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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랭보
여름의 푸르른 저녁에, 보리가 쿡쿡 찔러대는
오솔길 걸어가며 잔풀을 내리 밟으면,
꿈꾸던 나도 발에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내 맨머리를 씻겨 주리니
나는 말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으리라
하지만 무한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 솟아오르리라
그리하여 나는 가리라, 멀리 아주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 속으로 ,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
방콕
감자꽃잎 질 무렵 김기연
자주감자 꽃잎 지는 초여름이었습니다
아버지 동네 부역 나가시고,
어머닌 오 일만에 드는 이십 리 읍내의
의성장 가시고
오빠들마저 학교에 간 정오는
덕지덕지 고요가 쌓였습니다
아, 풍요해진 고요는 사랍짝을 밀치고 나와
휑한 동네의 구석구석을 마저 채웠습니다
앞산자락 참나무 사이 뻐꾹새 흐드러지게
고요를 읽고 있을 때
나는 가슴 한 자락 살포시 펴고
묘사 끝, 음복떡 보자기에 챙겨 담듯이
그 소리 담았습니다
이내 소리들은 졸음이 일고
졸음 든 소리를 베고 누워 따라 잠들었습니다
직지사
강촌 두보
맑은 강의 한 굽이가 마을을 안고 흐르니
긴 여름 강촌에 일마다 한가롭다
절로 가며 절로 오는 것은 집 위의 제비요
서로 친하며 서로 가까운 것은 물 가운데의 갈매기로다
늙은 아내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려 만들고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고기 낚을 낚시 바늘을 만든다
많은 병에 얻고자 하는 것은 오직 약물藥物이니
미천한 이 몸이 이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분류두공부시 언해>에서
인도 타지마할
그대를 여름날에 견주리까 세익스피어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교해 보련다
너 그보다 더 예쁘고 더 화창하다
모진 바람 5월의 꽃봉오리 떨구고
여름철은 너무나 짧은 것을 어쩌랴
때로는 태양빛이 너무나도 뜨겁고
가끔은 금빛 얼굴에 가려진다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를 고움은 상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도 가시고 말지만
그대 지닌 영원한 여름은 바래지 않고
그대 지닌 아름다움은 가시지 않는다
죽음도 그대 앞에 굴복하고 말지니
불멸의 노래 속에 때와 함께 살리라
인간이 숨 쉬고 눈으로 보는 한
이 노래 살아서 그대에게 생명 주리
Willim Shakespeare(1564-1616) 영국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경남 함안읍 이수정(함안 조씨 정자)
그 맘 때에는 문태준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
무른 나는 금강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 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 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제 21회 소월시문학 대상 수상작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 성복
시집<그 여름의 끝> 문학과 지성사 1990년
샤갈 ㅡ 창문
그해 여름 허형만
햇살 조금 빗물 조금
적당히 데불고
내 고향 순천을 찾아가던
그해 여름
죽어 시집간 누이의 치맛자락만
섬진강 푸른 물에 저녁놀로 떠서
서럽게 서럽게 흐르고 있었다
남녘의 여름 헤세
마로니에 꽃, 저녁의 숲
잎 속에는 반달, 숲 속에는 우리 조용한 술꾼들 ㅡ
밤의 미풍 속에서 우리의 술잔이 울린다
어두운 하늘로 우리의 술이 이글이글 탄다
우리 덧없는 꽃들이 여름 내내 작열한다
나를 마셔라, 사랑아! 아리따운 이여, 그대를 마시게 하라!
우리의 뜨거운 여름 횃불들로 우리는
연인들에게 여름밤의 노래를 부르라 신호한다
오 올빼미 울음 , 오 어두운 밤의 심장
환한 협죽도 속 밤나방 너
우리는 작열한다 타들어 간다 형제여 서로의 속으로
신에 바쳐진 축복 받은 제물이다
울려라 삶의 노래여 죽음의 노래여
술잔이 울린다 우리의 시작이 활활 타오른다!
