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꿈에 그리던 정동진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꿨던 그 해괴한 꿈 때문에 뒤가 구리긴 했지만... 어쨌거나 흥미로운 1박 2일이었다...
(아침. 포근한 미녀의 방.)
♪행복하게 살진 말아 줘(오-날 떠나서) 나를 떠나 더 힘들어 줘 다시 내게 오고 싶도록 baby~~♬
~~~언제라도 내가 생각나~♪
-여보세요?
-야! 몸 괜찮아?
-은빈이야?
-어.
-가뿐하지 뭐.
-체, 가뿐하다는 애가 강릉에서 서울까지 스트레이트로 잠을 자냐?
-아, 몰라! 그건 그렇고 지금 몇 시야?
-어... 11시...
-뭐? 진짜야?
-...2시간 전. 헤헤~
-뭐야 너!
-오늘 수업 몇 시야?
-2교시. 빨리 씻어야겠네. 전화 끊어 어서!
-그래, 학교에서 보자!
(지하철 안.)
학교로 가는 버스 노선만 잘 되어 있다면 난 절대로 지하철은 타지 않을 거다. 마치 두더지가 되는 기분이다. 공기는 또 좀 더럽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걷고 걸어서 무 다리가 되느니 차라리 두더지가 되는 길을 택하련다...
일부러 맨 마지막 객차가 정차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빈 좌석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마침내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찢어지는 여편네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나는 피곤한 몸뚱어리를 끔찍한 지옥철에 옮겨 싣는다...
다리품을 판 보람이 있다! 좌석이 드문드문 비어 있잖아~!
그치만 환호도 잠시... 자리를 잘못 택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무심코 엉덩이를 갖다 꽂았는데 너무 꽉 낀다... 몸을 웅크린 채로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핀다. 헉! 양쪽으로 체중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돼지 같은 아줌마 두 명이 내 몸을 조여 오고 있다. 뭐냐? 혹시 쌍둥이냐? 나 샌드위치 만들기로 둘이 약속하고 앉아 있었냐?
아~! 숨을 쉬기가 어렵다... 옮길까?... 말까?... 이런, 이미 늦었다! 엉덩이를 떼자마자 남아 있던 마지막 빈 자리를 옆 객차에서 원정 온 까까머리 중학생 한 놈이 차지해 버린다. 지금은 중학생들이 돌아다닐 시간이 아닌데...아무튼 다시 갖다 꽂는다... 헐~ 근데 아까보다 더 낀다... 누구야? 행동에 앞서 먼저 생각을 하라고 말했던 놈!
그건 그렇고... 뭐지? 저 시선은... 내 앞에 앉은 남자 하나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웃는다! 지금 나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다!... 지금 내 얼굴 상태가 그리 좋진 않을 텐데... 자세는 어깨를 웅크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것이 이제 막 자대에 전입 온 신병 꼴일 테고... 하긴... 줄리아 로버츠가 얼굴 좀 부었다고 줄리아 로보트 되는 건 아니니까... 주제에 눈은 높아 아주...
(강의실. 성생활과 가족계획 시간.)
맨 뒷자리다. 내 지정석... 마음 같아선 교수 코앞에 앉아 이 흥미진진한 강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녹음해 놓고 싶지만... 그보다는 책상에 편하게 몸을 기대어 피로를 달래고 싶은 욕구가 나를 더 지배하고 있다... 더군다나 입가에 허옇게 게거품을 물고 떠들어 대는 저 노친네 밑에서 침으로 머리 감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체! 저기 저 잘난 척 맨 앞 줄에 앉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있는 추악한 것들 좀 봐라! 멋대가리 없는 늙은이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고개를 따라 돌린다. 교수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강의의 시작을 알리자 뭐 대단한 거라도 배웠다는 듯이 그의 말에 단체로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다는 거 처음 알았니?
아니... 저 애는?
