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순이는 예쁘다] 03
S#1. 병원 앞뜰 (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인순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선영.
선영 : 엄마 원망 많이 했지?
인순 : (목이 메어 아무 말도 안 나온다)
선영 : 어쩌믄... 혼자서두 이렇게 이쁘게 자랐니. (인순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준다)
인순 : (다시 눈물 왈칵 쏟아진다)
선영 : 미안해...
인순 : (목메서) 아니에요.
선영 : 미안해,
인순 : 아니에요, 아니에요. 미안하실 거 없어요. 괜찮아요.
멀리서 다가오다가 그들을 의아하게 지켜보는 정아.
선영 : 어디서 어떻게 지내니?
인순 : 친구...친구집에 같이 있어요.
선영 : 일은...? 무슨 일 해?
인순 : (멈칫하다) 일..하다가 지금 좀 쉬고 있어요. 제과점 다녔는데... 사정이 있어서.. 잠깐 쉬는 중이에요.
금방 다시 일할 거에요.
선영 : (다시 손 꼭 잡아주며) 엄마가 너무 했어. 진작 찾았어야 되는데... 나 살기 바빠서. 내가 죽을 죄를 졌어.
인순 : (다시 눈물 왈칵) 아니에요, 아니에요.
다시 눈물 훔치는 선영.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정아.
시선 돌리다 문득 정아를 발견하는 선영. 흠칫 놀란다. 인순도 돌아보고 놀란다.
선영 : ...정아야!
파리해져서 바라보고 있는 정아.
난감해진 선영. 맘을 가다듬는다.
선영 : (이윽고 결심한 듯 비장하게) 인사해라...니 언니다.
정아 : (멍하니 그저 바라보고 있다) ...
어쩔 줄 모르는 인순이. 자기도 모르게 엉거주춤 벤치에서 일어나다가 삐끗 발이 꼬이면서... 그대로 꽈당 넘어지고 만다.
당황하는 세사람 표정. 부랴부랴 일어나는 인순.
S#2. 선영집 외경 (밤)
S#3. 집 거실 (밤)
인순, 한쪽에 거의 차렷 자세로, 경직된 채 서 있다. 시선으로 실내를 조심조심 둘러보는 중이다.
벽에 걸린 선영 정아의 사진과, 그림들과, 고급스런 가구들... 다 낯설고 어색하다.
주방 쪽에서 찻잔을 들고 오는 40대 파출부 아줌마. 슬몃 인순과 선영 관계 알고 싶어하는 눈치로 보다가.
파출부 : 차 드세요.
인순 : (얼른 차쟁반 받으며) 고맙습니다.
소파에 앉아 차 한 모금 꼴깍 마시는 인순. 다시 실내를 둘러보며 주눅이 잔뜩 들었다.
S#4. 정아방
정아 곁에 앉아있는 선영. 옷 갈아입고 있는 정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아직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아. 굳은 표정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다.
눈치 보는 선영.
선영 : 엄마한테... 화 많이 났니?
정아 : ....
선영 : ... 화 났어?
정아 : 아니에요. (외면하며 애써 태연히) 그냥... 아직은 뭐가 뭔지...잘 모르겠어요.
선영 : (한숨) 그래, 그렇겠지...
정아 : (OL 외면한 채) 밖에.. 기다리잖아요. 나가보세요.
선영 : (울컥한다) 화났음 화났다구 말을 해!! 그래야 나두 내 변명을 할 거 아냐?
정아 : (도리어 성내는 그녀가 기가 막힌다)
선영 : 미안하다. 나두 정신이 없어...나두 지금 복잡해. 그러니까... 니가 날 좀 이해 해주면 좋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영. 나가버린다.
어이없어 가만히 바라보는 정아.
S#5. 거실 (밤)
커피 잔 들고 거실 이곳저곳을 살금살금 둘러보는 인순.
여기저기 걸린 선영과 정아의 사진들, 고급 오디오며 장식품들... 들여다보며 구경하고 있다...
현관 쪽에 놓인 유리 공예품을 신기한 듯 슬몃 만져보기도 한다.
다시 힐끔 눈치 살피는 파출부.
파출부 : 차 한 잔 더 드려요?
인순 : (헉 놀라) 아,아니에요. (물러서다가 도자기에 부딪친다)
파출부 : 어머, 조심하세요.
도자기에서 얼른 물러나는 인순이.
인순 : 아, 죄송합니다. 이거 진짜 예술 작품인가봐요...하하. (머쓱하게 둘러본다) 집이 너무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순간, 방에서 나오는 선영.
선영 : 아줌마, 수고하셨어요. 오늘 그만 들어가보세요.
파출부 : 예.
선영 : 아, 그리구... (인순 바라보며) 내 딸이에요. 인순이. 앞으루 잘 부탁해요.
파출부 : (놀라는) ...예에.
선영 : 자세한 건 차차 말할께요. 들어가보세요.
파출부 인사하고 멀어지면, 결심한 듯 소파에 앉는 선영.
선영 : 인순아, 가서 짐 싸가지구 와.
인순 : 예? 짐요?
선영 : 친구집 가서 당장 니 짐 싸가지구 오라구.
인순 : 짐...을... 여기...루요?
선영 : 당연하지! 인제 같이 살아야지, 엄마랑...
인순 : (얼떨떨한데) 저기....
선영 : 뭘 머뭇거려. 당장 다녀 와.
마음이 뭉클해지는 인순이.
인순 : (N) ...잡지책 속에서나 보던 집이었다. 잡지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엄마가, 잡지 속에서나 보던 예쁜 집에서...
나와 함께 살자고 하신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다니...!
S#5. 보도국 사무실 (다음날 낮)
자료 읽는 중인 상우. 커피 두 잔 들어오는 진태.
진태 : (커피 건네며) 너 나 몰래 장가 들었냐?
상우 : 먼 소리야?
한쪽에 들어오다 멈칫 돌아보는 재은.
진태 : 어제 누가 너 봤대드라. 아이스링크에서! 애하구 와이프하구 같이 있는 거 같아서 아는 척 못했대.
상우 : 허,
진태 : 숨겨논 가족 있어? 바른대루 불어.
상우 : 넌 뭘 맨날 불래? 불긴!
진태 : 흐흐, 누군데?
상우 : 아, 진짜...열 받네. 누가 뭘 봤다 그래? 그냥 아는 사람들이야, 쪼끔.
진태 : 요새 얘가 아주 이상해요. 인순씨부터 시작해서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거든.
상우 : 넌 뭐가 그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냐? 댁에 일이나 잘 하셔.
자료 테잎들 안고 짜증스레 밖으로 나가는 상우.
S#6. 복도 사무실
나오는 상우. 뒤이어 나오는 재은.
재은 : 유선배.
상우 : (돌아본다) 어, 왜.
재은 : 이선영씨한테서 초대권 왔든데... 그 연극 재밌어요? 저 몇 장 주실래요?
상우 : 나두 아직 못 봤어.
재은 : 어머, 인터뷰만 하구 연극은 못 본 거에요?
상우 : 음. 그런 거 다 보믄 언제 일해?
재은 : 그럼 오늘 저랑 가실래요?
상우 : 에이, 뭘. 재미두 없겠든데.
재은 : 같이 가요. 저 이선영씨랑 조금 알아요. 예전에 라디오 할 때 게스트루 만났거든요.
안그래두 보러가고 싶었는데... 혼자 가기 그렇잖아요.
상우 : 뭐, 그럼 이따 봐서.
재은 : (마주 서서 생긋 웃는다) 저녁 맛있는 거 살께요!
상우 : 허,
S#7. 미화집 방안 (낮)
가방에 옷가지들을 싸고 있는 인순. 의기양양하다.
곁에서 흥분한 미화. 부러운 표정이다.
미화 : 너 진짜야? 거짓말 하는 거 아니지? 진짜 그 분이 니네 엄마란 말이야?
인순 : (으쓱)
미화 : (기막힌듯) 박인순... 우와...우찌 이런 일이 다 있냐아.
인순 : 그동안 고마웠다, 미화야. 내가 니 은혜는 두구두구 내가 안 잊어줄께.
미화 : 당연하쥐!!
인순 : (다시 거들먹거리며) 놀러 와. 가서 자리 잡으면 함 초대할께.
미화 : (샘이 난다. 샐쭉한 얼굴로 짐싸는 것 지켜보다가) ...혼자 사셔? 어머니?
인순 : 여동생 하나 있어. 작년에 이혼하셨대.
미화 : 그래? ... (곰곰 생각하다) 어머, 그럼 장난 아니겠는데?
인순 : 뭐가?
미화 : 에이, 걔가 널 좋아하겠냐? 너랑 완전 딴 세상 사람일 거 아냐.
인순 : 야, 무슨...! (조금 기죽는다) 그래봤자 동생인데 머.
미화 : 애가 요렇게 순진해요. 동생은 먼 동생이냐. 걔 입장이 지금 황당하겠다.
보두 듣두 못한 엄마 딸이, 어디서 짠 나타난 거 아냐. 참 싫겠다아...
인순 : (떨떠름하게 보는데)
미화 : 에이, 너무 심각하게 듣지마. 그냥 걱정 돼서 그러지 뭐... 잘 지내라구...
아, 근데... (걱정해주는 척) 니네 엄만 너...그거... 알어?
인순 : (표정 굳는다. 삐딱하게) 뭘?
미화 : 아니,나는...그냥 걱정이 돼서... (인순의 뜨악한 시선에 짐짓 하하 웃는다) 진짜 넘 잘됐다구, 인순아...
니가 그렇게 고생을 하드니... 드디어 복을 받나부다... 축하한다구!! 거하게 한 턱 쏴야 돼, 알았지? 오케이?
인순 : (머쓱)
S#8. 한식당 (낮-저녁)
불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다.
