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최장순
소란스럽다. 붕붕거리는 유혹, 어느새 손은 열고, 초단위로 대화가 달린다. 사진이 속속 뜬다. 좋아요, 멋져요, 아니 이런, 내가 왜 이러죠? 시끄럽다. 일정과 사건과 장면이 고스란히 뜬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시시콜콜한 단체카톡방.
참을성이 없다. 어디든 재빨리, 쉽게 날아가는 영상들.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전송되는 사진들은 대기권 어딘가에 하나의 층을 이룰 것이다. 맘에 들면 다행이지만, 감추고 싶은 것이 드러났을 때 당사자는 불쾌하다. '난 당신에게 끌렸거든', 단 한 사람을 클로즈업한 사진은 자신이 행위의 주체였음에도 '끌리게' 했다는 객체를 핑계 삼아 접근한다. 오래지 않아 고지서처럼 다시 날아든다.
드러내고 싶지 않다. 주름이나 잡티 같은 것들. 할리우드의 연륜 있는 여배우들은 스타킹을 씌운 카메라렌즈나 포그렌즈를 좋아한다. 굳이 보이고 싶지 않은 심리를 배려한 것이다.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표정은 굳어버린다. 배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스러운 표정을 잡아내고 싶다면, 카메라를 뒤로 멀리 물린 채 망원렌즈로 촬영할 수밖에 없다. 따가운 초점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한 배우는 자연스럽게 연기를 한다. 이럴 때, 영화감독과 배우와의 실제 거리는 멀어도 심리적인 거리는 안정권 안에 있게 된다.
언젠가 확대경으로 들여다 본 손바닥은 미처 눈여겨보지 못한 것까지 보여주었다. 굵직한 몇 개의 선을 잡고 있는 빗금들은 삶의 궤적이었다. 멈추거나 돌아가거나 곧장 가거나, 설움이자 욕망이자 갈등이었다. 희망과 절망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아스라한 순간들이 꿈틀거렸다. 기억조차 희미한 길들을 들여다보면서 내 몸에 수많은 선이 얽혔다 풀어짐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았다. 꼼짝 마, 넌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 선명하게 보여둔 엄포다. 보는 것이 힘이라는 듯 검고 둥근 테두리에 싸인 탐심이 나를 클로즈업했다.
육안이거나 안경 확대경 같은 겉눈이거나 심상으로 보는 속눈이거나. 같은 대상이라도 관점에 따라 안목은 달라진다. 사실과 진실조차도 어딘가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에 따라 결과는 학연히 다르다. 줌인이나 줌아웃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눈이다. 더 자세히 보려면 몸을 움직여 그 대상 가까이 가야한다. 즐거울 때 동공이 확장되고 불쾌하거나 두려울 때 작아지는 눈. 하지만 사물 가까이 갔다고 해서 모든 게 확연해지는 것은 아니다.
작은 창으로 내다보던 산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던 유년. 산만 넘으면 될 것 같아 동경한 너머는, 또 다른 산이 첩첩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육안으로 본 거리를 전제로 성립한 시각의 한계였다. 배척培尺의 척도는 확대경만이 가진 유일한 기능이다. 시력을 배가시킨 진보는 우주까지도 탐색한다. 상상만으로 떠올리던 블랙홀도 멀지 않아 관측할 수 있다. 전 세계에 배치된 12개의 전파망원경을 합친 '제3의 눈'으로, 달 표면의 200원짜리 동전도 볼 수 있는 시대가 곧 열린다고 한다.
생물학자 조지 해스컬은 숲에서 우주를 보았다. 지의류로부터 민달팽이에 이르기까지 숲에 초점을 맞추고 원대한 만다라의 세계를 일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필수로 지녔던 현미경은 추리소설의 주인공 셜록홈즈에게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었다. 누군가의 외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던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
확대시키는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다.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그것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상과 가깝거나 멀게, 친밀하거나 두렵게 한다. 의심의 잣대로 들여다보는 확대경은 상대를 피곤하게 하고 상처를 남긴다. 대충 넘길 일도 깨알같이 알려고 하는 집착을 섬세한 배려로 포장하기도 한다. 속속들이 알면 매력도 신비도 사라진다. 먼 산이 흐릿한 것은 비밀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설레지만, 막상 가보면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하듯 때로는 그렇거니 하고 넘겨버리는 것도 지혜다.
확대경은 권력이다. '난 네가 한 일을 알고 있어' 약점을 잡아 위협한다. 받은 상처는 확대하고, 준 상처는 축소한다. 보편성을 넘은 '내로남불', 나만의 척도로 남을 폄훼하며 상처 주는 일은 자기중심적 오류에 빠지는 일이다.
클로즈업은 무기로 돌변한다. 태양빛을 모은 돋보기에 걸려든 개미처럼, 부릅뜬 렌즈에 갇히면 빠져나올 수 없다. 흑백으로 규정하여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만들어 언론에 보도하면, 작은 흠집도 신문에서 봤어, 텔레비전에서 봤어, 꼼짝없는 기정사실로 매도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에게 의사는, 기억을 살리려면 시력이 손상 될지도 모른다면 기억과 시력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고심 끝에 시력을 선택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지 말라는 의미를 새겨본다.
누구나 마음속 확대경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다. 좋은 것을 보는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삼으면 더 밝은 내일이 클로즈업되지 않을까. 그것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겉모습만 되돌려주는 거울과 무엇이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