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필자 ‘대런 아세모글루’는 튀르키예와 미국 이중 국적인으로 그의 부모는 아르메니아 인이다. 그의 종교는 미노출이고 그는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MIT대학의 교수이다. 1967년 이스탄불 출생으로 현재만 59세다. 그는 “어떤 나라는 부유해지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 상태에 머무는가?”를 정치-경제 제의의 차이로 설명한 학자다. 저서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권력과 진보> 등이 있다. 그는 ‘중도좌파에 가까운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자!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노예제는 자유로운 발언을 용인하지 못합니다. 자유로운 발언을 5년만 허용해도 노예 경매시장이 사라지고 남부의 모든 사슬이 끊어질 것입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
미국에서는 대개 자유주의적(리버럴)이라고 하면, 좌파 태도를 보이지만 유럽에서는 자유시장 지향의 우파 태도를 보인다. 또한 자유주의는 정치 ‘철학’도 지칭하지만, 그 철학에 기초해 세워진 ‘제도’를 지칭하기도 하고 그 철학의 이상에서 추동된 정치적 ‘실천’을 지칭하기도 한다. 지난 30년 사이에 모든 연령대에서 민주정이 가장 좋은 정부 형태라고 선뜻 인정하려 하지 않는 추세가 강해졌고, 미국이 두드러진다. 이 변화는 미국의 18~35세에서 특히 확연하다. 미국인들은 민주주의의 제도와 기관에 충격적일 정도로 낮은 신뢰를 보인다. 권위주의 국가 지도자도 자기 정권에 민주적 망토를 둘러야 했고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했더라도 단지 늑대를 사냥하기 위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말해야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다음 세 가지 약속을 바탕으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공유와 하수구와 목소리다.
공유; 민주정은 번영과 그 번영의 공유를 약속했다.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요구하면서 “보편선거권은 나이프와 포크의 문제이고, 빵과 치즈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민주정으로 전환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면 번영과 번영의 공유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치솟았다. 노동자들은 민주정이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합을 달성하기에 효과적인 경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수구; 민주정이 공공서비스를 약속한다는 점은 “우리 조국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생각해보서. 민주적 제도와 제대로 된 하수구.”다, 많은 비민주적 정부가 보건, 교육, 의료, 도로, 하수구의 제공을 거의 완전히 외면해 왔기 때문에, 공공서비스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19세기 영국의 기대수명은 30세 아래로 떨어졌다. 길에는 오수가 흘러넘치고, 악취만으로 일상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목소리; 공공서비스가 향상되는 데는 민주정의 전환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민주정은 제약되지 않은 목소리와 자치도 약속했다. 사람들은 견해를 표현할 수 있었고, 대표자를 소환할 수 있었고, 자신의 공동체와 삶에 통치 과정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민주정이 완벽했던 적은 한 번도 없고, “간간이 시도되었던 다른 모든 정부 형태를 제외하면” 민주정이 “최악의 정부 형태”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은 우리에게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번영과 번영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국은 지난 30년 동안 빠른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지역별, 학력별, 인종별, 성별 불평등은 늘 있었고 경영진과 일반 노동자 사이, 사회 특권층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 불평등을 존재했지만, 모든 학력 집단이 모든 경제 성장분 중 자신의 몫을 가져갔고 노동자도 경영자만큼 이득을 얻었으며 저학력 집단은 대졸자 집단보다 오히려 임금 상승이 더 빨랐다. 1970년대 면 미-영국 모든 가정이 실내 배관 설비를 갖춰 수세식 화장실과 주방과 보일러 시설을 갖추고, 대부분 동네에서 대중교통으로 도심까지 갈 수 있게 된다. 시골에도 도시에 접근할 고속도로가 생기고 물화를 운반할 교통수단이 생기면서 경제적 기회가 확대되었다.
