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주유소
김이삭
쓸쓸히 늙어 가는 주유소가 있다
논이 있던 자리에 아스팔트 길이 나고
명아주풀 씨앗들 무심히 가을볕을 쬐고 있다
그는, 응달진 곳에 묻힌 경애왕의 悲哀도
풀숲에 떨어져 뿌리내리지 못하는
어린 소나무의 슬픔도 모른다
아니 세상일에 깊이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안다, 귀를 막고 입을 닫는 것이
현실에서 살아 남는 법임을
알면 알수록 올가미에 빠지는 것이 세상살이임을
캄캄한 밤 허기진 자동차에게 주유한 액수만큼
속도를 충전시켜주는 일만 할뿐이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이 가는 것은 길섶에 아슬아슬하게
터를 잡은 민들레 씨앗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 하얀 것들이 冠을 쓰고
어디든 마음 붙이는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속도에 중독된 사람들 천 년 사지의 안부 묻지 않아도
그는 결코 서운해하지 않는다
다만 한 때는 번창했던 주유소
불빛이 희미하게 꺼져 가는 것보다
질주에 감염된 휘발유를 팔 수 밖에 없는
生이 안타까운 것이다
한실리 분교
한약방 자리에 한실분교가 들어섰다
약봉지 대신 책상과 걸상이 들어오고
아침마다
땡, 땡, 땡
종소리 울리면
맨드라미 꽃밭 붉게 피던 자리
아이들 벗은 신발이 환하다.
가끔씩 해초가 밀려오고
교실 풍금도 귀를 열고 파도 소리를 듣는다.
운동장 귀퉁이 서 있는
은행나무에 노란 쪽지가 배달되고
하늘이 밀감 색깔로 물들면
우르르 교문을 나오는 아이들 위로
개밥바라기 야간 자습하러
교문을 마악 들어선다.
200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와 2010년 기독신춘문예에 각각 동화가 당선돼 문단에 올랐다. 제9회 푸른문학상을 받았으며 월간 어린이와 문학에 동시를 추천받았다. 지은 책으로 시집 <베드로의 그물>과 동화집 <꿈꾸는 유리병 초초>,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으로 펴낸 동시집 <바이킹 식당>이 있다. 이 책은 한국동시문학회의 <2012 올해의 좋은 동시집>으로 선정됐다.
시 감상: 시력이 쌓이고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내는 시인이라면
희로애락도 값싼 주관을 넘어
객관화 해 바라보게 된다
질료생명의 물활론적 사고.
웅숭깊은 시인의 시선은
그 슬픔의 면적을 사물로 이입해
무난한 수박 겉핥기를 넘어
점층적으로
편차적 시의 깊이를 확보해 간다
- 두레문학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