지하철 안 그 녀석이다. 우리 학교 학생이었군! 어쩐지 낯이 좀 익다 그랬어... 또 나를 감상하고 있었군...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누구나 다 이런 경험해 봤을 거다. 누가 날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사람이든 귀신이든...) 쳐다봤더니 홱~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리곤 펼쳐져 있지도 않은 노트에다가 뭔가 열심히 적는 척을 한다... 참, 기가 차서... 야! 그냥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라! 마음에 들면 솔직하게 고백하면 되지 무슨 남자가 숫기도 없이...쯧쯧...
"잠이 든다... 잠이 든다... 너는 지금 아주 고요하고도 편안한 곳으로 스며들고 있다..."
"저...실례지만 누구세요?"
"나? 잠의 요정..."
"아, 네..."
몽롱하다... 눈앞에 수많은 뒤통수들이 아른거린다... 음~냠냠...
"우선... 남자의 생식기는..."
뭐시라?
눈이 번쩍 뜨인다. 건방지게 내 두 눈에다 모래 가루를 뿌려 대고 있던 잠의 요정도 놀라 달아나 버린다. 오~ 교수님! 조금 더 큰 소리로 말씀하세요! 교탁 위에 마이크는 폼으로 놔두셨나요? 무거워서 그러신다면 제가 친히 받쳐 드리지요...
(점심 시간. 돈까스 전문점 지방흡입돼지.)
"소라야, 너 오늘 왜 수업 안 들어왔어?"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 싫다는 소라를 겨우 꼬셔 데려왔다. 나도 너 별로 안 좋아한다. 그냥 나 밥 먹는 동안 앞에 앉아만 있다가 조용히 사라져라.
"성생활? 나 들어갔었는데?"
"정말? 어디 앉아 있었어?"
"맨 앞 줄. 넌?"
"어... 난 가운데쯤."
얄미운 계집! 얌전한 부뚜막이 고양이에... 이게 아닌데... 바뀌었군. 어쨌거나... 여자에겐 순결이 최고의 미덕이랄 땐 언제고... 교수 꽁무니 따라 고개 홱홱 돌려 대던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너였구나!
그리고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웬 남자 두 명!
"뭐야, 저놈?"
"누구? 아는 애들이야?"
또 만났다. 지하철과 강의실에서 내 미모를 변태스럽게 탐하던 녀석을!
"알긴... 빌어먹을 스토커 같은 놈이야."
"스토커?"
"그래. 신경 꺼! 난 저런 제비 스타일 관심 없어."
또 쳐다본다. 이상한 놈일세... 세 번이나 우연히 만나면 저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네. 아니지... 우연을 가장한?... 얼씨구~ 이번엔 아주 대놓고 친구랑 쌍으로 나를 탐하네... 토론을 하는구먼... 토론을... 친구한테 내가 어떤지 한번 봐 달라고 그랬나 보군... 그래, 봐라 봐! 나 어디다 내 놔도 꿀리지 않을 얼굴 가졌다!
(늦은 밤. 집.)
여기는 침대. 시간은... 어두워서 모르겠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걸로 봐서 자정이 거의 다 됐을 거다. 컵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 아니다, 참자! 내일도 팅팅 부어서 학교에 갈 수는 없다.
그 녀석... 또 나를 따라붙을까? 몰라... 그 정도면 뭐 나쁘진 않지... 그런데 문제는 패기가 없다는 거야. 남자답게 그냥 뚜벅뚜벅 걸어 와서 "저, 시간 되시면 저랑 차나 한 잔..." 아니지, 이건 너무 구식이야.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에이~ 이것도 사실이긴 하지만...뭔가가 어색해... "제 이상형이세요. 저랑 사귈래요?"... 그래, 이게 제일 낫네...신세대답구... 이렇게 물어온다면 내가 왜 거절을 하겠어? 은빈이가 있긴 하지만... 요새 예쁜 것들은 양다리에다가 삼다리까지 걸친다는데...
그래, 언제까지 쳐다만 보고 있진 않을 거야. 지도 남잔데... 곧 대시하겠지... 크크크...
아, 이름 모를 소년이여~~ 용기를 가져라~~~~~~~ 보이즈!!! 비 커레이.... 에이, 몰겠다.
★그 이름 모를 소년의 하루★
(아침. 너저분한 소년의 방.)
