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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사진마을
김길나
사진 속에는
시간이 뒤로 감겨 있다
구름패랭이가 뒤따라와
꽃을 피웠다
기억이 뒤로 감기는 사람이
사진 속으로 손을 넣어
바닷물을 만진다
바람을 만진다
햇빛이 찍어놓은 정지는
햇빛을 추방한 암실 속에서
잘 구워진다. 눈썹이 잘 구워졌다
그 아래 눈은 흔들리는 암실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얼굴 한 장을 떠낸
공간이 네모로 잘렸다
곁에서 사람과 풍경이
수시로 잘려나간다
순간 포착으로 떠낸 공간에서
영구 정착하는 주민들을 만나러
늙지 않은 아이가 휘파람을 불며
사진마을 안으로 걸어들어 가고 있다
----김길나, [사진마을]({홀소리 여행}, 서정시학, 2008년) 전문
사진이란 무엇이고, 사진기란 무엇인가? 사진이란 가시광선과 자외선과 적외선과 전자선 등의 작용에 의하여 물체의 화상畵像을 찍어내는 것을 말하고, 사진기란 ‘카메라 옵스큐라’(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의 원리에 의하여, 렌즈를 사용하여 필름 또는 건판에 사람이나 물체의 화상(영상)을 찍어내는 기계를 말한다. 사진의 분야에는 보도사진과 상업사진과 건축사진과 현미경사진과, 뢴트겐사진과 항공사진과 천체사진 등이 있고, 사진기의 종류에는 라이카와 콘텍스와 인스터매틱과 오토포커스와 디지털 카메라 등이 있다. 사진의 용도와 기술은 오늘날 그 수효와 기술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지만, 이제 사진은 우리 인간들의 삶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사진은 원본이 없는 복제예술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버렸고, 또한 사진은 인간의 혼이 깃들어 있지 않은 일회적인 복제예술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사진 자체가 순수예술보다도 더욱 더 순수한 예술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사진은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물리적인 현상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진기의 렌즈가 인간의 눈보다도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사진은 인간의 고정된 시점을 해방시켰는데, 그것은 사진기의 렌즈가 자유자재로 비가시적인 공간마저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사진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표상)과 그 정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역동적인 시간성을 부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스냅사진으로 인하여 사물들의 운동을 다양하게 포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사진은 그 대상들의 다양한 변화를 포착하였는데, 그것은 사진기의 각도에 따라서 그 대상들의 의미도 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진은 보도사진과 상업사진과 건축사진 분야에서, 또, 그리고, 의학과 공업과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매우 다양하게 쓰이고 있고, 텔레비전과 영화와 컴퓨터와 비디오와 음악 등의 영상매체산업을 주도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은 순수예술의 극치이며, 우리 인간들의 미학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촬영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프레이밍framing 방법’과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내는 방법’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빛의 화학적 반응과 변화를 읽어내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프레이밍이란 작가가 파인더를 통해서 찍고자 하는 대상을 알맞게 따내는 작업을 말하는 데, 이 프레이밍을 구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본 현실 그 자체의 느낌이 살도록 피사체의 진실만을 생각해야 하며, 오직, 싱싱하게 살아 있는 현실을 얻고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내는 방법’이란 작가의 감정과 피사체의 진실이 한 점으로 모여 맞아 떨어지는 순간을 말하고,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피사체의내면의 진실과 인생의 본질을 파악할 줄 아는 역사 철학적인 지식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빛의 화학적 반응과 변화를 읽어내는 방법’이란, 어떠한 작가이든지간에, 피사체에 비쳐지는 빛을 읽고, 그 빛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빛은 흐린 날에도, 어두운 실내에서도, 늘,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이며, 요컨대 모든 사진의 외형을 만들어내는 것은 빛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진작가의 제일의 전제조건은 피사체의 내면의 진실과 인생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 철학적인 지식이며, 이 역사 철학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사진작가를 우리는 천재작가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 천재는 모든 기법의 창시자이며, 독창적인 예술가이다. 천재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자이며, 또한 천재는 많이 보고, 많이 찍고, 많이 생각하는 자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같이 디지털 카메라----휴대폰을 포함하여---를 소유하고 있고, 우리는 누구나 다같이 사진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인터넷 백과사전을 뒤적이면서, 사진과 사진기와 사진을 촬영하는 방법을 찾아보았고, 이상의 서술에서처럼 사진예술의 장중함과 그 위력 앞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길나 시인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고, 1995년 {새벽 날개}를 간행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빠지지 않는 반지}와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와, 그리고 {홀소리 여행} 등이 있다. 