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나눔터의 따뜻한 이야기방에 올린 정득자님(50대)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기에
이곳에 대략 이야기의 줄거리만 요약하여 올립니다.
정득자님은 위로 오빠만 다섯분이나 되고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4살때 생모가 돌아
가셨다고 한다. 그로부터 일년후, 새어머니를 맞이하였는데 그녀의 새 어머니는 시집가서
아이를 못낳는다는 죄몫으로 소박을 맞고 10년동안을 비단장사하며 혼자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풍수지리를 보러 다니시는 옆동네의 할아버지의 소개로 이 집에 오게 되었는데.
전날밤 꿈에 되지새끼 여섯마리가 대지우리에 있는데 우리안에 수컷 다섯마리와 암컷
한마리가 얼마나 귀엽고 이쁘든지 한참을 보셨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주소와 함께 담양군 수북면에 위치한 주소를 들고 마을어귀에 와서
그 무렵 밭을 매는 아주머니한테, " 이 동네에 정 호철씨 사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왜 물어 보쇼? " 하다가 "그기 살러오셨소? " 한다.
"한번 볼러는데 정호철씨 집이 이 동네에서 살지요? "
"살긴 사는데 그집 갈려면 가지마시쇼,그집가서 살아 봤자 눈먼 시어머니에 새끼들은
오글오글 많고 ...." 그리고 한참 더 말을 했다는 선동댁..
그때 논에서 물꼬를 터다가 그 장면을 보고 달려온 작은 오빠의 친구가 (학생으로 치면
중학생나이) 삽들고 와서 "아녀라, 복일이네 괜찮혀라,살다보면 좋은날 있을건디오,
식구들이 좋기만 한디 저랑 같이 가 봅시다." 하면서 앞장서며 안내를 했다고 한다.
그 댁에서는 애들이 많으면 안 오실까봐서 (다 알고 오셨는데도) 옆집 당숙네 헛간에
3명 숨겼는데 네째부터 여섯째인 득자님까지 포함 당숙이 못나가게 하시기에, 새 어머니
가 궁금해서 밖을 내다 볼려는 넷째 오빠 머리를 군밤을 먹이기도 하셨다고...
눈이 어두운 시어머니에 아이들 여섯,모두 아홉식구에 농사와 바구니업, 한번도 해 보지않은
고된 일들이며 많은 식구들과 정붙이고 살자니 시시때때로 나오는 눈물이, 머리빗다가도
눈물이 줄줄 내리고.... 낮에 한숨 잘라치면 다섯살짜리 딸애가(득자님) 마당에서 잘 놀다가도
울면서 깨우고 잠만 자는것 보면 잘 놀다가도 울면서 깨웠다는것...
아마도 잠자면 죽는거라고 생각하고 잠자는 것만 보면 달려와 울면서 흔들더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사시다가 하도 못살것 같아 아침밥을 해 놓고 큰 오빠한테,
" 득일아! 나 아무래도 니 엄마 못할랑 갑다,잘 살어라, 니 아버지 보다 니들 봐서 살라고
했더만 안되것다." 라고 했더니.. 큰오빠가 책가방을 마당에 던지면서, 책가방위에 퍼석
주저 앉으면서 퍽퍽 울면서, "가실라면 가쇼, 나도 어머니가 미국까지 아니 더 먼데라도
가신다 해도 따라 갈라요." 하니 ... 그때 못 가시고 지금까지 담양군 수북면에 사신다고..
아버지는 득자님이 열살무렵 부터 아프시다가 중1때 돌아 가셨다고 한다.
학교가면 " 득자 새엄마 밥은 주긴 하디,, " 라고 비아냥 그리는 같은반 여자애 머리채를
잡고 얼마나 실갱이를 쳤던지 손에 쥐어진 머리카락 한줌을 보고 울기도 하면서 '우리
어머니는 좋은분인데' "밥은 주긴 하디,," 라는 그 말 한마디에 분노했다고 한다.
생모 못지않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서 "아, 한없이 감사한 어머니! " 라고 자꾸 쓰고
싶다고....
학교에서 각종 행사있을때 마다 어머니가 오셨고 광주에서 자취하다 화상입었을때도
어머니가 제일 먼저 달려오셨고, 아이낳기전에는 포대기랑 기저귀베랑 다 친정어머니가
해주셨으며 분만후에는 소고기랑 미역이랑 챙겨 주신분도 친정어머니였다고..
마지막으로 득자님이 하는말:
* 요즘 세상에 어머니 도리 제대로 하신분들도 많지만 젊은 엄마들 불우한 환경에 처하면
참지 못하고 자기 자식 나이든 노모한테 내 팽개치고 집나간 사람들도 봤습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지금까지 담양에 계신 어머니가 내 어머니여서 저는 좋습니다.지금까지
살아계셔서 어머니라고 부를수 있는 어머니가 계셔서 저는 참 좋습니다.
첫댓글 아주 감동적인내용이네요 . 1910년 미국 필라델피아 웹스터 마을에서 26년간 일요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했던 자비스부인이 바로 카네이션의주인공!! 부모가 없는 마을 어린이들을 친자식들처럼 보살피며 늘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고 사랑한다"고 가르친 자비스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후 열린 추도식에서 그녀의 딸 안나가 카네이션 한송이를 영전에 바치며 어머님의가르침을 되뇌었다고합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아 부인에 대한 추모의 뜻을 기리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카네이션이"어머니의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어버니날의 심볼로 자리잡게 된것입니다.
현재, 득자님의 어머니는 담양에서 넷째며누리와 조카와 살고 계시는데, 철석같이 믿은 넷째아들이 병고로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자,사람도 이제는 믿을수 없으니 하나님 믿어야 된다고 하셔서 지금은 열심히 성당에 다니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