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 나의 삶 6>
이별, 그 날의 ‘대전 부르스’
6년 전 초겨울, 그날 밤은 스산했다. 대전에 있는 충남도청이 홍성·예산 내포內浦신도시로 이전을 기념하는 ‘떠나는 밤, 보내는 밤’ 행사가 마무리 될 무렵 끝맺음 말에 이어 처연하게 울려 퍼지는 ‘대전 부루스’가 무거운 분위기를 헤집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 발 영시 오십분 …’
이별은 왜 겨울에 해야 할까? 그것도 하필 밤이어야 하나? 짠했다. 이 때 어디서 날아 왔는지 허공을 맴돌던 낙엽이 맨바닥으로 떨어져 블루스를 추었다. 잠시 헤매다 발아래에 멈춘 낙엽 위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이별의 자리라서 그런 노래인가?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로 시작되는 ‘희망의 나라로’로 우렁차게 이어졌더라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 걸 하는 아쉬움이 솟았다.
대전은, 1905년 경부선 역사가 서고 그 후 호남선이 가지를 치면서 영호남을 아우르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전역은 이합離合의지점이었다. 1932년, 공주에서 충남도청까지 옮겨옴으로써 발전에 날개를 달았다. 교통중심도시에서 충남의 정치, 행정,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핵심도시로 발돋움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대전이 광역시로 승격되어 충남도에서 분리되자, 도청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지역에 두 개의 광역자치단체가 있을 수 없다’, ‘분가한 자식 집에 더부살이 하는 격이다.’ ‘자존심도 없느냐?’, 여기에 지역균형발전론까지 힘을 얹었다. 이런 이유들이 손잡아 내포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이전하게 되었다.
떠나는 도지사와 보내는 시장의 인사에 이어 그런 행사에서는 으레 있어야할 법한 절차들이 이어졌다. 마무리로 갈 무렵, 도청 근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다 이제 3층 건물을 마련하고 어엿한 식당 주인이 된 홍사장이 연단으로 올라가 심경을 말했다.
“대전에 처음 올 때는 추리닝 차림, 맨몸이었습니다. 도청, 경찰청 공무원 여러분들이 밤을 잊고 일할 때 저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동동걸음으로 밥을 날랐습니다. 퇴근을 모르며 고생하는 것을 알기에 따뜻할 때 드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덕분에 아이들 키울 수 있었고 집도 마련하였습니다. 비록 도청은 떠나지만 여러분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홍사장의 진솔한 말은 의례적인 말들을 덮었다.
밖에 나가 먹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아 그 아주머니의 머리를 짓누르고 무릎 저리게 하며 날라 온 밥을 수 없이 먹으며 일했다. 어느 때는 그마저 제대로 먹지 못하기도 했다.
뭉게구름 사뿐히 내려앉은 듯 운치 있는 향나무 울타리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푸근함을 안겨준다. 그 안에 일제 강점기에 서양식으로 지은 3층 건물이 멀리 대전역을 마주하고 서있다. 누군가 ‘대전에서 제일 큰 건물’이라고 했는데, 크다거나 높아서가 아니라 상징성에서 그랬다. 그 안에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수 십 년의 세월 속에 공휴일은 물론이고 명절날조차 제대로 지내본 적이 드물었다. 일요일에 ‘결근’하는 것보다 차라리 평일에 휴가를 내는 것이 떳떳했다. 퇴근하며 “집에 다녀오자.”라는 말이 동료들의 인사였다. 동틀 무렵까지 일하다 내려앉는 눈꺼풀을 비비며 길 건너 해장국 집에 가서 아침을 때우고 사무실로 돌아온 날을 헤아릴 수 없다. 출근할 때 타고 오는 시내버스가 도청 앞 정류장에서는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쳤으면 하는 심정이 가슴을 가득 채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햇빛 고운 봄날 일요일 아침, 여섯 살 아들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외쳤다.
“야! 너희들 떠들지 마. 우리 아빠도 집에 있단 말이야!”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와 어디 놀러갈 것을 기대하며 뽐내보려는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아버지와는 어렸을 적 추억이 없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말이 가슴을 후빈다. 후배들에게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고, 꼭 사진으로 남겨두라’는 당부가 나의 입버릇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에 밤낮이 없었고, 천안시·군 등 열개 시·군을 다섯 개 시로 통합하고 논산, 계룡 두 개의 시를 만드는 데 심신은 지치고 허물어졌다. ‘법에 없는 민원’까지 해결해 준다는 위민爲民시책을 역점 추진할 때는 과로로 쓰러져 입원한 적도 있다. 엄연히 소관부서가 있는데도 일선 행정력을 쏟아야 할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맡겨졌다. 어린이집의 전신인 새마을유아원, 산불방지, 뇌염예방대책에다 U·R협상 교육, 올림픽 지원과 홍보, 심지어 초창기 국민연금가입을 독려하는 업무까지 맡아했다. 늘 자리를 지켜야 하는 보초步哨요 버튼만 누르면 무엇이든 곧바로 내놓아야하는 자판기自販機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행정기구에 ‘방문’이라는 용어를 넣어 보건소에 ‘방문간호계’를 만들었다. 간호사, 물리치료사들이 움직이기 어려운 어른들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보살펴 드리도록 하니 ‘자식보다 낫다’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대학의 간호행정학 교재가 바뀌었으며 전국으로 확대되는 보람도 얻었다. 공공장소에 ‘건강관리코너’를 만들기도 했다. 20대부터 시작하여 주로 그런 부서에서 일하다 정년을 했다면 청춘을 바친 곳이 아니라 인생을 함께 한 일터였다.
