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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과격하고 지혜롭지 않은 사실상 親좌파 ‘노이즈마케팅’을 넘어서,
-[다빈치코드]의 한국기독교의 황당반응과 6.15 비판의 대중홍보 미약의 연관성-
1. ‘독재자 스탈린 시대’에 꽃핀 ‘바흐친’의 미학을 아십니까?
영화 [다빈치코드]를 둘러싼 한국 기독교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특히, 독재자 스탈린 시대에 꽃을 피운 ‘바흐친’의 미학을 아느냐고 간절하게 묻고 싶어졌다.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목사님들께 간절히 애원하며 묻고 싶다. 이는 황장엽씨가 제자 김정일의 장악력에 쳐져 좌천당한 자기 모습 발견하기보다, 눈물나고 ‘억울해’ ‘억울해’ ‘정말 억울해’ 하고 외치고 싶은 부분일 것이다. ‘바흐친’의 문학이론을 적용하여 기독교 문학을 연구한 사례가 정말 많다.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B9%D9%C8%E5%C4%A3&frm=t1&sm=top_hty
서구에서는 ‘기독교인’과 ‘천주교인’ 매스미디어 기자들이 영화를 보는 데에서 ‘정나미’가 팍팍 떨어지게 했다. 반면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변함없이 사실상의 ‘親좌파 노이즈마케팅’으로 기여하고 있다. 성경에 교인은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되어 있지만, 뱀처럼 찝찝하고 비둘기처럼 단순무식한 입장은 아닐까 묻고 싶어진다.
‘근대사회’를 넘어서 ‘탈근대’를 간다고 하면서도 중세교인 논리를 적용하여 현실세계는 알 것 없다고 여기고, “뭐뭐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아멘” 하고 그렇게 되어야만 된다고 우기는 방식으로 사료되는 데, 이는 배움이 너무 적은 20대 초반의 한총련 과격투쟁자와 다를 바가 없는 저급한 방식이다. 현실에서 되지 않을 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놓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안된다’하고 답함을 아는 게, 근대 기독교인이다.
성경 구절 독해에서 예수님의 형상과 본질적인 하나님을 만남이 가능한 이들에게서는, 스탈린 공산 독재 시대를 살아간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 이론’ 행간에서 ‘근대사회’에서 가능할 수 있는 기독교인의 사유방식을 만날 수 있다. 1970년대에 ‘民衆文學진영’의 리얼리즘 논리가 ‘모더니즘’의 무정함과 박정함을 비판하는 논리형식에, 단어만 바꿔 끼워서 러시아정교의 이상상태와 멀어지는 방향을 비난하는 논리를 닮아가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脫근대 논리 생산성의 배경인 ‘다원주의’논리 배경의 이슬람자본의 기독교 교회 잠식에 대해서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다. 공산독재 사회는 ‘이성의 도구성’에 의하여 인권이 학살되는 사회이다. 스탈린 공산 독재 사회의 인권 학살극은 상당히 많았다. 자기 자신을 ‘사울왕’의 죄악을 변태적으로 확장하는 측면으로서의 ‘이성의 만용’이 되지 않는가 하는 인식이 있어야 된다.
‘친애하는 거시기 님 가라사대.....’에서 시작하여 나가는 공산주의 담론 대부분은 독백 담론이다. 황장엽씨는 소련은 공산당이 서기장으로서 민중의 하수인인데, 북한은 수령으로 민중을 억누른다고 하는데, 그것은 ‘철학적 언어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바흐친 이론을 적용하여 문체를 세심하게 해석하는 비판해석학(‘페터지마’의 이론)을 적용하여 본다면, 對話的이며 多聲的인 언어를 ‘일언반구’도 쓰지 않는 소련공산당 언어를 사용하는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민중을 편드는 바”는 ‘언어 테크닉’일 뿐 ‘실질’은 아닌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전위적’ ‘혁명적’ ‘권력적’ ‘우두머리적’ 차원의 앞선 사람이란 우월감이나 우두머리라는 우월감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아파하는 입장에서 민중과 더불어 호홉을 공감할 수 있는 입장에서의 ‘깨어 있음’이겠느냐는 차원이다. ‘신문’의 정치란에서 ‘대화정치’를 싼티나는 말로 ‘쑈부 뜨는 거’ 수준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대화정치는 기본적으로 민중과 더불어 아파하기에, 마음 안에 있는 많은 숫자의 다른 목소리의 존재를 전제하게 된다. 서구 기독교인과 천주교인이 매스미디어를 장악하여 대중심리를 공격하되, 일단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괴상한 소설이라도 만들 자유를 허락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2.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실상 親左派 노이즈마케팅 : 말로 겁주기로 군사정부 이미지를 내라?