김득신 ㅡ 파적도
늦여름 임동윤
하룻밤, 구두끈 풀고 쉬어가라고
목쉰 대청마루가 흔들흔들 붙잡아댔다
등고선마저 지워진 무늬의 바닥
겹겹의 세월을 껴안고 비바람이 들이쳤다
우우 바람이 거친 팔을 뻗어오고
볏짚으로 엮은 흙벽이 가슴뼈를 드러냈다
떠난 사람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들이 퍼 올리던 우물물은 잦아들고
뚫린 지붕 위로 낮달이 머물다 떠난 자리
죽창처럼 빗줄기가 내리 꽂히고 잇엇다
다시 우지끈 쏟아지는 천둥과 번개
직립의 나무들이 허리를 꺾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빗줄기 속으로 몸을 섞고 있었다
거미줄과 빈 풍경이 간단없이 찢기고
쑥부쟁이도 익모초도 흙탕물에 몸 묻은 마당
그리움은 발치에 묻어두는 법이라고
장지문 꼭꼭 닫아걸어도 바람은 피리가 되어
빗물 잠긴 화덕을 끼고 밤새 돌았다
사방에서 다가드는 풀, 나무, 꽃, 바위 ...
간당간당 모가지를 빼들고 일제히 울어댔다
빈집이, 화들짝 갈비뼈를 쏟아내고 있었다
늦은 여름 헤세
아직 늦은 여름이 감미로운 온기 가득한
하루하루를 선물하고 있다 둥그런 꽃차례 위
여기저기서 지친 날개짓으로
나비 한 마리 흔들리며 비로드 금빛으로 섬광을 낸다
저녁과 아침들은 축축하게 호흡한다
엷은 안개로부터 그 습기는 아직 미지근하다
갑작스레 빛을 받은 뽕나무에서
노랗고 커다랗게 이파리 하나가 나폴나폴 부드러운 푸름 속으로 떨어진다
도마뱀이 햇빛 쪼이는 돌 위에 쉬고 있다
이파리 그림자 속에 포도가 몸을 숨기고 있다
마법에 걸려 세계는 사로잡힌 듯하다, 잠에,
꿈에 사로잡힌 듯하다, 네게 깨워 달라 한다
그렇게 이따금씩 여러 박자 길이로
음악이 흔들리다가, 황금빛 영원으로 굳는다
마침내 깨어나며 마법의 묶임에서 벗어나
이루어지려는 마음으로, 현재로 되돌아갈 때까지
우리 늙은 사람들은 수확을 하며 도열하여
여름에 검어진 우리의 손을 녹인다
아직은 날이 웃고 있다 아직은 끝이 아니다
아직은 지탱되며 우리의 환심을 사고 있다, '오늘 여기'가
어린 정원사
대치동의 여름 김춘수
내 귀에 들린다 , 아직은
오지 말라는 소리
언젠가 네가 새삼
내 눈에 부용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불도 끄고 쉰 다섯 해를
우리가 이승에서
살과 살로 익히고 또 익힌
그것
새삼 내 눈에 눈과 코를 달고
부용꽃으로 볼그스름 피어날 때까지
하루 해가 너무 길다
모를 뽑아 버리다 정약용
벼 싹이 돋을 땐
옅은 초록에 짙은 노랑
비단과 같이
푸른빛이 드리워
아이를 사랑하듯
아침저녁 돌보고
보석처럼 소중히 여겨
보기만 해도 즐겁다오
머리를 산발한 여인이
논 가운데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면서
하늘 향해 울부짖네
못내 정을 끊고
그 벼 싹을 뽑아 버리니
한여름이언만
찬바람이 서글프네
무성한 우리 모를
내 손으로 뽑아 버리다니
무성한 우리 모를
내 손으로 죽여 버리다니
무성한 우리 모를
잡초처럼 내다 버리다니
무성한 우리 모를
화톳불처럼 태워 버리다니
뽑아 묶어
웅덩이에 두었다가
혹 비라도 내리면
낮은 땅에 심어 볼까
내 자식이 셋인데
젖먹이도 있고 젖 뗀 애도 있네
그중 하나를 죽여서라도
이 어린 모 살린다면야
1810년 다산초당에 거처하던 시절의 시로, 그해 가뭄으로 모를 옮겨 심지 못하여
농부들이 모를 뽑아 버렸는데 통곡 소리가 들판을 메웠다고 한다
보리밭
분통리의 여름 고재종
닷새만에 헛간에서 발견된
월평할매의 썩은 주검에서
수백 수천의 파리떼가 우수수
살촉처럼 날아오르는 처참에 울고
빈대 뛰는 온 방안 뒤지고 뒤져
찾아낸 전화번호 속의 일곱 자녀들
기름때 묻은 머리로 하나 둘 달려와
뒤늦게 뉘우치며 목놓는 아픔에 울고
급기야 상여를 멜 남정네들 모자라
경운기로 울퉁불퉁 북망길 떠난 할매
굴삭기로 파놓은 구렁에 묻히는
그 험한 종말에 또 울었지만
어디 그뿐이랴 이 사양의 마을
그 어디건 헐린 담장, 텅 빈 마당에
개망초 눈물꽃은 흐드러지고
뻐꾹새 피울음은 종일 쏟아지고
이제 불과 예닐곱집 연기나는 곳
퀭한 눈만 남은 또다른 월평네들의
간단없는 해소기침만 너무 질겨서
사방 산천 진초록도 목숨껏 노엽고
비가 오는 여름밤은 박성룡
비가 오는 여름밤은
일찍이 소등하고
창가에나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이 멋이네
한밤내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에
흐려진 가슴을 씻기우고 누워 있으면
꽃밭에 쭈그린 청개구리보다도 오히려
내 마음이 화려하이
아침마다 서울을 가자면
저 먼 三井里에 이르는 길,
혹은 더 먼 마을의 들길까지도 수북이 수북이 피어 있던
그 허어연 들국화들도 지금쯤은
비를 맞겠지
지금의 내 눈, 내 귀만큼이나 어둠에 예민해져
그 허이연 목덜미로 비를 맞겠지
비가 오는 한여름밤은
일찍이 어린 것들을 달래어 잠 재우고
