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12
6월5일[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9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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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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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eXwdw4K4KQ (김대용 바실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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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그 신뢰한다는 것이 참 힘든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세상이 하도 흉흉하다 보니 사기꾼들도 많아지고, 서로를 속이고 이용해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보니 일단 한번 의심해보는 풍조가 보편화된 듯합니다.
이런 풍조는 예수님 시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선량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끊임없이 현혹시켰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의 타락과 착취는 백성들을 불신과 의심, 불안의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조차도 거부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그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 특히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일생일대를 건 도박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는 정확한 목표선택과 그 목표를 향한 철저한 투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강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신앙,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저지른 과오 중에 가장 큰 과오는 가장 값진 보물이 자신들의 손안으로 굴러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물을 절벽 밑으로 멀리 던져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 자신들을 죄와 악에서 구해줄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코앞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교만함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재물이나 권세, 명예에 눈이 단단히 먼 사람들입니다. 가끔 밑으로 내려가 인생의 밑바닥 체험도 기꺼이 할 줄 알아야 되는데, 끝도 없이 올라가려고만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우리의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는 쪽과 거부하는 쪽. 불행하게도 많은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저지른 실수 가운데 가장 큰 실수, 일생일대의 대실수였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이루어졌었던 배신의 역사, 반역의 역사는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역사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과분하게도 하느님께서 나를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미물 같던 나를 애지중지 돌봐주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아무 상관없는 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처음의 나를 생각하면,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정답이 바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불만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소작인들처럼 잔머리 굴릴 일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남의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과분하게 생각하면서, 그저 기뻐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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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S5jhJME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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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불콩죽이 에사우에게 한 일>
오늘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결국 소작인들이 합당한 소출의 일부를 봉헌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그 포도밭의 상속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인 그리스도를 죽이게 될 것인데 그 방법이 소출의 일부를 봉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는 처음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은 것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음이 결국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더 자세히는 야곱이 에사우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채는 것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야곱은 레베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야곱의 장자권을 가로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콩죽은 왜 주어야 했을까요?
불콩죽은 야곱의 입장에서는 장자권이 에사우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사우는 그 불콩죽을 먹고 자신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줄 수 있음을 인정해줍니다. 야곱에게 자신의 축복을 빼앗겼을 때 에사우는 무슨 힘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요? ‘아, 그때 불콩죽을 먹고 장자권을 팔았어지!’ 불콩죽은 야곱이 에사우가 상속권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였고, 그 불콩죽을 받아먹은 에사우는 그 불콩죽 덕분으로 상속권을 빼앗긴 것을 참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 소작인들이 내는 소출의 일부는 그 땅의 주인이 주인의 외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또 주인 입장에서는 아들에게 주어야 할 그 땅을 소출을 내는 동안 그 사람들에게 유예할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인은 착해서 아들이 죽어도 자신의 것으로 땅을 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봉헌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그리스도에게만 유보된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을 인정하고 그 상속권을 우리에게 유예해 달라는 행위입니다. 그분이 상속자라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그 인정한 불콩죽이 나의 영원한 기쁨으로 되돌아옵니다.
2020년에 개봉한 성동일과 하지원 주연의 “담보”의 줄거리입니다. 성동일은 냉혹한 대출 업자입니다. 불법 체류자인 아홉 살 서이를 둔 엄마는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성동일은 아이를 잠시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담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서이 엄마는 경찰에 걸려 다시 중국으로 추방 당합니다. 병이 든 서이 엄마는 다시 한국으로 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잔혹한 대출 업자이지만 서이에게 마음이 빼앗깁니다. 그리고 서이가 나쁜 이들에게 팔려가고 이용당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로 택배 배달을 하며 서이를 키웁니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면서까지 서이 대학 졸업을 시키고 중국의 서이 엄마에게 서이를 돌려줍니다. 서이 엄마는 훌륭하게 성장한 서이를 보며 성동일에게 절을 합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습니다.
