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오늘은 7월의 첫 날에다 하반기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제 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는 때이기도 합니다.
더위에 온 몸과 마음이 지치기보다 오히려 이 더위를 즐기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밤새 오염된 나의 영혼을 주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 주옵소서.
나의 옛 사람으로 행하려는 자기주장의지는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새롭게 시작하는 이 하루도 주님의 뜻을 잘 알아 주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이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으로 주님과 연합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6:1-7
제목 : 명목상 기독교인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어 날마다 영생을 누리는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 살게 하소서.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으리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나의 묵상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갔다.
예루살렘교회에 구제사역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한 불평이 점점 많아졌다.
그 이유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매일하는 구제에 자주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열두 사도들이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사역에 힘쓰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 곧 형제들에게 이 일을 맡기기로 하고 자신들은 오직 말씀과 기도에 힘쓰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형제들 중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이 구제사역을 전담하기로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였다.
그들을 사도들 앞에 세웠더니 사도들이 그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져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심지어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기 시작하였다.
초대교회를 보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많아지기도 하고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경우도 제법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의 복음전도로 인하여 3,000명 때로는 5,000명씩 주께로 나아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현상은 아직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는 성령의 능력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종족의 경우 복음을 전하면 다수가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님의 뜻은 이런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까지 모두 복음을 듣게 되면 그제야 종말이 올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복음사역이란 죄에 종노릇하는 주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끄집어내어 구원하므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은 주님의 주권과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영생을 약속하셨고 또한 그들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시마고 약속하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는 단순히 믿는 자의 숫자를 늘리거나 많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믿는 자의 숫자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자녀 많이 낳기 운동을 벌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하여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버겁기 때문에 적게 낳아서 확실하게 키우려는 마음은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인하여 국가적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심대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예전에야 한두 명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구호도 나오긴 했지만, 이제는 자녀들을 많이 낳지 않기 때문에 국력에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슬람에서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면서 한 남자가 여러 명에서 십 수 명까지 낳는 경우를 본다.
그들은 오일머니를 매개체로 하여 많이 낳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며 그들이 전 세계를 장악하도록 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서 기독교 내에서도 기독교인 늘리기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자녀들을 많이 낳아서 기독교인들의 숫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도를 해도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자녀를 낳아서 자연증가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옳은 것인가?
물론 자녀를 주시는 대로 낳는 것이야 그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으니 당연하지만, 그것이 단지 기독교인 숫자 늘리는 목적이라면 나는 결코 옳지 않다고 본다.
눈에 보이는 숫자를 늘려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숫자가 많은 다른 종교와 세를 견주겠다는 말인가?
기독교는 결코 숫자로 경쟁하는 곳이 아니다.
아무리 기독교인 숫자가 적어도 여전히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교회는 부흥하고 있다.
우리가 볼 것은 지상적인 교회, 눈에 보이는 유형의 교회가 아니라 그 속에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주적인 교회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명목상 기독교인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어 날마다 영생을 누리는 자들이다.
주님이 택하시고 예정하신 이들이 주님 안에서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며 그 나라를 미리 맛보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 어린 모습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결코 마지막 때에 믿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진짜 믿는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인데 믿는 자라도 많은 경우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이 많다.
이는 다 현실적인 만족과 쾌락을 누리려고 하는 욕심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숫자를 많이 늘려서 이 땅에서 세를 과시하고 이것이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의 힘이라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초대교회 당시 복음전도를 통해서 3천 명씩 또는 5천 명씩 믿는 자들이 나온 것은 단순히 기독교 숫자를 늘리기 위함이 아니라 거기에 생명이 있음을 확증하는 것이며 주께서 그렇게 역사하셔서 주님의 나라를 온전히 세우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강하게 들어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 또는 이를 이루는 교회는 결코 숫자가 아니다.
거기에 진짜 예수를 믿어 마지막 날에 주님이 찾으실 수 있는 믿음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초대교회에서 이렇게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다고 해서 오늘날도 그런 현상이 동일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웬만한 곳은 복음이 전하여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짜 온전한 복음, 곧 통합복음이 전해져서 십자가복음과 장사복음 그리고 부활복음과 현현복음이 규모있게 잘 전해져야 하는데, 십자가복음과 부활복음만 왕성하게 전해진다는데 문제가 있다.
물론 그것도 복음이지만 너무 파편적인 복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복음에서 장사복음을 건너뛰고 바로 부활로 넘어가면 부활은 실제가 되지 못하고 그저 상징만 남게 될 뿐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 장사되는 그 3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 무덤의 3일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무덤의 3일은 곧 주님과 함께 성소를 짓는 일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처리하시고 그런 우리를 무덤에 장사하시면 그 무덤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동거하는 장소를 만드신다.
그 장소가 바로 성소이다.
성소란 주님과 내가 만나는 만남의 장소이다.
왜 이 무덤 안의 성소가 필요한가?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거기서 바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무덤에 장사되시고 3일 동안 계시다가 그곳에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이는 주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동일하게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함이라.
초대교회가 3천 명, 5천 명씩 전도 되었다고 해서 우리도 그들과 동일하게 그렇게 해야한다는 논리는 비약이다.
오히려 이제는 기독교인의 수가 많이 있는데 그들이 진짜 복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살아있는 복음 그것도 통합복음을 전해서 신앙생활을 주님 안에서 균형있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은 결코 나의 안위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어서 이 땅에서 내가 잘 되고, 내 가족이 잘 되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잘 되는 그런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 아니다.
복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흩으시는 경우가 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를 흩으셨다.
그 때 사도들 외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
그들이 흩어져서 한 일이 다른 것이 아니라 곧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도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의 동행 문제로 둘이서 크게 다투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찢어져서 전도하러 나갔다.
물론 싸우는 것이야 좋은 일일 수 있겠냐만, 이런 일을 통하여 주의 복음은 더 넓게 확장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으로는 고통이요 없었으면 좋을 법한 일들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일까지도 사용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에 활용하신다.
소나기가 온 뒤에 땅이 단단하게 굳어지고, 태풍이 지나가면 바닷물이 깨끗하게 정화되며,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 때 그 영양분이 가지 끝까지 올라가는 것처럼, 환난이 다 무익한 것은 아니리라.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간구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구제하는 일에 문제가 생겼던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사도들이 그 일을 내려놓고 일곱 명의 일꾼들을 뽑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일은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모든 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칭찬하고 세워주는 한마음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주님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오늘 우리 교회도 숫적으로는 너무나 미미하지만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복음 안에서 영적으로 흥왕하여 주님의 나라를 현재로 살아가는 살아있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