불판 마주하고 앉아있는 인순과 경준과 은석.
은석의 밥 위에 고기 놓아주는 인순. 기분이 의기양양, 한껏 들떠 있다. (경준 앞에서 일부러 더 잘난척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인순 : 우리 엄마... 너무너무 좋은 분이세요. 그렇게 유명하신 분인데두 너무너무 겸손하시구요...
저한테 미안하다구 계속 울기만 하시는데... 제가요....엄마가 있다는 거 알구요... 잠깐 원망스런 마음두 들었거든요?
근데 만나서 엄마가 저한테 미안해하시는 거 보니까, 진짜 이상하게 하나두 안 밉구 하나두 안 원망스럽구...
그냥 막 좋기만 한 거에요. 참 예쁘구 고우신 분이세요.
경준 : (그런 인순의 맘이 더 이쁘다. 흐뭇하게 웃고 있다)
인순 : 선생님, 저 이제 엄마 집으루 들어가요. 인제 자주 못 찾아뵐지두 몰라요.
(으쓱하며) 갑자기 환경이 바뀌니까, 아 이거, 어떻게 적응해얄지...하하.
은석 : 누나 인제 못 와요?
인순 : 응... 은석아...누나 쪼끔 바빠질 거야. 그래두 자주자주 올께. 걱정 마!
은석 : (풀죽는다)
인순 : 선생님, 좀 드세요, 드세요. 모처럼 제가 한 턱 쏘는 건데.. 왜이렇게 안 드시는 거에요? 섭섭하게. (고기를 막 덜어주며)
경준 : 먹구 있다, 이녀석아. 너나 좀 먹어.
인순 : 전 배불러요. 은석아, 많이 먹어. (주방 향해) 여기 불고기 이인분 더주세요!
(씩 웃으며) 제가요, 그동안 방 얻을라구 모아논 돈, 오늘 다 풀거에요. 맘껏 드세요!
경준 : (어이없어 웃는다)
은석 : (기분 안 좋다)
맥주 한 잔 따라주는 경준. 우쭐하며 잔 받는 인순.
경준 : 자, 한 잔 하자! (건배하며) 축하한다, 박인순! 그동안 힘들었던 거 다 잊구 멋지게 한 번 잘 살아봐라.
인순 : 감사합니다. 언제 저희 집에 한 번 초대할께요, 선생님!
제가 엄마한테 선생님 얘기 잘 할 거거든요? 아마 뵙고 싶어하실 거에요.
경준 : (과장스런 인순의 태도가 귀엽다) 허허, 그러자.
인순 : (씩 웃는다. 흥분으로 들뜬 미소)
S#9. 선영집 앞 골목 (낮- 저녁)
양손에 짐가방을 낑낑 들고 오는 인순이. 집 건물을 올려다본다. 긴장된다. 떨린다.
이제 여기가 우리집이다. 나에게도 엄마가 있고, 이렇게 멋진 집이 있다.
S#10. 선영집 손님방 (낮-밤)
단촐한 장롱과 박스들만 놓여있는 썰렁한 방.
가방에서 옷을 꺼내고 있는 인순이. 곁에 어정쩡 서 있는 파출부.
파출부 : 말이 손님방이죠...창고처럼 쓰던 방인데... 너무 오래 비워놔서요. 도배두 새로 해야 되구...침대두 들여놔야 된다구...
일단 그때까진 사모님 방에다 짐을 놔두라구 그러시든데...
인순 : 어우, 괜찮아요. (둘러보며) 좋은데요? 이만하면 호텔 특실이에요. 헤헤, 가본 적은 없지만.
파출부 : (머뭇하다가) ...그럼 일단 좀 쉬구 계세요... 전 극장에, 사모님한테 좀 다녀올께요.
인순 : 극장엔 왜요?
파출부 : 휴대폰을 놓구 가셨어요. 급한 전화 받으실 데가 있다구... 얼른 가지구 오라 그러셔서..
(시계 보며 군시렁) 아유, 저녁두 해야 되는데...
(투덜거리며) 건망증이 심해지셨는지, 하루 건너 이렇게 놓구 다니시지 뭐에요.
인순 : (머뭇하고 살피다가) 제가 갈까요?
파출부 : 예? 에이, 아니에요. 제가 후딱 갔다 오죠 뭐.
인순 : (호기롭게 일어난다) 아니에요, 주세요! 제가 가지구 갈게요.
파출부 : 그러실래요? 그래두 되겠어요?
인순 : 그럼요! 제가 금방 다녀올께요!! (신난다)
S#11. 극장 무대
연극이 끝났다. 조명이 꺼지고 박수 소리가 울려퍼진다.
다시 조명이 켜지면 무대로 나와 인사하는 선영.
S#12. 객석
듬성 듬성 관객이 많지 않다.
상우와 재은, 한쪽에 앉아있다. 지루하고 무덤덤한 표정의 두사람.
재은 : 재미 있었어요?
상우 : 뭐... 그저.
재은 : 좀 별루다, 그죠?
상우 : (피식) 많이 별룬데...
S#13. 배우 대기실
대기실 쪽으로 오는 상우와 재은. 안에서 나오는 선영과 마주 친다.
선영 : 어머, 이게 누구니.
재은 :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선영 : 이게 누구야, 유기자?!
상우 : 안녕하셨어요? 잘 봤습니다.
선영 : 오면 온다구 미리 전화를 하지.
재은 : 너-무 감동이었어요! 연기 죽이시든데요. 저 막 울었잖아요.
상우 : (기막혀 힐끔 돌아보고)
선영 : 고마워, 재은씨! 저녁은? 먹었어요?
상우 : 네. 먹었습니다.
선영 : 안그래두 유기자한테 전화할려 그랬는데... 나가요, 차 한 잔 해요.
S#14. 공연장 커피숖
둘러 앉아 차 마시는 선영 상우 재은.
선영 : (넌지시) 두사람... 분위기가 참 잘 어울리는데?
재은 : 그래요? (호호 웃고) 제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에요! (팔짱 끼는 시늉)
상우 : (머쓱 웃는데)
선영 : 나두 우리 유기자가 인상이 너무 좋드라구. 회사에서 인기 많겠어요.
상우 : 에이...뭘요. 이선생님 역시 안목이 높으시네요.
웃는 세사람.
재은 : 인상만 좋은 게 아니구요, 실력이 대단하거든요. 기자로서 사명감두 투철하구, 정의감두 넘치구...
선배들한테 칭찬이 자자해요.
상우 : (흐뭇하게 듣다가) 당연한 얘기는 그만 하구, 차나 마시셔, 이재은.
재은 : (깔깔 웃는다)
그 순간, 커피숖 쪽으로 들어오는 인순이. 두리번거리다가 선영을 발견한다.
반가워 부랴부랴 다가가다 멈칫 선다. 마주 앉은 이가 상우다. 당황한다. 이거... 또 이렇게 만나나?
머뭇하며 세사람을 지켜보는 인순.
인순 : (N) 갑자기 계산이 복잡해진다. 이럴 땐... 다가가는 게 좋은가, 안 다가가는 게 좋은가?
고민하는 인순. 자기도 모르게 뒤로 슬몃 물러나려는 그 순간,
상우(E) : (놀란) 인순아?!
상우가 인순을 보고야 말았다.
화들짝 놀라는 인순. 그리고 더 화들짝 놀라는 선영.
인순 : (할 수 없이 돌아보는) 어어... (씩 웃는다)
상우 : 어떻게 된 거야? 웬일이야?
선영 : (긴장하며 인순과 상우를 번갈아보다가) ...아는...사이야?
상우 : 네! 중학교 동창이에요.
선영 : (굳어있다)
인순 : (어쩔 줄 모르다가 작게) 저... 이거...가져왔어요. (다가와 휴대폰 내밀면)
선영 : 아, 그래? 고맙다... 아유, 세상이 좁네.
상우 : (의아하게 보는데)
인순 : (난처한데)
상우 : 선생님 팬이라 그러지 않았었나? 선생님하구 무슨... 특별한 사이였어?
인순 : 어? 어어...
선영 : (웃으며 얼른 둘러대는) 우리 코디에요. 새로 뽑은 직원.
인순 : (당황하다가 선영과 눈 마주치자 금새 맞장구) 마,맞아...! 하하..
재은 : 어머, 그러시구나아! 세상 참 좁다아! 앉으세요! 차 한 잔 하구 가세요.
인순 : 에이, 아니에요.
재은 : 아후, 괜찮아요. 앉으세요.
상우 : 그래, 차 한 잔 하구 가. (억지로 끌어다 앉힌다)
억지로 앉는 인순. 난처한 선영.
상우 : (의심쩍다) 언제부터 일하게 된 거야?
인순 : 어어, 얼마... 안됐어.
선영 : (식은땀)
상우 : (여전히 좀 의아한 시선) 팬이라서?
인순 : 맞아! 팬이라서... (짐짓 태연히 웃으려 애쓰며) 특별 채용이 됐어. 운이 좋았지, 하하.
상우 : 그랬구나. 취직 걱정 많이 하더니... 잘됐네.
인순 : 응... (어쩔 줄 모르고 시선 내리는데)
상우 : (잠시 상황을 짐작해보다가 도움을 줘야겠다는 의협심이 발동한다) 이선생님, 사람 잘못 구하셨어요.
인순 : (놀라는)
상우 : (씩 웃는다) 농담이구요...이런 친구 만나신 건 정말 행운이세요...어릴 때부터 엄청 성실하구 야무졌거든요.
인순 : (얼굴 빨개진다)
선영 : 음, (난감한 미소) 그랬구나.
상우 : 공부두 아주 잘했구요. 얼굴두 이뻤구...지금두 이쁘지만요. (인순보고 찡긋 웃어준다)
인순 : (난감해진다)
재은 : (샐쭉해져있다)
상우 : (인순보고 작게) 그럼 선생님 소속 회사랑 계약 한 거야?