우리가 하는 봉헌은 이 영화의 ‘담보’와 같습니다. 봉헌은 나의 처지에서는 내가 드리지 않으면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처지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받는 하느님의 처지에서는 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만 하게 만드는 ‘독’과 같습니다. 물론 행복한 독입니다. 마치 아기의 웃음으로 부모가 자신들의 생명을 아이에게 내어 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 지극한 사람에게 보내는 인정과 감사의 봉헌은 그 사랑 지극한 사람을 나를 위해 죽게 만들 힘을 발휘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끝끝내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는다면 부모라도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일방적인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불콩죽도 내어주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취했다면 영화 ‘공공의 적’에서 자식이 보험금 때문에 키워준 부모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내가 바친 봉헌은 사랑스런 담보가 되어 그분의 생명까지도 내어주게 할 것입니다.
자녀는 최소한이라도 내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부모를 알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 받지만, 알아주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받지 못하게 됩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자녀에게 주고 싶지, 자신을 강탈하는 강도에게 내어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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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1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오늘의 복음은 부활을 통해 소작인들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은 포도밭 주인을 증언하는 내용이다. 이 비유의 본뜻은 예수님의 수난-부활의 이야기이다.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주인, 하느님은 이 포도밭을 농부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도지로 주고 떠나갔다. 수확기가 되자 주인은 종들, 예언자들을 보내어 도조를 받아오게 하였다.
첫 번째 종은 매만 맞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종도 머리를 맞고 모욕만 당했다. 세 번째 종은 농부들이 죽여버렸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냈다.”(6절) 이 말씀은 그 아들에게 주인과 같은 마땅한 존경을 드려야 한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마치 결과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속으실 수 없는 분이시다. 다만 인간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들이 나타났을 때 소작인들은 아들만 없애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은 아들을 죽이기로 공모하였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고 포도원 밖, 예루살렘 성 밖으로 버렸다. 그래서 주인은 소작인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아들을 죽였지만, 포도밭이 그들의 것이 되지는 못했다.
이렇게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 118,22). 소작인들은 잔인해지고, 아들은 소작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창에 찔리신다. 그분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로 여겨 죽였지만, 주님은 부활하시어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기에 인간의 눈에는 수수께끼 같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놀랍게만”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에 퍼져있는 포도밭을 다른 소작인들에게 넘겨주시고 제때 소출을 바치게 하셨다. 이렇게 선택된 자의 탑이 세워지고 빛나고 있다. 교회가 어디서나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어디서나 확을 팠다. 이 비유가 자기들에게 하는 말인 줄 안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를 잡으려 했지만, 군중들이 무서워서 감히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
우리 자신이 이제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지 않을 때, 우리도 이 소작인들과 같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소작인들은 주인의 뜻과는 멀리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겼던 사람들이었고, 끝까지 불순종과 반항으로 주인의 뜻을 거스른 자들이었다. 이러한 소작인들의 자세가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지 반성하면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매 순간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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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경고>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마르 12,1ㄴ-5)
이 말씀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마르 11,12-14)처럼 사는 사람들과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마르 11,17) 만들어버린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작인’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느님의 소작인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소작인들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소작인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일을 하고 소작료만 내면 그만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겉으로는 성실하게 일했지만, ‘아들로서’ 일한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일했고,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이 일했습니다.(루카 15,29)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강제노동이 될 뿐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은 소작료만 내면 그만인 소작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여기서 ‘멀리 떠났다.’라는 말은, 실제로 하느님께서 멀리 떠나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늘 보살펴주시는 분입니다. ‘멀리 떠났다.’라는 말을, “신앙생활은 강요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스스로 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소작인들이 주인의 종들을 박해하고 죽였다는 말씀은, 실제로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박해당하고 살해당한 구약시대 역사를 가리키는데, 인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면서, 말씀을 전해 주는 이들을 박해하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회개하라는 말은 듣기 싫어하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누리는 방법에 관한 말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듣기 싫은 말을 안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 이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 12,6-11)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요한 3,17)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마지막으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아들을 보낸 것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신 일도 회개와 구원을 위한 ‘마지막 기회’입니다. 비유 속의 소작인들은 마지막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도 마지막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과 멸망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말씀의 의도입니다. 여기서 ‘내버린 돌’과 ‘머릿돌’에 관한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로 여겨서 내버렸지만(죽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곧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일이어서 인간들의 눈에는 놀랍게만 보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로 오신 분이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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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바로 앞 단락에서(지난 토요일 복음 참조) 예수님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한 유다 지도자들에게 당신께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시는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계시하시면서 그들이 문제 삼은 권한을 실제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주인은 그 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 멀리 떠납니다. 여기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그리고 포도밭의 관리를 맡은 소작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자기 포도밭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내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게서 끊임없이 파견된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종들은 소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매질이나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머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종들은 죽임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파견된 많은 예언자가 겪어야 하였던 수난의 역사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이전에 파견된 예언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이심을 드러냅니다. 주인이 파견하는 마지막 인물은 ‘종’이 아니라 ‘아들’로 표현됩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져 본 적이 없는 하나뿐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계신 분, 하느님과 유일하고도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는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는지를 더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면, 우리 또한 그토록 귀하신 분을 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하고 정성껏 모시며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하는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작인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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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사랑하는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내 좋은 열매를 거두도록 하시는 장면에서 포도밭의 비유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포도밭을 빼앗아 다른 이들에게 주신다는 설명은 새로운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유다인들이 배척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구세사 안에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죄악과 배반,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완고함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에게 역설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역설은 시편 저자에게서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117〕,22-23).