오늘날 미국인의 85%는 선출직 공직자들이 자기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에 관심이 없다고 느낀다. 선출직 공직자인 의원들이 의회 투표에서, 유권자 하위 3분의 2의 의견을 무시하고 가장 부유한 유권자층의 선호에 맞추어 표를 행사하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민주주의는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와 맞설 때 가장 찬란하게 빛났다. 이 체제들의 재앙적인 범죄는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사람들의 삶과 자유에 단순히 추상적인 위협이 아니라 실질적인 위험임을 보여주었다.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과 높은 엘리트층의 관계에서 어떻게 적절한 균형을 잡을지는 처음부터 자유주의 철학과 실천에 주된 고민거리였다. 자유주의에 내재한 긴장은 군주, 권위주의적 지도자, 갑부 등 선출되지 않은 사람들의 권력을 제약해야 한다는 의제에 비하면 사소했지만, 여전히 까다로운 문제였다. 가장 기장 요인은 “불관용”과 “무지”였다. 한편, 대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불관용을 외친다는 것이 문제였다. 모두가 표현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가져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자유주의자들은 교육받은 자들만이 그런 자유를 인식하고 사회적 이득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므로 공적 사안에 대한 의사 결정에서 무지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노동시장에서 수요 증가는 임금이 높아진다는 의미였다. 자유민주주의는 과학기술 지식도 포함해서 지식을 일구고 공유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계속 달라지는 사회적-물질적 조건에 맞도록 규범과 제도를 개발해 가는 데 필요한 실용적 지식의 축적도 촉진했으며, 이것이 민주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대체로, 빠른 사회경제적 변화가 안정성 및 적용성과 함께 진전되었다. 산업혁명으로 도로와 인프라 건설이 기술적으로도 가능해졌고, 비용적으로도 감당해졌다. 성장은 세수를 확보했다. 정부는 인프라, 교육, 보건에 실제로 투자할 수 있었다. 많은 비민주적 정부가 보수주의자가 지배하는 일부 민주적 정부도 그때까지 복지 제공과 노동 계층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었기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인지적 기술을 가진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높았지만, 대체로 저학력 노동자들이 공급하는 육체노동의 숙련 기술은 자동화로 수요가 줄었다. 대졸자와 대학원 졸업자, 프로그래밍이나 법률, 경영 등 전문적인 인지적 기술을 가진 노동자는 소득이 늘었지만, 블루칼라 노동자와 육체노동자는 기회와 임금이 축소되었다.
탈산업 사회는 자유주의를 훼손했다. 자동화는 공동 번영과 연대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잠식했다. 규제는 그 규제를 보호해야 할 대상에서 멀어졌다. 작위와 부작위 죄 때문에 자유주의가 수명을 다해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는 포스트 자유주의 철학에서 지침을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가 가슴 뛰는 목적과 이상을 향해 우리가 한데 모이게 하기에 적합한 틀이 아니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가 이 책에서 필자가 개진하려고 하는 주장이다. 자유주의는 되살리고 재구성해 볼 가치가 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형제들보다 높이 올라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족 안에서 경건하게 살면서 다른 이들과 같은 거리를 걷는다. 또한 그는 꾸밈없이 자유롭게, 또 익숙하고 친절하게 말할 것이다.” 공화주의 사상가 –존 밀턴
세상이 달라진다는 점 때문에, 사회적 지식은 일구기가 어렵다. 소셜미디어 문제를 생각해 보자. 1990년대 말의 사람들은 완벽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낼 새로운 현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소셜미디어가 사용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다음 질문에 여전히 답을 모른다.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규율해야 할 것인가? 청소년이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도록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소셜미디어 사용이 정신건강 문제와 점점 더 많이 연관되는 현상을 우려해야 하는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해 아이들이 소셜미디어 없는 환경에서 학습하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개인 수준과 집단 수준 모두에서, 소셜미디어에 대한 방대한 경험과 폭넓은 실험을 통해 나와야 한다. 한 방에 해결되는 만병통치약이 있을 리 만무하며, 해답은 어찌어찌 모종의 불완전한 적응에 집합적으로 도달해 가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 사회의 큰 특징은 지식의 공유다, 지식을 공유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더 나은 실행에서 배우지 않는다면, 상황에 적응하고 여건을 개선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근본적으로 제약될 것이다. 인간의 제도는 법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인간의 제도는 공유된 이해에 의존하는데, 그 이해는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 학습을 통해 지어진다. “공동의 지식”은 단순한 사실관계 정보보다, 기른 것, 가령 무엇이 받아들여질 수 있고 무엇이 기대되며 무엇을 고려 범위에 넣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집합적인 감각까지 포함한다.
사람들은 배가 멀리 가면 선체가 돛대보다 먼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지평선이 곡선임을 관찰한다. 또 월식 때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를 보면서, 지구가 평평할 수 없음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행성의 운동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도 사실로 널리 확립되었다. 이 모두 지배적이던 이론은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면서 도전받았고, 하늘과 우주를 관찰하는 더 나은 도구들이 이 도전을 뒷받침했다. ‘토마스 쿤’은 과학의 진보가 지식의 점진적인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혁명”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증거가 쌓여서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균열을 내고 새 세대 과학자들이 기존 지식에서 이탈하면서,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도전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 지식은 반대자들을 깨우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차차로 죽음으로써 승리한다.”-‘막스 플랑크‘ 이 말은 “과학의 진보는 장례식이 한 번 있을 때마다 진전된다.”라는 것이다. 느릴지언정, 아무튼 과학은 진전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6.10.13.
자유민주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대런 아세모글루 지음
김승진 옮김
생각의 힘 간행
첫댓글
경제적 차이로 보는
국력의 차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