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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사람. 등 )
*** 반영억 신부님 묵상글 10. 15. 060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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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어머니가 부럽다는 여인의 말을 듣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을 정도로
대단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이런 아들을 두면 자기도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주 제주 지구 회원들의 서약 피정을 동반하고 강의도 했는데
다른 어느 곳보다 반응을 잘해 주셔서 저도 열과 성을 다해 강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제가 생각하기에도 강의가 잘 됐고 회원들도 만족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강의가 좋았다고 인사해주시고,
심지어 제가 존경스럽다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그들도 이 여인처럼 저의 강의로 힘을 얻고 행복감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마움을 표현할 때 그저 고맙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저의 어머니가 참 행복하시다고,
그래서 부럽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그러면 더 멋스러울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아들을 잉태하는 것보다 하느님 말씀을 잉태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뜻이지만
이 말씀이 오늘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좋은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겠지만
듣고서 그것을 실천까지 해야 더 행복할 것이라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들었으면
듣기만 하지 않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진정 행복하다고.
말씀을 듣는 것은, 씨앗이 내게 떨어진 것과 같다면
실천하는 것은, 그 씨앗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지요.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도 행복합니다.
하느님 말씀 듣고 걷어차는 이들과 비교하면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만도 행복하다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보다는
말씀대로 실천할 때 더 행복하겠지요.
말씀을 듣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니 말입니다.
그래서일까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야고보 사도는 아주 강력하게 말하지요.
그런데 듣기만 하는 것이 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 상상 임신과 같을 것입니다.
들은 것만으로 이미 그리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고는 이내 자기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는 이유는 자기 얼굴을 가다듬기 위해서인데
가다듬지 않고 거울을 본 것만으로 됐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거울을 봤을 뿐 자기 얼굴을 본 것은 아닌데도,
얼굴을 봤어도 얼굴을 가다듬은 것은 아닌데도.
아무튼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은 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때 진정 행복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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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모욕하는 자들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제압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너무도 감동을 받아 탄성을 올립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루카 11,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찬사를 부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혈족관계에만 치중한 그 말을 넘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여기서, 여인의 행복선언과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모두 ‘행복’을 찾지만, 각자가 찾는 행복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대체 어떤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요? 여인은 아기를 간직했던 태중과 젖을 먹인 가슴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를 떠올려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루가 1,45)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하여, 말씀을 잉태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승복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 있을 뿐이요,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곧 행복’입니다. 그것은 ‘경청한 바를 믿는 일’ 입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들어라. 아들아,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순명의 노고로 되돌아가라”
이는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들려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일’, 곧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 ‘마음의 귀를 경작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고 믿는 일’,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진정 참된 행복을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바를 사랑과 믿음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주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듣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을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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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한 사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충북 음성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것이 행복이고 보상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며 되새기고 순종하며 지켰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이룬 영광이 어머니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말슴을 듣지 않고서는 성모님도 올바로 공경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일생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또한 성모님은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주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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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 온지 4년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에서 ‘한국 성지순례’를 기획하였고, 제게 같이 갈 수 있는지 문의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맞으면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난 10월 2일부터 한국 성지순례를 하였고, 어제부터는 저의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12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아버지 옆에 나란히 있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고, 그토록 존경했던 아버지 옆에 있으니 어머니는 참 좋으실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3년 늦게 갔지만 어머니는 늘 그렇듯이 따뜻한 미소로 아들의 인사를 받으십니다. 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성지의 신부님이 배려해 주었고, 순교자들의 전구로 부모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를 기도하려합니다. 가족들은 부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이제 주교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리운 동창 신부님들도 만나면서 남은 날들을 보내려고 합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한국에 오니, 뉴욕에서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4년 동안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가족처럼 지냈던 브루클린 한인 성당의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처럼 비록 저보다 나이가 어린 신부님들이지만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한 신부님은 큰 바위 얼굴처럼, 고향의 느티나무처럼 모든 신부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사제관은 고향을 떠나온 신부님들에게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캠핑을 좋아했고, 자전거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팬데믹 동안 함께 캠핑을 하였고, 자전거를 타면서 팬데믹을 견디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계획의 달인이었습니다. 여행을 가면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하였습니다. 항공권 예매, 호텔 예약, 자동차 렌탈, 식당 예약, 음식준비를 모두 완벽하게 해 주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언제나 말이 없지만 뒤에서 부족한 것들을 채워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요리는 거의 요리사 수준이었습니다. 캠프장에서는 장작을 태워서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았기에 저는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 중에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를 위해 LA에 가면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맞이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시고,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저를 위해서 차량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습니다. ME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ME 봉사자들은 함께 피정을 준비하였고, 야유회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 기간 중에 줌으로 하는 강의를 도와주었습니다. 집으로 초대해서 집밥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사랑은 결심이다.’라는 ME의 가르침대로 부부들은 사랑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성당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아파서 제가 잠시 미사를 도와주었는데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는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것처럼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제게는 행복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업적, 인간관계, 가족, 건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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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별들이 수놓은 밤하늘을 보신적 있으시지요? 그런 밤하늘을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라고 말합니다.