그리스도께서는 버림받은 돌이 되셨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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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역류하는 세상에서 찾는 행복의 길>
너나 할 것 없이 행복을 원하고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며 참 행복인가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오늘의 시대는 사람이 사는 세상임에도 사람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소유가 존재를 좌우하는 시대, 이미지가 실재를 지배하는 시대는 한마디로 ‘거꾸로 가는 시대’인 듯하다. 제정신이 아닌 사회에는 하느님의 선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사랑은 무시되어버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한에 대해 시비를 걸어온 유대 지도자들에게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해주시면서 동시에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마르코 복음 11장 28절)에 답하신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종들’은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은 이방인들 또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하느님의 사랑의 결정적 표지인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님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고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마르코 복음 4장 12절) 어리석음과 무능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 예수님과 동떨어져 무관한 존재로 자신들을 내몰아버렸다.
소작인들은 포도밭 주인이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보낸 종들을 붙잡아 매질하거나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였다(마르코 복음 12장 2절-5절).
끝내는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마저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르코 복음 12장 8절)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마르코 복음 12장 12절)
오늘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누구인가?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본질이요 정체성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어리석음 속에 살아가지는 않는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재물과 권한을 공동선을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더 많은 부를 얻으려고 인간의 존엄함을 잊고 살아가지는 않는가?
주변 사람들의 아픔과 사회적 불의에는 무관심하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이 시대가 참으로 복음의 가치를 거슬러 ‘역류하는 사회’임을 인식하고 있는가?
얼마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가, 얼마나 넓은 고급 아파트에 사는가, 얼마나 고가의 명품을 지니고 있는가에 나의 관심이 머물고 애착의 끈이 묶여 있다면 나 역시 미친 듯 역류하는 사회 속의 어리석은 속물 인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머릿속의 관념에 머무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분의 사랑과 생명이 지금 내 안에서 살아 꿈틀거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함께 사는 모든 사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분의 생명과 사랑이 되살아나야 한다.
꺼져가는 불씨처럼 신음하고 허우적거리며 하루 한 끼를 걱정하고 희망 없는 미래에 갇힌 수많은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아도 냉정하게 대하고 있다면, 나는 분명 그토록 어리석고 무능한 유대 지도자들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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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변덕스러운 우리를 참아주시는 하느님>
살아가면서 많은 재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물은 꼭 필요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위축되고 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뿐더러 해야 할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재물이 없어서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반면에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라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재물은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재물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그리고 재물을 담보 삼아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진 사람은 재물로 몸을 일으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몸으로 재물을 일으킨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재물을 위해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 세상은 끝장난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고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는지요?
어떤 포도밭 주인이 밭을 일구어 소작인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가 포도 철이 되자 종을 보내어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매질하고, 어떤 종은 죽이고 결국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보낸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상속자가 죽었으니 그 포도밭이 자기들 것이 되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명 그 주인은 상응하는 배상을 요구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비와 은총의 신이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 분노에 더디시고 항구하게 사랑하시며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만약 종을 몇 차례 보내고 아들까지 보내며 기다려 주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하게 행동하면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파국의 책임은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끝없이 인내하시며 변덕스러운 우리들을 참고 계십니다.
