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를 풀다가 놀랐다. 그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니 그대로 문장이 된다. 구어를 문어로, 비문을 정문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 없다.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tvN의 여행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이 영어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 제작진은 ‘관계대명사, To-부정사의 정확한 용례’라는 자막을 달았다.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나보다 못하면 화가 나요. 젊은 사람이 늙은이보다는 나아야 하잖아요.
배우 윤여정
20년 전에 찍은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나, 40년 전에 찍은 영화를 이야기할 때도 그의 기억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올해 일흔이 된 그는 자신을 여배우가 아니라 노배우라고 불렀다. 그처럼 한결같이 여자인 배우가 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처럼 총명한 노인이 되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 영화 <계춘할망>에서 계춘을 맡았습니다. 배우에게는 타이틀롤(Title role)인데요.
타이틀롤은 <화녀>(1971), <충녀>(1972) 이후로 처음이죠. 그래서 제가 제목 바꾸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일동 웃음). 어렸을 때는 그런 제목이 좋아요. 지금은 늙어서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알아요. 흥하면 좋지만, 모든 일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걸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실패한다면 이 실패는 제 몫인 거죠.
- 시나리오를 받으면 처음에는 인물의 외면이 그려지고 나중에는 인물의 내면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계춘의 어떤 내면이 느껴졌는지요.
사랑이오. 세상에는 엄마도 있고 할머니도 있는데 둘 중에는 할머니가 무한한 사랑이에요. 저도 엄마를 해봤지만 엄마는 그렇게 못 해요. 열심히 해야 하거든요. 그럼 자꾸 괴롭히고 잔소리를 하죠. 할머니는 그런 게 없어요. 애가 토를 해도 예쁘고 오줌을 싸도 예뻐요.
실제로 저의 증조할머니가 저를 그렇게 예뻐하셨어요. 10살까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당시 저는 할머니가 저를 예뻐해주는 걸 몰랐어요. 오십이 넘으니까 그 사랑을 알겠어요. 이 영화는 할머니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찍었어요.
-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시나리오를 읽고 제 첫 질문이 “상업영화 맞아요?”였어요. 할머니와 손녀 이야기를 누가 보러 올까 싶더라고요. 저예산 영화는 돈을 많이 안 주니까 못 하거든요(일동 웃음). 저는 도회적인 이미지가 있어 못 할 것 같다고 했더니, 글쎄 제작자가 “도회적인 이미지는 소진되셨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 말이 재밌었어요. “소진됐나요?”라고 다시 물었더니, “네. 됐습니다”라고 딱 자르더라고요. 지금은 고맙죠. 저를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수 있게 건드려줬으니까요.
- 촬영 기간에 실제로 제주도에서 지내셨는데요,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요.
진짜 안 좋았어요(일동 웃음). 첫 촬영 마치고 그만둘까 싶을 정도로요. 이건 앞으로 제 숙제겠더라고요. 저 같은 노배우는 이제 젊은 스태프와 함께 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예를 들면, 제가 뱀장어를 잡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남자 스태프도 그걸 못 잡아요. 장갑을 끼고도 못 잡아요. 촬영은 지연되죠. “나는 평생 뱀장어를 잡아왔으니 그럼 내가 잡으마” 했는데 이런 농담도 못 알아들어요. 이래서 세대 갈등이 있구나 싶어요(웃음).
- 김고은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은교>라는 영화에서 고은이를 처음 봤어요. 눈이 가더라고요. 한국 영화에 없던 얼굴이잖아요. 배우는 얼굴에 뭔가 이야기가 있어야 해요. 김고은의 얼굴이 그래요. 그리고 배우는 같이 하는 작업이라 상대방과의 호흡이 중요해요. 가수는 혼자 노래를 부르지만 배우는 아닙니다. ‘이게 내 손녀구나’ 라고 최면을 걸게 할 상대가 필요하죠. 고은이는 제 손녀로 보였어요.