인순 : ?
선영 : 어어, 아냐... 아직... 좀 해보다가... (착잡하게 차 마시는데)
인순 : (얼굴 빨개져 고개 숙이고 있다)
상우 : (인순의 표정에 신경이 쓰인다)
인순 : 저기...나는 그럼, 이만... (선영 눈치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상우 : (혹시 그것 때문에?) 저어...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신원은 제가 보증할께요.
신원보증 같은 거... 필요하면 얼마든지 제가 해줄 수 있습니다!
선영 : 신원 보증?
인순 : (헉 놀라 헛기침)
재은 : (깔깔 웃고) 갑자기 무슨 신원보증이에요. 무슨, 간첩이나 전과자두 아닌데...
상우 : (멈칫)
인순 : (표정 딱딱하게 굳어있다)
상우 : (재빨리 인순 표정 읽는다. 이거 뭔가 실수다)
재은 : (역시 뭔가 이상하다. 눈치 살핀다)
상우 : 야, 누가 꼭 간첩이나...살인...(당황)
인순 : (더 하얗게 질린다)
상우 : 하하, 그런 게 아니고.. (인순 눈치 읽으며) 축하한다, 인순아! 이렇게 멋있는 분 밑에서 일하게 된 거...!!
(인순에게 눈 찡긋하면서 입으로 작게) 걱정 하지마...
인순 : 어어, (착잡한 미소) 저기... 상우야, 난 좀 바빠서... 먼저 일어날께.
상우 : (당황) 그, 그럴래?
인순 : 그럼 저... 나중에 뵐께요.
선영 : 어어, 그래...어서 들어 가.
인순 : (일어나며 재은에게 목례) 안녕히 가세요!
재은 : 아,네에... 또 뵐께요! 들어가세요!
상우 : (어정쩡 따라일어나는) 그래, 그럼... 잘 들어가라. 전화할께!!
목례하고 돌아서는 인순.
잠시 썰렁하게 앉아있는 상우.
선영 : (담담하게) 유기자, 차 들어요. 다 식겠다.
상우 : 아, 예...
차 마시며 멀어지는 인순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래도 크게 실수했다 싶어진다. 괴로워진다.
S#15. 공연장 앞길 (밤)
터덜터덜 나오는 인순이. 혈색이 창백하다.
인순 : (N) ... 엄마가 아셨을까? 눈치채셨을까? ... 바보같은 자식!
아무리 기자래두, 궁금한 게 뭐가 그렇게 많은가?
한숨이 저절로 포옥 나온다.
S#16. 거리 (밤)
운전하고 있는 재은.
조수석에 앉아있는 상우. 멍하니 자기 고민에 빠져있다. 전화를 해야 하나, 안해두 되나...
재은 : 아까 그 분요...
상우 : 어?
재은 : 인순...씨요. 첫사랑인가봐요.
상우 : 어어...(피식 웃고 만다)
재은 : (샐쭉해지다가) 이선영씨 되게 깐깐하다든데... 그 밑에서 일할램 피곤하겠다.
상우 : ...깐깐하대?
재은 : 어우, 말두 마세요. 성격 대단한 걸루 유명하잖아요. 모르셨어요? 같이 일해 본 사람들 전부 넌덜머리 낸대요.
하긴 뭐 요샌 인기두 없으니까 그런 얘기두 잠잠하드라.
상우 : (흠...걱정 된다)
재은 : (넌지시) 근데... 신원보증은 뭐에요? 무슨... 사연이라두 있어요?
상우 : (버럭) 누가 그런 소릴 해?
재은 : (놀라) 저... 아뭇 소리두 안했어요. 왜그렇게 발끈하세요?
상우 : 어... 발끈하긴 내가 언제...(짐짓 웃다가 한숨)
S#17. 선영집 외경 (밤)
S#18. 손님방
걸레로 방을 닦고 있는 인순. 전전긍긍, 표정에 근심이 가득하다.
그 순간, 부랴부랴 들어오는 선영.
인순 : (흠칫 놀라서 일어난다) 오셨어요?
선영 : 여기 있었구나. 뭐하니?
인순 : (얼른 일어나 차렷자세로 긴장) 머,먼지가 많아서...
선영 : (둘러본다) 이 방은 안돼. 수리를 해야 돼. 옥상 방수 공사를 엉터리루해서 물이 새...
어서 나와. 당분간은 나랑 같이 방 쓰자.
인순 : 아니에요, 괜찮아요. (올려다보며) 물 안 샐 거 같은데...
선영 : 아냐, 아냐. 어서 나와. (밖으로 이끌면)
인순 : (힘껏 사양한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전 여기서 잘께요.
선영 : (갑자기 애틋하고 차분하게 바라본다) 저기...인순아...
인순 : (긴장한다)
인순 : (N) 아무래도 눈치채신 게 틀림 없다... 그래, 사실대로 다 말씀 드리자.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인순 : 사실은... (벌써부터 눈물이 왈칵 나온다) 저어...
선영 : (OL 착잡하게 한숨) 아깐 미안하다. 엄마는 어쨌든...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구... 아까 그 사람은 기자라서...
인순 : ?
선영 : 코디로 소개해서 기분 나빴지?
인순 : 예? (그제야 깨닫고) ... 어휴,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연하죠!!
선영 :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때가 되면 나중에 자연스럽게 소개할 날이 올 거야.
인순 : 에이, 당연해요, 너무 잘하신 거에요!!!
선영 : 착하기두 하지. (손 잡아준다)
인순 : (괜히 자기도 뭉클해지고)
선영 : (한숨) 유명하다는 거, 사람들한테 알려진 인생이란 거... 보기만 그럴 듯하지 정말 빛좋은 개살구야.
행동두, 말두, 다 자유롭지가 못해. 쪼끔이라두 책 잡히면 추락하는 거 금방이란다. 얼마나 말이 많은 동넨지 몰라.
인순 : (안쓰럽다) 예에...
선영 : 더군다나 난... 최근에 이혼까지 했구... 안그래두 너무 괴로운 시점이야.
(글썽하며 다시 본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주라. 응?
인순 : 서운하긴요. 제가 왜 서운해요? 정말 하나두 안 서운해요.
선영 : (한숨) 고맙다.
인순 : (N) 난 엄마가..신원보증에 대해서 자세히 물으면 어쩌나..그게 걱정이었는데...
엄마는, 거기엔 전혀! 하나두 관심이 없으셨다. 내가 그동안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더 이상 한 마디도 묻지 않으셨다.
기운없이 돌아서서 나가버리는 선영. 얼떨떨 서 있는 인순.
S#19. 선영방 (밤)
스탠드만 켜진 방안.
화려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선영. 몸을 뒤척이며 근심 어려 있다. 복잡하고 머리가 아프다. 잠이 안 온다.
인순 : (N) 다행인 거다... 정말로...
S#20. 손님방 (밤)
불꺼진 방안. 잠못 이루고 누워서 뒤척이고 있는 인순.
인순 : (N) 그런데, 그런데 왜...내가 지금 이렇게... 서운한 거지?
울적하게 돌아눕는다. 그 순간, 천장에서 물 한방울이 똑 떨어진다.
이크 놀라 일어나는 인순. 이불을 둘둘 감고 피하다가 마침내 밖으로 조용히 나간다.
S#21. 동 거실 (밤)
방에서 조용히 나오는 인순.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는 인순. 어두운 실내를 어색하게 둘러본다.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선영 방 쪽으로 슬몃 다가가보다가 다시 돌아온다.
정아 방에서 희미하게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시끄러운 락 음악이다.
자기도 모르게 가만히 그 방으로 다가가 귀 기울여보는 인순.
이윽고 돌아서려는 순간, 방문이 와락 열린다. 어마 뜨거라 놀라는 인순.
역시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는 정아.
정아 : 뭐...하시는 거에요?
인순 :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그,그냥... 인사나 할려고.
정아 : (기가 막힌다)
인순 : 인사를...제대로 못한 거 같아서...(머쓱 웃는데)
S#22. 정아방 (밤)
쭈볏거리며 한쪽에 서성이는 인순. 하프와, 대형 벽걸이 사진과, 책장과 침대, 미니 소파, 책상이 놓인 예쁜 방이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정아. 둘 다 영 어색하다.
정아 : 앉으세요.
인순 : 어어...
소파에 살짝 앉는 인순. 싸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한다.
어색한 듯 흠흠 기침 하는 정아. 역시 어색해지는 인순.
인순 : (둘러보다 하프에 시선이 꽂친다) 이게 무슨 악기...지요?
정아 : (딱딱하고 예의 바르다) 하프에요.
인순 : 아아.. (끄덕인다) 하프.
다시 침묵이 흐른다.
할 말이 없어지는 인순. 외면하고 있는 정아가 좀 두렵다.
인순 : 와아...이런 것두 킬 줄 알아...아세요?
정아 : 아뇨. 전공했어요.
인순 : 아아...(끄덕인다) 전공.
다시 침묵이 흐른다. 식은땀 흐르는 인순.
인순 : (N) 밑져야 본전이다. 이럴 때는 그저... 정면돌파 하는 수 밖에 없다.
인순, 결심한 듯 갑자기 우하하 웃는다. 놀라서 돌아보는 정아.
인순 : 우하하, 하프...! 맞아요... 이거 옛날 로마 시대 영화 같은 데서 귀족들이 딩가당 딩가당 그러구 치는 그거 맞죠?
맞아, 맞아, 그거야! 쫌 만져봐두 돼나...요?
정아 : (경계하며 얼떨떨 본다)
다가가 줄을 튕겨보는 인순.
인순 : 우와, 소리 죽인다아!
정아 : (떨떠름 보고 있다)
인순 : 진짜...멋있다! 이런 것두 전공하구!! 아, 근데... 우리 말 놓구 지낼까...요?
