤
2006년 2월 14일은 화요일입니다... ㅎㅎ
2003년과 2004년의 '들이 운다' 행사는 제가 잘 모르고요. 그것까지 포함하자면 '황새우울' 카페의 전신 사이트 격인 '숨'에서부터 이야기를 진행해야 할 듯합니다... 나머지에 대해서 그냥 기억나는대로 말씀드리자면... 2006년의 '들이 운다' 행사는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뉩니다... 상반기는 3개월 동안 진행된 대추리 현장예술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고요... 정확한 기간은 2월 11일 토요일부터 4월 29일 토요일까지 12주로 계산하시면 되고요... 그 중에서 매주 토요일을 '황새울의 날'로 정하여, 여러가지 행사들을 집중하였습니다... 이 때의 자세한 내용들은 '빼앗긴 들에도...' 메뉴 그룹의 여러 게시판들에 올려져있습니다..
상반기 행사의 기자회견은 1월 24일 화요일, 인사동 민예총 문화아카데미 대강당에서 있었고요... 기금마련 일일주점은 2월 3일 금요일, 한양호프에서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서... 하반기는 보신각 앞에서 펼쳐진 30일간의 거리예술제 '평화를 원한다면 대추리를 지켜라!' 이고요... 정확한 기간은 10월 13일 금요일부터 11월 11일 토요일까지 30일로 계산하시면 됩니다... (회차로 계산하기엔, 우천관계로 쉬었던 이틀이 빠져서리...) 이 때의 자세한 내용들은 '대추리를 지켜라!' 메뉴 그룹의 게시판들에 올려져있습니다... 하반기 행사의 기자회견은 10월 12일 목요일, 보신각 앞에서 있었고요... 2006년은 이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시간 순으로... 2004년 7월 23일 '52평' 오타가 있는데, 이런 것들은 일일이 지적하지 않아도 되는거죠...?? ^^;; 2004년 5월 29일 토요일, 평택 공설운동장에서 진행된 행사의 정식 명칭은 '5.29. 반전평화축제'로 기억합니다... ('문화'가 빠지고요...) 2005년 8월 9일 화요일부터 10월 25일 화요일까지 진행되었던 교보문고 앞 거리공연의 정식 명칭은 '평화, 그 먼 길 간다' 입니다... ('을'이 빠지고요...) 2005년 7월 10일 일요일의 집회는 '제1차 평화대행진'으로 뒤늦게 명명되고 있고요... 2005년 12월 11일 일요일의 '제2차 평화대행진'은, 대추분교가 아니라 평택 시내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평택역 앞에서 모인 뒤에, 시가행진을 하였고, 평택시청 앞에서 정리집회를 가졌습니다... (7.10. 여파로 꽤나 언론에서 시끄러웠는데, 별다른 충돌없이 끝났었죠...) 2006년 1월 24일, 비닐하우스 콘서트는 이 날이 아니라, 2월 11일부터 시작되었겠죠...?? ^^;; 이 날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2006년 2월 3일, '들사람들'의 정식 명칭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와 대추리 도두2리 주민 주거권 옹호를 위한 문예인 공동 행동' 입니다... 2006년 5월 8일, 광화문에서 대대적인 촛불집회가 있었던 것은 이 날이 아니고, 5월 7일 일요일입니다... 2006년 6월 7일 수요일, 이 날의 문화제는 청계광장을 중심으로 광화문 일대에서 펼쳐졌고요..
정식 명칭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와 한미 FTA 반대 문화한마당 - 평택, 들이 운다' 입니다... 2000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하였고요... 이 때의 자세한 내용들은 '평택문예대책회의' 게시판에 올려져있습니다... 워낙 큰 행사라서 프로그램도 다양했습니다. (모든 문예 관련 기사들은 '문예 기사 스크랩' 게시판에 있습니다...) 2006년 9월 24일 일요일, 이 날의 집회가 '제4차 평화대행진' 이고요... 2006년 10월 13일, 들사람들 주최의 보신각 거리예술제는 위의 댓글 참고하시길... ^^;; 2006년 11월 30일, 마을운동회는 이 날이 아니라, 11월 26일 일요일에 열렸고요... 명칭 또한 '잊지 마! 기억해! - 대추 초등학교 운동회'가 맞습니다.
2006년 12월 1일 금요일, 인사동 선녀와 나뭇꾼에서 일일주점이 있었습니다... 명칭은 '2006 문예투쟁 기금마련을 위한 문화예술인 송년연대의 밤 - 이 험한 세상 술 묵자' 입니다... 2006년 12월 9일 토요일, 세종대 대양홀에서 민가협 주최의 '열여덟번째 인권콘서트'가 펼쳐졌고요... 이 행사에서 '양심수' 김지태 이장님과 대추리 관련 이야기가 심도있게 다루어졌습니다... (일단은 여기까지 마무리짓고, 생각나는대로 또 올리겠습니다... 노들나루 님, 그리고 우리 카페의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빛듦장이 좋은 한해 맞이하길....
네... 감사합니다... ^^;; 먼길먼산 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올 해 내내~ 건강하세요... ^^
빛듦장이 님, 감사합다다. 오자까지 잡아주셔더 더욱 감사해요. 혹시 더 빠진 게 있으면 언제라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인휘 선생님, 전자우편으로 사진 발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