창가에나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이 멋이네
한밤내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에
흐려진 가슴을 씻기우고 누워 있으면
꽃밭에 도사린 꽃뱀보다도 오해려
내 몸매는 화려하이
묘족마을
비개인 여름 아침 김종삼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살구나무 조병화
녹우당
수국을 보며 이해인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푸른
한 다발의 희망이 피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무더기로 쏟아지네
숲향기 김영랑
숲 향기 숲길을 가로막었오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 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새워 버렸오
이집트 나일강
쓸쓸한 여름 나태주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 울음 소리 땅 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 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가회동
여름 나기철(1953 - )
감나무 잎이 창을 덮어
건너 아파트 삼층 여자의 창이
안 보인다
감나무는 내 눈을
우리 집 안방으로 돌린다
여름 유홍준
노모가 흘린 밥
한덩어리, 노모가 흘린 밥풀떼기 한 덩어리에
검은 파리 떼가 꼬여 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할 일도 없는
앉은뱅이 노모가
초록색 파리채를 들고 탁탁
눈알 디룽거리는 파리를 때려잡고 있다
배때기째로 짓뭉개고 있다 여기저기 검버섯이 핀
노모의 얼굴에도 검은 파리떼가
잔뜩, 아랫배가 볼록한
저 사진 속 아프리카 소년도 마찬가지
파리에겐 그저 한 덩어리 밥
노모가 흘린 한 덩어리
밥과 같다 눈곱 잔뜩 낀 눈가에
파리 떼가 달라붙어도 쫓을 줄을 모른다
제 뺨을 제가 때릴 줄조차 모른다
햇살 따가운 슬레이트 지붕이 무너진다
낡고 가벼운 그림자가 마당 가득 무너진다
늦은 오후다 다 늙은 노모가
걸레 한 쪽을 까뒤집어
눈가를 닦는다 걸레로 입가를 닦는다
소치 운림산방
여름 이시영
은어가 익는 철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수박이 익는 철이었다
통통하게 알을 밴 섬진강 은어들이
더운 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찬물을 찾아 상류로 상류로 은빛 등을 파닥이며 거슬러오를 때였다
그러면 거기 간전면 동방천 아이들이나
마산면 냉천리 아이들은
메기 입을 한 채 바께쓰를 들고
여울에 걸터앉아 한나절이면 수백마리 알 밴 은어들을
생으로 훑어가곤 하였으니,
그런 밤이면 더운 우리 온 몸에서도
마구 수박내가 나고
우리도 하늘의 어딘가를 향해
은하수처럼 끝없이 하옇게 거슬러오르는 꿈을 꾸었다
시집<은빛 호각> 창비. 2003년
여름꽃들 문성해
사는 일이 강퍅하여
우리도 가끔씩 살짝 돌아버릴 때가 있지만
그래서 머리솔 속에 조금 맺친 꽃봉오리가
새벽달도 뜨기 전에 아주 시들어버리기도 하지만
부용화나 능소화나 목백일홍 같은 것들은
속내 같은 거 우회로 같은 거 은유 같은 거 빌리지 않고
정면으로 핀다
그래 나 미쳤다고 솔직하게 핀다
한바탕 눈이 뒤집어진 게지
심장이 발광하여 피가 역류한 거지
거참, 풍성하다 싶어 만질라치면
꽂은 것들을 몽땅 뽑아버리고 내뺄 것같은
예측 불허의
파문같은
폭염같은
깔깔거림이
작년의 광증이 재발하였다고
파랗게 머리에 용접 불꽃이 인다고
불쑥불쑥 병동을 뛰쳐나온 목젓 속에
소복하게 나방의 분가루가 쌓이는 7월이다
여름 낙조 송수권
왜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들어 산다
왜 채석강변에 사느냐 묻지 말아라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날으는 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잎새들만큼이야
자욱하겠느냐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에
왜 나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여름날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2006년
서편제
여름날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 토마스 무어
여름날 마지막 남은 장미
홀로 피어있네
사랑하는 동료들 모두
곁에서 사라져버렸는데
근처엔 어떤 종류의 ?逾?