정아 : ...(서먹한)
인순 : 그래, 좋아! 말 놓구 지내자! 근데 우리 둘 다 음악하구 인연이 있나 봐. 나는 인순이 너는 하프.
무슨 무슨 시스터즈 만들어서 방송출연 하는 건 어때? 니가 하프 키구 내가 춤 추구! 인순이 시스터즈!
정아 : (자기도 모르게 허 웃는다)
인순 : (환해지며) 맘에 들어?
정아 : (금새 다시 표정이 딱딱해지는)
인순 : 저기...(쑥스럽게 보다가) 앞으루... 잘 지내면 좋겠어. 내가 입장을 바꿔서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너 진짜 당황스러울 거 같애. 근데...그래두 말이야... 어차피 이렇게 된 거니까... 잘 지내고 싶어.
나 너한테 잘 보이구 싶어.
정아 : (아직 그대로 외면하고 있다.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다)
인순 : (다시 좀 무안해지지만) 저기...나... 오늘 이 방에서 자면 안될까?
정아 : (당황하는) ...침대가 일인용이에요.
인순 : 어후, 침대는 무슨! 나는 바닥 체질이거덩! 여기가 더 편하구 좋아, 원래!
바닥에 벌렁 눕는 시늉하는 인순.
당황하는 정아.
인순 : 재워줄 거지?
난감하게 보던 정아, 마침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안도하는 인순.
인순 : (벌떡 일어나 손을 잡는다) 고맙다, 시스터!!
S#23. 상우집 외경 (아침)
S#24. 상우집 식당 (아침)
둘러 앉아 밥 먹는 상우 부모와 상우.
바쁜 표정으로 대충 밥을 먹으며, 한 손엔 조간신문 들고 읽는 상우.
병국 : 요번에 미국 선거 말이다...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은 몇 퍼센트나 되겠냐.
상우 : 글쎄요... (신문 내리고 난감한) 그건 저두 잘...
병국 : 하기야, 암만 똑똑한 너래두... 예측이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
명숙 : 아이고, 얼릉 밥 먹구 출근이나 해라. 니 아버지 말대꾸 해주다보믄 끝이 없겠다, 얼른 얼른 먹어.
병국 : (화나서) 여편네가 지금 뭐라는 거야? 당신이 이러면 얘 앞길을 막는 거야!
자고로, 위대한 인물들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어머니가 있어! 당신 스케일이 커야 아들 스케일두 커지는 게야.
그저 밥,밥...밥 밖에 몰라요.
명숙 : (또 시작이군 하는 눈빛)
상우 : (눈치 보다) 저기...아버지...
병국 : (흥분해 있다) 이 녀석이 보통 기자야? 앞으로 세계적인 언론인이 될 사람이야.
상우 : (씩 웃고) 맞아요, 그건 그런데요... 아! 내일 어머니하구...연극이나 한편 보러 가세요.
저한테 표가 생겼는데요. 두 분 보시면 딱 좋아하실 내용이에요.
명숙 : 아유, 됐다. 연극은 무슨! 너나 많이 봐.
병국 : 허, 이거 좀 보라고! 아들 말을 대뜸 그렇게 딱 자르는 거 좀 보라고!
명숙 : 아유, 나는... 그런 거 모르잖아요. 연극 같은 거... 아무나 보나아.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당신이나 나나, 연극 같은 거 하군 거리가 먼 사람들 아니에요?
(웃는다) 가면 니 아버지 잠이나 쿨쿨 자겠지 뭐.
병국 : 허허, 이것 좀 봐라, 이것 좀 봐! 무식하면 공부를 해얄 거 아냐?
명숙 : 아, 연극 좀 안 본다구 무식한 거에요? 아니 근데, 당신은 뭐 그리 가방끈이 길어서 말끝마다 무식이에요?
상우 : 엄마,
명숙 : 아이구 됐다! 니 아버지나 많이 보시라 그래. 아, 캐나다선 안 그러드니, 유난히 여기 와서 저런다?
매사에 신경질이구 매사에 딴지야. (삐져서) 벌써 노망이 들라구 저러나...
병국 : 뭐?!!
상우 : (한숨)
S#25. 보도국 사무실
모니터 화면에 각 방송국의 뉴스들이 방송 되고 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들어오며 통화 중인 상우.
상우 : 에이... 그건 말두 안되죠... 포장지만 바꿔서 다른 물건이라구 주장하시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요...
전시된 물품이 작년하구 같은데 어떻게 새로운 걸로 소갤 하라는 거에요?
(점점 언성 높아진다) 말 나온김에 말인데요.... 그런 거 자꾸 보내지 마세요! 선물은 무슨 선물이에요?
세상의 모든 선물은 따지구 보면 다 뇌물이에요. (흥분했다) 네, 저 잘났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송사 알아보세요!!
데스크 재식과 진태, 곁에서 왜저러나 듣고 있다.
전화 탁 끊는 상우.
진태 : 뭔데 그래?
상우 : (태연해진다) 뭐, 암 것두 아냐. 자꾸 기사 내달라구 졸라서.
진태 : 혹시 대영기획 홍회장 아니냐?
상우 : 맞어. 어뜨케 알어?
진태 : 너한테두 무슨 선물 같은 거 자꾸 보내냐?
상우 : 너두 받았냐? 와, 완전 찰거머리야.
진태 : (한숨) 야...알구보믄 그 인간두, 불쌍한 사람이야.
상우 : 뭐가.
진태 : 어릴 때 소년원에서 자랐는데, 이담에 커서 발명가가 되기루 맘 먹구 열심히 공부를 했대.
기껏 대학까지 마쳤는데, 도대체 취직이라군 안되는 거야. 아는 사람이 있나, 신원보증에서 맨날 퇴짜 맞지...
그래서 이 악물구 돈 벌어서 여태 가난한 발명가들 뒷바라지 한 거래잖아.
상우 :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진태 :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이 말이지.
상우 : 어릴 때 힘들지 않은 사람 있음 나와보라 그래.
진태 : 너 있잖아.
상우 : 야! 너는! (좀 기어들어가는) 니가 날 어뜨케 알어?
진태 : 척 보믄 알지. 야, 왠만함 곱게 설득해라 좀. 그 사람 기분두 생각해가면서...
상우 : 허,
자리로 와서 앉는 상우. 컴퓨터 모니터를 켜고 일할 준비한다.
물끄러미 인터넷 초기화면을 바라보다가... 의자 뒤로 젖히며 곰곰 생각에 잠긴다.
S#26. 회상 (#13의 커피숖)
둘러앉은 상우 선영 인순 재은.
상우 :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신원은 제가 보증할께요.
신원보증 같은 거... 필요하면 얼마든지 제가 해줄 수 있습니다!
선영 : 신원 보증?
인순 : (흠칫 놀라 헛기침)
재은 : (깔깔 웃고) 갑자기 무슨 신원보증이에요. 무슨, 간첩이나 살인 전과자두 아닌데..
상우 : (멈칫)
인순 : (어느새 표정 창백하게 굳어있다)
S#27. 보도국 사무실 (현재)
굳어있던 인순의 표정이 자꾸 머리에 맴돈다. 내가 실수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다. 맘에 걸리고 걱정이 된다.
휴대폰 꺼내서 박인순 전화번호를 찾는다. 버튼 누르려다가 잠시 머뭇거린다.
상우 : (혼잣말) 갑자기 코디는 무슨 ... 지 옷두 제대루 못 입으면서...
그러다 다시 한숨 쉰다.
상우 : 짤리든가 말든가, 휴... 나두 몰라.
휴대폰 던져놓고 다시 모니터 앞으로 가는데.
S#28. 선영집 정원 (오후)
정원 구경하고 있는 인순. 화분의 꽃들과 나무들, 야외 파라솔 등을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둘러보고 만져보는 중이다.
집에서 나오는 정아. 깔끔한 정장차림이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 표정.
대문 쪽으로 나가다 힐끔 돌아본다.
정아 : 뭐하세요?
인순 : (돌아본다) 어? 어어...마당이 증말 좋다. 꽃두 많구...
(파라솔 가리킨다) 이런 데서 차 마시고 그러믄 차가 저절로 넘어가겠다.
정아, 씁쓸히 보다가 목례하고 간다.
인순 : 어디...가?
정아 : (시큰둥) 오디션요.
인순 : 오디션? 무슨 오디션? 어제 내가 한 말은 농담인데...? 정말 가수 될라고?
정아 : (어이없어 웃고) 가수 아니구요... 그냥 뭐...엄마가 원하는 거 있어요.
인순 : 그게 뭔데?
정아 : (씁쓸히) ...그럼 갈께요. (대문까지 가다가 슬몃 걸음 멈춘다)
인순 : (머쓱해지는데)
정아 : 저기... (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본다) 지금부터 뭐하실 거에요?
인순 : 오늘? 어...글쎄. 이것저것...계획두 세워보구... (머뭇거리는)
정아 : 저랑 놀러 가실래요?
인순 : (휘둥그레진다) 어딜?
정아 : (피식) 그냥요. 아무 데나.
인순 : ?
정아 : 만난 거 기념 해야죠. (작심한듯) 혹시...술 좋아하세요?
인순 : (휘둥그레진다) 술??
S#29. 단란주점
인순이 노래부르고 있는 인순이. 탬버린 흔들며 댄스까지 춰가며 열심히 노래 부른다.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 마시고 있는 정아.
이윽고 노래가 끝나면 자리로 오는 인순. 박수 치는 정아.
인순 : 와, 너 술 쎄구나? (쌓여있는 맥주병을 바라본다)
정아 : (흐흥 웃는다) 언니 정말 노래를 잘 하시네요?
인순 : 너두 한 곡 해야지.
