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96/모처럼 사모곡]어머이-, 홍시가 익어가요!
추석 전날인 엊그제, 동네후배가 서울서 내려와 “형님, 이장집에서 술 한잔 합시다”하길레 “왜? 우리집서 둘이 하지”했더니 “아이고, 그 집은 어머니가 계시고 적(전)을 부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소. 갑시다”하는 것이 아닌가. 못이기는 척 따라갔더니, 밖에서부터 적 부치는 냄새가 고소했다. 우리 어머니 친구였던 형님의 어머니(92세)는 총생(자식)들(네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이 모두 내려와 추석차례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분이 좋으실까? 모처럼 연중 최고의 날이리라. 내일이면 떠날 아이들에게 안길 보따리를 머리 속으로 그려보고 있을 터. 우리를 보고 반색을 한다. 언젠가 돌아가신 후 4년 동안 한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형님의 어머니를 찾아 뵙고 손을 부여잡으며 운 적도 있는, 이무러운 분이다.
그렇다. 민족의 최대 명절, 추석은 이렇게 가족들로 북적거려야 제맛인 것을, 언제부터인가 우리 대가족이 흩어져버렸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건만, 아쉽다. 오늘 아침 MBC의 <김연자-진성 한가위 특집 빅쇼>를 보며, 또 어머니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눈물을 조금 흘렸다. 일주일 전에 가족묘지 벌초를 한 후 성묘하면서, 나는 “할머니, 어머니, 인자(이제) 아버지 모셔가세요. 당신도 힘들어해요”라고 중얼거렸다. 시간을 다퉈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97세가 어디 보통나이인가? 지난해보다 부쩍 ‘아버지 앞의 생生과 남는 시간’에 어찌할 줄 모르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느는 것은 오직 아버지에 대한 연민憐憫뿐이다.
오죽하면 당신도 새벽마다 비척비척 걸어 대문을 열고 뒷산의 가족묘지를 바라보며 절을 하면서 소리내어 말씀을 하실 것인가? “어머니, 이제 저 혼자 남았어요. 하루속이 불러주세요. (세철이가) 이승에서 못다한 효도 하겠습니다”라고 할 것인가? ‘세철’은 아버지의 아명兒名이다. 40여년부터 쓰는 일기장에도 요즘엔 부쩍 ‘속히 데려가달라’고 자주 쓰신다. 노인들의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아버지만큼은 진짜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 하지만, 말상대 한 명 없이 ‘노치원’에서 무한정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는 일상이 무슨 재미가 있으실 것인가? 그 외로움과 고독을 서른 살 아래인 넷째아들이 함께 해줄 수(생각)도 없고, 해주지도 않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어머니 가신 후, 아버지와 둘이 고향집에서 산 지 4년(둘째 여동생이 11개월 모셨다), 나도 점차 흥미를 잃어가고 조금씩 지쳐가는 중이다.
지난 주, 진짜 효녀인 큰여동생에게 아버지가 “무슨 놈의 나이가 세자릿 수를 다 채울랑갑다”고 하니 곧바로 “아이고, 아버지 그러면 안되야”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니 “너무 솔직했나? 그런데 오빠 사실 그렇잖아”했다. 아버지가 서운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도 ‘하하’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라면 어땠을까?를 종종 생각한다. 확실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상’은 다를 것이다. 김연자-진성이 듀엣으로 남진의 노래 <어머님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셨어요/백날을 하루같이 이 못난 자식 위해/손발이 금이가고 잔주름이 굵어지신 어머님/몸만은 떠나 있어도 어머님을 잊으오리까/오래오래 사세요 편히 한번 모시리라>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도 확실히 느낀다. 어머니는 어쨌든 자식들에게 자상(자애)스러움의 상징이지만, 아버지는 아무래도 (대하기가) 어렵다. 둘이만 사는 데도 이무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상당히 어색할 때가 많다.
두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얼마 전 옥수수농사로 번 귀한 돈 50만원으로 구입한 <어머니, 그냥 한번 불러봤어요>라는 대한민국 국보급 전각예술인의 액자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사진>. 투박하게 큼지막하게‘어’ ‘머’자를 쓰고, 마지막‘니’자를 길게 내려쓴 게 인상적이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그냥 한번 불러봤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 어머니는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그냥 한번 불러보는’ 존재이다. 어느새 내 입에서는 나훈아의 <홍시가 열리면>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또한 어머니 가신 지 100여일만에 만들어 어머니 묘 앞에 바친 ‘어머니 사랑글 모음집’인 『어머니, 봄이 왔어요』를 펼친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눈이 오면 눈 맞을세라/비가 오면 비 젖을세라/험한 세상 넘어질세라/사랑 땜에 울먹일세라/그리워진다/홍시가 열리면/울 엄마가 그리워진다/눈에 넣어도 아프지도 않겠다던/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명절은 이렇게 가신 분이나 살아계신 분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