<계춘할망> 제작보고회가 있던 날, 윤여정은 “김고은이 처음부터 살갑거나 싹싹하지 않고 서먹서먹하게 다가왔는데,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했다. 처음엔 서먹한 게 당연한데 애써 친한 척하지 않아 좋았다는 뜻이었다. 이 기사에 수많은 악플이 달렸다. 김고은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윤여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터뷰 자리에 모인 기자들에게 당부했다. “여러분의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왔다갔다 할 수 있다”고. “내가 연기로 욕먹는 건 괜찮지만, 이런 말로 오해를 사는 건 고은이 얼굴 보기도 미안하고 배우로서 너무 창피한 일 아니에요?”라면서.
나이 듦의 기쁨과 슬픔
- 나이가 들면 ‘꼰대’라는 용어가 따라 옵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 보입니다.
저는 이미 꼰대죠. 나이 칠십이 된 여자가 꼰대가 아니라면 이상한 거 아니겠어요? 현장에서 저의 미션은 제가 해야 할 일을 끝내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쓴소리도 하죠. 그리고 지금은 이러나 저러나 꼰대 소리를 들어요. 나이가 들면 좋은 게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죠.
- 저예산은 안 한다 하셨지만 얼마 전 이재용 감독과 (저예산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찍었는데요.
사람이라는 게 그럴 거예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죠. 이재용 감독과는 <여배우들>부터 관계가 깊어져서 그와 나는 계속 저예산만 하고 있어요. <죽여주는 여자>는 모인 사람들에게 제가 밥 사 먹이면서 찍어서 제 돈이 더 들어갔어요.
- 나영석 피디와의 교분도 각별하다고 들었습니다.
나영석씨는 사려가 깊어요.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나보다 못하면 화가 나요. 젊은 사람이 늙은이보다는 나아야 하잖아요. 처음에 <꽃보다 할매>로 간다고 하기에 그건 아니라고 했어요. 하루가 지나고 사과를 하더라고요. 꼭 그의 잘못은 아닌데, 그럼에도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교정하려고 하는 게 머리가 좋은 거죠. 바뀐 제목이 <꽃보다 누나>인 거는 저한테 비밀로 했어요. 제가 이승기 누나라는 게 말이 되나요?(일동 웃음) 누나인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예요.
- 나보다 나은 젊은 사람’에는 <디어 마이 프렌즈(tvN)>의 노희경 작가도 포함되겠죠?
자기 분야에서 자기 일을 잘한다면 누구든 그렇죠. 노희경 작가는 아직 오십이 안 됐는데 너무 놀라워요. 이 사람은 ‘늙은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싶어요. 여러분은 어른을 어른이라 다를 거라 생각하는데 다 똑같아요. 모든 순간은 모두가 처음인 거예요.
- 혹자는 <디어 마이 프렌즈>를 ‘시니어벤저스’라 부르더군요. 배우에게도 여러모로 특별한 현장일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 연기를 하는 건지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거의 50년 역사를 같이 했잖아요. 고두심이네 아이 이름도 제가 다 알고, (김)혜자 언니 아이들 이름, (나)문희 언니 아이들 이름, (김)영옥 언니 아이들 이름도 다 알아요. 처음엔 주인공들을 하다가 그 이후로는 각각 엄마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 거잖아요. 포스터 찍는 첫날 혜자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이 작가가 우리 죽기 전에 만나라고 이 작품 썼나봐.” 그래서 다 같이 울컥했죠, 뭐.
그날 밤,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JTBC)에 윤여정이 출연했다. 역대 최고령 출연자였을 텐데, 각국의 비정상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가 건넨 고민은 “꼰대가 되는 것”이었다. 아마 꼰대라고 해도 그는 선선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기 모인 출연자도 시청자도 알았다. 그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꼰대가 아니라, 오늘의 충만함을 즐기는 인생의 선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