어떤 장미봉오리도 없는데
뒤는 붉은 색을 반사시키며
한숨을 쉬고 있네
난 곧 따르리라
친구들이 썩어가고
사랑의 빛나는 품에서
보석들이 떨어져버릴때
진실한 가슴들이 시들어 누웠고
좋은 친구들이 흘러가 버렸는데
아! 그 누가 이 쓸쓸한 세상에
홀로 살고 싶었는가?
Tomas Moore(1779-1852)
정원으로부터의 싱그러움
여름밤 헤세
나무들이 폭우로 뚝뚝 물방울 진다
젖은 잎 속에서 달빛이 서늘하게, 친숙하게 반짝인다
골짜기에서부터 올라와 보이지 않는 강이
어둡게 쉼 없는 소리로 울린다
이제 농가에서는 개들이 짖기 시작하고 ㅡ
아 여름밤과 절반 구름에 가려진 별들
너희의 창백한 궤도 위에서 마음이
얼마나 내닫는지, 여행의 도취와 먼 곳으로!
7 세기 신라시대 얼굴무늬 수막새
여름밤의 연등 헤세
어두운 정원의 서늘함 속에 따뜻하게
색색깔 현등 줄이 흔들리고 있다
어지러운 이파리 속에서
여리게 은밀한 빛을 보낸다
하나가 환하게 레몬 빛으로 미소 짓는다
빨강 하양으로 오동통하게 웃는다
푸른것 하나는 나뭇가지 속에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달이나 정령처럼
하나가 갑자기 불붙었다
우쭐우쭐 타올라 금방 꺼져 버린다
그 자매들이 가만히 몸 오그려 전율한다
미소 짓는다 죽음을 기다린다
달빛 푸름 포도주 노르스름함 비로드 붉음을
강 ㅡ 모네
여름 아침 김수영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진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우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애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이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여름에는 저녁을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잠들고
마을에서는
지붕이 잠들고
들에는 잔잔한 달빛
들에는
봄의 발자국처럼
잔잔한 풀잎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여름의 달밤 김소월
서늘하고 달 밝은 여름밤이여
구름조차 희미한 여름밤이여
그지없이 거룩한 하늘로서는
젊음의 붉은 이슬 젖어내려라.