어두운 밤이 아름답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별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가요? 만약에 밤하늘에 어두운 부분이 없이 별들로 가득 찼다면 우리는 과연 밤하늘이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별은 밤하늘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일 뿐 실제로는 밤하늘, 어두운 그 하늘이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인생이 아름답다.’라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인생이 왜 아름다울까요. 즐거움만 있어서? 기쁨만 있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어서? 아니지요. 물론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내 마음먹은 대로 되었던 것도 있지만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내 삶에 고통이 있고, 아픔도 있고 좌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사이에 기쁨과 즐거움이 끼어들어 있지요. 꼭 밤하늘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즐거움보다 슬픔을 더욱 잘 기억하는데 이것은 꼭 넓은 어둠에 별들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성모님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 안에 고통도,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함께 들어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영광만을 보고 말합니다. “당신을 낳은 여인은 행복하다.”라고 말입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성모님의 삶에는 기쁨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의 삶이었습니다. 외로움의 삶이었고, 걱정과 슬픔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성모님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픔도 고통도 없어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잘 압니다. 그 안에 쓰라린 아픔도 상처도 있음을, 좌절도 있었고 누구에게도 말 못 한 어둠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십시오.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위로이고 내가 너의 희망이고, 내가 너의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내게 가슴을 열고 말하여라. 내게 의지하고, 내가 열어주는 길을 걸어가거라. 그러면 마리아가 걸었던 길을, 고통과 슬픔으로 보이는 그 행복의 길을 너희도 걷게 되리라.’라고 말입니다.
영적 부유함이란….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국가의 부는
금도 은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국가의 부는 ‘생산역량’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얼마나 부유한가를 측정할 때
현재 가지고 있는 재화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가를 측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부유함이란 무엇일까?
국부론을 바탕에 두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적인 부는
지금까지 걸어온 신앙의 길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 모든 희망을 생산할 수 있는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겸손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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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남편은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술에 빠져만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아내가 말합니다.
“언젠가는 아이들은 집을 떠날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은 걸 후회하겠죠.”
이 말에 남편은 “그건 미래의 내가 겪을 문제지. 나는 그 인간과 상관없어.”라고 말한 뒤에, 곧바로 보드카를 병째 부어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심장마비를 쓰러집니다.
이 주정뱅이 남편처럼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상관없을까요?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나’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나’가 해야할 것이 분명해집니다.
미래의 ‘나’가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술을 끊고 아이와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나’가 건강한 모습으로 튼튼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운동을 시작하고, 몸에 좋지 않은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가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생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의 ‘나’는 기도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의 ‘나’가 가지고 있는 악습이 있다면 미래의 ‘나’를 바라볼 때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미래의 ‘나’와 단절된 사람은 눈앞의 목표만 추구하거나 도파민이 잠깐 활성화되는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지금 원하는 ‘나’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미래의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것을 잊어버립니다. 과연 무엇이 미래의 ‘나’에게 필요할까요?
군중 속에 있던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서, 이렇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예수님을 낳은 성모님이야말로 행복할 것이고 하지요.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늘 고통과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순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하느님이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래의 ‘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나’를 떠올렸기에 철저히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미래의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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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마음이란 나를 살게 하는 뿌리. 조심조심 다뤄야 한다. “괜찮아, 괜찮아.” 다독여 가며(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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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10월13일 어제 이태리의 젊은 교회 지도자들인 고등학생들의 모임 첫날에 교황님이 보낸 메시지 핵심 내용이 멋졌습니다.
“꿈은 크게, 하느님 역시 그렇다!(Dream big, God does too!)”