받은 은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잃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는 것입니다. 잃어 놓고는 하느님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작인이라면 포도밭을 맡겨 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지금도 여전히 베풀어 주시고 계신 데 전혀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베풀어 주신 은혜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라고 말하면서도 ‘돈 나고 사람 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 삶의 구심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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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타고르의 하인이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서 타고르의 속은 타들어 갔습니다. 2시간이 지나면서 타고르는 하인에게 어떤 벌을 줄지 온갖 궁리를 짜내기 시작했습니다. 3시간이 지나자 더는 하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인을 곧바로 해고하리라고 결정한 것이지요.
점심때가 되어서야 하인이 모습을 나타냈고, 하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밥을 짓고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타고르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다가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런 고함 속에서도 계속 빗자루로 청소하던 하인이 잠시 뒤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상대의 행동과 말을 보고서 무조건 잘못한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과 행동에도 이유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상대가 먼저 말해야 하지 않느냐고도 할 수 있지만, 타고르 하인의 경우처럼 너무 큰 슬픔에 말할 수 없는 상황도 될 수 있습니다.
“틀렸다”라고 말하는 내가 틀린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틀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해의 마음으로 내가 먼저 말하고 먼저 행동해야 했습니다. 저 역시 참으로 많은 잘못된 판단으로 상대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음을 반성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너무 큰 사랑으로 다가오는 주님께 제일 큰 상처를 드렸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을 다 일구어내고서 그 밭을 소작인에게 맡겼지만, 이 포도밭 소작인들은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당연히 자신들의 것처럼 생각하면서 소출을 받아 오라고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모욕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 소작인들의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정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장 기본은 사랑의 판단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특히 주님께 대한 사랑이 아닌,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랑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줄 은총과 사랑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1독서에 등장하는 토빗은 평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 기리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와 선행의 길, 사랑의 길을 힘차게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상처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전하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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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침내 선이 악을 이기다>
마르코 12,1-1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마침내 선이 악을 이기다>
악이
선을 만나면
결코
선해지지 않으며
선을 없애러
더욱 악해지지만
마침내
선에 의해 없어지리니
선은 있게 함이니
스스로 영원히 있을 것이요
악은 없앰이기에
그마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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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선행에 관하여>
“나 토빗은 평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었다.”
구약성서 중에 토빗기는 드물게 선행의 모범으로 토빗을 제시하는데 참 아름답기는 하지만 토빗과 같은 삶을 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토빗과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것도 평생 이런 삶을 살고 싶습니까?
저의 경우 한때 이런 삶을 살았던 적이 있고 또 살고 싶기도 하지만 살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선행을 한다는 것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악행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비교하면 분명합니다.
악행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그 안에 악만 가득 차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에 비해 선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선과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그런 것이니 분명 행복하지요.
그렇습니다 선행은 상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행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자기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했을 때 아니, 선행을 하려는 마음만 먹어도 사랑이 내 안에 스며들고 행복감이 내 안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또 하고 또 하는 거지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저는 선행의 중매를 많이 하는 편이고, 어제도 그런 중매를 했지요.
한국에 유학을 온 친구들이 영어도 배우고 싶어 하는데 마침 영어를 잘하는 친구가 있어서 이들을 엮어 줬지요.
그런데 이런 중매쟁이 짓을 하고 가면서 생각해보니 제가 영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선행을 밀어붙인 것이 아닌가? 한두 번은 큰 무리가 없지만, 매주 봉사는 무리가 안 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중매가 그 친구를 매주 행복하게 할까, 매주 부담이 될까 걱정된 것이지요.
실제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여기 밥상의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분이 많지 않고 그래서 꾸준한 분들을 보면 정말 고맙고 정말 대단해 보이지만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 토빗은 자기 생일잔치에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주님께서 선행을 하되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라 하신 바로 그대로지요.