그의 {사진마을}은 ‘사진’을 토대로 하여 또다른 ‘언어의 사진’을 촬영한 시이며, 그의 낙천주의를 양식화시켜 놓은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왜, “사진 속에는/ 시간이 뒤로 감겨” 있는 것이며, 왜, 또한, 사진 속에는 “구름패랭이가 뒤따라와/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일까? 사진은 과거 속의 사진이며, 시간이 정지되고, 공간이 확정된 예술이라고 할 수가 있다. 패랭이는 석죽石竹과의 야생화이며, 6월과 8월 사이에서 분홍색의 꽃이 피는 야생화이다. 패랭이는 그 무엇보다도 생명력이 강한 야생화----석죽이란 이름은 그야말로 돌틈에서도 싹을 틔우는 대나무라는 뜻이라고 한다----이며, 그 옛날 민초들이 쓰던 패랭이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패랭이는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민초들의 상징이며, 그 꽃말은 ‘영원하고 순결한 사랑’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진은 과거 속의 사진이기 때문에, “시간이 뒤로 감겨 있는” 것이고, 그 사진 속에는 실제의 패랭이가 아니라, “구름패랭이가 뒤따라와/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한 장의 사진 속의 세 가지 실천을 역설하고 있는 데, ‘만들기’와 ‘받아들이기’와 ‘바라보기’이다. ‘만들기’는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의 의도를 뜻하고, ‘받아들이기’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관람객)의 마음을 뜻하고, ‘바라보기’는 수용자가 사진을 감상하는 행위를 뜻한다. ‘만들기’와 ‘받아들이기’ 사이에는 ‘바라보기’가 있으며, 이 ‘바라보기’를 통해서 그 사진의 의미는 사진작가의 의도를 넘어서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속에는/ 시간이 뒤로 감겨 있다/ 구름패랭이가 뒤따라와/ 꽃을 피웠다.” 따라서, “기억이 뒤로 감기는 사람이/ 사진 속으로 손을 넣어/ 바닷물을 만진다/ 바람을 만진다”라는 시구가 가능해 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 속의 하늘에는 구름패랭이꽃이 피어 있고, 바닷가에는 파아란 바닷물이 있고, 또, 그리고, 바닷가에는 바람이 불고 있다. “기억이 뒤로 감기는 사람”은 지난날을 회상하는 사람이며, 그 ‘구름패랭이꽃’과 ‘파아란 바닷물’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매혹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은 “햇볕이 찍어놓은 정지”----‘빛의 예술’----이며, 그 “햇빛을 추방한 암실 속에서/ 잘 구워”지는 예술이다. 피사체에 비쳐지는 빛을 읽고, 그것을 찍어낸 사진은, 다만, 캄캄한 암실에서 필름의 현상과 확대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 “ 햇빛이 찍어놓은 정지는/ 햇빛을 추방한 암실 속에서/ 잘 구워진다.” 바로 이때에 “잘 구워졌다”는 것은 사진이 아주 잘 찍혔다는 것을 뜻하고, 인물사진 중에서, 그 중에서도 “눈썹이” 매우 “잘 구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눈썹이란 눈두덩이 위에 가로로 길게 모여난 짧은 털을 말하지만, 그러나 이 눈썹은 인간의 얼굴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을 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래 눈은 흔들리는 암실에서 무엇을 보았을까”라는 시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눈은 인간의 마음의 창이고, 우주로 열려 있는 창이다. 아는 것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아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눈이 없으면 사진도, 그 어떤 예술도 다 소용이 없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아름답고 행복한 삶도 가능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는 흔들리는 암실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이며, 그 암실의 밀교적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과거는 기억 속에 보존되고, 미래는 용감히 대하고, 현재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미래의 목표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된다. E. H. 카아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한 바가 있지만, 나는 예술---역사도, 학문도 마찬가지이다----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사진작가는 “흔들리는 암실”에서 그가 의도했던 사진과 실제로 현상된 사진을 보았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가 의도했던 사진과 실제로 현상된 사진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단 말인가? 이때의 암실暗室은, 단지, 카메라 필름을 현상하기 위한 암실만이 아닌 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의 삶 자체가 암실 속의 삶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살아 있음은 구체적인 현실이며, 그 살아 있음을 위하여, 다만, 어둡고 컴컴한 우연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치, 암실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예술작품이 인화되어 나오듯이, 그 살아 있음의 필연의 쳇바퀴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존재의 근거는 ‘무無’이지만, 그러나 그의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의 예술적인 삶을 통하여 전지전능하고 영생불사하는 인간으로서, 보다 낫고 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가 의도했던 사진은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사진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현상된 사진은 그의 미학적 가치기준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진일 수도 있다. 