-야, 어떻게 할 거야? 중간 고사 다 되어 가는구먼...
-나만 믿어.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가능할까? 요새 것들이 사악해서 말이야...
-걱정 마! 넌 이 형님만 믿으라구!
(지하철 안.)
아, 계집애 저거! 그냥 아무 데나 타면 되지 꼭 못생긴 것들이 가리는 건 많다니까... 어디까지 걸어 올라와선...
계집애가 앉는다. 하하하! 뚱뚱한 아줌마들 사이에 낀 네 꼴을 좀 봐라! 지금 추녀삼총사 영화 찍냐?
조심! 이제부턴 표정 관리... 계집애가 날 쳐다보고 있다. 일단 얼굴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를...
미소나 한번 슬쩍 머금어 주자... 계집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쭈~ 어금니로 양쪽 볼때기 안쪽을 살짝 깨무네... 그런다고 그 빵떡 같은 얼굴이 갸름해 보일 것 같냐?
(강의실. 성생활과 가족계획 시간.)
어딨지? 분명히 저 뒤쪽 어딘가에 앉아 있을 텐데... 오케이, 저깄네!
"야, 정명아! 저 여자야 저 여자!"
"어? 어디?"
"저기... 젤 뒤에 앉아 있잖아... 머리통만 딥따 큰 계집애 말이야!"
"아, 저 여자? 잘 물었네!"
"그치? 저런 애들이 성공률 100%야."
"근데 작업은 좀 들어갔냐?"
"응. 지금 얼굴 익히는 중이야."
"헉! 쳐다본다!"
"빨리 고개 돌려 임마!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말구..."
(점심 시간. 돈까스 전문점 지방흡입돼지.)
"야, 저깄다. 빨리 들어 와!"
"너무 티 나게 하는 거 아냐, 너?"
"시끄러, 빨리 와서 앉기나 해!"
얼굴을 익히게 해야 한다. 저 계집애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내 부드러운 미소를 남겨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하지 않도록... 생각할 틈도 없이 오직 무의식에 이끌려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도록...
"야, 저 옆에... 친군가 봐. 열라 섹시하지 않냐?"
"그러게... 꼭 예쁜 애들이 못난 애들이랑 친해요..."
"당연하지. 그래야 자기 미모가 더 도드라지니까..."
(늦은 밤. 그 이름 모를 소년의 집.)
여기는 방바닥. 시간은... 자정이 조금 지났네. 그 계집애... 지금 자고 있을까? 혹시... 내 생각을 하고 있진 않겠지? 우액~ 구역질이 나려고 한다... 제발 부탁이니까 내 생각은 무의식 속에서나 해 다오! 난 너 같은 성형 추녀들은 관심 없으니까...
내일은 결전의 날!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번에도 학사경고 뜨면... 정명이와 난 제적이다. 그걸 알면서도 수업 땡땡이치고 놀러 다니는 우린 뭐하는 놈들인가?...
옷은 뭘 입지? 단정해 보일 만한 색깔로 입는 게 낫겠지? 흰색이나 아이보리가 낫겠다. 검정은 상대의 기분을 다운시킬 수가 있을 테니까...가장 천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중요하다!
그건 그렇고... 뭐라고 말하지?
"저... 노트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건 너무 무례해 보여.
"저기요... 노트 필기 그런대로 하셨죠? 괜찮으시면 복사 좀~~"
그런대로란 단어는 별로야. 주제에 완벽주의자일 수도 있으니...
"안녕하세요? 너무 죄송한데요~~ 저희는 졸업반이거든요... 취업 면접을 다니느라 수업을 많이 빼먹어서 그러는데... 괜찮으시다면 노트 좀 함께 볼 수 있을까요?"
그래, 이게 제일 낫네. 좀 비굴해 보이긴 하겠지만...눈 딱 감고 이렇게 말해야겠다. 음료수도 하나 빼서 갖다 바치면 죽음이지!
아~~~ 이름 모를 추녀여~! 내일 하루만... 딱 하루만 내게 자비를 베풀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