저 같으면 제 생일잔치에 제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해 저의 생일잔치가 유쾌한 자리가 되기를 바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자리를 망치는 불청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과거 그런 경험이 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식사하는데 곤궁한 분들이 껌을 가지고 와 사달라고 하면 순간 즐거웠던 분위기가 잠시 싸해지는 경험 말입니다.
그러니 토빗은 자기 생일잔치마저 즐거움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한 것이고, 즐거움의 행복이 아니라 희생의 행복이요 사랑의 행복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토빗은 희생의 행복을 넘어 위험한 행복도 선택합니다. 살해당한 동족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내주는 선행을 한 것이고, 그로 인해 자기 재산이 몰수되고 쫓기게 되는 선행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위태로워지지만 자기의 행복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행복이 위태로워지는 것이지 자기 밖의 상황이 위태로울 때 행복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겁니다.
이런 강한 믿음, 확신이 있었기에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평생 선행을 멈추지 않고, 그 선행이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고 아들에게까지 이어지는데, 그 아름다운 얘기를 우리는 이번 주 계속 따라가며 마음에 새기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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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승리의 삶>
-예수성심의 성인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는 비유라가 보다는 우화입니다. 이에 대한 200주년 성서주석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해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유는 큰 뜻 하나를 전달하는데 반해 우화는 세세한 뜻 여럿을 알린다. 우화에는 비교점이 많다. 포도원=이스라엘 백성, 소작인들과 집짓는 이들=이스라엘 백성 또는 그 지도자들, 포도원 주인=하느님, 종들=예언자들, 사랑하는 이들=예수님, 다른 이들=이방인들, 그리스도 교회, 버린돌=십자가의 예수, 머릿돌=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니 이 우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구약 예언자로부터 신약 이방인 전도시기까지의 구원사로 십자가(버린돌), 부활(머릿돌), 그리고 이방인 전도(다른 사람들)를 열거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인 포도원 소작인의 우화는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우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입을 빌린 이방인 전도를 추진한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언뜻보면 십자가의 사건은 실패인 듯 하나 하느님의 놀라운 승리, 즉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결코 그 누구도 하느님의 구원섭리의 역사를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은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삶의 마무리를 승리로 이끄셨다는 초기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교회의 신자들의 해석입니다.
이들의 렉시오 디비나의 묵상 깊이가 참 놀랍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시편 118장(22-23)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을 읽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화의 끝무렵 예수님의 입을 빌려 전개되는 내용들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구약은 끝나고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에 의한 예수님께서 당신 십자가와 부활로 신약의 그리스도 교회가 영적승리의 주인공이 된다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위해 최선을 다한 순교적 삶을 살았을 때 결국 하느님은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한결같이 경외하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없다는 것이며 결국은 영적승리의 삶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112장도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그의 의로움이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순교적 삶에 항구한 의인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환호송 묵시록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씻으셨네.”
바로 이런 예수성심의 사랑에 감격한 성인들이, 또 다른 예수님들이 세세대대 영적승리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으니 이 도도한 하느님 승리의 물결을 멈출자 누구이겠습니까? 2000년 유구한 가톨릭교회 역사가 그대로 하느님의 승리를, 우리의 궁극적 영적승리를 상징하니 우리의 영적전의를 새롭게 합니다.
오늘부터 제1독서는 토빗기의 시작입니다. 다른 교파에서는 외경에 포함시키나 우리 가톨릭 교회는 흥미와 드라마로 가득한 가장 유쾌하고 재미있는 성경중 하나로 여깁니다. 토빗기의 서두의 고백에서 토빗의 매력적인 인품이 예수님의 제자라 해도 손색이 없고 우리 삶의 귀감이 됩니다.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플었다.”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 자선의 삶으로 일관했으니 얼마나 멋진 아름다운 삶이었는지요! 오늘은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이 순교성인 또한 예수님을 그대로 뒤따른 또 한분의 예수님이요 영적승리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675년에 태어나 754년 순교하기 까지 79년 한생애 자체가 감동입니다. 독일의 사도요 수호성인인 앵글로 색슨족인 베네딕도회 출신의 성 보니파시오는 선교열정에 불탔던 스스로 순교의 삶을 자초했던 분입니다.