선택된 사진, 특수한 사진, 따라서 그 사진은 실체가 아닌 우연에 불과한 사진에 지나지 않으며, 텅 빈 ‘무’를 가리키고 있는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꿈과 현실, 그 의도와 배반 사이에서, 그 꿈과 의도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의 매력이며, 따라서, 암실 속의 삶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삶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작가는 그의 암실에서 그의 꿈의 세계(이상세계)를 보았던 것이며, 우리는 이 세상의 암실 속에서 태어나 이 세상의 암실 속에서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삶의 이치를 깨달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암실 속의 사진작가이며, 그 불필요한 대상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오직, 자기 자신이 필요한 대상만을 선택하고, 또, 그것을 강조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얼굴 한 장을 떠낸/ 공간이 네모로 잘렸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곁에서 사람과 풍경이/ 수시로 잘려나간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의 대상은 유령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죽은 자들의 귀환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의 말은 그가 그처럼 사진예술에 경도되어 있었던 만큼, 농담같은 진담의 말이며, 그 말 속에는 사진 속의 인물은 유령과도 같은 인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 유령들의 세계인만큼, 그 사진은 실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인위적인 가공의 세계라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세계는 가공의 세계이며, 인공낙원의 세계이다. 창작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에 비수를 들이대는 세계이며, 그 비수를 들이대고 있는 만큼 가공의 세계이며, 인공낙원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라!’ 하지만, 그러나, 이 자연예찬의 말만큼 부자연스러운 말도 없으며, 그 자연예찬의 말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삶이 없게 된다.
사진의 세계는 가공의 세계이며, 인공낙원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순간의포착으로 떠낸” 지상낙원의 세계이다. 그곳에 정착하는 주민은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늙지 않은 아이가 휘파람을 불며/ 사진마을”로 걸어들어 가게 된다. 사진마을은 지상낙원이며, 우리 인간들이 손에 손을 잡고, 언제, 어느 때나 사랑과 우정과 정담을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악도 없고, 악마도 없고, 악의도 없다. 증오도 없고, 분노도 없고, 질투도 없다.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우울함과 쓸쓸함도 없다. 가난도 없고, 질병도 없고, 죽음과 고독도 없다. 오직, 언제, 어느 때나 젖과 꿀이 넘쳐나며, 끊임없는 감사와 찬양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곳의 원주민들은 인간의 미래이며, 그 영생불사의 삶은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된다. 늙지 않는 아이들이 휘파람을 불어댈 때 시간은 정지되고, 그 늙지 않은 아이들이 “사진마을로 걸어들어” 갈 때 그 공간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순간 포착으로 떠낸 공간에서
영구 정착하는 주민들을 만나러
늙지 않은 아이가 휘파람을 불며
사진마을 안으로 걸어들어 가고 있다
김길나 시인의 [사진마을]은 그 언어가 절제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독자들의 마음과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의 [사진마을]은 그의 지상낙원이며, 그 지상낙원이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마을] 속에는 인간의 건강과 인간의 미래가 약속되어 있고, 또한, 인간의 평화와 그 행복이 약속되어 있다. 모든 사진예술도, 시도, 행복에의 약속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마침내, 드디어, 사진을 토대로 하여 또다른 언어의 사진을 촬영해낸 김길나 시인, 밀교적인 암실의 비밀을 밝혀내고 그 암실 속에서도 [사진마을]이라는 지상낙원을 연출해낸 김길나 시인, 그 [사진마을]은 만인에 의한, 만인들을 위한 초대의 장소가 된다. 감동은 마음을 움직이고, 또한 감동은 매혹을 불러일으킨다. 매혹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며, 그 매혹의 꾐에 빠진 자는 너무나도 열광적인 광신도가 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사진의 1차적 의미는 사진기에 찍힌 어떤 피사체, 즉, 어떤 인물과 사물들을 지시하고, 사진의 2차적 의미는 어떤 피사체, 즉, 어떤 인물과 사물을 담고 있는 의미를 뜻하게 된다. 가령, 예컨대, 마릴린 먼로의 사진은 마릴린 먼로를 지시하지만, 그러나 마릴린 먼로의 아름다운 몸매와 그 요염한 표정에 의하여 그녀는 단순히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모든 남성들의 정념을 사로잡는 ‘관능의 화신’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마릴린 먼로--마릴린 먼로’라는 1차적 의미가 ‘마릴린 먼로--관능의 화신’이라는 2차적 의미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길나 시인의 [사진마을]은 단순한 [사진마을]이 아니라, 영원한 지상낙원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사진마을이여!
아아, 사진마을이여!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이 [사진마을]의 열광적인 광신도가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