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복사 성가정은 묵주기도의 은총
묵주기도는 내 신앙생활 시작과 때를 같이한다. 1951년 12월에 정규량 신부님께 세례를 받고 이듬해
2월 초 매괴회에 가입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을 찾아보니, 매괴회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께
공경을 드리고 특별한 도움을 청할 목적으로 도미니코회 수사가 1470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언제 한국에 매괴회가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다블뤼 신부님의 1846년 편지에 "교우들을
매괴회와 성의회에 가입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뤄 프랑스 선교사가 첫 입국한
1836년 직후에 매괴회가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매괴회에 가입한 때로부터 60년 넘게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친 덕인지 성모님께서는 부족한 나에게도
말로 다할 수 없이 많은 은혜를 주셨다. 요즘에도 매일 150단을 바치고 외국 나갈 때도 손에서
묵주를 놓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열심한 기도가 많은 분들께 전달이 됐는지 해외에 있는 자녀들이나
주변 지인들이 어려운 일에 맞닥뜨리면 내게 연락을 해 묵주기도를 해주기를 청한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들으면 묵주기도가 꼭 필요하기에 묵주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그러니 하루에 내가 해야 할 묵주기도 책임량(?)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묵주기도의 힘은 참으로 묘하다. 기도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 오랫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면
반드시 기도의 은사가 있음을 지금까지 살면서 무수히 경험했다. 혹여 그 사람에게 가지 않더라고
묵주기도의 은사는 필요한 누군가에게는 꼭 간다고 확신한다.
학생회원의 일원으로 용산성당을 짓기 위해 산천동 꼭대기까지 벽돌을 나르면서 성전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며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 기도 덕분에 전쟁 직후 모든 게 부족하던 그
시기에 용산성당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해방촌본당에서 18년 동안 총회장을 맡아 빈약한 성당을 증축 확장하고, 빈곤에 허덕이는
인근 주민을 성당으로 인도하며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깨닫도록 열심히 전교했던 것도 묵주기도로
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존경하는 박희봉 신부님의 임종 때도 우리 부부는 병원 침상 곁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선종의 은혜를 성모님께 전구했다. 또한 종교가 다른 사돈댁에서 시집 장가온 며느리 둘과 사위가
세례를 받았고 그 부모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덕에 이제 손자손녀들까지도 복사를 선다.
그러니 나와 우리 아들들 손자 손녀들까지 3대가 복사를 서는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음도
묵주기도의 은총이었다.
내게는 100여 개의 묵주가 있다. 김수환 추기경님과 김옥균 주교님께 받은 묵주를 비롯해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들께 받은 묵주가 많다. 이 묵주는 형제자매들이 세례, 견진을 받거나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지인들이 찾아오면 선물한다. 묵주를 선물할 때 묵주기도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선물할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명동성당 제대 위에 있는 매괴회 15단 성화를 포켓용으로
만들어 묵주와 함께 선물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성화를 보면서 묵상하면
신자들이 묵주기도의 신비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되고 기도가 더욱 간절해져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현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교구장대리인 박신언 몬시뇰이 차를 타고 해방촌성당 근처를 지나가는
중에 어느 노인이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며 걸어가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열고 혹시 아는 신자인가
하고 자세히 봤더니 그게 바로 나였단다.
그게 묵주기도를 바치는 오늘의 내 모습이다. 한 알 한 알 묵주알을 넘길 때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 사랑이 느껴진다. 그러니 주님께서 날 불러가시는 날까지, 주님의 집에서 성모님을 만나게
될 그날까지 묵주를 놓을 수 없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유용근 베네딕토 요셉 라브로(한국교회사연구소 이사)
첫댓글 장호원의 매괴성당이 생각나네요 감사
묵주기도 저도 매일 바치지만
대단한 분이십니다.
성모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