“자아불확실감에서 기인되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결정불안, 예기불안은 무엇에 의해 진정시킬 수 있으며, 무엇에 의해 해소될 수 있을까?
첫째로 결정불안은 집단에 의존하여 경감시킬 수 있다. 일본인은 개인일 때는 조심스럽고 소극적이지만 집단일 때는 사람이 변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된다는 점은 때때로 외국인이 지적하는 바이다.
그 이유는 개인에 의한 결정보다도 집단에 의한 결정이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결정한 경우에는 자기 결정에 수반되는 자기 책임의 일부가 집단결정에 의한 집단책임에 흡수되어, 그만큼 정신적으로 편안해지기 때문이다.”(미나미 히로시, 서정완 역, [일본적 자아], 소화, 1996. 21쪽)
문민정부 때 ‘좌파운동가’를 보수진영에 편입한다는 이유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경계심을 가졌다. 국민의 정부 때엔 좌파대통령 출현으로 여겨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바짝 긴장감을 가졌다. 우파 미디어는 좌파의 자유 파괴의 문제점을 잘 찾은 듯 하다. 그러나, 일관되게 좌파의 자유 파괴의 문제점을 덮어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대항혁명 역량이 강한(?) 좌파 이미지의 우파로 규정하는 것만의 연속이었다. 즉, 좌파 약진의 두려움을 잊고자, 좌파 이미지를 덮어쓰며 ‘세뇌당함’을 자처하는 입장인 것이다. http://www.newdaily.co.kr/m_debate/?im=free&sm=&number=2182&fid=2182&listno=2008&page=1&keyword=&keyfield=&pid=view&aid=
우파 담론에 반복되는 일관성은 ‘말로 군사정부’ 이미지를 내서, ‘어흥, 무섭지’차원으로 좌파의 굴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발상이다. 좌파가 세뇌한 바에서 세뇌된 사람을 반대로 엎어내기 위한 ‘미세한’ 연구는 늘 정지된 상태이다.
그렇게 ‘좌파적’ ‘혁명적’ ‘개혁적’ ‘진보적’ 우파라고 하여 좌파시대의 자신 안의 불안감만 떨쳐 낼 뿐, 사회 현실을 달라지게 한 게 뭔가요? 자기가 그러한 과정에서 더 좌파에 세뇌되어 좌파를 편하게 해준 것 말고 달라진 게 뭔가요? ‘혁명적’ ‘좌파적’ ‘개혁적’ ‘진보적’ 우파라고 해서 좌파가 겁을 먹습니까? 황장엽씨가 제자 김정일에 밀린 것보다도 더 구슬프게, 기독교 목사님 붙잡고서 반공하는 기독교이론에서 이러한 게 있는데요,.... 하고 애처롭게 우파본론 말해야 될 분께 우파 본론을 설파하는 것이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요? 마음에 방 여러 개 나눠서 좌파 이론 조금 알 수 있다고 하며 개방적이었다가,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우파의 모습이 정말 안 보이십니까?
말로 하는 차원으로는 ‘어처구니 없게 머리 안 쓰고’, 행동차원으로는 무력 제압을 꿈꾸는 바를 시행할 수 없게 된 상황에 있거나 그 핑계로 온순해져 버린 상황일 것입니다.
