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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심양(선양-SHENYANG)
 
 
 
카페 게시글
********** 자유게시판 스크랩 임시수도 부산 - 달동네의 시작 -pgr21.com
105M 백골포병 추천 0 조회 86 14.03.12 15: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임시수도 부산 - 달동네의 시작


돼지국밥과 밀면, 부산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죠. 공통점이 있다면 전쟁 중 피난민들로부터 시작된 음식이라는 겁니다. 이북의 맛과 부산의 맛이 합쳐졌다, 어려울 때라서 뭐 대신 뭐를 넣었다 이런 식이죠. 돼지국밥은 다른 설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이런 식의 피난음식이 여러 개 더 있구요. 유명을 넘어 대표한다 할만한 향토음식이 예로부터 이어진 게 아니라 근현대사 와중에 태어난 거라는 게 좀 흥미롭죠. 

민족 최대의 비극 6.25, 부산은 임시수도가 됩니다. 대전과 대구도 잠깐 되긴 했지만 부산은 좀 길었죠. 1.4후퇴 이후엔 휴전할 때까지 계속 임시수도였으니까요. 그 동안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왔고,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고향과 가족을 잃은 슬픔, 피난 생활의 고통, 바닥부터 시작해야 되는 현실까지... 부산의 역사엔 그들의 애환이 녹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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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시대 역사에서 부산을 찾을 수 있는 키워드가 있죠. 네 일본입니다. 다른 건 딱히 -_-a 뭐 태종 무열왕이 놀다갔다는 태종대랑 최치원의 호를 딴 해운대가 있긴 합니다만. 이 때의 부산은 동래부의 진과 포 이름이었습니다. 이 쪽에 있는 산이 가마솥 같이 생겼다 해서 釜山이 됐다 합니다. 일본이랑 가까웠으니 대일외교, 무역은 물론 왜구가 쳐들어올 때도 직빵이었죠. 

임란이 끝나고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조선에선 부산포만 열어주고 사신은 왜관에만 있게 합니다. 이렇게 일본과의 무역을 하고 조선 후기가 되면서 동래상인들도 좀 뜨긴 한 모양입니다만 한양이나 개성상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죠.

부산이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한 건 개항 후였습니다. 대일무역이 급성장했으니까요. 강점 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부산을 개발하기 시작하구요. 이 때 동래부가 부산부로 바뀌었고, 곧 개항장 주변의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나뉩니다. 자기네한텐 부산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서 그런 거였으려나요. 이후는 부산이 동래를 잡아먹는 + 다른 지역까지 확장하는 역사죠.

http://mirror.enha.kr/wiki/%EB%B6%80%EC%82%B0%EA%B4%91%EC%97%AD%EC%8B%9C/%EC%97%AD%EC%82%AC#toc
자세한 건 여기로요 '-')/~ 

도시화를 통해 많은 일본인들이 왔고, 일자리를 찾으려는 조선인들도 부산으로 몰려듭니다. 일본인은 주로 평지에, 조선인은 고지로 나눠졌죠. 동래온천이 일본인을 위해 만든 시설인 건 유명한 얘기입니다. 항구도 항구고 철도고 철도고 길도 길이고... 침략의 시작지인만큼 신경 많이 쓴 모양입니다. 노면전차만 해도 당시 서울과 평양, 부산밖에 없었다 하네요. 하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조선인들은 고지대에서 살 수밖에 없었죠. 달동네의 시작입니다.

이 때 일본은 65년까지 부산인구를 40만명으로 맞추고 도시계획을 만들었다 합니다. 하지만 도시의 팽창은 그들 예상과는 전혀 달랐죠.

해방 후 28만이었던 부산 인구는 귀환동포들이 돌아오면서 47만으로 늘어납니다. 하지만 그들을 수용할만한 집은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터집니다.

+) 헌데 이렇게 인구가 늘어나니 해방되자마자 특별시 승격을 요구합니다. 서울이 특별시 됐으니 부산도 해달라는 거였죠. 뭐 결국 63년에 특별시보단 급이 떨어지는 직할시가 됩니다. 현재도 은근히 말이 나오는가봐요 (...)

수많은 피난민,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랴부랴 수용소를 만들긴 했지만 수용가능 인원은 7만명밖에 안 됐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전쟁을 피하고자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가진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살려면 일단 바람 피할 곳이라도 필요했죠. 따뜻한 곳이라 하지만 부산 바닷바람 장난 아닙니다.

