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권 구원론
제5장 회심-1
제1절 회심에 대한 성경의 용어
1. 구약성경
구약성경은 회심에 관해서 니캄과 슈브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는데, 니캄은 ‘회개하다’라는 뜻이고, 슈브는 ‘돌아서다’, 특히 떠난 뒤에 ‘다시 돌아온다’라는 뜻입니다.
[시시편 7: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이 말씀에서 회개는 ‘회복하다, 새롭게 하다, 되돌아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슈브입니다.
또 [시 85:4]에서는 하나님께서 분노를 돌이키신 것도 슈브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2. 신약성경
신약성경에는 회심에 해당하는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단어인 메타노에오, 또는 메타노이아주는 ‘마음(정신)의 변화’를 말하는데, 이 변화는 知的인 변화와 도덕적인 변화를 모두 포함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단어는 에피스트레포, 에피스트로페인데, 이 말은 ‘선회하다’ 혹은 ‘돌아서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적극적으로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행위가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 단어인 메타멜로마이는 신약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데, 문자적으로는 ‘후에 어떤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판 유다가 스스로 뉘우쳤다는 것을 메타멜로마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메타멜로이아는 하나님께 돌아선다는 의미보다 일상적으로 후회한다는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2절 성경의 회심관
성경은 항상 회심을 같은 뜻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1. 민족적 회심
[욘요나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롬로마서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이 말씀은 한 개인의 회심이 아니라 민족적 회심을 말합니다.
2. 일시적 회심
예수님의 씨앗 비유에서 씨앗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일시적인 회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3:20,21]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히히브리서6:4~6]도 일시적인 회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3. 참된 회심
성경은 참된 회심에 대해서 많은 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인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까 문둥병이 나았을 때의 그의 언행은 그가 참된 마음으로 회심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이렇게 회심하고 변화되었습니다.
[눅누가복음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 외에도 고넬료, 루디아, 사마리아 여인, 사도 바울 등도 진실된 마음으로 회심한 예입니다.
참된 회심에는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이 있다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능동적인 면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고, 수동적인 면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역사를 인간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회심케 하시겠다는 것을 인간에게 제시하신 후에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회심시키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반복되는 회심
죄인이 거듭나는 것은 새 생명을 심는 것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는 반복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새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은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단회적인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계요한계시록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말씀을 보면 첫사랑을 버리기도 한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회심한 인간도 살아가는 동안에 현실적이거나 부주의한 행위 등으로 의도적이든 아니든 첫사랑을 버렸다가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회심은 반복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라고 해도 얻었던 새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탈이라고 본다면 회심은 결코 반복되어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신자가 일시적인 일탈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새 생명을 빼앗지 않고 길이 참으심으로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 중의 마지막 교리인 ‘성도의 견인’입니다.
구원은 성령님의 사역으로 진행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성령 받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에게 성령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고전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많은 설교를 들어보면 성도들에게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윽박지르거나, 성령 받아야 한다고 종지목을 대는 목사님들이 많은데, 그건 잘못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조금 전에 본 [고전 12:3]에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았고 아울러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다만 사람마다 마음의 완악함이라든가 영적 감각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늦기도 하고 감각이 없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감각이 좀 느리다는 것이 성령 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을 또 달라고 떼를 쓰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느끼고 깨닫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교파 사이에는 구원에 관한 기본 교리가 다른 예를 알아보겠습니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목사님들이 일반적인 주제를 설교할 때는 교리적 내용이 별로 다르지 않지만, 구원론 설교에서는 전혀 다른 설교를 합니다.
몇 주 전에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이 구원에 관한 설교를 할 때도 그런 게 나타났습니다. 만나교회는 감리교회입니다.
그 목사님이 설교하는 중에 先行은총을 말했습니다.
선행은총은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는 감리교회의 구원 교리인데, 구원에 앞선, 즉 선행하는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다 구원받을 은총을 주신다.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는데,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있는 것은 죄인 스스로 구원을 선택하거나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先行은총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구원받는 데에는 하나님이 반 몫을 하시고 나머지 반은 죄인의 몫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하고 싶어도 죄인이 거절하면 구원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은총인 구원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을 쓸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의 구원 교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하려고 미리 선택하신 자만 제한해서 구원하신다는 제한속죄의 교리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따른 교리입니다.
감리교회의 선행은총 교리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가 다 올라갈 수 있는 구원의 멍석을 깔아놓으셨는데, 그 멍석에 올라갈 것인지 안 올라갈 것인지는 죄인이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제한속죄 교리는, 죄인들은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구원의 멍석을 하나님께서 깔아놓으시고, 선택하신 자만 멍석 위로 옮겨 놓아 구원하신다는 교리입니다.
죄인은 구원의 멍석이 있는 것을 모르니까, 멍석 위로 올라갈 것인지 안 올라갈 것인지조차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멍석에 올라가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는 죄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선택하십니다. 이것이 장로교회 구원교리 중의 제한 속죄입니다.
장로교인은 스스로 선택해서 구원의 멍석 위로 올라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멍석 위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주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