정아 : (손 젓는다) 됐어요, 됐어요. 나는 못해요.
인순 : (맥주 한 잔 따라 마시며) 한 곡 더 불러야지...(노래책 찾는다)
정아 : (취해서 혼잣말 하듯 ) 우리 아빠는요... 유명한 심장수술 전문의셨는데요...
지금 제주도에서 펜션을 하면서 살아요. 의사 관두구요.
인순 : (멈칫) 왜?
정아 : 세상 일에 회의를 느끼셨대나? 하하, 우리 엄마 때문이죠 뭐.
엄마가 한시두 가만 안 뒀거든요. 이래라 저래라 닦달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인순 : 그래서 이혼하셨어?
정아 : 아뇨. 우리집에서 일하던 가정부 아줌마랑 바람이 났어요. 아빠가.
인순 : (멈칫)
정아 : 그 아줌마랑 지금 제주도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세요... (흐흐 웃는다)
인순 : ...(난감해진다)
정아 : 엄마... 자존심이 무지 상했어요. 하필 못생기구 나이두 많은 우리집 일하는 아줌만 거에요.
두사람이 지금 너무 재미나게 사는 거에요. 하하, 웃기죠?
인순 : (머쓱) 웃기긴...뭐가 웃겨.
정아 : (헤실헤실 웃는다. 취했다) 언니네 아빠 얘기 좀 해봐요. 언니네 아빤 뭐하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엄마 첫남편은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해요.
인순 : 나두 몰라. 나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걸 뭐. 그냥... 연극배우였대.
엄마랑 연극하다 만나서 날 낳구... 그리구 교통사고루 돌아가셨대. 끝.
정아 : 그렇구나. (끄덕하는데 취해서 어지러운 기색)
인순 : 너...안되겠다. 그만 집에 가자.
정아 : 에이...아직 대낮이에요.
인순 : 대낮은 무슨... (걱정) 여기...술값두 장난 아냐. 이런데 한 병에 얼만지 알어?
정아 : 괜찮아요. 저 카드 있어요.
인순 : (난감하다)
정아 : 사실은 나두 이런데...오늘 첨이에요.
인순 : 뭐?
정아 : (흐흐 웃는다) 나 사실은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요. 너무 통쾌해요.
인순 : 뭐가?
정아 : 울 엄마 말이에요. 하하, 이상하게 통쾌한 거 있죠? 언니 땜에 쩔쩔매는 거 말이에요!
인순 : (먼 말인가 멀뚱히 본다)
정아 : (표정이 묘하게 쓸쓸해진다)
인순 : (가만히 표정 살피다가 머뭇머뭇) 저어...고맙다, 정아야...
정아 : 뭐가요?
인순 : 야...사실은... 나는 니가...팥쥐처럼 그러믄 어쩌나... 속으루 무지 겁먹구 있었어.
정아 : 팥쥐요? (멈칫하다 하하 웃는다)
같이 낄낄 웃는 인순.
인순 : 좋았어, 그럼! 가기 전에 노래나 한 곡 더 해볼까? 짜짠, 안녕하세요, 인순이에요~
전주가 울려퍼진다. 앞으로 나가 몸을 흔드는 인순이.
S#30. 단란주점 앞길 (저녁)
어느새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다.
정아를 부축하며 안에서 나오는 인순. 휘청거리는 정아. 난감한 인순.
인순 : 업힐래? 괜찮겠어?
정아 : 괜찮아요, 걸을 수 있어.
인순 : 안되겠다. 업히자.
정아 : 아니에요. 됐어요.
저만치 잰 걸음으로 앞서 가버리는 정아. 할 수 없이 따라가는 인순.
그때 앞에서 오던 트럭이 휘청거리는 정아를 칠 뻔 한다. 맥주를 가득 실은 트럭이다. 끼익 경적을 울린다.
기겁을 하고 정아를 잡아끄는 인순.
놀라서 차창을 여는 운전기사 근수.
기사 : 썅! 눈 좀 똑바루 뜨구 다녀!!
죄송합니다, 인사하고 정아를 이끄는 인순. 부랴부랴 정아를 데리고 한쪽길로 걸어간다.
다시 차를 모는 근수, 멈칫 다시 돌아본다. 인순을 자세히 바라본다.
백미러로 바라보다가 이번엔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바라본다. 반쯤 넋이 나갔다.
그 순간, 뒤에서 오던 승용차, 경적을 울려댄다.
차에서 내리는 근수. 멀어지는 인순을 바라본다. 달리기 시작하는 근수.
트럭 뒤로 차들이 주욱 밀리기 시작하며 미친놈! 뭐하는 거야! 등등 욕설과 고함을 질러대는 기사들.
주위에 온통 경적소리가 요란해진다.
어느새 저만치 길을 건너고 있는 인순과 정아.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한 채... 빨간 신호로 바뀐 신호등 앞에 물끄러미 선 채...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근수. 넋이 반쯤 나간 표정이다.
S#31. 선영집 앞 골목 (밤)
정아를 업고 들어오는 인순. 너무 무겁고 힘들다. 땀 뻘뻘 흘리며 골목을 들어온다.
울리는 휴대폰. 힘겹게 받는 인순.
인순 : 네에..
선영(E) : (버럭) 너 지금 어디니??
인순 : 예?... 집 앞이에요.
S#32. 선영집 거실 (밤)
현관문이 열리고 비틀비틀 들어오는 인순. 정아를 내려놓는다.
놀라서 달려나가는 선영.
선영 : 니들 지금 어디서 오는 거야? (멈칫) 술 마셨니? 어?
정아 : (인순에게 기대어 휘청거린다)
선영 : (질려서) 정아 얘 지금... 술 마신 거야?
인순 : 네, 저희가요... 만난 기념으루다가 쪼-끔 마셨어요, 하하.
선영 : (화가 버럭 치민다) 너 오디션 왜 빼먹었어?
정아 : (대꾸없이 무표정)
선영 : 대답 안해?! 왜 빼먹었어? 왜 연락두 없이 펑크내구! 하루 종일 전화두 안 받구! 니가 지금 제 정신이니?
인순 : (술이 번쩍 깬다)
선영 : 너 왜이래? 왜 갑자기 안하던 짓 하는 거야? 응?
정아 : (꾸벅) 죄송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정아. 어처구니 없는 선영.
선영 : 너 거기 안 서??
인순 : (난처하다) ..
선영 : 안 서? (고함 친다) 정아야! 정아야!!
그대로 들어가버리는 정아.
선영 : (휙 돌아본다) 니가 마시자고 했니? 술?
인순 : (헉 놀라) 예? ...어...글쎄요. 그게...
선영 : (싸늘해진다)
인순 : (질려있다)
S#33. 정아방 (밤)
침대에 털썩 쓰러져있는 정아.
들어오는 인순.
인순 : 정아야,
정아 : (헤실거리며 웃는다)
인순 : 엄마 화 많이 나셨나 봐. 오디션 안 가서.
정아 : (손 저으며) 괜찮아, 괜찮아요...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내일 우리 또 가요.
인순 : (난감)
S#34. 선영방 (밤)
머리 아픈 듯 손으로 괴고 있는 선영.
노크 하고 들어오는 인순.
인순 : 저어...
선영 : (본다)
인순 : 죄송합니다... 오디션... 제가 가지 말라고 했어요. 전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줄 모르구...
선영 : (물끄러미 보다가) 괜찮아... 이리 와서 앉아 봐.
다가와 마주 앉는 인순. 가만히 바라보는 선영.
선영 : 우리 정아가... 정아가 요즘 많이 방황하구 있어. 다 내 탓이라구 생각해. 이혼 땜에 많이 힘들었나 봐.
거기다 너까지 들어왔으니..
인순 : ...(슬몃 시선 떨군다)
선영 : 참 재주 있는 아인데... 뭐든 의욕을 못 느끼는 게 흠이야. 음악하군 진작 멀어진 거 같아서... 연기를 시켰으면 하는데...
내가 보기엔 참 재능이 있거든? 근데 딱 의욕이 없는 거야. 자신감만 회복하면 정말 잘할 아인데...
인순 : (본다)
선영 : 부탁이야... 앞으로 언니로서, 정아 좀 많이 도와주라. 술 같은 거...마실 줄 모르는 아이야. 나 쟤 저러는 거 첨 본다?
부탁해. 앞으론 그런데 데려가구 그러지 마. 응?
인순 : (난감하다)
선영 : 그리구 너두... 인제 여기 왔으니까, 여기에 맞게 생활했으면 좋겠다. 전에 뭘 했든, 어떻게 살아왔든,
인제는 배우 이선영의 딸이야. 너두 앞으로 내 자랑거리가 돼주면 좋겠어.
남들 앞에 떳떳하게 내 딸이에요,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돼 줘. 나도 힘껏 도울께. 그동안 못해준 거 다 해줄께...
인순 : ...
선영 : 그럼 가서 자. 피곤할텐데... (일어난다) 나두 좀 쉬어야겠다.
가라는 듯 손짓하며 침대로 가서 피곤한 듯 기대어 눕는 선영.
긴장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인순... 왠지 점점 두려워진다.
S#35. 고모집 마당 (다른날 낮)
마당 가운데 빨랫줄에 팬티, 런닝셔츠, 바지 등등을 널고 있는 고모 옥선.
평상에 앉아 다 마른 빨래를 개고 있는 인순.
옥선 : (유심히 본다) 아이고, 얼굴이 아주 활짝 폈네 폈어.
인순 : (얼굴 어루만지는 시늉) 하하, 그런가?
옥선 : 니 엄마 집 좋디? 어뜨케 해놓구 살어?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궁궐이드라.
인순 : 맞아요. 궁궐이에요.
옥선 : 아유, 나두 그런 집 딱 한 번만 들어가봤음 좋겠다.
인순 : 언제 놀러오세요. 안그래두 엄마가 고모한테 고마워하시든데.