쓸 수 있는 건 다 썼다 합니다. 나무판자부터 함석, 미군 부대에서 나온 깡통, 골판지까지 말이죠. 피난민들의 수만큼 판자집이 늘어납니다. 당시엔 하꼬(일본어로 상자)방이라 불렀다 하네요. 평지야 이미 주인이 다 있었죠. 거기다 부산은 바다 아니면 산인 동네라서 그 평지도 적죠. 결국 산을 따라서 판자촌이 쭉 이어졌습니다. 부산 곳곳에서 말이죠.


판자촌으로 유명했던 40계단

사람들은 더 몰려오고, 더 높은 곳으로 갑니다. 이렇게 판자촌은 늘어만 갑니다. 이런 곳이 어디 안전하겠습니까. 불이 쉽게 일어났고, 한 번 일어나면 근처의 집들을 집어삼키며 큰 피해를 냈습니다. 53년의 부산역전 화재사건은 현 부산 중구의 절반을 태워버릴 정도였습니다. 오죽 불이 많이 났으면 불산이라 불렀다 합니다. 정부에서도 시에서도 골칫거리였습니다. 불은 거의 판자촌에서 시작됐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통해 중심가까지 밀어닥쳐 큰 피해를 줬으니까요. 때문에 전후 판자집들을 철거하기 시작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이야 상관없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 또한 지옥이었죠. 특히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은 돌아갈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한 내라 하더라도 일자리 등의 문제로 눌러앉으려는 사람들도 있었구요. 결국 최초의 공공주택사업이 부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불은 계속 나고, 집들은 불타고 사람들은 죽고 다시 시작하고... 뭐 그랬다 합니다. 


이후에도 인구는 불어나기만 했고, 정부는 지속적으로 판자촌을 밀어내고 아파트를 만듭니다. 하지만 부족할 수밖에 없었죠. 뭐 다른 판자촌도 차츰 그래도 사람 살만한 집으로 바뀌어 갔죠. 이렇게 판자촌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달동네라는 낭만적인지 모를 이름 말이죠. 아파트 계속 세우고 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이런 달동네들은 많이 남아 있죠.

이런 데 운전할 때는 죽을 맛입니다. (...);; 산은 높아서 내리막길 가면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죠. 주택가로 가면 단독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길은 좁고,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뒤로 쭈우우욱 빠져야 되고... 운전은 또 왜 그리 험하게 하는지.

아무튼 이런저런 재개발 시도부터 관광 명소로 개발하기도 합니다. 위의 감천 문화마을이 대표적이죠. 그 시작이 대순진리회의 모태가 된 태극도에서 단체로 정착하면서였다고 합니다. 이거 참 (...) 어려울 땐 역시 믿을 곳을 찾게 되는건지 통일교의 시작도 부산이었다 합니다.

뭐 그런 가운데서도 놀고 먹는 사람들도 있었죠. 장택상 왈 공무원들은 아침엔 다방 밤엔 고급 요정(요리점)에 갔다고 하네요. (...) 부산항에 유사시 탈출할 수 있는 배 하나씩 구해놓구요. 일본 덕분에 유흥 인프라는 참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일본에서 오는 밀수품들도 받아먹고 살았구요. 


좀 유명한 얘기 하나 하면서 글을 맺도록 하죠. 영도대교는 부산의 랜드마크 중 하나입니다. 유명한 이유 중에 이런 게 있죠. 피난을 떠나서 헤어질 경우 부산에서 유명한 편인 영도대교 밑에서 만나자고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재는 재개통 됐고 12시에 기념으로 다리를 들어올립니다. 가보니 추억 찾아 오신 어르신들과 학교에서 체험학습 나온 애들로 가득하더군요.

전쟁 중 대구에서 강사랑이라는 사람이 양키시장(교동시장)에서 미군 물자를 팔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는 흥남 부두에서 오빠와 헤어졌고, 영도다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했죠. 하지만 만나지 못했다구요. 그는 자기가 일하는 오리엔트레코드사에 사연을 말해서 노래를 만듭니다. 


그녀의 이름이 '금순'이였죠. 노래는 히트쳤습니다만 오빠를 만날 수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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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향토사도 괜찮으려나요 '-'a 
어머니께서 돼지국밥을 사오셨네요. 내일은 국밥 먹어야겠습니다 >_<)


출처
부산발전 50년 역사이야기
국제신문 -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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