행복의 맘이 도는 높은 가지의
아슬아슬 그늘 잎새를
배불러 기어도는 어린 벌레도
아아 모든 물결은 북받았어라
뻗어뻗어 오르는 가시덩굴도
희미하게 흐르는 푸른 달빛이
기름 같은 연기에 멱감을러라
아아 너무 좋아서 잠 못 들어라
우긋한 풀대들은 춤을 추면서
갈잎들은 그윽한 노래 부를 때,
오오 내려 흔드는 달빛 가운데
나타나는 영원을 말로 새겨라
자라는 물벼이삭 벌에서 불고
마을로 운 슷듯이 오는 바람은
눅자추는 향기를 두고 가는데
인가들은 잠들어 고요하여라
하루 종일 일하신 아기 아버지
농부들도 편안히 잠들었어라
영 기슭의 어둑한 그늘 속에선
쇠스랑과 호미뿐 빛이 피어라
이윽고 식새리의 우는 소리는
밤이 들어가면서 더욱 잦을 때
나락밭 가운데의 우물가에는
農女의 그림자가 아직 있어라
여름밤 김춘수
발가락이 가렵다
(무좀일까? 또)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밤이 온다 먼 데서
작디작은 바다가 하나 이리로 다가온다
어딘가
소리 내지 않는 악기가 숨어 있다
숲은 왜 서서 잠을 잘까
새는 어디 가고
바람이 제 혼자 눈을 뜬다
벌써 아침인가 하고
가랑이 사이로 누가 보이지 않는
세상의 뒤쪽을 보려고 한다
여름밤 문인수
저인망의 어둠이 온다
더 많이 군데 군데 별 돋으면서
가뭄 타는 들녘 콩싹 터져오르는 소리 난다
가마솥 가득 푹 삶긴 더위
솥검정 같은 이 더위를 반짝반짝 먹고 있다
보리밥에 짱아찌 씹듯
저 별들이 먹고 있다
한여름밤의 꿈 발해
여름 밤 박형준
저녁이면 늙은 고양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살결이 희어지는 꿈을 꾸는 노파들
자기 무릎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자기 살 속의 별빛에 취해 잠드는
고양이들과 도무지 분간 안 되는
저 교만한 시간들이여
풀씨들이 하나 둘 피어나는
창천蒼天의 구멍마다
그녀들의 웃음소리 스며 있지 않는 곳 없다
노파들은 가끔씩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입을 다물고 자기 무릎에 뉘어논 고양이를 흔ㄷ르어
졸음에 겨운 눈 속에서 어린이 책 같은 시간을 읽는다
여름 밤엔 그녀들의 눈보다
주름살이 더욱 가느스름해진다
자기 몸 속에서 풍겨나는
냄새에 취해
이슬에 가깝게 투명해지는 유령들,
일몰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젖은 태양의 일렁임
방콕 차오프라야 강
여름밤 유금(1741-1788)
저녁 먹자 초승달이 아까워
사립문 닫고 더위에 누웠네
하늘 맑으니 모기가 귓가를 지나고
별 흩어지니 거미가 처마로 내려오네
박꽃은 하옇게 피고
국화잎은 점점 커지네
이웃집 아이 달노래 부르는데
그 가락 어찌 그리 간드러진지
여름밤 정호승
너는 죽어 별이 되고
나는 살아 밤이 되네
한 사람의 눈물을 기다리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통곡하는 밤은 깊어
강물 속에 떨어지는
별빛도 서러워라
새벽길 걸어가다 하늘을 보면
하늘은 때때로 누가 용서하는가
너는 슬픈 소나기
그리운 불빛
죽음의 마을에도 별은 흐른다
여름밤 조원규
1
밤이란
그 밤에 부는 바람.
그 바람결에조차
하지 못한 말들.
2
얼굴이란
그 얼굴이 놓친 무엇.
심연에서 껴안던
기억을 잃고
여름밭 문태준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여름은 끝났다 이면우
대청호 본댐과 보조댐 새 조정지엔 다슬기 무진장이라
그걸 숙주로 하는 반딧불이 함께 무진장
구월호 는개 오시는 밤
대전 동남쪽과 꼬불꼬불 이어진 골짜기 포장도로 따라
캄캄한 길 혼자 걸어 올라가노라면 반딧불이
수십백천만 반딧불이 골짜기 가득 메워
마지막 혼례여행을 준비중일 겁니다 그걸 깨닫기까지
당신은 한참 혼란스러워햐 합니다 세상이
밤이, 삶이 이토록 아름답던가
그걸 처음 본 길 위에서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서당
여름의 끝 헤세
단조롭게, 나직하게 또 탄식하며
온화한 저녁 내내 비가 흐른다
지친 아이처럼 울며
가까운 자정을 마주 보며
여름은 잔치들에 지쳐
그 화환을 시든 두 손으로 들고 있다가
던져 버리고 ㅡ 여름이 꽃 진다 ㅡ
불안하게 몸을 숙이며 숨을 거두려 한다
우리 사랑도 한 개 화환이었다
뜨거운 여름 축제들로 활활 타오르며
이제 그만 마지막 춤판이 깨진다
비가 쏟아지고, 손님들은 피신한다
우리가 시든 호화로움을
또 꺼져 버린 광휘를 부끄러워하기 전에
이 더없이 엄숙한 밤
우리 사랑과 작별을 하자
고흐 ㅡ 아를의 노란 집
여름의 달밤 김소월
여름의 절정 헤세
먼 곳의 푸름이 벌써 맑아지고 있다
승화되고 환해져서
저 감미롭고 마술적인 音이 된다
그 음을 이제 9월이 밀봉한다
무르익은 여름은 밤새
자신을 물들이려 한다, 축제를 위해
모든 것이 완성 가운데서 웃으며
기꺼이 죽어 가려는 축제를 위해
벗어나라 영혼이여 이제 시간에서