3. 大韓民國 國民으로서의 ‘集團我’를 거부하는 右派?
박정희대통령의 이론은 분명히 서구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기반의 이론이다. 그러나, 완전히 서구의 것은 아니다. 박정희대통령은 ‘조국’(대한민국)과 ‘민족’(대한민국 국민+김일성 체제 부정하거나 동화안된 북한 주민)이란 ‘集團我’를 정당성의 기반으로 자주 사용했었다.
“이처럼 운명과 결부된 집단, 즉 운명공동집단에서 자아의 결정력이 개인을 초월한 힘에 의해서 증강된다는 사실은 운명을 공유하는 집단이 갖는 위력에 의존한다는 뜻이지만, 거기에는 집단에 대한 자아의 심리적인 일체화를 통한 집단의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다. 즉, 집단아는 개인아를 초월하고 자아불확실감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앞의 책,23쪽)”
황장엽씨의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의 경우에서도, <일본의 집단자아>를 우위로 놓는 일본농촌의 개인 소외 상태를 전제한다. 박정희대통령의 ‘집단아’(사실상, 대한민국 국민)와 황장엽씨의 ‘집단아’(김정일 도와주는 극소수 인텔리 뺀 사실상 북한주민전체)를 연결하여, ‘사회민주주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렇게 읽어주고 싶은 욕망이 만드는 개념 모사물일 가능성이 높다.
“집단아는 그 집단에 속하는 구성원들의 자아를 강화하고 기업의 영원불멸을 믿으며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도 구성원 개개인의 자아를 보호해줄 것을 기대해주게 된다.(앞의 책, 35쪽)
종신고용제 시대의 ‘진로그룹’과 ‘한보철강’의 빚경영 때 보여준 ‘대마불사론’과, 대한민국 국민의 안보위협 상황에서의 외국인들이 보기에 신비스러울 정도의 만족감은 ‘일본적 자아’의 <집단불멸신앙>에서 바라봐야 한다. 즉, 미국인 정보기관은 대한민국 국민의 세뇌 상태로 다른 신념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그 순간에, 대한민국 국민은 일제 잔재의 영향으로 ‘개인 자아 성숙’이 미약하여 충분히 알지 못했을 때 ‘바람 따라’ 선택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미국 미식축구 영웅 하인즈 워드에 대하여 ‘바람’으로서 지지했다가, 초호화 꽃미녀 미셀 위가 지나가고 난 뒤에 ‘시들’한 상황은 증거가 될 수 있다.
일본인이 종신고용 상태로서 ‘우리 회사’가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비슷하게, 빚경영 상태에서 ‘한보철강’근로자가 가졌기에 IMF가 터졌다. 김영삼정부의 부실경영도 김대중야당지도자의 데모를 통한 경제 난국도 아니라, 그 때 모든 이들이 ‘대기업 대마 불사론’을 외쳤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국가안보에 나긋한 입장도 역시 마찬가지의 ‘대마 불사론’이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보니, 어디를 봐도 6.25의 김일성 불시 남침의 근거가 없는데도 당시의 일반국민들의 증언이 ‘불시남침’으로 적힌 바가 드러난다.
대한민국 정치판의 ‘여권 어드밴티지’는 일제 잔재의 특성을 가진 개인 자아 미흡한 이들이, 권력에 동화되면서 집단아를 찾아가는 성향을 반영한다. 권력 따라 선택하면 ‘그까이꺼 대~충 손해는 안보겠지’ 하는 인식. 그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집단아’의 마음에 찾아가는 전형적인 교과서형식을 매스미디어에 찾아가서 전복시켜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완벽하게 세뇌되었어~! 하고 포기하는 그 순간조차도 극단적 책임주체를 빼고서는 결코 포기해선 안되는 부분이, 일제 잔재로서의 국민성을 가진 이들이 ‘부끄러움’을 지우고자 허구헌 날 일본 욕을 하는 부분 때문일 것이다.