옥선 : 정말이야?
인순 : 예.
옥선 : 아, 됐다. 초대해두 안 간다 그래라.
인순 : 왜요.
옥선 : 진짜루 고마우믄 제발루 찾아와야 되는 거 아니니?
그동안 키워줘서 고맙다구, 뭐라두 들구 와서 인사를 해야 사람 아니야?
인순 : (눈치)
옥선 : 첨부터 맘에 안 들드라고! 니 엄마 너 뱄을 때, 내가 맨날 니 할머니 가게서 찐빵을 몰래 갖다 날랐걸랑?
근데 한 번두 고맙단 말 안 하드라구! 그저 섭섭하단 말만 하구...그러믄서 찐빵은 날름날름 어찌나 잘 먹는지...
인순 : (웃고) 우리 할머니 찐빵이 워낙 유명했잖아요..
옥선 : 인간이믄, 할머니 산소에두 한 번 가자 그래야 되는 거 아니니.
인순 : 고모.
옥선 : 왜.
인순 : 사실은 나... 부탁이 있어 왔어요.
옥선 : 뭔데.
인순 : 엄마한테요.. 나 전과 있단 말 안했어요. 고모 우리 엄마 만나믄요, 제가 감옥 갔었단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슬몃 시선 내리는) 그리구 사람...죽였단 말은... 정말루 하지 말아주세요.
옥선 : (머뭇) 어어..
인순 : (떨린다) 엄마... 실망시키구 싶지 않거든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말할 수 있는데...
그런데... 엄마한텐 안돼요.. 말하면 안돼요. 고모, 약속해줄 수 있어요?
옥선 : 어...뭐...그러자, 그렇게 하지 뭐. (딱한 듯 바라본다)
S#36. 보도국 취재 차량 안 (낮)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있다.
카메라 기자 등과 동승한 상우. 취재 마치고 들어가는 길이다.
피곤한 듯 지쳐 잠든 카메라 기자 일행. 취재한 테잎들 정리하며 하품하는 상우.
앞좌석의 운전기사, 빵을 하나 건넨다.
운전기사 : 점심두 거르구... 배 고프셨죠?
상우 : 아뇨, 뭐 들어가서 먹으면 되죠. 아이쿠, 고맙습니다.
제과점 빵봉지를 뜯어 한입 삼키는 상우.
기사 : 음료수두 드릴까요.
상우 : 아뇨. 괜찮습니다.
기사 : 어제 얻어논 빵이라서 안 상했나 몰라요. 우리 조카가 제과점을 열었거든요.
상우 : 괜찮은데요... 아-주 맛있습니다.
하는데... 문득 인순의 목소리가 스친다.
인순(E) : 내가 빵순이잖아, 빵순이.
흠... 잠시 뭔가 골똘히 고민하는 상우. 이윽고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건다.
상우 : (짐짓 과장된 목소리로) ... 난데.. 상우! ... 하하, 잘 있었냐? ...어디야, 지금?
S#37. 고모집 근처 언덕길 (낮)
언덕 내려오며 전화 받는 인순. 서울 변두리 산동네 언덕길.
인순 : 우리 고모집 동네...... 다니러 왔어, 잠깐.
S#38. 차 안 (낮)
전화 받는 상우.
상우 : 고모집? (잠깐 생각하다가) 일... 안해?
인순(E) : 일? 무슨 일?
상우 : (긴장) ... 코디네이터... 안해?
인순(E) : 어? (얼버무리는) 어어...해야지.
상우 : 해야지...는 뭐야?
대꾸 없는 인순.
상우 : (이거, 짤린 거 아냐?... 잠시 고민하다가) 인순아, 잠깐 좀 볼래? 거기 무슨 동네야?
S#38. 고모집 근처 어느 장소 (낮)
동네 커다란 나무 아래. 혹은 버스 정류장, 암튼 어디쯤에서 기다리고 있는 인순이. 시계를 보며 서성이는데...
저만치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상우.
상우 : 인순아!
인순 : (돌아본다)
상우 : 많이 기다렸지?
인순 : 금방 왔네!
상우 : 어어...취재 마치구 오는 길인데...마침 딱 이쪽으루 지나가던 참이라서... (씩 웃는다)
인순 : 무슨...급한 일 있어?
상우 : 어어...아니 뭐 급한 일은 아니고... 그냥 저번에 섭섭하게 헤어진 거 같아서..
인순 : (어이없다) 너 되게 바쁘다더니 한가한가보다.
상우 : (기분 거슬린다) 나 바뻐. 밥두 먹을 시간 없는 사람이야.
인순 : 그래?
상우 : (머쓱하게 주위 둘러보는 척) 동네가... 재개발 해야겠네.
인순 : (괜히 같이 둘러보는)
상우 : 하긴 재개발두 문제 투성이야. 지가 상승 문제두 문제지만 획일적인 뉴타운 계획이야말로
도시 문명을 비인간화 시키는 주범이라는 생각... 안 들어? 주거 문화야 말로 문화의 기본 척도잖아.
인순 : (무표정하게 보고 있다)
상우 : 정책이.. 너무 근시안적이야. 삶의 퀄러티에 대해, 맨날 말로만 주장하면 뭐 해? ...안 그래?
인순 : (뜨아한 표정)
상우 : (머쓱해진다) ...점심은? 먹었어?
인순 : 아니, 아직.
상우 : 아직 점심두 안 먹었어? 가자. 점심 사줄께. 근처에 뭐, 먹을 데나 있나 모르겠네.
인순 : (좀 주눅 든다)
S#40. 동네 분식집 (낮)
떡볶이 라면 김밥을 놓고 마주 앉은 상우와 인순이.
상우 : (넌지시) 코디 일은... 재밌어?
인순 : 어? (웃는다) 어어, 재밌어.
상우 : 잘... 다니구 있는 거지?
인순 : 그럼!
상우 : (다행이다. 안 짤렸다) 빵순이라 그러드니 왜 갑자기 코디 일을 하게 됐어?
인순 : (머뭇) 어어...
상우 : 이선영씨 광팬인가부다, 너?
인순 : 광팬? 어...하하, 뭐 그렇다구 볼 수 있지.
상우 : 코디가 니 적성에 맞아?
인순 : 에이... 꼭 적성에 맞아야 하나 뭐.
상우 : (심드렁) 난 니가, 뭐랄까, 좀 더 너한테 맞는 일을 했으면 싶은데...
인순 : (웃는) 그래?
상우 : 물론 딴 사람에 비해 핸디캡이 있지만... 어떡하든 극복하구.. 니가 하고 싶은 일, 말하자면 천직을 찾는게 좋지 않겠어?
인순 : 뜻은 고마운데... 나두 이렇게 저렇게 생각 중이거든? 걱정해줘서 고맙다.
상우 : 아니 꼭 걱정을 한다기 보다는.... (짐짓 호탕하게 웃고) 야, 그 아줌마, 아니 이선영씨 말이야. 기자들한테 무지 약해요.
내가 너, 잘 얘기해줄께. 절대 짤리는 일 같은 거, 없을 거야. 걱정 말라구.
인순 : (피식)
상우 : 정말이야. 혹시라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혹시 그 아줌마가 니 전력을 문제 삼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인순 : (떨떠름하게 본다)
상우 : 팬이라서 듣기 싫겠지만... 그 아줌마 여간 깐깐한 게 아니래. 솔직히 인상두 그렇게 보이잖아? (찌푸리며)
인순 : 그분 인상이 어때서? 이쁘시기만 한데.
상우 : 역시... 팬심이 두텁구나.
인순 : 팬심이 뭐야?
상우 : 아냐, 아냐... (웃는다) 암튼 힘들더라두 잘 지내라구.
인순 : (기분이 안 좋다) 상우야, 너... 앞으루 내 앞에서 그 분 욕하지 마. 별로 듣기 안 좋아.
상우 : (멈칫)
인순 : 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좀 이중성격이다?
상우 : 이중 성격?
인순 : 그 분 앞에선 그렇게 좋은 말만 하면서, 뒤에선 왜그러는데?
상우 : 허, 내가 언제? 내가 뭘 어쨌는데?
인순 : 어릴 땐 안 그러드니... 참 이상해졌다, 너.
상우 : 허,
묵묵히 김밥을 먹기 시작하는 인순.
억울하고 화가 나는 상우.
상우 : 야, 난... 니 걱정이 돼서 온 거야.
인순 : (어이없다) 난 너 오라고 안 했어.
상우 : (할말 없다) 허...
그때, 분식집 주인이 가게 앞에서 가마솥 뚜껑을 열고 찐빵을 꺼내고 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솥단지. 먹음직스런 찐빵들이 유리문 너머로 보인다.
반한 눈으로 바라보는 인순이.
인순 : 맛있겠다...!
상우 : (돌아본다) ...찐빵 좋아하는구나?
인순 : 그럼! 옛날에 우리 할머니 찐빵 끝내줬잖아!
상우 : ...맞아!! 그랬지.
아득하게 밖을 바라보는 인순이. 중학생 두어명이 찐빵 솥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S#41. 옛날 인순이네 분식집 앞 (어린 시절 회상)
가마솥 앞에 서 있는 중학생 인순과 상우.
봉투에 찐빵을 가득 담고 있는 인순. 식당 안을 살피며 얼른 상우에게 봉투를 건넨다.
인순 : 할머니 보기 전에 얼른 가지구 가.
상우 : (좋아서) 이렇게 많이 줘두 돼?
인순 : 괜찮아. 얼른 갖구 가.
상우 : 고맙다, 인순아!
인순 : (작게) 내일 또 와. 또 줄께.
상우 : 진짜야?
인순 : 당연하지!!
으쓱하며 웃는 인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상우.
S#42. 분식집 앞 (현재)
현재의 인순과 상우, 주인에게 각각 찐빵 봉투를 건네받고 있다.