꿈의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평화롭게 지내는 이 시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에서는 비참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7일째 전투에서 1만여명의 사상자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전쟁하는 나라 모두가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나라들입니다. 참으로 꿈의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코 이런 비참한 전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원대하고 영원한 꿈이, 희망이 무엇입니까? 하나, 단 하나 평화입니다. 누구나 소망하는바 평화의 꿈인데 참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하느님을 믿는 나라들이 그렇게 전쟁을 많이 합니다. 모든 전쟁이 영적 전쟁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고 바람직할까요!
아마 종교간의 평화공존이 한국처럼 잘 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런 하느님 평화의 꿈을 앞당겨 실현하며 살아가는 곳이 여기 가톨릭의 요셉 수도원입니다. 그리하여 “평화의 집”이란 피정집 명칭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평화를 찾아, 그리스도의 평화를 목말라 평화의 집, 기도의 집,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지요!
요즘 그동안 계속해서 읽은 매일미사 제1독서는 에즈라, 하까이, 즈카르야, 느헤미아, 바룩, 요나, 말라기, 요엘의 말씀으로 모두가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궁극적 특징은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희망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칠흑같은 절망의 현실에서도 결코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희망을 선포하고 노래하며 살았던 꿈과 희망의, 생명과 빛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로서 요엘서는 끝나고 다음 월요일부터 제1독서는 신약으로 넘어갑니다. 오늘 요엘서의 빛나는 희망의 대목입니다.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이 거룩한 미사를 드리는 오늘이 그날입니다. 그날의 평화를 오늘 앞당겨 살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희망을 앞당겨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모든 수행을 사랑합니다. 수행덕목들뿐 아니라 삶을, 이웃을, 자연을, 말씀을, 모두를 사랑합니다. 베네딕도 규칙 4장 “착한 일의 도구들은 무엇인가”는 76절까지 계속되며 첫절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라는 1절입니다. 그리고 41절은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참행복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시편131,3)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에게 공평히 열려있어 선택할 수 있는 참행복입니다. 시편의 두 고백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우리가 배운 모든 참행복은 하느님께 있음을 봅니다. 엊그제 화답송 후렴도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주님을 신뢰할 때, 참행복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에서 보다시피 우리의 참기쁨도 주님께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연유한 제 행복기도 다음 대목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참행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주님을. 희망의 주님을, 평화의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참행복입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도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참행복에 대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참행복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참행복을 선택하여 살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노력에 항구할 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사랑하여 듣고 지키는데 한결같이, 끊임없이 항구한 열정과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절로 짧습니다만 참행복의 비결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와 주님이 주고받은 대화가 흡사 불승들의 선문답같고, 사막교부들의 언행록에 나오는 제자와 스승이 주고 받은 대화처럼 긴 여운을 남깁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잘 난 자녀를 둔 어머니에 대해 선망하는 마음은 인지상정, 모든 어머니의 공통적 심정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질문했던 어머니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사랑하여 찾는 모든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주는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오히려’란 말마디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하지 못한 말씀을 제가 보완합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심중을 반영하는 묵상이란 확신이 듭니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행복한 분입니다. 그러나 나를 낳은 육신의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에 행복합니다. 사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킨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야 말로 시종여일 ‘예스-맨(yes-man)’으로 ‘순종의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으며 평생 저와 함께 했습니다.
여러 어머님들 참으로 행복하고 싶습니까? 참행복은 순전히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제 어머니 성모님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제 어머니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십시오.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바로 당신의 이런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배울 것입니다. 나도 성장과정중 성모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배웠고 지금도 배웁니다.‘-
참행복은 모두에게 공평히 활짝 열려 있는 선택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욕망도 무지도 허무도 아닌 사랑이요 말씀입니다. 사랑과 말씀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말씀을 사랑하여 자나깨나 깨어 말씀을 듣고 지키는 공부에 온힘을 다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참행복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하느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북돋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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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한 사람>
그 사람
믿음이기에
그 사람
믿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희망이기에
그 사람
희망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사랑이기에
그 사람
사랑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기쁨이기에
그 사람
기뻐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함께이기에
그 사람
함께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베풂이기에
그 사람
베푸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품음이기에
그 사람
품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돌봄이기에
그 사람
돌보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섬김이기에
그 사람
섬기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살림이기에
그 사람
살리는 이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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