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루멘시오 주교(콥트)
그와 성 에데시오(Saint Aedeius)는 형제로서 티르 태생이고, 에티오피아의 첫번째 복음 선포자로 공경받고 있다.
그 당시 인물인 루피노에 따르면, 프루멘시오와 에데시오는 티르의 철학자인 메로피오(Meropius)의 젊은 문하생이었다.
그들의 스승이 에티오피아에서 살해되었을 때, 그들 형제만 이상하게도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크숨에 있는 왕궁으로 끌려갔으나, 왕은 오히려 그들을 신하로 삼으면서 에데시오에게는 궁중 연회에서 술을 따르는 직책을, 그리고 프루멘시오에게는 서기직을 맡겼다.
왕이 죽은 뒤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왕비의 요청으로 그 지방에 계속 머물면서, 서방의 상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알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왕의 아들이 계승하게 되자 완전히 석방되어, 에데시오는 티트로 가서 사제가 되고,
프루멘시오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성 아타나시오(St.Athanatius)에게 가서 에티오피아의 선교사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성 아타나시오는 그를 주교로 축성하고 파견하자, 그의 선교 활동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 왕의 형제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 그는 "아부나(Abuna of Ethiopia)"로 불리는데, 우리 아버지란 뜻이다.
-성바오로수도회에서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를 소개했다.
에티오피아의 고대 수도인 아크숨의 초대 주교로서, 4세기에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정통신학에 근거하여 그곳에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를 조직했다.
티레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340년경 동료 아이데시우스와 함께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붙잡혀가서
아크숨 왕국의 왕 에자나의 신하가 되었고, 후에 왕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왕이 죽은 뒤 총리 겸 황태자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로마 제국에서 온 그리스도교 상인들에게 종교활동의 자유를 주었다.
섭정 역할을 마친 뒤 347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타나시우스를 방문하여 에티오피아의 그리스도교화를 더욱 촉진할 것을 조언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콥트 교회 Coptic Church
이슬람권 이집트에 압도적으로 많은 주요 그리스도교 교회.
7세기 아랍인이 점령하기 이전의 이집트 민족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아이지프티오스’(아랍어로는 qibt, 콥트는 서구화된 발음임)라 불렀다.
그뒤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이 ’아이지프티오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자 이 용어는 소수 종교집단인 그리스도교도들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5세기 이래 이 그리스도교도들은 단성론(그리스도의 단성만을 인정하는 견해) 교회에 속했으며, 스스로를 이집트 교회라 불렀다.
19, 20세기에는 콥트 정교회로 자칭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콥트인들 및 주로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동방정교회와 스스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4, 5세기에 이집트에서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451)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있었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콥트인들은 그리스어 사용을 중단했다.
■콥트 성가 Coptic chant
7세기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 전 그리스도교에 귀화한 고대 이집트 후손들의 예배음악.
아랍어 ’qibt’에서 유래한 ’콥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Aigyptios(’이집트인’ 또는 ’이집트어’)의 전와어(轉訛語)이다.
나중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로 이집트인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계속 믿던 소수인들에게만 이 명칭이 적용되었다.
함셈어족인 콥트어는 997년에 아랍권에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콥트의 예배용 언어로만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다.
콥트의 종교의식은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리아와 아랍의 영향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콥트의 의식이 이슬람의 종교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콥트인들은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음악은 근래에 와서 필사 악보와 예배서 등에 의해 정리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