인순 : (봉투 들여다보며 신났다) 뜨거워~
상우 : (넌지시) 할머닌... 언제 돌아가셨어?
인순 : 어어...나 거기 있을 때... 면회 오시다 빙판길에 쓰러지셔서...
상우 : (앗, 괜히 물어봤나 미안해진다)
인순 : (쓸쓸히) 보고 싶다, 우리 할머니... (찐빵 내려다본다) 음식 솜씨 정말 좋으셨는데... 그지?
상우 : (애틋해지는 기분. 가만히 바라본다)
봉투에서 빵 한 개 꺼내서 맛있게 먹기 시작하는 인순.
S#43. 근처 가로수길 (낮)
가로수가 늘어선 길.
찐빵 봉투를 안고 나란히 걸어오는 상우와 인순이. 말없이 한동안 걸어가는 두사람.
점점 묘한 감상에 젖는 상우. 가만히 인순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인순과 눈이 마주친다.
상우 : (괜히 머쓱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늘이 참 파랗다.
인순 : (올려다보고) 하늘 전혀 안 파래. 비올 거 같은데?
상우 : (무안) 어, 그러냐.
인순 : 우산 가져왔어?
상우 : 아니.
인순 : 빨리 가야겠다.
잰 걸음으로 총총 걸어가는 인순이.
뒤따르는 상우. 앞서가는 인순이가 어린 인순이로 바뀐다.
S#44. 어린시절 고향 동네 가로수길 (회상)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가방 메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중학생 상우. 저만치 머리에 손을 얹고 뛰어가는 인순이.
뒤따라 뛰어가다가 문득 위에 걸친 교복 상의를 벗는 상우. 달려가 인순의 머리 위로 덮어준다.
멈칫 돌아보는 인순이. 씩 웃어보이는 상우. 런닝셔츠만 입은 채 교복 상의를 우산처럼 받쳐준다.
수줍게 머쓱 웃는 인순이. 이윽고 비바람 맞으며 씽씽 달리는 두사람. 상우 입이 귀에 걸렸다.
S#45. 가로수길 (현재)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앞서가던 인순, 놀라서 하늘 올려다본다.
인순 : 빨리 와, 상우야!
뛰어오는 상우.
나무 아래로 잠시 피하는 두사람. 나란히 비를 피하고 있다.
다시 묘한 감상에 젖는 상우.
상우 : (슬몃) 저기... 인순아,
인순 : (돌아본다)
상우 : 어뜩하다...그랬어?
인순 : 뭐가?
상우 : 어? 어어... 그...살(인이라고 하려다가)... 감...옥..(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데)
인순 : (OL) 아무래두 하루 종일 올 거 같다! 그냥 맞구 가야겠다.
상우 : 에이, 맞구 가긴!! 그럴 수야 없지! 와, 이거...차를 갖구 오는 건데...
인순 : (나갈까 말까 하늘을 바라보며 망설이는데)
머뭇하다가 점퍼 상의를 슬며시 벗는 상우. 인순에게 씌워주려는데...
그 순간, 걸려오는 인순의 휴대폰. 얼른 전화 받는다.
인순 : 네, 선생님...
상우 : (멈칫 돌아본다)
인순 : (놀라서) 네에? ...저한텐 연락없었는데요? ... 정말루요?...(창백해진다) 알았어요, 선생님! 금방 갈께요!
전화 끊고 후다닥 빗속으로 뛰어가는 인순이.
인순 : 나 먼저 갈께! 나중에 또 보자! 잘가라!
놀라는 상우. 점퍼 들고 뒤쫓아 간다.
상우 : 무슨 일인데 그래? 같이 가줄께!!
점퍼를 우산 삼아 씌워주려던 아름다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너무 빠른 인순의 걸음.
헐레벌떡 쫓아가던 상우.. 한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쭐떡 넘어지고 만다. 점퍼와 바지가 흙투성이가 돼버렸다.
어느새 저만치 사라지고 있는 인순.
당황하는 상우. 체면이 말이 아니다.
S#46. 대로변 (낮)
빗속에서 택시를 잡고 있는 인순이. 좀처럼 차가 안 잡힌다.
택시! 택시!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저만치서 나타나는 상우. 속히 체면 만회를 해야 한다.
대로 한가운데로 과감히 들어가더니 손을 들고 지나가는 택시를 턱 세운다.
기사가 짜증스런 얼굴로 창문 열고 내다본다.
멀리서 보던 인순, 멈칫 놀란다.
비장하고 멋있게 돌아보는 상우.
상우 : 인순아! 타라.
S#47. 택시 안 (낮)
뒷좌석에 앉은 두사람. 밖엔 여전히 비 내린다.
초조한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인순. 차가 신호대기에 걸려있다.
상우 : 갑자기 사라졌단 말이야?
인순 : 응. 어린이집에서 소풍을 갔는데, 갑자기 사라졌대.
상우 : 응석이 그 녀석, 거 되게 속 썩이네.
인순 : 은석이야.
상우 : 아, 그랬지... 암튼 짜식, 속 썩이게 생겼드라구, 눈이 땡글땡글한 게.
인순 : 걔 평소에 전혀 속 안 썩이는 애거든? 말 조심해 줘.
상우 : 아니, 내 말은 영리하게 생겼다는 뜻이야. 걱정하지 마. 찾을 수 있을 거야. 집 주소 전화번호 다 알 거 아냐.
인순 : (눈물 훔친다) 그래두... 요샌 워낙 세상이 험해서...
상우 : (넌지시 보다가) 괜찮아. 찾을 수 있어. 집 찾아올 거야, 금방.
인순 : 상우야... 넌 기자니까, 혹시라두 못 찾으면... 어떻게 좀 해줄 수 있지?
상우 : 그럼! 걱정 마... 나두 최대한 힘써 볼께.
인순 : (초조하게 창 밖 보며) 차가 왜이렇게 막히지?
상우 : (슬몃 미소) 너... 그 꼬마랑 보통 사이 아니구나. 아들이라 그래두 믿겠다.
인순 : 응... 아들보다 더 가까워.
상우 : ...(할 말 없다)
인순 : 선생님이 걱정 많이 하실텐데... (눈물 훔친다) 어떡해...
상우 : (뜨악하게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홀애비가... 복두 많다.
인순 : 뭐?
상우 : 아냐, 암말두 안했어. (기사보고) 기사님, 빨리 좀 가주세요. 급하거든요,
인순 : (기분 나빠졌다)
상우 : 아니 나는... 너 긴장 풀어줄려구 농담 한 거야. (씩 웃고) 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뭐 잘생긴 분도 아닌데...
솔직히 얼굴은 뭐랄까, 좀 범죄자 형으루 생기셨든데...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까...
인격이 참 훌륭하신 분인가 보다... (목소리 적어지는)... 싶었다는...
인순 : (차갑게 굳어있다)
상우 : (또 실수했다) ...범죄자..라는 말은 정말 농담.
인순 : ...(무표정)
상우 : ...(식은땀 흐른다. 덤덤한 척 앞을 바라본다)
S#48. 경준집 앞 골목 (낮)
비가 그쳤다. 택시에서 내리는 인순과 상우.
그 순간, 저만치 골목 앞에서 걸어오는 경준과 은석.
인순 : (확 반갑게) 은석아!!!
은석 : (반갑게) 누나!!!
인순 : 찾았네요? 어떻게 된 거에요?
경준 : (허탈하게 웃고) 공원 앞에서 울구 있는 걸 누가 경찰서에 데려다줬댄다!
달려오는 은석. 격하게 와락 부둥켜 안는 두사람.
인순 : 은석아, 이 녀석아... 어떻게 된 거야? 응? 응?
은석 : 누나아...
서럽게 부둥켜 안고 엉엉 울기 시작하는 두사람.
멀찌기서 뜨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상우.
경준 : 너하구 똑같이 생긴 여자가 지나가드랜다. 쫓아가다 일행을 놓친 모양이야.
인순 : (울며) 진짜야? 진짜 난 줄 알았어?
은석 : (울며 끄떡끄덕)
인순 : 바보! 바보같이! 누나 얼굴두 몰라? 응? 맨날 보는데,
은석 : 누나가... 인제 못 온다 그랬잖아요...
인순 : 내가 언제! 언제 그랬어? (끌어 안으며) 바보야!
다시 왕 울음을 터뜨리는 은석. 역시 서럽게 우는 인순. 거의 이산가족 상봉에 버금 가는 풍경이다.
난감하게 지켜보는 상우.
그 순간, 상우를 발견하는 경준. 목례 한다.
당황하며 답례하는 상우.
상우 : 안녕하세요, 유상웁니다.
경준 : 전에... 어디서 한 번 뵌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온몸에 흙투성이가 된 상우. 마구 옷을 털며 갸웃 한다.
상우 : (머쓱) 제가 워낙 인상이 평범해서요... (명함 꺼내며) 첨 뵙겠습니다. 인순이 동창입니다.
인순이한테 훌륭하신 분이라구 말씀을 워낙 많이 들었습니다. (다시 꾸벅 절한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경준 : (웃으며 악수 청하는) 나두 영광입니다. 서경준입니다.
인순 : (난감하게 보다가) 바쁜데 그만 가봐, 상우야.
상우 : 어어,
인순 : 들어가자, 은석아... 누나가 맛있는 거 사왔다? (떠밀며) 들어가세요, 선생님.
경준 : (머뭇하다가 어색하게) 그럼... 또 봅시다.
상우 : 아,예. 그럼...
인순 : 잘 가! 오늘 고마웠어.
상우 : 어어...
인사하고 부랴부랴 경준 부자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 인순.
머쓱하니 홀로 남는 상우. 영 무안하고 썰렁해진다.
