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이훈식
생각 날 때마다 잊어버리려고
얼마나 제 가슴을 찔렀으면
가시 끝에 핏빛 울음일까
장미꽃을 건네는 법 / 양광모
즉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장미꽃이라 해도
가시를 모두 떼어내고
꽃만 건네줄 수는 없다는 것 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건넬 때는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잘 감싸서 주어야 한다는 것 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바치는
장미꽃이라 해도
언젠가는 그 꽃과 향기
시들기 마련이라는 것 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건넬 때는
그 꽃과 향기 사라지기 전에
흠뻑 사랑에 취해야 한다는 것 쯤
불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장미꽃이라 해도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반 쯤 섞어야 한다는 것 쯤
그러므로 그 사랑
뜨거운 열정만이 아니라
순백의 순결로도
함께 불타 오르기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 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장미꽃을 건네받을 때는
오직 한 가지
그 뺨
장미꽃보다 붉어져야 한다는 것 쯤
장미를 사랑한 이유 / 나호열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고통이었다
슬픔이 깊으면 눈물이 된다
가시가 된다
눈물을 태워본 적이 있는가
한 철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미
불꽃 심연
겹겹이 쌓인 꽃잎을 떼어내듯이
세월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처연히 옷을 벗는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마음도 몸도 다 타버리고 난 후
하늘을 향해 공손히 모은 두 손
나는 장미를 사랑한다
장미가 되리 / 류정숙
무슨 칼로 가슴을 저미면
저리 핏빛 꽃잎이 될까
무슨 불로 구워내면
저리 핏빛으로 타오를까
무슨 사랑으로 문지르면
흰 가슴 저리도 붉은 피가 묻어날까
장미가 피는 날엔 가슴 아파라
장미의 날 / 마종기
장미나무 꽃대 하나 좁은 땅에 심어 놓고 몇 달 꽃피울 때까지 나는 꽃이 웃는다는 말 비유인 줄만 알았다
작은 잎의 상처도 아파 조심해 연한 물을 주고 긴 잠 깨어 안심할 때까지 장미가 말을 한다는 것도 도저히 믿지 않고 살았다
이 나이 되어서야 참으로 꽃이 웃는 모습을 보다니, 젖은 입술의 부드러운 열기로 내게 기대는 것을 보다니
그러니 은밀한 관계여 영문 모르는 애인이여,
장미가 울기까지 한다는 것은 이승에서는 감당키 어려워 어느날 쯤 못 들은 척, 멀리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리
장미와 더불어 / 신경림
땅속에서 풀려난 요정들이
물 오른 덩굴을 타고
쏜살같이 하늘로 달려 올라간다
다람쥐처럼 까맣게 올라가
문득 발밑을 내려다보고는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이내 다시 뜨면
아, 저 황홀한 땅 위의 아름다움
너희들 더 올라가지 않고
대롱대롱 가지 끝에 매달려
꽃이 된들 누가 탓하랴
땅속의 말 하늘 높은 데까지
전하지 못한들 누가 나무라랴
발을 구르며 안달을 하던 별들
새벽이면 한달음에 내려오고
맑은 이슬 속에 스스로를 사위는
긴 입맞춤이 있을 터인데
장미에게 신경림
나는 아직도 네 새빨간
꽃만을 아름답다 할 수가 없다
어쩌랴, 벌레 먹어 누렇게 바랜
잎들이 보이는데야
흐느끼는 귀뚜라미 소리에만
홀릴 수가 없다
다가올 겨울이 두려워
이웃한 나무들이
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꽃잎이 쏟아지는 달빛과
그 그림자만을
황홀하다 할 수가 없다
귀 기울여 보아라
더 음산한 데서 벌어지는
더럽고 야비한 음모의 수런거림에
나는 아직도
네 복사꽃 두 뺨과
익어 터질 듯한 가슴만을
노래할 수가 없다
어쩌랴, 아직 아물지 않은
시퍼런 상처 등 뒤로 드러나는데야
애써 덮어도 곪았던 자욱
손등에 뚜렷한 데야
이쯤에서 / 신경림
이쯤에서 돌아갈까보다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찻집도 기웃대고 술집도들러야지
낯익은 얼굴들 나를 보고는
다들 외면하겠지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테다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으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다
내 손에 들린 가방이 텅 비었더라도
그동안 내가 모으고 쌓은 것이
한줌의 모래밖에 안된다고
새삼 알게 되더라도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