베네딕도회에 입회하여 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수와 설교가로 명성을 떨치지만 이를 모두 내려놓고 프리슬란트 지방의 선교사로 나갔고 이어 너슬링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이를 사양하고 몇차례 교황을 알현한후 이교들에게 선교하라는 명령을 받고 또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독일의 선교활동도 참 눈부십니다. 교구마다 수도원을 세우고, 그가 세운 풀다 수도원은 독일에서 종교적, 지성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지속적인 선교활동과 영성적 쇄신을 위한 근거지가 됩니다. 그러나 성인은 결코 안주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백절불굴의 지칠줄 모르는 선교수도사제였습니다.
성인은 보장된 마인츠의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이교도의 관습에 떨어진 프리슬란트 선교에 여생을 바치던중 754년 6월5일 성령강림대축일에 개종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려고 준비하던중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동료 52명과 함께 살해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에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순교성인들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또 한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싶은 중국에 파견되어 눈부신 활약을 펼친 선교사로 가경자 마태오 리치(1552-1610)입니다. 하비에르 프란치스코가 못다 이룬 중국 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신화적 인물이 마태오 리치입니다. 교황님은 5월31일 수요 일반 접견 교리교육에서 전주의 우리 김대건 안드레아에 이어 마태오 리치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강론을 했습니다.
참 불가사의한 백절불굴의 선교사 마태오 리치는 중국 파견에 앞서 무려 18년간을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수학, 천문학 지식은 물론 그의 학식은 참으로 광범위했고, 대화에도 능해 현인이자 학자로 중국 황제는 물론 고관들에게도 전폭적인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복음의 봉사자로 온 열정을 쏟았습니다. 1610년 북경에서 57세로 선종하기 까지 전생애를 선교에 바친 선교사로 황제의 허락에 의해 중국땅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이었습니다.
같은 예수회 회원으로서 교황님의 마태오 리치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물씬 풍기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저절로 감사, 감탄, 감동하게 되는 예수성심의 성인들이요 영적승리의 빛나는 모범들인 성 보니파시오와 가경자 마태오 리치입니다. 새삼 두 분 선교사들을 통해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계속 예수님의 뒤를 잇는 순교성인들의 영적승리의 삶에 저절로 복음의 시편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순교적 삶에 항구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마지막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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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12,10)
<모퉁이 머릿돌이 되자!>
오늘 복음(마르12,1-12)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당신에 앞서 파견된 수많은 예언자들의 박해와 죽음과 그리고 참예언자로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파견된 당신의 죽음을 언급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치고는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나갑니다. 포도철이 되자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종을 보내어 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을 받아 오게 합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의 뜻을 거절합니다. 주인의 종들에게 매질하거나 죽여 버립니다.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아 있었는데,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르12,7-8)
우리도 소작인들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 복음화'라는 주인이신 주님의 명을 받고 이 세상 안으로 보내어진 소작인들입니다.
'나는 이 복음화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 소작인인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도 복음에 드러난 소작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으로부터 파견의 명을 갖고 세상에 파견된 또 다른 예언자들을 괴롭히거나 죽이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곰곰이 우리 각자의 모습을 성찰해 보고 다시금 하느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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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6IYEYQatT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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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마르 12, 8)
소중한 하루의
일기(日記)를
봉헌하듯
이 하루를
이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폭력을
멈추는 것이
기도이며
평화입니다.
너무 자주
소중한 관계마저
없애고
깨뜨려 버리는
끔찍한
우리 자신입니다.
거두어들이는
욕심보다
내려놓는
겸손이 더
필요한 우리
여정입니다.
욕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할
은총의
시간이 가득
펼쳐집니다.
하느님마저
소유하고
하느님마저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 내면이
위험수위를
이미
넘었습니다.
의미 있는
시간은
새로워지는
시간이며
사랑을 다하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길의
모색은
사랑과 감사의
길로 우리 내면을
바꾸는 것입니다.
삶이 풀리지
않는 것은
헛된 욕심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음과 마음이
언제나
같이 걸어가는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이제 탐내지
않습니다.
생명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고
빛나는
오늘을 주시는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바뀌면
온 세상이
다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선물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마음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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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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