4. ‘공산주의자’ 속에서 핍박받는 ‘자유주의자’, ‘자유주의자’속에서 괴로움 느끼는 ‘공산주의자’ 양쪽에 입막음하는 ‘中道主義者’의 통일론이 최악으로 한심한 이유.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507&C_CC=BB
‘통일’에 겁내는 사람 없다. ‘김정일’에 겁내는 사람 없다. 영화 [다빈치코드]의 목사님 지도부의 ‘노이즈마케팅’ 시도 등에 짜증내면서 정말 아니라고 화를 내는 사람만 있는 것이다.
좌파 정권 시대이다. 당연히 전체 국민을 좌파로 물들이려고 한다. 여기에서, 국민의 정체성을 최대한 약화시키는 방향의 운동이 ‘정통 우파’라? [톱클래스]의 이전 제호 [징기스칸]에서 발레리나의 발을 보여주면서, 완벽하게 외계인이 되는 입장을 전망으로 그린 조갑제기자의 속내는 논리적 차원으로는 수상하다.
통일에 겁내는 것이 아니라, 우파권력의 기본이 무너진다고 겁내면서도 ‘배포 큰 사무라이요!’하는 일본 마니아 보수파에 대하여, 영 아니라는 울분을 토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상, 역사책은 집단아를 관리하는 ‘型’의 의미를 띤다. 따라서, 집단아를 부정하는 측면으로서 좌파 중고등학교 역사책이 쓰여진다면, 포커스를 그것에만 맞춰서 고정하면서 ‘대선’때의 정체성 싸움에 맞서 싸우도록, 지지자 내부에서 결속력 강한 ‘型’을 암송하고 있는 바를 확인함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질문] 좌파가 왜 ‘민족’이란 화두를 내세웠을까요?
[답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집단아를 파괴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6.15 2항을 어중이떠중이 대중들에게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집단아’를 넘어설 수 있는 바로서의 ‘매개’가 필요하다. 따라서, 6.15 2항을 어중이떠중이 대중들에게 ‘사악한 것이다’라고 알려주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집단아를 강화시켜야 함이 논리적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유보장의 법규칙이 중요함을 알려주려면, 대중들을 대한민국 집단아의 소중함으로 길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 없이 대중들을 설득한다? 영화 [다빈치코드] 앞두고 울부짖는 교인들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충고하는 절대 다수의 감정을 소수의 영화홍보교인이 알까 의문시된다.
[뼈 있는 농담] 드라마 <연애시대>는 ‘동문회’를 “미혼, 기혼의 남녀들이 계급 계층별로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으로 정의를 내렸다. 이러한 시대감각에 맞춰서 ‘이북 실향민’을 내세우면, 자유주의 사상과 대한민국을 좋아하며 ‘침묵하는 다수’도 반영하라는 45%와 자유주의 사상에 둔감하고 북한귀환을 꿈꾸며 ‘외치는 소수’만 중요하다는 55%로 나뉘고 있는 공간이라 정의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계급 계층 미혼 기혼의 차이를 ‘동문’이란 이름으로 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북 실향민 보편을 지지할 듯 하면서도, 최근 들어서 일관되게 55%만을 대변하는 일부 집단이 있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자는 개인적 성격을 갖는 차원이다. 자유주의자가 어쨌든 모여 있으면 요새는 ‘多衆’이라고 부르게 된다. 집단아 성격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의 다중과 공산주의적 집단아가 나뉘어져 있어야, 서로간에 행복하다.
6.25 전쟁을 체험한 세대 말고는 ‘전대협’ ‘한총련’치하에서 공산주의적 집단아와 수평적 관계를 이루어본 끔찍한 경험의 자유주의자들이 많다. 통일을 겁내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맞지 않는 코드의 이들과 억지로 같이 있어야 ‘행복’이 증진된다는 발상법에 대하여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박성조 교수의 [뭉치면 죽는다]차원의 서독과 동독의 이 부분을 얕잡아 본 사례도 주목된다. 이 부분을 얕잡아 보려 한다면, 자립형 사립고 주장하거나 교육 여건 찾아서 외국으로 나간 사람들을, 강제로 평균화 시키는 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다. 여기에도 동의 안하면 정말로 살 떨리는 악마적 이기주의로 여겨지는 것이다.