S#49. 병국의 인테리어 회사 사무실 (낮)
인테리어 물품 도매업체다. 갖가지 인테리어 관련 용품들.
벽지, 세면대, 바닥재, 타일 등등을 취급하는 종합 인테리어 관련 회사.
병국은 회사의 공동 사장이다. 통화 중인 병국. 갖가지 샘플들 사이로 지나가며 잔소리 하는 병국.
직원들, 마뜩찮은 표정으로 대처하는 중이다.
복사기 앞에 흩어진 종이들을 집어들고.
병국 : 이면지 사용하랬더니... 내 말을 귓등으루 듣는 모양이야.
남직원1 : 죄송합니다, 사장님.
병국 : 에이포용지 한 장 만들래믄 나무가 얼마나 들어가야 되는지 알어?
남직원1 : 주의하겠습니다.
병국 : 어제 아홉시 뉴스 안 봤어? 전 세계적으루 벌목이 문제래. 지구온난화두 다 상관이 있대.
남직원1 : (마뜩찮다)
병국 : (남직원2에게) 아, 우리 아들 어제 뉴스 나오는 건 봤어?
남직원2 : 아드님이 기자세요?
병국 : 하하, 한대리 새로 와서 아직 모르는군. 유상우에요. 케이비엔 방송국 문화부... 모니터 좀 부탁해요!
밖으로 나간다.
직원들 수군거린다.
남직원1 : 휴...지겹다, 지겨워. 맨날 아들 아들 아들.
S#50. 회사 로비 (낮)
아담한 건물. 경비원이 인사한다.
인사 받으며 나오는 병국. 휴대폰이 울린다.
병국 : 여보세요... 예. 제가 유병국 맞습니다만... (확 어두워진다) 언제요? 아프지두 않았는데 갑자기 왜요?
..저, 한사장하구 어제두 통화했어요...갑자기 어떻게...(목멘다)
알겠습니다. 어느 병원입니까?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화 끊고 침울해진다.
S#51. 병원 진찰실 (낮)
내과 의사 앞에서 혈압 재고 있는 병국.
의사 : 혈압이... 영 안 떨어지네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일을 좀 줄이셔야겠습니다.
병국 : (어둡다) 나 이러다 갑자기 죽는 거 아닙니까?
의사 : 하하,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마시구요... 약 규칙적으루 드시구... 조심하십시오. 왠만하면 스트레스 받지 마시구요.
병국 : (씁쓸히)
의사 : (모니터 화면 보다가) 진료 예약일은 모렌데... 일찍 들르셨네요.
병국 : 어어... 오늘 여기...영안실에 문상이 있어서요...온 김에...
머쓱 웃다가 한숨 쉬는 병국.
S#52. 거리 (낮-밤)
약국을 나와 걸어오는 병국. 초라한 어깨. 기운이 하나도 없다.
약봉지와 지갑을 호주머니에 넣다가 문득 뭔가가 바닥에 떨어진다. 연극표다.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도로 지갑 안에 넣는다.
인순 : (N) 살면서 중요한 순간들은 대부분... 느닷없이... 찾아온다.
S#53. 공연장 무대 (밤)
공연이 한창이다. 무대 의상과 분장을 한 선영. 열연 하고 있다.
선영 : 세월이...참 덧없어요. 난 내가 이렇게 초라하게 늙어갈 줄 몰랐어요.
한때는 나두 복숭아보다 더 붉은 뺨을 가진 소녀였어요. 그땐 세상이 온통 연분홍색이었는데...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었는데...
인순 : (N) 내가 감옥에 가게 된 것도... 엄마를 찾게 된 것도... 어느날 갑자기...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다.
S#54. 객석 (밤)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다.
객석 한쪽에 홀로 앉아있는 병국. 물끄러미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가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인순 : (N)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정말로 느닷없이 찾아왔을까? 어쩌면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이...
S#55. 무대 (밤)
인순 : (N) 꼭 필요할 때... 완벽하게 적절한 시점에, 우리를 찾아오는 건 아닐까?
무대 위의 배우 선영, 눈물을 닦으며 객석을 슬프게 바라본다.
선영 : 윌리엄은 제 첫사랑이었어요. 우린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났죠. 첫눈에 반했던 거 같아요.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말이 있어요. 지금두 기억나요... 앨리스, 널 꼭꼭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녔으면 좋겠어.
S#56. 경준집 마루 (낮-밤)
식탁 앞에 앉아 찐빵을 맛있게 먹는 은석.
마주 앉아 경준에게도 찐빵을 권하는 인순. 찻잔에 차를 타서 인순에게 건네는 경준.
인순 : 드세요, 드셔보세요. 옛날 맛 그대로에요. 찐빵은 팥이 좌우하는데,
이집 주인이 뭘 좀 아는 사람이드라구요. 제대로드라구요.
경준 :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인순 : 하하, 집에두 좀 가져갈 거에요. (나누며) 이만큼은 엄마랑 동생 꺼.
경준 : (보기 좋다) 얼굴이 아주 좋아보인다.
인순 : 에이, 제가 언제 안 좋아보일 때 있나요? 선생님 그리구, 아까 걔요.
경준 : ?
인순 : 걔 저랑 아뭇 사이 아니거든요? 진짜에요.
경준 : 누가 뭐래냐.
인순 :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애가 볼수록 별로에요. 기자가 뭐 대단한 거라고 얼마나 재는지,
경준 : 흠.
인순 : 사실 영 밥맛인데... 친구라서 내가 참는 거에요.
경준 : (차 마시며 짐짓)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든데?
인순 : 어휴, 그런 말씀 하지두 마세요. 그럴 애가 아니에요. 뭐, 그런다구 해두 절대 사양이지만...
농담이라두 선생님 그런 말씀 하시믄 저 화낼 거에요.
은석 : 누나, 저요, 찐빵 하나 또 먹어도 돼요?
인순 : 그럼, 그럼! 많이 먹어! (건넨다) 선생님, 에이, 좀 드시라니까요!! 안 드시면 뽀뽀해버릴 거에요! 은석이한테.
경준 : (허, 웃는다)
S#57. 상우집 거실 (밤)
비 맞고 흙투성이가 된 상우. 현관으로 들어온다.
맞아주는 명숙.
명숙 : 어디서 이렇게 비를 맞았니? 회사에서 너 찾는 전화 왔드라. 저녁은?
상우 : 옷 갈아입구 다시 나갈 거에요.
명숙 : (봉투 받아 열어보며) 이건 뭐야...웬 찐빵이니... 어머나, 다 찌그러졌네.
상우 : (착잡하다) 버리세요.
명숙 : 버리긴... (한입 먹어보고) 맛은 괜찮다, 얘.
상우 : (방으로 들어가며) 아버진요?
명숙 : 모르겠다. 연락두 없이... (벽시계 본다) 안 오시네.
S#58. 상우방 (밤)
옷 갈아입는 상우. 점점 약이 오른다. 내가 오늘...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건가!
침대에 털썩 앉는다. 벗은 옷을 휙 던진다. 분하다.
상우 : (혼잣말) 나쁜 기집애!
S#59. 선영집 정원- 현관 앞 (밤)
남은 찐빵 봉지를 안고 들어오는 인순. 정원을 지나 현관문 앞에 선다.
현관벨을 누르려다가... 가만히 번호키를 들여다본다. 여긴 우리집이다... 미소를 슥 짓는다.
비밀번호를 속으로 중얼중얼 외어보다가 하나하나 버튼을 누른다. 딩동댕 문이 열린다.
환해지는 인순이.
S#60. 선영 집 거실 (밤)
무선 전화기 들고 왔다 갔다 하며 통화 중인 선영. 시름이 가득한 목소리.
선영 : 관객이 갈수록 줄어들구 있어... 극장 쪽에서 뭐라 그러나봐... 장기공연은 당연히 힘들 거 같구...
예정보다 일찍 막 내려야 될지두 몰라... (한숨) 글쎄, 요새 취향들이 그렇잖아. 웃기는 거 아니면 자극적인 거...
고전이 먹힐 리가 있니... 올해가 내 인생 최악의 해인 거 같애..... (듣다가) 그애 얘기 아직 아무한테두 안 했지?
절대루...비밀로 해줘야 돼.... (훌쩍인다) 얘, 나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벌을 받는 거니...
다들 잘 먹구 잘 사는데... 나만 어쩜 이렇게 되는 게 없니... 인생에 무슨 마가 낀 거 같애...
(듣다가) 알아...안다구... 나두 내가 이해가 안 가... 근데...미안한 건 그냥 잠깐이구... 애가 미워 죽겠어.
S#61. 현관 (밤)
들어오며 신발 벗다 멈칫 걸음을 멈추는 인순.
거실에서 들려오는 선영의 목소리.
선영(E) : 내 속으루 난 딸인데... 자식인데 왜 이러니... 왜 이렇게 미워 죽겠니... 얼굴두 보기 싫구...
왜 하필 이 시점에 얘가 나타난 건지 너무 원망스럽기만 해...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서 듣고 있는 인순이.
훌쩍이는 선영의 목소리.
선영(E) : 그래...다 내 죄야... 내 죄겠지... 그런들 어떡해...나 어떡하면 좋으니...
미워서 죽을 거 같은데... 하는 짓, 웃는 거, 먹는 거, 다 밉구 끔찍해.
가만히 몸을 돌려 밖으로 도로 나가려는 인순. 그 순간, 거실로 통하는 유리문이 바람에 저절로 끼익하고 닫힌다.
흠칫 놀라 몸을 움츠리는 인순.
그때, 안에서 선영의 목소리 들린다.
선영 : 누구니? 누구 왔어?
화들짝 놀라서 후다닥 뒤로 물러서는 인순. 그 순간, 삐끗하면서 현관에 놓여있던 유리 공예품과 부딪치고 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진다.
기겁하는 인순의 표정에서...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