대전과 도청은 나만의 추억이 서린 곳은 아니다. 시골에서 유학했던 아버지의 모교가 있는 곳이고, 도청은 아버지의 직장이었다. 한 세대의 세월이 흐르고 아들인 나의 일터가 된 후, 혹시 아버지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까 싶어 패인 돌계단을 걸어보고 대리석 난간을 쓰다듬어 보았지만 어디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으니 마음으로만 느끼곤 했다.
어느 날, 대전역에서 아들과 손자를 맞이하여 집으로 오는 중 옛 도청 청사에 데리고 갔다.
다섯 살 손자에게 “여기가 네 왕할아버지曾祖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하던 곳이다”라고 일러주고 내가 근무했던 사무실도 가리켜 주었다. 하지만 “예~”하고는 별 흥미가 없는 듯 밋밋한 반응을 보였다. ‘좀 더 철이 든 후에 데리고 올걸…’ 무언가의 바람이 어긋났나 보다.
애환이 시루떡처럼 쌓이고 쌓인 도청이 떠나는 이별의 절차가 진행되는 자리에, 퇴직한지 여러 해가 지났으니 초청장 접어두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데 무슨 정 때문에 공연히 가서 서늘함만 더하고 왔다. 그날 ‘대전 부르스’는 연인들의 애절한 이별에 빗대어 도청이 옮겨감을 상징한 것만이 아니었다. 내 인생과 함께 했던 직장이 먼 곳으로 떠남을 실감하게 해준 하나의 증거였다.
도청이 내포로 옮겨가고, 이제 덩그러니 건물만 남아있다. 가끔 지나면서 바라보면 짠하다. 아린 심정은 차마 들어가 기웃거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직도 거기에 보람과 회한이 그림자로 남아 어른거리고 있어서 그럴까? 작아 보이는 모습이 애잔하다. (2018. 에세이 포레. 겨울호)
첫댓글 충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이전을 기념하던 날, <대전 블루스> 라는 노래를 누가 틀었는지
참으로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가슴을 울리는 노랫말입니다.
가 선생님은 일찍이 짠한 가슴의 소회를 수필 작품으로 승화하셨군요.
<이별, 그날의 '대전 블루스'> 제목만으로도 성공한 명수필입니다.
도청 이웃 건물에서 20여년 세월을 보낸 저의 감회도 특별합니다.
가슴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은 귀한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가 선생님 옥고는 제게 같은 지붕 아래 살았던 한솥밥 식구와 같은 따뜻함과
진한 향수를 불러 일으킵니다.
짠한 감동입니다.
가기천 부시장님과 부친이 함께 몸담아 일하셨던 도청이 홍성으로 이전할 때의 이야기를 쓴 글 감동입니다.
이별은 꼭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정들었던 곳을 떠나는 심정과 연인이 떠나는 심정을 노래한 '대전 블르스'는 재치가 넘치는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윤승원 선생님의 앞의 글 '옛 직장 충남경찰청사를 둘러보며'를 읽고,
저 또한 추억에 잠겨 전에 쓴 글을 소환했습니다.
윤 선생님도 고려회관 김치찌개, 하얀집 해장국 많이 드셨지요?
윤 선생님, 최 선생님 공감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청사 둘러보고 사진 찍던 날 <고려회관>에서 옛 경찰동료들과 오찬했습니다. 술도 한잔 했지요. 옛날을 추억하며.
*사진 : 고려회관 앞 골목
대를 이어 공무원으로 살아오기가 쉽지 않은데, 가기천 선생님의 분위기가 충청도 선비같다 싶었는데 다 그런 연유였군요.
저도 고려회관을 기억합니다~~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강표성 회장님.
최근 받은 동인지에서 여러 작품 잘 읽었습니다.
'역시나'이십니다.
'붉은 바다, 사하라'에 이어 '와디에 서다'로 사막을 통찰하는
묵직한 작품을 빚으셨습니다.
'고야의 개'도 마음에 간직하고 계시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