벗어나라 너의 근심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비상할 준비를 시키라
열망하던 아침을 향하여
여름 편지 정일근
여름한철 도종환
동백나무 묵은 잎 위에
새 잎이 돋는 동안
아침 창가에서 시를 읽었다
난초잎이 가리키는 서쪽 산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바로 세우지 못한 나랏일에 마음 흐렸다
백작약 뿌리를 다려 먹으며
견디는 여름 한철
작달비 내리다 그친 뒤에도 작달비 ㅡ 장대비
오랜 해작 생활에 찾아온 병은
떠날 줄을 몰랐다
여름밤 깊고 깊어 근심도 깊은데
먼 마을의 등불도 흔들리다 이울고
띠구름 속에 떴다 지는 까마득한 별 하나
초여름 성석제
삼천 세를 살아 비로소 모르네라
풋복숭아 절로 붉어지는 일
초여름 한재렴(1775-1818)
긴 둑에 비 지나자 말쑥이 깨끗한데
아마득히 수양버들 땅을 쓸며 흔들리네
서루에서 밥 다 먹고 등상에 앉았자니
꾀꼬리 오후 울음 기다리고 있는 듯
옥수수밭
초여름 허형만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벤쿠버 하버
초여름 헤세
하늘은 소나기 퍼붓고
뜰에 서서
보리수 한 그루 떨고 있다
벌써 늦었다
한 가닥 번갯불
창백하게 제 모습 비춰 본다
젖은 커다란
두 눈으로 연못에다
흔들리는 줄기 위에
꽃들이 달려
바람에 실려 오는
낫의 날 가는 소리 듣는다
하늘은 소나기 퍼붓고
후욱 무더운 입김 지나간다
내 아가씨는 떨고 ㅡ
"말해봐, 너도 느껴지지?"
초여름의 꿈 황동규
간 겨울 눈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가
생시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꿈
깬다
초여름에 겨울 꿈을 꾸다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진짜 꿈은 다 개꿈이라지만
꿈의 출구에 삶의 입구 표지를 붙일 수는 없다
새벽길 나서니 길섶 홍건히 젖어 있고
먼동 트는 하늘에는 금빛 별 무리
땅에는 은빛 별꽃 무리
별꽃, 석죽과의 막내꽃
별빛 한 줄기 줄기는 별꽃잎의 하트형이라고
초여름 새벽이 알려준다
지금 뛰는 가슴도 하트형이다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삶의 이마에 뜰 때까지
삶의 출구라 꿈의 입구로 열릴 때까지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아니면 또 어떠리
이 세상 어디엔가 꽃이 눈뜨고 있는 길이면
초여름 새벽을 가라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 지성사. 2003년
보리수
초여름의 풍경 김재혁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 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김점선 화백
夏 백석
짝새가 발부리에서 날은 논두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늪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가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한여름 김수영
마흔 나이에 막내 낳은 어머니
몸져 누웠다
젖은 나오지 않고 비 오듯 땀을 쏟으며
온몸이 짓물러 갈때
외당숙 할아버지 술 한병 가져왔다
푸른 솔잎 사이 먹구렁이 한 마리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새까만 눈을 뜬 채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구렁이 어머니 몸을 빌려
뒤란의 우물에 가득 찬 서늘한 기운을
다 들이켜고 그림자 없이 사라졌다
그뒤, 쓴것이 입에 당긴다고
쓴 것만 골라먹고 다시 젖이 돈 어머니
고야
한여름밤의 꿈 이현승
나뭇잎에 베인 바람의 비명
몸이 벌어지면서 나오는 신음들
수도꼭지의 누수처럼 집요하게 잠을 파고드는
불편한 소리들
아, 들끓는 소리와 소리 사이
폭발과 폭발 사이 화산의 잠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우는 사람이 있다
누가 밤하늘에 유리 조각을 계속 뿌려대고 있다
한여름 새벽에 박재삼
이십오 평 게딱지 집 안에서
삼십 몇도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오노레 도미에 ㅡ 세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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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름에 관한 시가 꽤나 소재도 다양하네요,,,, 흠 삼촌한테 이런면도 있었네요,,ㅎ 감사히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