5. 6.15 논리의 ‘이에모토’와 전형적인 논리를 대중들의 뇌리에서 부숴 뜨리려면, 머리를 써야 한다.
“제자 입장에서 볼 때, ‘이에모토’제도의 큰 매력의 하나는 고정형을 그저 흉내만 내고 있으면 예술적으로도 생활적으로도 보장을 받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는 자아의 확실감을 얻기 위한 하나의 유효한 심리적 토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이에모토의식은 제자들이 자기의 자아를 권위있는 이에모토 집단과 동일화시킴으로써 집단아를 쇡득할 수 있으며 그에 의해서 자아를 보강, 확대할 수 있다. 권위있는 이에모토 아래에 속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자신의 자랑이며 개인의 자신감을 강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셋째, 제자들은 이에모토의 통제하에서 예술적인 면에서나 생활면에 있어서도 일치된 행동을 취함으로써, ‘나카마의식’ 연대감이 생긴다. 이 때 운명공동체 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아의 안식처와 같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아의 확실감을 다소나마 강화하게 한다.(앞의 책, 188쪽)”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의 미국 민주당 선거운동단은 한국처럼 선거운동 하기 쉬운 곳 없다고 여길 것이다. 대중심리 기획단 왕초로서의 김대중대통령은 ‘3단계통일론’으로서 책을 냈고, 그 책을 조금씩 배워서 부분적 실현화 과정으로서 살을 더한 막대한 지식인이 있다. 따라서, 김대중의 ‘3단계통일안’을 매스미디어에 나가서 전복시키면 되는 것이다.
김대중의 방북은 이에모토의 통제아래에서 나카마의식을 확인하여 강화하게 하는 ‘반보수 연합전선’의 구축의 의도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하여, 열린당 영구 집권론을 추구하려는 것이 궁극 목적이다. 김대중 방북의 궁극 목적은 김대중 제자들이 단결하여 권력 사수하자는 입장의 결론을 갖는다.
그렇다면, 열린당 집의 근원인 ‘이에모토’인 김대중전대통령의 통일론의 반 민주 반 자유민주주의적 성격을 만화와 그림으로 홍보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아직도 6.15 선언 2조가 불법이라는 울분의 비분강개에서 머문다. 이러한 비분강개는 조갑제기자 등장 이후에 좌파에 노이즈 마케팅 기여와 탄핵 역풍에 이어서 오늘에 이르르는 비생산성이다.
6.15 2조를 대중심리에 퍼뜨리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집단아 약화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 징기스칸도 유목주의도 국가연합주의도 분권주의도 행정도시도 남북경협도 방북도 전부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집단아 약화’를 겨냥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연적으로 보장된다는 ‘대마불사론’에 입각해서 속지 말고 꼼꼼하게 따져보자고 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얼마를 설득해 냈는가?
인터넷을 장악한다면서 게시판에 ‘도배’말고 얼마나 넷심의 마음의 뿌리를 움직였는가? 넷심의 마음의 뿌리를 움직여야 ‘대선’을 이긴다. 낮은 곳에 서서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이 ‘열린당’을 지지하지 않도록(이번 선거전을 보면, 빨간 색을 슬슬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열린당의 광고문을 잘 보라) 어떻게 최선을 다해서 가르칠 수 있는가?
이러한 이성적 노력이 자리할 자리에 ‘크고 강하게 큰 소리로 모쳐 외치면 된다’고 하는 무대뽀 정신의 답변이 예상되어서 서글퍼진다.
*. 6.15 선언 2조 비판은 별개의 글로 한다.
첫댓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 정말 아는 것인데, 우파는 왜 이리 모르는 것을 안다고 설칩니까?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한 마디 하기보다는 침묵을 권합니다.
잘읽었습니다...바다를건너다님 사실 좀 어렵거든요^^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